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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강 제 10 장 생명 보호 :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3)
임 바울  2016-12-02 05:18:30, 조회 : 1,005, 추천 : 186

제 14 강 제 10 장 생명 보호 :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3)

B. 사형제도


1. 문제점


        사형제도에 대한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범죄로 기소된 사람의 생명을 정부가 빼앗을 수 있는가?”


        사형제도 (또는 사형집행)가 형벌로서 명기한 범죄들은 계획된 살인과 반역죄를 포함한다. 때때로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범죄들은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는 것, 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스파이 첩보활동, 잔인한 강간, 잔인한 유괴, 비행기 납치, 또는 한 사람의 죽음을 일으킨 위증죄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정부가 사형집행을 수행할 권리를 갖고 있느냐이다.


2.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들


        a. 창 9:5-6절은 인간 정부의 근거를 제공한다.


        인간 초기 역사에서, 창 6-9장은 하나님이 지구에 홍수를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방주에서 구원받은 8명을 제외하고 모든 인류를 멸망시켰다. 노아, 그의 부인, 그리고 세 자녀와 며느리들.


        홍수가 끝났을 때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에서 나왔고 다시 한 번 인간사회를 형성하였다. 그 시점에서 하나님은 다시 시작된 생명에 대해서 교훈을 그들에게 주었다. 이 교훈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 정부의 기초이다;


[창 9:5-6]   (5)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피를 흘리면”이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솨파크”이다. 이것은 “많은 양의 피를 흘림으로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불법적으로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창 37:22, 민 35:33, 왕상 2;31, 겔 22:4)).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인했을 때에, 살인자 그 자신은 죽어야 한다고 법은 말한다: 이것이 “그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가 의미하는 바이다.

        살인자의 사형 집행은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실행되는 것이다. 이것은 복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요구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5절을 보면 “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의미하는 바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의 생명이 무한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었음으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모든 창조물보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인간은 지구에서 하나님의 대표자라는 것이다(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과 같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살인은 하나님 그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표자를 공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심각한 범죄에 대해서 형벌을 가하기 위해서, 살인은 최고의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벌로서 그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야 한다. 형벌은 범죄에 상응해야 한다.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이 구절은 모든 인간정부의 권위를 위한 기초적인 원리들을 놓는다. 홍수 뒤, 인간 사회 시초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범법자에게 형벌을 실행할 권위를 줄 것을 제정하였다(그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릴 것이다). 그러므로 범법에 대해서 형을 집행할 권위가 스스로 인간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전달된 권위이다. 이 권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범법자에게 그의 정의를 행한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라, “(5)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따라서 범법행위를 처벌하는 권위는 (아마도 세워진 정부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범법행위를 처벌하는 권위는 인간 정부가 (a) 어떤 범법행위가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가, (b) 어떤 형벌이 각각의 범법행위에 적당한가, (c) 인간이 범법행위에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기 오래전에 나왔다. 또는 모세에게 언약을 주기 전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적용은 특정한 시기에만, 또는 특정한 나라로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때에 적용이 되어야 한다. 신약이 “옛 언약(고후 3:14)”에 대해서 말할 때에, 이스라엘 나라와 함께 모세를 통해서 세워진 언약을 언급한다(렘 31:31-32, 눅 22:20, 고전 13:11, 고후 3:4-16, 히 8-10). 그러나 하나님이 홍수 뒤에 세운 언약은 “옛 언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폐지했거나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세운 언약은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세대에게 적용이 된다;

[창 9:16]   (16)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이 구절을 통해서 내린 결론은 하나님께서 인간 정부에게 사형을 집행할 권위를 주었고, 이것은 지구의 모든 정부의 기본적인 권위이다.


        창 9장의 이런 해석에 대한 반대는 ‘이것은 하나의 교훈이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실제적인 명령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글렌 스태슨(Glen Stassen)과 데이빗 구스히(David Gushee)는 창 9:6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사형 집행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이런 행동에서 빚어질 유사한 결과를 기초해서 현명한 충고를 주는 것이다. 이 충고는 ‘네가 어떤 사람을 죽인다면, 너도 죽임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1) 5절이 6절과 연결해보면, 살인자의 형 집행은 하나님 그 자신이 인간 사회에 정의를 실행하는 방법임을 보여준다. 스태슨과 구스히는 5절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 이유이다.


