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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하나님(D. A. 카슨) 제1부 제2장: 잘못된 행보
이드보라  2018-09-18 12:25:57, 조회 : 131, 추천 : 24

<위로의 하나님> by D.A. 카슨


제 1 부
고난과 악에 대해 생각하기


제 2 장
잘못된 행보


1. 무지와 오만에서 나오는 잘못된 행보

1998년, 시카고 북쪽의 위넷카라는 부유한 마을에서, 정서 장애가 있는 젊은 부인이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학생 한명이 부인의 권총에 살해되었고, 두 명의 학생이 부상당했으며, 이웃 주민이 그녀를 제지하려다가 부상을 당했다. 그녀는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자살을 하고 목숨을 끊었다. 마을 전체는 공포에 휩싸였고 상담가들과 전문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면서 예방책과 대처능력을 평가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만한 생각들은 무엇인가?

수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종류의 폭력은 흑인 지역이나 빈민가, 제 3세계, 또는 마약 중독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나야 한다. 이와 같은 폭력이 백인들과 중산층이 거주하는 부유하고 건전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의 분노 속에는 이러한 감정들이 숨어 있었다. 세상의 가혹한 악은, 첫째로, 인간이 누리는 유익한 것들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만 고난과 고통이 일어나거나 또는 일어나야 한다는 선입견은 오만한 생각이다.

둘째로, 사람들은 내 돈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고 믿고 싶어한다. 나와 내가 가진 소유를 믿으며, 무엇인가 잘못되는 경우에 가장 먼저 비난할 대상은 ‘하나님’이다. 젊은 부인이 총기사고를 내었을 때 학교에서는 경찰력을 증강시키는 등 보안력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여러 가지 제안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태도는 ‘돈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셋째로, 자신의 아이를 잃은 부모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동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서는 매주 기근으로 수 백명의 아이들이 죽어간다. 내 문제가 아니기에 그만큼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재난뉴스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무뎌질 수 있다. 인간의 슬픔의 본질은 이러하다. 가뭄 때문에 아들을 잃은 에티오피아 여인은 중국에서 일어난 지진 희생자들을 위해서 자기 아들에 대해서만큼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유대관계가 매우 깊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파괴되었을 때 훨씬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슬픔은 그 아이가 우리 아이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더 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때문에 더 크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은 밝은 소망으로 나아갈 여지가 있다.

넷째로, 근본적인 악과 타락한 세상에 대한 개념으로 ‘내가 얼마나 선한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참으로 자기 점검이 필요한 개념이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압박을 받아야만 젊은 여인과 같이 잔인하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다섯째로, 어떤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올린 기도가 오직 육신의 안전과 안녕, 물질적인 행복들로만 채워진다. 이러한 비극을 통해서 인생의 연약함이나, 이생의 허무함이나,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 등에 대해 배우는 일은 매우 드물다. 우리는 이생에서의 안전함을 간절하게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속하는 안전함과는 무관하다. 다른 모든 것들과는 연결되었을지 모르지만...

악과 고난에 대한 이러한 오만한 생각들이 일관적이고 공식적인 반응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들은 매우 널리 퍼져있는 반응들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반응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다양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분노를 표출하고, 우리가 ‘반드시’ 악과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에 빠져있다.

왜 그러할까?

첫째, 성경을 균형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요셉과 기드온, 다윗의 멋진 승리를 기억한다.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기적적으로 나은 것과 나사로의 부활을 기억한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고난과 디모데의 지병, 또는 바울의 가시 등에 대해서는 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봇과 같은 의인도 모함을 받아 죽었다(왕상 21장). 선한 사람이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균형있게 이해하지 못할 때, 어설픈 승리주의가 경건의 탈을 쓰고 우리의 삶 속에 만연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다급한 상황에 안절부절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덜어주신다면, 즉시로 그리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반응이 초고속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믿으며 지체되는 상황들을 참지 못한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렸다. 요셉은 누명을 벗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렸다. 제단 아래 있는 성도들의 신원함도(계 6:9-10) 오랜 세월이 걸린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찮은 시간표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유익에 열심을 가지신다고 해도, 지체되는 것이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다. 우리는 더 멀리 전망하며 내다보고, 하나님의 시간이 최선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조급해 하는지, 얼마나 ‘지금 당장!’이라고 요구하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중요한 성경 본문들을 매우 심각하게 오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롬 8:28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해석할 때, 이기적 혹은 물질적으로 해석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문맥에서 말씀하는 요점을 완전히 놓치게 된다.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닥치는 세상의 ‘나쁜 일들’은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고 고통을 겪는 사망과 부패함이며(8:22절 이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박해들(8:35 이하)이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그러한 불행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즉 믿음에 관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사랑해 주셨다는 증거 때문에 강력하다. 아들을 선물로 주신 것보다 더 강력한 증거는 없다(롬 8:31-32). 이 본문에는 우리에게 평탄한 삶과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 것이라는 약속이 없다.

