Welcome to Henderson Christian Seminary in New York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Home About Us Academic Program Admissions News &
Event
Gallery Contact Us
LOGIN

 



제 9 강 (제8장)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심: 말씀과 성례들
이드보라  2018-07-05 10:19:52, 조회 : 133, 추천 : 47

제 8 장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심: 말씀과 성례들


하나님께서는 예배 속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들에게 응답하신다. 예배의 방식을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의 응답’이라는 고정된 구조속에서 드려야만 한다는 예배방식의 입장은 거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중에 나타나는 것은 매우 두드러지는 사실이다.


-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은 성경 속에 있는 말씀을 읽고 선포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을 때에 하나님과 마주 대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셔서 우리들에게 이해하게 하신다.(고전 2:!2-15, 살전 1:5)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글이 아니라 신적인 말씀이다. 상대방의 말에 동의하거나 혹은 비판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을 동의하거나 비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와 섭리, 심판과 구원등의 사역을 행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신적 속성과 권위를 가진다. 그것은 영원하고 전능하며 완전하다. 이러한 말씀은 예배 가운데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적절한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도요한은 살아계신 말씀되신 예수님과 창 1:3과 시 33:6에서 나오는 창조하시는 말씀을 모두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요 1:1)

그렇게 때문에 예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그분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과 따로 분리하여서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나 경험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을 때에 우리에게는 놀라운 변화와 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진지하게 받지 않거나 그것을 거역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을 가져온다. 사 6:9-10에서 불순종하는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했고, 더욱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중적인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구절들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밝혀주는 역사를 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진리를 감추는 목적이다.(마 13:11-17)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 성경읽기


성경에서 최초로 ‘기록된’ 말씀은 십계명이다. 두 돌판 위에 쓰여진 하나님의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적 관계에서의 법규와 약속들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들을 지켜야 하는 동시에, 그 말씀들이 공적으로 읽혀지고 가르쳐져야 한다.(골 4:16, 살전 5:27, 딤전 4:13) 성경을 읽는 것은 예배를 위해서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며, 우리의 순종과 믿음을 이끄시는 수단이다.


- 설교와 가르침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성경이 가르쳐지고 성경의 내용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서 일반적으로 역사하시는 방법은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이다.(롬 10:14이하, 고전 1:21, 2:1-5) 그래서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제2 헬베딕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진술한다. 설교자는 이 진술을 자기의 무오성을 주장하는데 사용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설교자가 바르게 말씀을 선포하는 한, 그의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입술을 통해 전해진다고 해서 그보다 못한 것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선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와 능력, 그리고 권위와 마주 서게 된다.

교회의 장로는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여야 한다.(딤전 3:2, 딛 1:9) 어떤 장로들은 그들의 사역의 초점을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에 맞춘다.(딤전 5:17) 오늘날에 그러한 이들을 치리하는 장로와 구별하여, 가르치는 장로 혹은 목사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의 가르침은 장로들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회당에서는 어떠한 유대인들도 회중에게 권면의 말을 하기 위하여 지명될 수 있었다.(눅 4:16-19) 이같은 방식은 기독교인의 예배 모임에 대해서 말하는 고전 14:26에서도 제안되었다. 또한 히 10:24-25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와 관련하여 그 지체들을 훈육할 책임이 있음을 지적한다. 골 3:16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서로를 가르치고 있다.

여성들은 장로로서 사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딛 2:4-5) 그리고 브리스길라는 아볼로를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그의 남편인 아굴라와 함께 참여하였다.(행 18:24-28) 가르침은 이해가능해야 하고 분명하며 교육적이어야 한다. 에스라와 레위인들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칠 때, 그 회중들은 ‘알아들을 만한 자들’이었다(느 8:3). 분명히, 알아들을 만하지 못한 이들은 다른 상황 속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어떤 개혁주의 신앙인들은 모든 어린아이들도 교회에서 유아실 대신에 설교장소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가족예배는 유익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훈육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이 각각의 이해정도에 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좋다.


- 드라마


현대에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함에 있어서, 설교라는 전통적인 형식으로 수행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사역하기 위해서 드라마(극)을 사용하고 있다. 어떤 장로교인들은 성경 속에서 드라마를 사용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이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체적인 명령들이 항상 요청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적인 명령들을 통해서(말씀을 선포하라는 명령), 그리고 구체적인 적용의 기준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적절하게 적용하는 일들을 행할 수 있다. 드라마가 설교나 가르침을 위한 적법한 형태인지의 여부와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 있어서 제한되는 분야가 있는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예’, 후자에 대해서는 ‘아니오’라는 대답을 하려고 한다.