        (2) 6절의 마지막 부분은 (이것도 스태슨과 구스히는 언급하지 않았다) 명령의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사형집행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살인자에게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스태슨과 구스히의 견해에서, 이런 이유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것은 “하나의 교훈, 격언, 속담, 금언”으로 이해를 한다.

        “너가 잘못된 어떤 것(이 경우에는 살인이다)을 한다면, 다른 잘못된 것이(사형집행)이 너에게 행해질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범죄를 위한 이유가 될 수 있는가?”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사형집행도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에게 잘못된 것을 행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이유가 되는 셈이다.”


        (3) 구약의 나머지 부분에서 보여주는 구절들은 살인행위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형 형벌을 세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 35:16-34


        이런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스태슨과 구스히의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b. 롬 13:1-7은 시민 정부에 대해서 가르치는 두 개의 주요한 신약 중에 하나이다.


        롬 13:1-7절에 대해서 두 개의 의견을 내놓고 싶다.

롬 13:1-7


        첫 번째로, 바울은 정부의 일꾼들이 하나님의 사역자, 범법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실행하는 대행자이며 하나님이 범법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고 인간 대행자들을 통해서 수행할 것이라는 창 9장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시민 정부는 헛되이 칼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바울은 말한다. ‘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마카리아’이다. 이것은 여러 구절에서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서 말할 때에 사용된 단어이다. 몇 가지 예가 여기에 있다.

행 12:2
행 16:27
히 11:37,
계 13:10


        70인역에서 여러 구절들이 이런 식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신 13:15
신 20:13


        따라서 여기서의 칼은 단지 정부 권위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어떤 사람들의 제안은 설득력이 없다. 일반적으로 시민정부가 칼을 소유할 권위를 받았다고 말할 때에, 1세기 사람들은 칼을 사용하는 목적대로 이것을 사용할 권위를 받았다는 것이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사용할 권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c. 벧전 2:13-14는 신약에서 시민정부에 대한 두 번째 주요한 구절이다.

        [벧전 2:13-14]   (13)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4절에 ‘징벌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엑디케시스”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복수갚는 일”이라는 단어를(롬 12:19) 사용할 때에 바울이 쓴 똑같은 단어이다. 바울이 롬 13:4절에서 시민 정부는 하나님의 진노를 실행하는 ”보복자“라는 똑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이다. 롬 13장과 벧전 2장에서 시민정부는 범죄를 막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범법자들에게 하나님의 형벌을 집행하는 책임을 갖고 있음을 신약은 가르친다. 또한 이것은 창 9:5-6절의 사상과 일치한다.



        d. 정부가 범죄자를 벌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때때로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한다: 그들 자신이 강도를 만나고 또는 술취한 운전자로부터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고, 맞았다면, 그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하고 범법자가 법정에서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롬 12:19절에서 바울이 주었던 해결책이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다. “[롬 12:19]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오히려, 스스로 복수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시민 정부에게 맡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다음 장에서 시민정부는 하나님의 진노를 실행하는 대행자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13:4).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잘못을 범했을 때에 개인적인 복수를 해서는 안되고, 시민 정부의 역할을 통해서 정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시민 정부로 하여금 정의를 실현하도록 맡기는 것은 자신에게 잘못된 사람들에게도 성도들이 선을 행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바울이 “ [롬 12:20]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라고 말한 것처럼 성도들은 이런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성도들은 선으로 악을 이긴다. 이것은 음식을 줌으로서 행해지기도 하고, 시민정부의 사법제도를 통해서도 실행되어야 한다. 시민 정부는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복수를 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복수를 원하느냐에 달려있다. 스스로 복수를 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때에 이런 자세는 롬 12장과 13장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정부가 범법자에게 하나님의 정당한 보복을 실행할 것을 우리들이 요구한다면, 우리는 바울이 롬 12:19절에서 말하는 바를 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는 것이 된다. 우리는 시민정부의 바른 목적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서 범법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할 권세를 받았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런 식으로 집행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의의 속성의 영광을 전시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짐 웰리스는 “공의는 복수를 요구한다”라고 말하면서 사형제도를 반대한다. 잘못된 개인적인 복수와 시민 정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보복을 원하는 바른 소원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보복은 공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킨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1) 그들에게 잘못한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친절, 구원을 위한 기도와 영원한 용서를 보여주는 것과 (2) 동시에 시민 정부를 통해서 공의를 추구하고 그가 했던 잘못된 것에 대해서 바르게 갚도록 요구하는 것. 사실, 친구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성도들과 여러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들은 살인자에게 시민 정부가 공의를 실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처벌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공의가 실행되기를 욕망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구절은 계 6:9-10절이다. “[계 6:9-10]   (9)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이 구절에서 중요한 요점은 여기에서 부르짖는 영혼들은 죄로부터 씻음을 받은 성도들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죄성이 전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살해한 사람들에게 보복하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수 갚아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욕구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손에 심판을 맡기라는 말씀과 불일치하지 않는다. 사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이런 의미를 가진 말씀을 하셨다.