넷째, 모든 대답을 담고 있는 신학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상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신학체계가 완전하고 신비하고 경이롭다고 해서 이러한 영역들마저 다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답해주고, 모든 것을 당장에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가지고 있던 신학체계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절망하게 된다. 큰 확신이 흔들리고 당황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비와 확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오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맹목적인 확신에 불과한 기독교는 쉽사리 오만해지고 완고해진다. 이런 기독교는 인생의 굴곡이 우리를 지탱하던 신앙의 기둥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매우 고통스러운 의심에 빠지게 한다. 그런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가 숨 막히는 고통과 패배로 괴로워할 때 신뢰할 만한 크신 분이 아니다. 신비에 불과한 기독교는 믿음을 무분별한 맹신으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확신의 핵심 포인트가 되는 점들을 강조하며 깊은 신비들의 언저리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다섯째, 무엇보다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해서 바르게 묵상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방편이다. 여기에만 너무 익숙해지는 바람에,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는다거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다섯 가지 이유들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고통과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불신자들과 같이 반응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것을 극복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고통에서 면제되어야 한다고 믿는 오만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2.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나오는 잘못된 행보

이제부터는 근본적으로 비기독교적인 사상체계에서 나온, 잘못된 행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무신론과 물질주의적인 세계관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선의 기준이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것이 진화의 산물이고 원자나 아원자의 우연한 충돌에 의한 것이라면, 눈에 보이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 한 어떤 이성적인 존재도 불법을 느낄 수 없다. 무신론자들은 악의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한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그럴싸하게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지난 20세기만 돌아보아도, 이 문제에 대한 무신론의 주장이 그릇된 것을 알 수 있다.

2) 전능하지 않은 하나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무슨 말인가? 먼저 용어의 정의를 내리고 출발해 보자.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바르게 구분한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은 전능함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전능하다는 말은 모순적이다. 하나님께서 정사각형 모양의 원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모순이다. 하나님께서 들 수 없는 돌을 창조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논리적 모순이다. 이와 같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행위들은 결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행위들이 아니다. 이것은 말로 지어낸 표현일 뿐,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가정할만한 어떤 행위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고백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의미임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악과 고난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다른 무언가가 그 일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지 않으셨을 것이며 그것을 멈출 수도 없다고 한다. 만일 하나님이 고난을 멈추실 수 있는데 멈추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 악에 가담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롤드 커쉬너가 <선한 사람들에게 악한 일이 생길 때>라는 책을 썼다. 그는 아들을 잃은 후, 그가 가진 전통적 유대교 신앙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랍비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라고 믿게 되었다. 하나님을 전능하지 않은 하나님으로 믿은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아이들이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는 고난을 싫어하지만 그것을 제거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더 쉽다”고 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커쉬너의 말이 해답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거짓된 해법들 중에 하나는 일종의 이원론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작용하는 원칙으로 선한 원칙과 악한 원칙,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이런 이원론의 견해는 종종 사탄을 가리켜 악이 의인화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악의 배후에 있는 인격적이고 악한 수호신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선의 배후에 있는 수호신인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의 특징은, 사탄이나 하나님 모두 절대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두 존재 모두 전능하지 않다. 이상하게도 이와 비슷한 결과는 일원론에서도 나온다. 즉 스타워즈 이야기 속에는 하나의 ‘힘’이 등장하는데, 그 힘에는 어두운 면과 좋은 면이 모두 있다. 그 힘의 어느 면이 당신을 지배할 것인지는 당신의 도덕적 선택에 달렸다. 그러나 만일 하나의 힘이 존재한다면, 선과 악 사이의 구분은 곧 희미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배제시키는 다른 여러 방법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적인 근거에 기초해서, 하나님께서 일정한 방식으로 시간에 매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미래를 알 수 없으며 창조 질서 전체는 매순간 절대적 자유를 부여받은 인간이 자유를 어떻게 책임있게 발전시키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또한 소위 ‘과정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고난과 악을 완화시키려는 거대한 사역에 있어서 인간에게 제한되거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모든 도덕적 존재는 자기만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다른 도덕적 존재를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신학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오해와 부정과 연결된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신관은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런지 신자들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만일 이원론이 옳다면 궁극적으로 악이 승리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실험대상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은 이 실험이 실패임을 알고 우리를 폐기하실 것이다.