성경은 꼭 설교나 가르침을 통해서, 일방적인 의사전달 방식만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느 특정한 모임에서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선생들이 서로 말씀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 나아가서 성경적인 설교와 가르침은 많은 극적인 요소들을 포함한다. 선지자들은 때로 겔 4:1-15과 5장에서와 같이 상징적인 행동들을 수행했다. 예수님은 대화적인 방식으로도 가르치셨다. 비유로도 말씀하셨는데, 그 비유에는 종종 다른 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포함되었고 눅 12:!3-21과 16:19-31, 18:1-8에서와 같이 예수님이 모든 역할을 맡아 진행하신 것도 볼 수 있다. 바울의 편지들도 종종 극적인 성격을 지녔다. 바울은 질문자들, 반대자들, 그리고 비난자들과의 대화를 하였다. 요한계시록도 극적인 축제의 책이다. 그러한 극적인 요소들은 설교자가 본문을 설교할 때마다 강조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종종 그의 백성들을 드라마를 통해서 가르치신다. 욥기서, 구약의 희생제사들과 축제일들, 그리고 신약의 성례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들의 재현들이다. 전통적인 예전들이 이미 재현의 과정을 계속해 온 것처럼, 예배에서의 드라마도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말씀이 한 사람 이상의 말씀 전달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질 수 있고, 설교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가르침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으며, 불가피하게 극적인 요소를 지니게 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가르침의 형태로서 드라마를 반대할 수 없다.

그러나 드라마의 방식이 전통적인 설교방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잘 제시된다고 주장할 수 없는 고려점들이 있다. 드라마들은 쓰기도, 계획하기도, 연습하기도 어렵다. 허술하게 공연되면 주의를 산만하게 하며, 성공적으로 잘되려면 그 비용이 공연의 가치를 초과하게 된다.

우리의 청교도들이 강조했듯이 말씀 전달의 단순성은 위대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드라마를 사용할 자유를 준다고 믿는다. 우리는 예배에서의 말씀 선포를 전통적 방식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다. 드라마의 사용은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올바르게 제시될 때 매우 효과적인 방편이 될 수 있다.


- 축복


하나님께서 회중들에게 말씀하시는 또 다른 방법은 축복의 선언을 통해서이다. 예배의 처음에 일반적으로 문안 혹은 인사라고 불리운다. 바울의 편지에서 처음 부분에 축복과 문아니 포함되어 있다. 예배의 마침 부분에서도 축도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한다. 민 6:22-27의 아론의 축복구나 고후 13:14의 사도의 축복구 등으로 인사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소유됨을 선포하고 복음의 축복들을 새로이 약속한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축복이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은 성경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을 때, 자신들을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로 확인하는 축복을 받는 것은 분명히 적절한 일이다.


- 저주(견책)


만약 예배 속에 하나님의 축복을 포함된다면, 언약을 어기는 자들에 대한 저주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 5장에서 교회의 권징이 예배의 적절한 측면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교회가 법적인 견책(권면, 권징, 면직, 제명)을 선언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르게 실행되었을 때, 그 견책은 범법자와 회중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마 18:18에서 (권징의 문맥에서) 교회가 이 땅위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을 가르친다. 그 말은 교회의 심판이 무오하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옳은 판결을 실행했을 때, 그것들이 범법자들을 적법하게 매었을 때, 그것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그 사도가 부재할 때조차도 교회의 판단은 사도들이 존재했을 때와 똑같이 권위있는 결정이라고 말했다.(고전 5:3-5)


- 예배로의 부름


성경에는 시 95:1-7, 96:1-3, 100:1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예배로 부르시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문안과 축복구들과 같이, 예배로의 부름도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성경이 직접적으로 명령하는 것은 없다. 어떤 이들은 공식적인 예배와 그 외의 다른 모임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예배로의 부름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하게 강조한다. 그러나 구별의 원리가 그릇되었다. 공적인 예배에도 일반적인 모임에도 모임의 목적을 기억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모두 좋은 일이다. 이것을 상기시켜 주는 일은 찬송이나 기도, 권면의 말, 혹은 예배로의 공식적인 부름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 성례


개혁신학에서, 성례는 은혜언약의 표와 인침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구원을 상징해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것을 약속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는 정결케 됨을 상징해주며, 성만찬은 주의 죽으심을 그의 재림까지 선포하는 것이다.(고전 11:26) 이러한 의식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확인시키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묶어준다.

이러한 축복들은 말씀 봉독과 설교안에서의 축복과 동일하다. 말씀은 복음의 진리를 상징해주며, 그 약속들을 하나님의 보증에 의해서 인치시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 성령 하나님은 그 말씀과 함께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마음에 인치신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인하면서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을 갱신시켜 준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종종 성례를 ‘가시적인 말씀’이라고 표현했다. 말씀은 우리의 귀에 제시해주며 성례는 우리의 눈과 감각들에 제시해준다. 내용은 동일하되 전달 매체가 다른 것이다.