[벧전 2:23]   (23)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사실, 우리 스스로 원수 갚는 일을 포기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심판을 맡기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땅에 살면서 자신들에게 잘못한 사람들까지도 긍휼의 손을 뻗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 어떤 범죄가 사형에 해당하는가?


        살인을 제외한 어떤 범죄가 사형에 해당하는가?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어떤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범죄들이 그들이 행한 악의 정도에서 살인만큼이나 잔인한가? 그럼으로서 그들은 사형에 해당되는가? 어떤 범죄가 사형에 해당하가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각 주나 각 나라가 결정해야 한다. 사람의 뜻이 그들이 뽑은 대표자로 인해서 제정된 법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이상적이다. (물론 많은 중요한 사항들이 지금 미국에서 실행하고 있는 임명된 9명의 대법원판사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구약 법의 중요한 특징들을 지적하였다; “일상적인 법절차에서 재산권에 대한 범죄는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다.” 어떤 것을 훔친 것 때문에 사형을 시켜서는 안된다. 대신에 금전적인 배상으로 대처해야 한다. 재산상의 손해로 인해서 사형을 언도되는 것을 막는 아주 현명한 원리라고 본다.


        그러나  모세의 법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많은 종류의 범죄를 적용해서  이런 범죄들도 사형에 해당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많은 법들은 역사의 특별한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하는 시민법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기에,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하며, 다른 신들에게 충성을 보여서는 안된다. 모세의 법에서 보여지는 여러 가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들이 오늘날 시민정부에 의해서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머지 성경에서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다.


        현대 정부에 있어서, 사형집행은 다른 사람을 죽였거나 죽음으로 인도하는 범죄에 대해서만 집행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거짓되게 기소된 사람에게 사형판결을 받도록 의도된 위증죄가 포함될 수 있다. 또는 나라의 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도한 간첩죄도 포함될 수 있다. 또는 반역이나 대량 살상무기 사용을 계획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형선고를 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잔인한 강간과 폭행으로 영구적인 상처나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대법원은 2008년 6월 25일에 케네디 대 루이지애나에서 사형판결을 내릴 권리를 주정부로부터 빼앗았다. 이 사건은 아이의 잔인한 강간 사건이었다. 희생자의 생명이 빼앗기지 않는 범죄에 대해서 사형 형벌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판례이다.



        f. 결론


        하나님은 시민정부에게 특정한 범죄에 대하여 사형을 집행할 권리와 책임을 주었다. 이것은 창 9:6절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3. 성경을 제외한 이성과 증거로부터 논증


        많은 사적인 옹호단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사형제도를 찬성하고 있다; 범죄 행위를 막는다, 공평하게 갚아주는 것이다, 적절한 예방책은 시민들이 살해되는 것을 막아준다. 공감되는 공의에 대한 인식은 사전에 계획한 살인 행위는 오직 살인자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합당한 형벌이다. 심지어 불신자들도 어떤 경우에는 공의의 요구사항에 대한 내적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놀랄 필요가 없다. 율법이 마음에 새겨져 있으며, 양심이 그 증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롬 2:15). 하나님의 법을 상고할 수 있는 선악을 분별하는 감각을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두었음을 말한다. 마음에 심어진 이런 감각은 잘못을 하였을 때에 공의가 실행될 필요성을 감지하는 것을 또한 포함한다.



