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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하나님(D. A. 카슨) 제1부 제6장: 저주와 거룩한 전쟁 - 그리고 지옥
이드보라  2018-10-26 22:06:03, 조회 : 361, 추천 : 109

제 6 장

저주와 거룩한 전쟁 - 그리고 지옥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성탄절과 부활절 외에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중년 여성을 교회에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그 때는 마침 목사님은 호세아의 예언을 시리즈로 설교하기 시작한 때였다. 음행과 매춘, 수치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지적하는 본문을 통한 설교를 듣고 나오는 중년 여성의 얼굴은 매우 침울해 있었다. 뺨을 맞을 때 다른 편 뺨을 돌려 대주고, 복수는 주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성경이라고 믿었는데 저주의 말씀을 대하니 너무도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지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옥의 위협에 대해서 약화시키려는 해석들은 인기를 끈다. 저주와 전쟁에 대한 부분들을 모두 축소시키거나 또는 영적인 해석으로 바꾸려고 한다. 성경을 적용하는 단계에서 그렇게 바꾸는 것이 적합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럴 때조차도 우리는 일단 구약성경의 대학살 사건들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자매가 나에게 찾아와 도움과 위로를 구하면서 그녀의 아버지가 최근에 돌아가셨고 지옥에 가셨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이러한 문제들은 민감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바라보는 ‘틀’의 하나로써, 나는 이렇게 실제적인 성경 본문들을 통해서 알아보기를 원한다.


1. 문제에 대한 인식


피터 크레이기는 <구약성경에서의 전쟁의 문제>라는 소책자를 썼다. 그는 이 책 제목에 들어있는 ‘문제’가 바로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느끼는 ‘우리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선, 그가 붙인 제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이 전쟁에서 ‘문제’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아말렉 사람들을 완전히 멸절시키지 않았을 때, 어떤 탁월한 도덕적 양심의 가책으로 인함이 아니라, 자기 원하는 대로 아각 왕을 살려두고 양과 가축 중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겨둔 것이다(삼상 15장).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습게 여긴 것은 사울이었다.

복수해 달라는 부르짖음과 지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옥에 대한 매우 끔찍한 묘사를 읽을 때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 하나는, 그 말씀 대부분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시편의 첫 다섯 편에서만 해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미워하시고, 죄인들에게 진노하신다는 명백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소리를 더 듣기 좋아하는가? 나는 이 말에 진리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전쟁이나 대학살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어떤 군대가 ‘공산주의에 맞선 싸움은 하나님을 위한 싸움이다’라는 슬로건을 걸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나 현대의 테러와 같은 무력 전쟁들에서 양편 모두 윤리적으로 옳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두 가지는, 첫째로 새 언약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서들의 삶의 터전이 더 이상 국가형태가 아니며, 어느 한 국가와 동일하지 않은 세계적인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항상 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비록 국가의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검을 사용할 권세를 가졌으나,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그 권력이 부패하는 바람에 폭력을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너무 쉽게 처음부터 사용한다는 것을 모든 국가와 국민들에게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격정의 수사학


도덕적으로 난폭해 보이는 모든 성경의 표현들을 사실적인 묘사로 생각하거나, 진지한 바람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가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한탄하며 쏟아내는 저주를 생각해 보라.

렘 20:14-18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예레미야는 너무도 비참해서 죽기를 바라고 있다. 또는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기의 출생 소식을 자기 아버지에게 전한 사람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그의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지 말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이 단락을 본문에서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큰 오류이다. 예레미야가 깊이 동요하고 있다는 식으로 온화하게 요약하거나 단순한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대체한다면, 그 분노의 생생함은 희석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분노가 얼마나 격정적이었는지 느끼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저주의 언어들도 격정의 수사학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한 언어들은 정보를 제공해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에 불을 붙이기 위한 것들이다. 침착한 설교와는 다르게, 갑작스러운 절규이며 혼란과 공포를 토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격정적인 외침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메시지가 처한 더 큰 문맥에 어떻게 부합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그의 호된 자기 연민에 대해 주님의 온화한 꾸중을 듣곤 했다.  

사람들이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역사의 종말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전쟁이 중립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선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명한다. 오히려, 전쟁의 복수의 외침과 대규모의 죽음은, 악이 억제되어야 하는 타락한 세상, 그리고 고통스러운 악 때문에 격정적인 절망의 외침과 엄격한 공의에 대한 솔직한 요구가 있을 수 밖에 없는 타락한 세상의 현실과 대조된다.


