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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하나님(D. A. 카슨) 제1부 제4장: 사회적인 악, 가난, 전쟁, 자연재해
이드보라  2018-10-09 11:13:37, 조회 : 75, 추천 : 9

제 4 장

사회적인 악, 가난, 전쟁, 자연재해


이번 장에서 논하려고 하는 것은 위의 제목과 같은 복잡한 주제들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지를 개괄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가난을 없애는 해법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특별한 주제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훨씬 소박하게, 위에서 열거한 악들로 야기된 고난들에 대해서 말씀하는 바가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국가가 예방하거나 범하는 악

일반적으로 성경은 시민정부가 악을 억제한다고 말씀한다. 그것은 정부의 주된 목적이다. 사사기에서 통치자에 의한 국가 질서가 세워지기 전의 시기에 무자비한 강간, 살인, 약탈, 그리고 만행등의 폭력이 행해진 이야기들을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들 중에, 저자는 주제가 되는 후렴구를 반복해서 적으며, 책의 결론도 그 문장으로 끝이 난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것은 사울 왕국과 다윗 왕국의 설립을 예비하고 있다. 반면에, 도덕적으로 볼 때에는, 악을 제어할 책임이 있는 권세자가 없는 경우에 각 개인의 탐욕과 폭력이 점점 더 노골적이고 뻔뻔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성경은 모든 악의 근원이 시민정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 각 개인이 ‘자연’과의 연대가 느슨해질 때 사회의 모든 악들을 스스로 치료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인간 정부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 말씀한다.

롬 13:1-5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바울의 강력한 언어를 보자. 국가가 악을 억제하기 위해서 힘을 행사함으로 사람이 국가에 복종하는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가 바로 형벌 때문이라는 것만 말하지 않는다. 그는 국가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정부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국가에 대한 복종은 단순히 실용적인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요, 양심의 문제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국가가 주는 혜택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의 신화를 지지하지도 않는다. 결국, 국가는 국민에 의해서 운영되는데, 국민이 타락했다. 타락한 사람들이 정부에 들어가게 되면 부패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 타락했기 때문에 부패는 만연하다.

이스라엘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사이에 구체적인 약속을 주셨고 통치자들과 백성들은 모두 이 법에 복종하기로 맹세했다. 이 법을 위반할 경우에 형벌이 내려질 것이므로, 그것이 유발하는 부패와 고난은 적어도 계속해서 통제되었다. 그러나 자기의 악한 통치자들이 권세를 잡는 일이 반복될 때, 그들은 우상숭배에 빠졌고 악의 대명사가 되었다. 후대의 왕들이 종종 여로보암의 죄와 비교되어서 평가되기도 했다.

왕하 14: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다윗과 같이 위대한 군주도 악하고 형편없는 일을 했다. 밧세바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의 남편을 잔인하게 죽이는 음모를 꾸몄다(삼하 11장). 악한 왕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했으며, 왕비 이세벨은 조작과 뇌물로 왜곡될 수 있는 재판제도를 통해서 나봇의 명예를 더럽히고, 그의 생명을 빼앗았다.

나봇이 돌에 맞아 줄을 때 견뎌야 했던 고난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가족들은 가난과 수치를 어떻게 감당했어야 할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두 가지 가치판단을 내리시는 대상은 구약 시대의 언약 공동체의 정부만은 아니었다. 바울이 로마서 13장을 기록할 때 그의 마음속에 있던 정부는 로마 제국이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국가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구약 성경을 통해 이미 배웠다. 하나님은 그 모든 국가들에게 공의를 기대하시고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이셨다.

잠 14:34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모든 정부가 국가를 안정시키는 수단은 바로 공의다. 공의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 국가에 대해서도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고치기 위해서 다른 나라를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심판에 사용하는 수단이라고 선언하지만, 앗수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다른 나라를 멸망시킨다고 생각한다. 앗수르는 그들의 악한 행위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하시기 위해서 앗수르를 쓰시고, 이제 돌이켜 앗수르를 멸하신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근본적으로 비인간적이 될 수 밖에 없는 노예제도 속에서 종들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씀한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정부를 보았다. 엄청난 박해로 온 나라가 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야 하는 충성을 국가가 요구할 때 그 국가는 짐승이요, 음녀다.