4. 반대들


a. 성경으로부터 반대


        여기에서 제시한 생각, 즉 계획된 살인에 대해서 사형 집행을 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반대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서 발견된 다른 구절에 반대의 근거를 둔다.


   (1) 출 20:13 ; 살인하지 말라는 출 20:13절의 말씀은 사형 형벌을 금지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정부조차도 범죄자를 ‘살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살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라짜흐’의 뜻을 오해한 것이다. 이 동사는 오늘날 형사법적인 살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언급할 때에 구약에서 사용이 되었다. 그러나 ‘라짜흐’라는 단어는 사법적 사형집행을 언급하는 일에 사용된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를 위해서는 ‘무트’라는 단어가 사용이 되었다. 민 35:16절을 보면, “ [민 35:16]   (16)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라짜흐)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무트).” 다른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논증으로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제 1차 독자가 그것을 이해했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KJV 또는 RSV 번역판은 출 20:13절을 번역할 때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그들은 “ You shall not kill"이라고 번역함으로서 독자들을 오해를 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 you shall not murder"이라고 번역을 했어야 옳았다.


        추가적으로, 하나님 그 자신이 사형 형벌을 모세언약에서 주었던 실제적인 법에서 실행되어져야 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예를 들면, 민 35:16-21, 30-34 등이 있다. 하나님이 민 35장에서 명령한 것을 출 21:13절에서 금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관적이지 않다.


        (2) 마 5:38-39 : 이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마 5:38-39]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각 개인에게 말씀하고 있으며, 그들이 다른 개인들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롬 12:19절에서 개인적인 원수 갚는 일을 막는 것과 유사한 구절이다 예수님은 지금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범죄의 형벌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절의 문맥에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 말씀이 언급하고 있는 상황에 적용을 해야 한다. 롬 13장은 정부의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마 5장은 개인적인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마 22:39 : 여기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명령이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가? 이 명령에 순종을 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동시에 살인자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떻게 이 두 가지가 서로 일치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이런 명령은 사형을 집행하라는 구약의 명령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명령을  사형집행에 대한 구약의 명령 위에 둠으로서 반대를 진행시키는 것은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문맥을 분명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레 19:18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똑같은 문맥에서, 하나님은 또한 어떤 범죄에 대한 사형 집행을 명령하고 있다 (레 20:2, 10).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명령과  자기 자식을 우상에 바치기 위해서 번제로 드리는 사람에게 사형을 집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조화롭게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범법자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실행하는 요구사항을 절대로 무효화시키는 방식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


        (4) 마 26:52 ;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에,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대제사장의 종을 쳤다. 예수님을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마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이 말씀이 사형 집행을 반대하는 말씀인가?


        이 구절은 정부 요원으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는 명령으로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해석은 베드로가 누구였으며, 이 점에 대해서 베드로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떤 군사 또는 경찰이 무기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잡아서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려는 사람들을 저항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추종자들이 시민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보호하고 변호하다가 그 때에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예수님과 3년 동안 늘 같이 돌아다녔던 베드로가 칼을 소지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강도나 또는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서 방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칼을 소지하였다. 자기 방어를 위해서 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 눅 22:38절에서는 이 목적을 위해서 칼을 가지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눅 22:38]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심지어는 칼을 가질 것을 명령하는 것도 본다, “[눅 22: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추가적으로, 예수님은 칼을 버리거나 포기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분명히 베드로가 칼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단지 예수님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방해하는 일에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보면,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 왕국이 진행하는 영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칼을 잡는 사람은 성공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그 당시에 하나님 나라 진행을 위해서 로마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다면, 그들은 실패하였을 것이고 로마의 칼에 의해서 망했을 것이다.