성례가 가시적인 말씀들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성례를 사소한 것으로 여긴 일들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가르쳐준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만찬 속에서, 그리고 세례 속에서도 임재하신다. 세례의 물은 그냥 물이며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냥 떡과 포도주이지만 그것이 실행되는 가운데, 가시적인 말씀들이기 때문에 그것들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 ‘참예하는 것’이며, 예배자들도 참여하는 것이다.

세례는 정결케 됨을 상징하나,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던져주는 시련의 위협하는 물(하나님의 심판)도 상징하고 있다. 성만찬은 구약에서의 유월절을 상기케하며, 성전에서의 화목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먹이셨던 만나,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땅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셨던 풍성한 추수등을 상기시킨다. 또한 우리에게 과거와 미래를-우리의 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의 재림에 대한 약속의 빛 아래서-모두 가리켜 주고 있다.(고전 11:26) 그리고 현재에도 우리의 영혼을 성장시켜 준다.(요 6:48-59)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를 위해서 희생제물로 드려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대표한다. 그리스도의 몸, 즉 예배를 위해 모인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다.(고전 10:17, 11:17-22, 27-29)

말씀과 마찬가지로 성례에도 축복이 있다. 그리고 저주의 가능성도 있다. 세례와 주의 만찬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며, 그의 교회, 그리고 그의 목적들과 연합하게 한다. 자신을 교회와 동일시한 후에 타락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고백한 적이 없는 이들보다 더 심한 심판에 처하게 된다. 주의 만찬을 합당치 않게 받는 이들은 심각한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될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병들고 죽게될 수도 있는 것이다.(고전 11:27-34)

그러므로 바울은 먹기전에 자신을 살피라고 말한다. 오직 완전한 자들만이 성례를 받는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무죄하게 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죄로부터 떠나려는 결심을 하는 것과 그렇게 할 것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례의 축복들은 자동적인 것들이 아니다. 말씀의 축복과 마찬가지로 성례의 축복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유아세례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는 유아세례에 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유아들은 믿음으로 세례를 받을 수 없는데, 그들이 적절한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 유아들은 분명히 언약의 표,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케 하는 표를 받았었다.(창 17:1-14) 구약에서는 할례로, 신약에서는 세례가 되었다. 또한 예수님은 유아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손을 얹으셨다.(막 10:13-16) 하나님과 일체감을 가지고 자신이 언약백성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 축복이다. 이것은 또한 세례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 축복이 유아들에게도 적합한 것이라고 한다면, 세례도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은 개인들만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 교회들, 민족들을 취급하신다. 신약에서도 구원과 세례등이 개인에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정들에게도 주어졌다. 1세기에 유대인들의 가정이 세례받았을 때, 그들의 구약적인 방식, 즉 부모와 어린아이들이 함께 하나님의 언약의 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연관되었을 것이다. 가정세례는 그 방식이 변화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적법한 세례를 받는 것이다. 부모들은 그들의 가정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으로 믿음을 행사했다.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나이로 성장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들은 또한 주님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8장 연구문제)

1. 교회에서 드려지는 ‘어린이 예배’는 성경적인가?

2. 드라마가 공연되는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한 일들이 예배를 혼란케 하는가? 아니면 효과적이 되게 하는가? 성경의 어떠한 원리들이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결정을 규정하는가?






  추천하기   목록보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4  제 14 강 (제13장) 종합하여 생각해 보기    이드보라 2018/08/10 36 87
13  제 13 강 (제12장) 예배에서의 음악: 찬송가의 선택 문제    이드보라 2018/08/02 38 100
12  제 12 강 (제11장) 예배에서의 음악: 논쟁적인 주제들    이드보라 2018/07/26 46 110
11  제 11 강 (제10장) 예배에서의 음악    이드보라 2018/07/21 43 103
10  제 10 강 (제9장) 우리가 하나님께 말함: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응답    이드보라 2018/07/12 46 143
 제 9 강 (제8장)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심: 말씀과 성례들    이드보라 2018/07/05 47 133
8  제 8 강 (제7장) 예배의 분위기    이드보라 2018/06/28 51 129
7  제 7 강 (제6장) 예배를 위한 준비들    이드보라 2018/06/22 48 134
6  제 6 강 (제5장) 예배에서 하는 일들    이드보라 2018/06/15 56 143
5  제 5 강 (제4장) 예배의 규칙들    이드보라 2018/06/01 51 142
4  제 4 강 (제3장) 신약에서의 예배    이드보라 2018/05/17 56 213
3  제 3 강 (제2장) 구약에서의 예배    이드보라 2018/05/11 54 179
2  제 2 강 (제1장) 기본적인 원리들    이드보라 2018/05/01 62 197
1  제 1 강 강의목적 및 교재소개    이드보라 2018/05/01 51 163

    목록보기 1
       

 
www.hendersonny.org // email: info@hendersonny.org

Copyright © 2018 Henderson Christian Seminary in New York
NY : 40-36/38 78th Street, Elmhurst, NY 11373
General and Admission Office of NY & NJ 718.810.3248 or 646.338.7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