성경은 국가가 이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악을 억제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국가가 악을 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한다. 국가는 어떤 때에 우리를 고난에서 보호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고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우리는 모든 잔인함과 고난의 형태가 반드시 물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치 정부는 1933년에서 1939년까지 여러 가지 좋은 일도 했다. 그러나 거의 전 국민을 언론으로 통제하고 공포의 정치를 하였으며 도덕적으로 파탄한 탐심으로 물들게 함으로써 그 전의 좋은 일들을 훼손시켰다. 심각한 고난을 야기하는 제도적인 폭력은 경제, 교육, 법정, 군대의 모든 영역에 미칠 수 있다. 또한 개인의 삶에서도 작위적인 죄, 부작위적인 죄도 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로마서 13:1-5을 인용할 대, 조건적인 복종을 말한다. 이유는 국가가 가진 양면성 때문이다. 국가가 공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종일 때에는 국가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악의 도구가 된다면, 국가에 저항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해야 하는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이다.

고난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지만 네 가지 사항은 매우 확실하다.

(1) 성경은 국가가 야기하는 고난과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 주는 고난에 대해서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이나 어떤 그룹들이 이러한 원인들 때문에 발생되는 고난을 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2) 성경적 사고의 맨 아래에 깔려있는 전제는 인류의 타락과, 악의 성향과, 파괴되고 반역한 세계의 비극과 악의다.

(3)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견뎌야 하는 고난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공의를 증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땅에 유토피아의 건설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최종적인 치유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확실한 사회 개혁은 대각성과 그 이후의 부흥과 같은 것이겠지만, 공의를 추구하기 위한 의무를 재발견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4) 하나님께서 국가의 배후에 계신다. 하나님은 국가가 종종 악하게 행하는 것을 아시고 그 책임을 물으신다. 이 점에 대해서는 11장에서 더 다룰 것이다.


2. 여러 유형의 가난

야게의 아들 지혜자 아굴은 굉장한 통찰력으로 이렇게 말한다.

잠 30:8-9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가난, 지독한 가난은 결코 기쁘지 않다. 사실, 가난이라는 의미는 굉장히 다양하다. 국가가 정한 빈곤선보다 못하게 하는 것은 굶어죽는 것과 전혀 다르다. 실제로 빈곤선보다 못하게 사는 것도 서로 다른 두 가족에게서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첫 번째 가족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사랑한다. 수입이 적은 직업을 갖고도 그 곳에서 진정한 실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주님을 섬긴다. 감사하는 삶을 살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공급하시는지를 가르친다. 독서하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있다. 지역 교회로부터 도덕적이고 정서적인 지지와 물질적 후원을 받으며, 하늘의 창고에 얼마나 투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도전을 받는다. 이런 가정에서 성장한 나는 집을 떠나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지 알지 못했다.

똑같은 수입으로 사는 두 번째 가족에는 어머니와 네 명의 자녀가 함께 산다. 이중 세 자녀는 모두 아버지가 다른데, 현재 이 가정에 아버지는 없다. 쓰러질 것 같은 아파트에서 산다. 후원해 주는 교회는 없고, 자녀들의 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사로잡는 사회적 그룹은 길거리의 불량배들이다. 책보다 마약을 구하기가 더 쉽다. 자녀들은 글을 모르고 어머니는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가난’이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정부가 정한 빈곤선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실상 가난하게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신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 신학에서 가난의 문제’등을 생각하지만 이 문제의 여러 측면들이 현저히 현대적이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권력의 결핍 때문에 경제적으로 박탈당한 자들이라고 분석한다. 어떤 연구들은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자들이란 땅이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 연구들 대부분은 가난이 항상 악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 말하지 않는다. 사실 가난은 종종 다른 것들보다 낫다. 또한 성경을 올바로 이해한다고 해도, 성경의 의미를 현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

현대 세계에서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차이를 생각할 때, 이 문제들은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압박은 건전한 생각을 갉아먹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적어도 성경이 제시하는 여섯 가지 유형의 가난을 구분하고, 각 유형이 본서의 주제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불행하게 가난한 자들