반대자들은 성경에 서로 양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고 반박할 것이다. 고로 우리는 성경에서 이해하기 쉬운 것만 받아들이는 오류에서 벗어나며 조화롭게 성경의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반대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위로를 주지 못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과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에 대한 온갖 어려운 질문을 야기할 수 있지만 그 믿음은 또한 도움과 위로, 해답과 종말론적 소망의 약속도 함께 가져다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악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나다. 성경과 다른, 만들어 낸 신은 도울 수 없다. 우리를 약간 동정하고 함께 탄식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분명히 우리를 돕거나 위로하거나 해답을 줄 수 없다.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말이다. 그러한 신에게는 기도할 필요도 도움을 청할 필요도 없다. 커쉬너처럼 자기가 존경할 수 있는 하나님을 찾는 일에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결국 자기를 도울 수 없는 신과 함께 망하게 된다.

3) 이신론자의 하나님

이신론(deism)과 유신론(theism)의 차이를 먼저 짚고 넘어가자. 유신론은 ‘창조주이시며 섭리적 통치자이신 인격적/초월적 하나님’을 믿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정통 유대인, 무슬림,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사람들처럼 어떤 성경적 의미에서든지 유신론자들이다.

이신론자는 초월적인 신을 믿고, 그 신이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도 믿는다. 그러나 이 신이 자기 자신을 인격적으로 계시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신론자는 신이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질서와 법칙을 세웠으며, 그 법칙을 따라 운행되게 하고, 그 후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신이 너무나도 크고 초월적이어서 인간들과 같이 작은 존재들이나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사소한 것들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신론과 같은 신관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행동과 생각에 관심을 가지시고, 그의 주권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의 머리카락은 그에게 모두 세신 바 되고, 참새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 왕의 마음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바꾸신다. 성경의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우리와 인격체로 관계를 가지신다. 하나님은 단순히 위대한 힘을 가진 능력의 집합체가 아니라, 사랑하시고, 미워하시며, 말씀하시고, 반응하시고, 일을 시작하시고, 심지어 고난받으시는 인격체이시다.

이신론자의 신도 결국 전능하지 못한 신과 같이 고난을 받는 자에게 아무런 위로를 주지 못한다. 아기를 잃어버린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서 상처받은 지렁이를 대하듯 바라보는 신에게서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한다. 이신론에 근거해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 대가가 끔찍하다. 악과 고난은 우리의 슬픔을 조롱하고, 이신론의 신은 우리를 도무지 돌보지 않는다.

4) 범신론

범신론에도 다양한 견해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신’과 우주를 하나로 본다는 사실이다.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구분이 없으며 모든 것을 신으로 본다. 힌두교 뿐 아니라 뉴에이지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받아들이고 있다. 신은 초월적인 ‘타자’가 아니므로 인격적이지도 않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 찾아오시지도 않는다. 온 우주는 하나의 질서에 속한다. 범신론자들은 자아실현과 점진적 자아계발을 통해서 죄악을 제거해야 하는 ‘불완전한 실재’라고 본다. 인간의 목적은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그들을 죄인으로 여기는 신과 화해하는 것이 아니라, 환생 등을 통해서 혹은 명상과 자아 집중과 자기 계발을 통해서 인간의 순환 주기를 타고 올라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또한 성경과 그리스도 안에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세계관은 무서운 운명론을 낳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세계관은 도덕적인 의분을 일으킬 수 없으며, 고뇌하는 절규도 인정하지 않는다. 무감각한 초연함에 빠져서는 고통에 대한 고뇌와 절규를 미성숙한 증거로 치부해 버린다.

인격적인 신뢰와 무감각한 초연함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자기계발과 하나님 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혼동해서도 안된다. 또한 악은 너무도 끔찍해서 그렇게 쉽게 피해갈 수 있지도 않다.