3. 옛 언약의 영향


옛 언약,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의 종 모세틀 통해서 맺으신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터전은 국가였다. 더욱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중보자들을 세우시어 일하게 하셨다. 다윗의 계보를 따른 왕들, 레위 족속의 제사장들, 그리고 때를 따라 일으킨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했고,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을 대리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한 국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그 국가의 복지와 분리시킬 수 없었고,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국가의 쇠망과 분리시킬 수도 없었으며, 그 백성의 영적, 도덕적 순결을 그 국가의 신앙적 순결함과 분리시킬 수 없었고, 그 백성에 대한 긍휼을 그 국가에 대한 사랑과 분리시킬 수 없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사회적인 것들과 신앙적인 것들을 너무 쉽게 분리하고, 정치적인 것들과 도덕적인 것들을 너무 쉽게 분리하는 일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국가는 신정국가였고, 그 국가의 근본적인 법은 하나님의 법이었다. 이상적으로 볼 때,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입법적 결정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반영해야 했다.

이스라엘의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의 대적은 하나님의 대적이었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다 찰 때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애굽에 남아 아직 가나안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창 15:16) 계속된 우상숭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신앙, 그리고 심지어 인신 제사등이 성행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홍수 때 인간들을 벌하시고 세상의 악을 제갈 물려야겠다고 생각하시고, ‘이제 하늘과 땅을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셨다면’(벧후 3:7),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들을 통해 매우 비슷한 종류의 형벌을, 그러나 훨씬 더 작은 규모의 형벌을 그들에게 내리신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적들에게 둘러 싸였을 때 그들은 그 문제를 단순히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사자였다.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대의와 공의에 호소해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시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 대답은 단연코 명확하지 않다. 한편으로, 그 대답은 부정적이어야 한다. 새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터전은 한 국가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의 경계가 불분명한, 통일된 ‘기독교 국가’를 세우려는 모든 노력은 잘못된 생각일 뿐 아니라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인식하던지 아니하던지 하나님께서 여전히 모든 국가들의 하나님이시다. 전쟁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여러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중에서도 틀림없는 한 가지는 심판의 관점이다.

지난 세기에 벌어진 대부분의 전쟁들은 선조들의 보편적이었던 신앙에서 떠나 무지와 탐욕, 야망과 오만함으로 엄청나게 타락한 국가들에 의해 시작되고 주도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은 개인과 국가를 주관하시고 그의 목적을 주권적으로 실행하시며, 모든 국가들과 국민들을 세우시거나 무너뜨리기 위해 일부 사람들의 악한 책략을 사용하시는 신비한 섭리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의 거룩한 전쟁에 관한 ‘문제’를 대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오만한 자기의나 충격적이고 과도한 공포심이 아니라, 회개와 상한 마음과 중보의 마음이어야 한다.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기 싫어하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지옥에 관한 것일 게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생생하게 지옥에 관한 묘사를 하신다. 불못, 신음하고 이를 가는 곳, 시원한 물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려 주기를 갈망하는 자들이 있는 곳, 흑암이 있는 곳, 성 밖,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기쁨이 없는 곳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극명하게 대립되는 두 그룹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그 뿐인가? 악인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부활과 의인에게 주어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거할 부활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여러 가지 비유들이 사용되고 은유적 언어들을 사용하지만, 분명히 그 지시하는 대상이 있는 은유적 언어이다.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충격적인 언어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확증된다. 이러한 본문을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관점들이 있다.

첫째, 대체로 예수님께서 충격을 받으시는 것은 지옥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강퍅함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눈에 죄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더욱 부지런히 거룩의 길을 가야 함을 알려준다.

둘째, 성경에는 지옥에서 회개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오는 부자와 같이, 구원해 달라는 부르짖음이나,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경고해 달라는 간청은 있지만 회개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다. 사실 그와 정반대로 말하는 구절이 있을 뿐이다.