어떤 사람들은 불행한 환경 때문에 가난하다. 퇴행성 질병이나 난치병 때문에 생업을 잃었거나 수년간 지속된 가뭄 때문에 기근이 찾아왔을 수도 있다. 룻과 그 시어머니 나오미는 기근 때문에 유다를 떠나 모압으로 갔다. 나오미와 그의 두 미망인 며느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타락한 세상에서, 비극적인 사건 때문에 가난하게 된 사람들은 항상 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가난에 대해서 철학적인 공론을 하거나, 자기의에 사로잡힌 운명론 등을 논해서는 안된다. 긍휼히 여기고 베풀고 물질적인 후원을 해주어야 한다.

일용직들에게는 임금을 신속하게 지급해야 한다(레 19:13). 실제적으로, 모세의 율법은 가난한 자들과 레위인들을 위해 삼년마다 수확의 십일조를 따로 모아두라고 규정한다(신 26:12 이하). 땅이 쉬어야 하는 일곱 째 해에는 가난한 자들이 그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었다(출 23:10-11). 룻과 나오미는 그러한 율법을 그대로 지킨 신실한 보아스에게서 큰 유익을 얻었다.

섭리의 신비가 크다 할지라도, 손을 놓고 철학적인 슬픔에 빠져 우리의 욕심만 채워서는 안된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따라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한다.

잠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2) 억압받아 가난한 자들

구약성경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가난의 유형일 것이다. 이 가난은 다른 사람들의 무분별하고 부당한 착취 때문에 찾아온다.

그 예로 나봇과 우리야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은 약자들을 착취하여 자기 배만 채우는 탐욕을 통렬히 비난한다.

사 5:8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모든 가난에서 나오는 비인간적인 결과들은 이 유형의 가난 때문에 더 늘어난다. 전도서 기자는 전 4:1-3, 5:8-10에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평가했다.

여기에서 가난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다. 즉 다른 사람의 죄의 결과다. 첫 번째 유형의 가난에서와 같이 죄와 연결되지만, 여기에서는 타락한 세상에 대한 심판을 초래하는 배경으로서의 죄가 아니라, 직접적인 억압으로서의 죄다.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악을 허락하시는지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악 자체가 인간의 행위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들이 도적적으로 책임을 가지는 피조물들이라면, 또한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억압받는 자들에게 개인이 줄 수 있는 최선은 사랑과 긍휼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가난한 자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공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공의를 줄 수 있는 곳에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잠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잠 31:9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우리는 신정론 관점에서 가난 문제를 논의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더 깊이 생각하고 기억해야 한다.

잠 29:13-14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3) 게을러서 가난한 자들

잠언서는 거의 모든 종류의 가난에 대해 말씀하지만, 이 유형이 특히 중요하다.

잠 13: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 13:18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

종종 게으름은 다른 악덕들과 짝을 이룬다.

잠 23:20-21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 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작은 아들의 가난은(눅 15:11-16) 그의 퇴폐적인 방탕함의 결과였다.

이 가난을 결코 모든 경우로 일반화시켜서는 안되고, 각 경우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해고를 당한 후 일자리를 찾을 수 없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나중에 매우 낙심하고 술과 게으름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의 태도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직장을 잃은 것이 그들의 윤리적인 인격에 적지 않은 손상을 가져온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그런 경우에 단지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는 것은 비록 깊은 동정심에 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의존성만 더 낳게 하고 그들을 더 나약하게 만든다. 특정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경험한다면, 그 사회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빈곤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더 교묘한 형태의 게으름이 국가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일을 더 적게 하면서 임금은 많이 요구하고, 노동에 대한 자긍심도 없고 종일 급여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신실함도 없으며, 자신이 몸담은 산업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갖기 위해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도 없다면, 그 게으름의 열매는 결국 형편없는 산업과 대규모 실업사태, 그리고 쇠퇴하는 문화 등으로 나타날 것이다.

죄의 요소가 강력하다. 게으름과 훈육의 부재는 하나님 앞에서 죄다. 그러나 개인의 순수한 게으름이 위험스런 것이라는 것을 안 이상, 성경은 우리가 결코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을 핑계대기만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회개와 부지런함을 촉구한다.