        (5) 요 8:2-11 ; 구약은 간음죄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했다(신 22:23-24). 그러나 신약에서 간음으로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첫 번째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그리고 모든 고소인들이 떠났을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더 이상 사형 집행을 시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 구절이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구절로서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이 구절이 모세의 언약에서 가르친 것처럼,  간음에 대한 사형 형벌을 내리는 것에 반대하는 논증으로 사용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살인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며, 살인을 위한 사형 형벌로서 사용되어질 수 없다. 노아의 언약은 모세의 언약 오래전에 세워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구절의 역사적 문맥은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설명한다. 예수님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라고 말하게 되면 그들이 원하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에 사형집행은 오직 로마 정부에게만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전체 이야기는 요 7:53-8:11절에 포함되어 있다. 현대 성경 번역판에 있는 주석에서 설명이 되어 있는 것처럼, 이 구절은 기원이 조금 의심을 받고 있다. 오늘날 많은 성경이 이 구절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 구절들은 요한복음 원문에 있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이 붙여져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신빙성은 조금 의심해볼 만하다.


        그러므로 여러 면에서 이 구절은 살인과 같은 범죄에 대해서 사형 형벌을 반대하는 설득력 있는 반대를 제시하지 못한다.


        (6)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사형 형벌에 대한 반대자들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보다, 특히 구약의 구절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스테슨과 구스히( Stassen and Gushee)는 “사형 형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연구하는 한 가지 방법은 주님으로서 예수님에게서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헌신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인에 대한 응답으로서 사형형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들은 창 9:6절을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정부 책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창 9장, 롬 13장, 벧후 2장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 그 자신은 시민 정부에 대해서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시민 정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어떤 사람이 말한다면, 그는 시민 정부에 대해서 가장 관련이 있는 구절들을 전부 배제해야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전체 성경은 예수님의 권위를 가진다. 이 주제에 대해서 가르치는 모든 성경구절을 연구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마태복음을 통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스테슨과 구스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시민 정부가 사용하는 사형 제도의 질문에 잘못 적용을 하였다. 마태복음의 가르침이 전달하고자하는 것은 사형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7) 가인이나 다윗 왕과 같은 살인자들을 하나님은 살려주었다 :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최종적인 성경적 논증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가 살인자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나님 그 자신이 아벨을 죽였던 가인을 살려주었다(창 4:8-16). 그리고 다윗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을 때에 다윗의 생명을 빼앗지 않았다(삼하 12:13).


        그러나 이 반대는 시민정부의 책임에서 그가 원하는 사람을 용서해주는 하나님의 자유로 주제를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하나님은 그 자신의 지혜에 따라서, 최종 심판 때까지 어떤 사람을 용서할 수 있으며, 즉각적인 심판을 베풀어서 어떤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다른 구절에서, 특히 소돔과 고모라, 노아의 홍수, 고라 다단과 아비람, 웃사 등과 같이 즉각적으로 심판을 베풀어 많은 생명을 빼앗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최종 심판 때까지 그가 원하는 사람을 살려둘 수 있고, 그가 원하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구절은 그가 시민정부가 하기를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하게 창 9장, 롬 13장, 벧전 2장에서 그가 세운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명시하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정부는 그 지시를 따라야 한다.


        시민 정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구절에 의지해서 사형제도를 반대하려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시민 정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을 부인하기 위해서 이런 구절들을 고집스럽게 사용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이것은 건전한 성경 해석이 아니다.


        (8) 기독교인들이 “전체 생명윤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반대자들은 말해왔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생명을 빼앗는 일 전부를 반대한다; 예를 들면, 낙태, 안락사, 사형제도, 그리고 전쟁 등. 이 견해를 또한 “호지 아니한 옷; 요 19:23”의 논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짐 웰리스(Jim Eallis)는  “God's Politics”에서 이 입장을 택했다. Joseph Cardinal Bernadin은 이 견해의 옹호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명에 대한 논의 범위는 유전학, 낙태, 사형제도, 현대 전쟁 그리고 불치병의 치료의 문제까지 널리 퍼져있다.” 교항 John Paul 2세는 “복음주의 역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형제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이다. 교회와 시민 정부에서 이 문제가 점점 관심을 받고 있다.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이것이 적용되기를 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는 이것을 폐지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문제는 형법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즉 사람과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사회가 부여하는 형벌의 주요 목적은 범죄자에 의해서 일어난 무질서를 교정하는 것이다. 정부는 범죄에 알맞은 형벌을 가함으로서 개인과 사회적 범죄를 교정해야 한다. 범죄자로 하여금 다시한번 그들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는 상태까지 교정시켜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정부는 공공질서를 변호하고 사람의 안전을 확보하는 목적을 실현시켜야 한다. 동시에, 범죄자에게 자신의 행동을 바꾸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이런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서, 형벌에 대한 성격과 범위에 대하여 신중한 평가와 결절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너무 분명하다. 절대적인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는 한 범죄자를 죽이는 극단적인 곳까지 나아가서는 안된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를 보호하는 다른 방법이 없을 때에만 실행되어야 한다. 오늘날, 형벌제도의 점차적인 발전의 결과로서, 사형 집행은 매우 드물며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유명무실하다.”