계 22:10-11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미래에 심판이 있다. 종말에 악한 모습으로 남아있을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악하다. 종말에 거룩하다고 ‘선언’되어질 사람들은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계속해서 거룩하여 실제로 거룩의 완성 단계에 이를 것인 반면, 종말에 악하다고 선언될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반역과 굳은 마음 때문에, 계속해서 모든 것에 악하여 실제로 악한 것의 극치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지옥에서도 계속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하며, 계속해서 자기의 길을 주장하고 편견과 미움의 사회체계 속에서 산다. 그래서 지옥의 심판은 영원하다.

결국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벌어지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사 42:24-25 야곱이 탈취를 당하게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약탈자들에게 넘기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최근, 어떤 저명한 복음주의 학자들은, 지옥 자체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그곳에 사람이 영원히 살 것은 아니라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형벌이 다르겠지만, 결국 지옥의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소멸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원한 형벌의 개념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거룩하시고 주권적인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에 대한 ‘적법한’ 심판이 무엇인지 평가할 수 있는 존재가 과연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있을지 생각해 본다. 제시하는 논리가 옳다면, 소멸론자들이 말하는 주장은 거짓된 것이다. 각 본문에 대한 해석의 오류가 있는 것이 분명하고 지옥에서 죄인들이 결코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한 보응을 받는다면, 소멸론자들의 견해에는 도덕적인 추동력마저 없을 것이다.

셋째로, 성경은 결코 하나님께 중립적인 사람들을 택하여 어떤 사람들을 임의로 천국을 보내고 어떤 사람들은 임의로 지옥에 보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진노에 합당한 죄인들 중에서 오직 그의 자비와 사랑에 근거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의 은혜의 행위였다고 고백할 수 있다.

넷째, 하나님의 축복과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거나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천국도 지옥이 될 것이다.

다섯째,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고난에 냉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자비가 풍성하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종교적 위선자들에게 끔찍한 화를 선포하시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마 23:37-3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정말로 청중에게 지옥불을 안겨주는 ‘지옥 불 설교자’라는 고정관념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선명이 선명하게 그리고 때로는 무섭게 말하지만, 눈물 없이 그리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선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진노를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경험한 구원의 위로를 나누고 싶은 상한 마음으로 경고하는 것이다.


5. 교회의 권징과 본질 - 그리고 부르짖음


옛 언약의 본질과 지옥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구약 성경이 거룩한 전쟁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지만, 신약 성경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더 탁월하여 그러한 흔적들을 찾아볼 수 없다. 새 언약 백성의 삶의 터전인 교회는 무력으로 자신을 보호하거나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징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형제를 권징하는 방법, 교인을 출교시키는 단계를 가르치신다.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권징은 여러 형태를 띤다. 온화한 훈계, 권면, 상호 고백, 개인적인 면담 등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출교이다. 교회는 눈물과 자기 성찰로 출교를 감행한다. 신약 성경에서, 이 마지막 조치는 오직 세 경우에만 적용된다. 심각한 교리적 타락의 경우, 심각하고 지속적인 윤리적 비행, 그리고 지속적이고 사랑 없는 불화 등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밖에 있다고 법적으로 선언한다면, 그 결정은 이 사람이 주의 날에 구원받기를 바라는 의도로 행해진다. 그러나 참혹한 가능성은 틀림없이 존재하며 반드시 그것을 마주해야 한다. 신원하는 부르짖음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은 시편과는 반대되는 말씀을 한다.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전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외침이다.

계 18:19-20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이 구절들 외에도 비슷한 말씀들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가 신약 성경이 제시하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려한다고 해서, 구약의 예들을 본질적으로 더 가혹한 것으로 취급하고 오늘날에는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오셔서 그의 피로 새 언약을 인치시사,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더 분명히 나타나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는 변명거리가 덜해지고 찬양과 예배의 근거가 더 많아진다.


6. 좋지 않은 해법들


맨 처음에 언급했던, 자기 아버지에 대해 물어본 한 자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 자매는 자기 아버지가 이미 지옥에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이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그 사람과 전능하신 하나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고 말해주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의 결정적인 증거는 십자가라고 말했다.

우리가 절대적인 보편구원론은 택할 수 없는 것은, 성경의 수많은 본문들이 이에 대해 부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요 3:36) 말씀하셨다. 우리는 진리와 계시를 식별의 기준으로 가져야 하며, 사람의 성실함을 기준 삼을 수 없다. 다른 대안은 사람이 만든 신이다. 평안을 주지 못하는 신이다. 어떤 평안을 느낀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기만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는 참 평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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