잠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4) 형벌 받는 사람들 때문에 가난한 자들

다윗이 요나단에 대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므비보셋을 찾아내 그에게 선을 행하기까지 사울 왕의 자손들과 요나단의 자손들이 수년간 겪어야 했던 궁핍함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만일 사람이 살인 또는 반역 등의 죄에 대해 형벌을 받게 되면, 그의 가족은 가난해 질 수 있다. 그러한 고난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분적으로 이 가난은 첫 번째 유형의 가난한 형태이다. 즉 재앙과 불운에서 초래된 가난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재해라고 불리는 재앙에서 온 불행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에 의한 불행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사람의 착취나 억압에 의해 가난이 초래되는 억압의 죄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죄와 그 결과로써의 형벌이 그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환경에 변화를 주어 가난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유형이 보여주는 것은, 죄가 부지불식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강간, 살인, 또는 도둑질 등의 경우에 가장 많은 고난을 받는 사람은 피해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가장 많은 고난을 받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범죄자의 범죄와 무관하고 범죄자가 의도한 피해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범죄 행위의 효력이 미치는 영향권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다.

난잡한 성관계를 통해 AIDS 바이러스를 고의적으로 전염시키는 것은 죄이지만, 어느 혈우병 환자가 정부의 헌혈에 의해 이 병에 걸렸다면 그 질병만으로는 아무 비난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죄는 종종 무고한 사람들에게도 찾아온다. 이것은 죄 자체에 대해서도 사실이고, 그에 따른 심판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엘리야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하나님께서 남겨두셨다는 말씀을 들었다(왕상 19:18). 그렇다고 해서 3년간의 가뭄 기간 동안 그들 중에서 아무도 가난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고난에 대해서 우리는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고난이 누군가에 의해 찾아온 것이기는 해도, 당사자가 어떤 억압과 폭력의 직접적인 희생자일 때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난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우리 사회의 야만성은 매우 고통스럽다. 악이 우리에게 너무도 가까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죄의 본질이다. 죄는 범죄자와 피해자로부터 밖으로 범람해 나가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은 악은 그것이 범해진 작은 범위를 훨씬 넘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악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고 고난을 당할 때에 충격을 덜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들은 무엇일까? 공의를 펼치거나, 악에서 파생된 결과로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 안목을 가짐으로써, 그러한 일들이 발생할 때 잘못된 기대들을 움켜 잡으면서 황폐해져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공명정대하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악과 죄는 공의롭게 행해지지 않으며 우리 자신은 이 악한 세상 질서의 한 부분이다. 또한 우리가 소멸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5)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주님의 사역에 드리고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동안 대체로 세상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자발적인 가난이다. 성령의 강권하심을 받아 수 많은 첫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졌었다(행 2:44-45).

분명히,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에 처해지는 원인은 죄가 아니다. 적어도 이 그리스도인들의 죄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포기의 결과로 그렇게 되신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가난에는 미묘한 함정들이 있다. 하나는 오만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함과 이타심을 순수하게 사랑하지 않고 거룩하고 이타적이라는 명성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행 5장) 이러한 악을 범한 가장 좋은 본보기다.

이러한 유형의 자기 부인을 선택한 사람들에 대한 반응 중에서, 아마도 가장 적절하지 않은 태도는 동정일 것이다. 그들은 동정을 원하지 않으며 그것을 경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순수하지 않은 동기로 이 가난을 택했다면, 당신이 보여주는 동정은 그들에게 매우 위험한 유혹이 될 것이다.

6) 심령이 가난한 자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마 5:3-5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동정이나 구제는 필요 없다. 하지만 왜 가난이 비유에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자들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지속적인 경제적 약탈과 사회적 곤궁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시 37:14, 40:17, 69:28-29, 32-33, 잠 16:19, 29:23, 사 61:1 등)

시 40:17과 69:29등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왕이 자기를 가리켜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말하는 것은, 소유의 관점이 아니라 지위와 명예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왕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그를 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의 목숨을 찾는 것이었으며, 그들에 대한 그의 반응은 상대가 수치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신구약 중간기에는 많은 부호들과 세도가들이 가장 부패하고 영적으로 타협했는데, 여러 저자들은 ‘가난하다’를 ‘의롭다’와 거의 동일하게 생각했다. 고통스러운 가난이 본질상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가난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를 구한다면, 본질적인 악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은혜의 수단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심령의 가난함은 많은 경우에 가난함에서 시작된다. 즉 가난 때문에 영혼의 황폐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겸비하게 도움을 구하게 된다면, 가난은 큰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요소가 있다. 부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은 종종 자기 만족에 빠지고 오만하여 자기에게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설령 느낀다고 해도,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시인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이 결코 캐낼 수 없는 통찰력의 광맥을 찾을 수 있다.