3. 성경과 유사한 기독교에서 나오는 잘못된 행보

이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두 가지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첫째는, 지금부터 다루고자 하는 잘못된 행보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세 가지로 분류하는 것은 다분히 인위적이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하는 견해가 주로 비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강력하게 나타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종종 나타난다. 즉 무지와 오만한 행보들을 거의 대부분의 견해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가 유익한 것은, 악과 고난에 대해 일정하게 접근하는 특징들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회 역사에는 신정론에 대한 오랜 기록이 있다. 악과 고난의 문제에 있어서 잘못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고 계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는 시도들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오늘날 케케묵은 관심사로 취급받는다. 아니 실제로 아무도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이 문제를 활발하게 논의하는 경건한 신자들이 옹호하는 다른 이론들이 있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쓴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신정론’, 즉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시도가 믿음의 건전함과 믿음의 합리성을 증명함으로써 성경을 변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러한 시도들을 가리켜 ‘성경과 유사한’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성경을 통해서 발견한 ‘해법’들을 시험해 볼 때, 그것들은 부적합하고, 축소적이며, 성경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성경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 근거한 판단을 할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지 않다 또는 그의 능력에 제한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전능하시지 않다는 주장은 교회 역사에서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클라크 피녹과 그 밖의 다른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들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상당히 자유로운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행할지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과 개입 능력을 본래부터 제한하셨다고 말한다. 성경적 근거와 대조해 볼 때 얼마나 허술한 말인지, 앞서 언급한 견해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보다 더 교묘한 견해는, 비록 하나님께서 전능하시지는 하지만 더 큰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정한 범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제한하시고 악을 허용하신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학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은 제한하시지만 지식은 제한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어떤 선과 악이 일어날 지 아시지만, 그 악을 멸하실 수 있는 능력을 여러 이유로 행사하지 않기로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가 어떤 능력을 행하지 않을 경우,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아신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선택하신다면, 그의 자제하심이 그의 절대적인 작정과 어떻게 다른지 이해할 수 없다.

2)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전히 자유롭게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제한하신다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로 인간의 자유와 관련하여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 옹호론’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선택은 하나님의 속박과 필요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워야 하며,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완전히 의존적이시다. 하나님의 주권은 없고, 단순히 상황에 대한 대처가 있을 뿐이다. 만약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고, 도덕적인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간섭하기로 선택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피조물들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일을 행할지 미리 알 수도 없다고 말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지식은 갖고 있으나 자기 스스로 제한하기 때문에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아채게 된다. 자유의지라는 것이 결코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유의지가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식으로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들의 자유로운 결정을 미리 아시지도 못한다면, 하나님은 결국 인간에게 ‘저지’도 당할 수 있다. 그러한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들이라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 한 번 반역을 하는 일도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3) 악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 견해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선에 대해 알기 위해 악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는 ‘유사성경적 개념’과 관련이 있다. 매우 흔한 견해이나 심도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일 이 견해가 사람이 선을 알기 위해서는 악을 직접 행하는 방식으로 경험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악을 행한 적이 없는 하나님은 선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타락 이후에,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은 사탄의 악을 틀림없이 인지하고 지목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이 어떤 악을 목격하기 전에는 결코 선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악을 정당화하는 것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우리가 자유롭지 않으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자유는 실패와 악과 고난을 수반하며, 이것들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데 사용된다는 점에서 정당화되고 만다.

수없이 많은 이러한 이론들을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는 진리의 요소들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논의는 악과 고난의 존재에 대해서 아주 형편없는 설명들을 늘어놓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 그런 완전한 자유가 필요하다면, 전혀 죄가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인가? 또는 거꾸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조차 죄를 지을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그러나 만일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히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실 수 있다면, 어째서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한 세계를 경험하지 않고도 그렇게 되게 하실 수는 없겠는가? 왜 오직 이 곳, 타락한 세계에서만, 우리가 성숙하기 위해서 반드시 완전한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4. 결론적 고찰

신기하게도, 이러한 ‘해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유신론적인 신정론이기는 해도, 기독교적 유신론은 아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논의의 지형을 바꾸고, 우선순위를 정하며, 각각의 요소를 다르게 보이게 해주는 중심축이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공의를 부르짖고 불의에 몸을 떨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공의인가? 그렇다면 왜 십자가인가?

만일 공의와 정의로 충분하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헛되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의롭기만’ 하셨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단순히 공의인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보내어 고난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신앙 핵심에 숨어있는 이러한 실재들이 악과 고난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가?

어떠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악과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접근은 반드시 십자가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잘못되고 오만한 행보를 내디딜 수 밖에 없다.




* 질문들

1. 잘못된 행보들의 세 가지 유형을 말해보라.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인가?
2. 악과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무신론의 가장 치명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3. 성경적인 기독교는 왜 이신론이 아니라 유신론인가? 이것은 악과 고난의 문제에 어떤 차이점을 가져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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