        응답으로서, 주제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결정하는 적합한 접근법은 관련된 주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부분의 입장을 지지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모호한 일반성(전체 생명 윤리와 같은 표현)으로 숨기보다는 성경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취하는 것이다.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낙태와 안락사에 대한 구체적인 구절이 이런 일에 반대를 한다. 사형 형벌에 대한 구체저인 구절들은 그것을 지원한다.


        “전체 생명 윤리”에 반대하는 또 다른 논증은 겔 13:19절에서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겔 13:19]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여기서 영혼은 보통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된 성경적인 윤리는 모든 경우에 모든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결백한 사람을 보호하고, 그들이 저지른 죄에 따라서 죄인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전체 생명 윤리”보다 기독교인은 “전체 성경 윤리”를 채택해야 한다. 이 주제와 다른 주제에 대해서 전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



b. 결과와 공평성에 근거한 사형제도 반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사형제도에 대한 대부분의 논증은 사형제도를 유지하거나 폐지할 때에 나타나는 결과에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a) 범죄를 방지하지 못한다 ; (b) 결백한 사람들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c) 정부에 의한 부당한 힘의 행사는 사회에 더 많은 부당함을 일으킨다; (d) 불공평하게 결정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과 소수 민족은 더 많은 사형 언도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e) 사형 형벌은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통해서도 잔인하고 가혹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졌다.


        응답으로, 사형 제도의 옹호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1) 사형제도는 살인을 억제하는가?  전체 통계를 조사해보면, 미국에서 사형 집행 건수와 살인자의 수는 반비례한다. 사형집행수가 줄어들면, 살인의 수가 많아진다. 그러나 사형집행의 수가 증가하면, 살인이 줄어든다. 이것은 Pepperdine University에 두 명의 교수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표가 있다.








        연구에 의하면, 한 건의 사형의 집행했을 때에, 14-18건의 살인을 막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방지 효과는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인정을 하여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형제도를 반대한다”고 루이지에나 주립대학 경제학자 H. Naci Mocan은 말한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하나의 사형집행이 5건의 살인을 막는다고 주장한다. “나의 연구에 의하면 사형제도는 방지 효과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유사하게, 시카고 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사형집행 반대  옹호자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형제도는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덧붙여 말하기를,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 그리고 생명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사형제도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 생명 보호를 실패할 가능성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짐 월리스의 주장,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것이 모순이 없는 생명 윤리”라는 주장이 불합리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형제도를 지지할 때에, 인간 생명에 대해서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잘못되게 생명을 취했을 때에, 사회는 가장 큰 형벌인 살인자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 발표는  “사형제도가 살인을 방지한다는 실제적인 증거가 없으며, 복수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짐 웰리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추가적으로, 상식으로부터 논증이 있다. 살인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에,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때보다 살인을 저지르는 확률은 확실히 줄어들 것이다.


        미국에 있는 현행 법률 체계는 항소를 하게 되면 몇 십 년이 걸린다. 따라서 사형의 판정이 되고, 항소가 기각되었을 때에 즉각적으로 실행되는 사형제도가 가지는 방지 효과를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즉각적인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훨씬 더 많은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전 8:11]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2) 결백한 사람이 죽음에 처하는가? 결백한 사람이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에 대해서, 1976년에 사형제도 회복 이후로, 미국에서 결백한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는 알려진 예가 없다. 많은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결백한 사람들이 DNA 조사에 의해서 풀려나왔다. 잘못된 사형집행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형제도는 매우 높은 증거에 의해서 증명이 될 때에만 집행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절차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적용이 되고 있다.