잠 28:11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사야 61장의 예언을 인용하셨다.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주님께 모든 필요를 맡기고, 주님 안에서 풍성한 자비를 구한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관점들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이번 장에서 긍휼과 공의에 대한 성경의 수많은 강조점 중에 불과 몇 가지만 엿보았으며 악과 고난의 문제가 가진 수 많은 측면들 뒤에 존재하는 신비한 섭리에 대해서는 아직 살피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증명하는 데 대한 염려를 멈추고, 오히려 우리가 성경의 하나님 아래서 이런 저런 고난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비통함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기보다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법을 더 읽찍 깨우치게 될 것이다.


3. 전쟁과 자연재해

수년 전, 피터 크레이지는 <구약성경에서의 전쟁의 문제>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다. 정말로 ‘구약에는 전쟁의 문제가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패했을 때 전쟁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박국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더 악한 국가가 덜 악한 국가에게 승리할 때 전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강성한 제국들이 정복 당시 벌인 약탈과 야만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이 세상에 왜 전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은 없다. 전쟁은 일정한 유형들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국가를 세운 이후 전쟁에 나가서 그 나라를 지키고, 승리할 때마다 하나님의 강력한 도움의 손길을 경험한다.

전쟁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우리 세대이다. 즉 최첨단 무기로 수백만 군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온 나라의 십분의 일을 멸절시키며, 급기야는 가공할 핵무기로 지구 전체를 위협하는 잔인한 전쟁의 시대가 되어버린 21세기이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고, 한 국가를 이루었던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온 세계의 남녀노소로 이루어진 국가의 하나님의 백성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교회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이 그 백성으로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칼의 힘을 빌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은 구야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출현에 대해서 결코 놀라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오실 때까지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마 24:6-7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자연재해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마 24: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우리는 놀라지 않아야 한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전쟁을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전쟁과 자연재해에 의한 고난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화해자로서의 역할을 할 때 고려해야 할 여러 신중한 단계들이 있다. 전쟁이 하나님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거나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와해될 위험이 생긴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경 말씀의 진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은 전쟁을 좋은 것이나 남성적인 스포츠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은 전쟁에 놀라지 않으며,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전쟁이 그칠 것이라는 어떠한 소망도 주지 않는다. 그러한 악이 예상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전쟁과 자연재해에 대한 어떠한 관점을 길러야 하는가?

누가복음 13:1-5을 읽어보자.

눅 13:1-5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단락은 중요한 교훈들을 담고 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결코 그것을 경험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똑같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모든 죽음이 어떤 식으로든 죄의 결과이며 따라서 마땅한 결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들로 인한 죽음이 있다고 해서 그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그 고난을 피한 사람들보다 더 악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중에 그들을 살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이며, 사람들 사이에는 도덕적인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전쟁의 문제를 다루실 때 하나님의 신비한 수단에 대한 토론 주제처럼 다루지 않으시고, 회개를 촉구하는 수단으로 다루신다. 재앙은 회개를 촉구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은 평안과 안정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용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뒤바꿔 놓은 것은 우리가 타락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번영과 축복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전쟁과 재난의 시간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능력, 또는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각을 안다면, 우리 자신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할 수 있는 근본적인 기준을 얻게 될 것이다.



* 질문들

1. 그리스도인은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가? 불복종해야 하는가? 어떠한 상황에서 그러한가?

2. 본장에서 설명한 여러 유형의 가난의 사례들을 적어보라. 각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가?

3.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3장에서 압제와 자연재해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런 비극을 맞이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반응하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관점과 가치들을 당신의 삶에서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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