        계획된 살인의 경우에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을 때에 일어나는 결과가 무엇인가? 물론 종신형도 심한 형벌이며, 많은 비용이 든다. 게다가 살인자에게 종신형 또는 장기복역을 주는 것은 형무소에서 다른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고, 탈출하거나 사면을 받고 나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1981년에 Glen Stewart Godwin은 Kim Robert Levalley라고 불리우는 마약 운반자를 칼로 찔러 죽인 일로 25년형을 받았다. 그는 26번을 칼로 찔렀다. 그는 Folsom(켈리포니아) 형무소를 탈출하여 멕시코로 도망을 갔다. 거기에서 그는 마약 중매자가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체포되었고 감옥에 있는 동안에 많은 멕시코 마약상들을 죽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형무소에서 탈출을 하였고, 그는 현상범이 되었다. FBI는 10만불의 현상금을 걸었다.


        홍수 뒤에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그 당시에 자료와 증거를 소집하는 능력은 오늘날에 비해서 매우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류가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주었다. 우리가 사형제도를 실행하기 위해서 전지(모든 것을 아는 능력)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며, 그것을 실행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명령한 것을 실행하는 일의 실패는 땅을 더럽히고, 땅을 저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민 35:32-34).


(3) 모든 강한 조치는 더 많은 폭력 행위를 낳는가?: 정부에 의한 조치(사형집행)가 많은 폭력을 낳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창 9:5-6, 롬 13:4, 벧전 3:12-13절의 가르침과 정반대이다. 사실, 그 반대의 현상들이 일어난다. 사형 형벌은 실제로 방지 효과를 가진다. 많은 결백한 생명을 구한다. 많은 연구 자료들은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4) 사형제도에는 인종차별 또는 빈부 차별이 있는가?: 사형제도가 차별에 의해서 행해진다면, 필요한 법적 절차가 이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논증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단지 공정하게 사형제도가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만을 말해줄 뿐이다. 사형제도에 해당하는 범죄가 일어났을 때에, 빈부의 격차없이, 인종이나 민족의 차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 개인의 사회적 신분 또는 경제 또는 배경에 근거한 차별은 철거되어야 한다.


(5) 사형제도가 과거 역사에서 남용되었는가? 사형제도가 때때로 역사에서 너무 지나치게 그리고 사형 이외의 범죄에도 과도하게 사용된 적이 있다. 교회가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였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사형에 처한 일들이 있었음을 교회사는 말해준다. 이런 사형집행은 어떤 사람도 오늘날 변호해서는 안되는 남용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남용은 사형제도의 바른 사용을 대항하는 논증이 아니다.



5. 법과 정책에 대하여 권하는 말


전에 논의한 것에 비추어서, 두 가지 특별한 추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a. 정부는 사전에 계획된 살인의 경우에 사형제도를 실행에 옮겨야 한다. 이것에 대한 이유는  위에서 논의되었다


        b. 살인 이외의 범죄가 사형형벌에 준할 만큼 잔인한가를 결정하기 위한 정부에서 세운 일반적 기준들이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결정에 관련된 요소들은 위에서 언급하였다



6. 이 문제의 중요성


        사형제도 문제는 네 가지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 (1)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살인의 경우에 정부가 이 제도를 실행하라고 가르친다 ; (2) 살인이 이루어졌을 때에 정당한 형벌이 요구하는 것은 인간 양심에 부합된다; (3) 이런 사건에서 정당한 형벌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사항은 사회가 이런 사건에서 실행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결백한 사람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를 가지고서 빠르고 신속하고 공평하게 실행이 된다면, 잔인한 살인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연 구 문 제 1>>
1. 정부가 범죄자의 생명을 빼앗는 법을 만드는 것이 정당한가?


2. 신약의 사람들이 구약에서 명령된 사형제도를 지켜야 하는가?


3.  사형 제도를 폐지하거나 유지할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가?




<<연 구 문 제 2>>
* 발표하는 방법
1. 이 글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2. 이글의 내용을 평가합니다. 평가에서 저자의 틀린 점을 지적할 수 있고, 저자의 옳은 점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3. 나의 의견을 진술합니다. 이때에 자기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을 예로서 드는 것도 좋습니다.
4. 결론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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