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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강 예수님이 가지셨던 겸손
김 에스더  (Homepage) 2018-02-17 08:43:49, 조회 : 245, 추천 : 79


제 7장 예수님이 가지셨던 겸손


        복음을 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거룩한 약속을 행할 준비가 된 것만큼 그리고 전할 메시지를 아는 만큼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전도의 기술과 방법들은 대부분 대화에서 주도권을 가지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이것은 대화를 하나님에 대한 힘겨루기로 바꾸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복음을 위한 노력에서 힘겨루기로 시작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거대한 소화기처럼 우물에서 물을 끌어올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야구경기처럼 우물가의 여인을 홈런으로 날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물을 사겠다고 제안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의 접근은 힘겨루기도 아니었고 기적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시작하셨다.

요 4:5-8



1. 겸손은 약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약한 분이 아니셨음을 알라. 그분은 힘의 빛을 발하는 분이셨다. 그분은 폭풍을 잠잠케 하셨고 귀신을 쫒아 내셨으며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다. - 예수님은 결코 그의 능력으로 그 자신을 섬긴 적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심으로서가 아닌, 겸손의 모습을 통해 모델이 되어 주셨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의 인간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분은 6시간을 걸어가셨고 정오가 되어서 그분은 목이 마르셨다. 물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데 마실 수 없는 목마름만큼 큰 갈증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도움을 요청하셨다.

“마실 물을 좀 주실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분이 처음으로 우물가에 있는 여인에게 겸손한 연약함으로 말씀하셨다. 겸손의 이 모범은 복음전도의 특징이다. 우리는 전능할 수 없지만 겸손할 수 있다.


        내가 전혀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힘을 다해 나 자신을 섬기는 것은 여전히 잠재해 있는 유혹거리이다. 나는 강하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특히 복음전도에서.


        냉소적인 사람에게 가장 멋진 대답은 대화가 끝난 후에 생각이 난다. 나는 정말로 필요한 것이 많다. 나는 불완전하다. - 아내 리엔에게 물어보라. 모든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여전히 복음전도에서 능력을 보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는 겸손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위해(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 그들을 때려 눕히고 싶어진다.



2. 겸손은 쉽지 않다.


        리엔과 나는 아프리카에서 단기 선교 프로그램을 몇 번 인도한 적이 있다. 어느 여름, 우리가 거기에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능력있는 전도의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앤이라는 한 학생의 겸손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프리카에 있는 학생들은 미국인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식에 대한 부족을 열정으로 가리고 있었다. 우리는 더 열심히 노력했다. 우리는 열매가 맺어지기를 원했다. 우리의 단기 선교에서 학생들이 가장 자주 질문하는 것은 “무엇을 해야하는가”였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doing)에 뛰어났다.

“저희들도 일을 하게 해주세요” 학생들이 요청하였다.

“우리는 우물을 파고 음식을 나누어 주고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싶어요.” 그들은 말한다.

“더 큰 일일 수록 더 좋아요.”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큰 프로젝트들을 좋아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능력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만약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무익하고 나약하다고 느낀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나약함을 싫어한다.


        그 여름, 케냐에서 오리에테이션 기간 중에, 아프리카의 나이가 지긋한 한 어른이 우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는 그를 둘러싸고 앉았다. 그의 부드럽고 경쾌한 아프리카식 영어가 콘크리트 방에 메아리 치고 있었다. 그의 말은 우리의 귀에 부드럽게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우리의 심장을 꿰뚫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말했다.

“저는 나의 온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케냐의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예의상의 인사말을 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그는 긴장했지만 미국인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말했다.

“나의 부모는 당신의 나라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해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그는 말했다.

“선교사들은 여기서 그들의 자녀 두 명을 묻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희생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그들을 보내준 당신의 나라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사죄하며 말했다.

“오늘날 저의 젊은 형제자매들이여, 저는 당신들이 두렵습니다.” 그는 단상을 의지하여 그의 몸을 바르게 세웠다.

“여러분의 커다란 힘이 현재 당신들의 약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종(servant)과 같은 겸손함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겸손? 종처럼?

        학생들이 무엇을 들었는지 말하기가 어렵지만, 나는 그가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주었다고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다르다고 믿기를 원한다. 그 나이가 든 사람은 단지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 우리는 학생들이 계속 바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남은 주간을 빌립보서를 공부하고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는데 보냈다.


        오리엔테이션의 마지막에 우리는 학생들을 케냐의 아프리카 기독교인의 가정에서 지내도록 내보냈다. 조앤은 느두티리스와 살게 되었다.


        느두티리스 씨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해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었다. 오리엔테이션 기간 동안 케냐의 학생들 사이에 부흥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조앤, 추수할 준비를 하세요.” 한 오리엔테이션 방문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매번 모임에서 떼를 지어 그리스도께 와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


        이런 이야기는 조앤을 흥분시켰다. 그녀는 고등학교에서 Young Life 사역 단체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녀는 대학교의 Young Life 단체의 리더로 일하고 있었다. 이 일은 더할 나위 없이 꼭 맞는 일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그녀의 간증을 다듬었고 설교를 준비했다. 그녀는 전도를 위한 자신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으로 그들을 인도할 것을 기대하였다.


        느두티리스의 집은 전형적인 아프리카 도시의 가정이었다. 그곳은 다른 학생들이 머물렀던 많은 집들과는 다르게 물과 전기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도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조앤은 느두티리스의 부인이 9개월째 임신 중이었을 때 도착했다. 느두티리스의 부인은 그녀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집안 청소와 장보는 것 그리고 요리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인 손님을 위해 케냐의 가정을 준비할 때,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학생들은 종이자 배우는 자들로 여러분께 갑니다. 그들을 손님이 아닌 가족처럼 대해 주십시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가장 잘 섬길만한 일을 주십시오.” 느두티리스 씨 가족은 그 말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들은 조앤에게 집안 일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3. 어떤 실수가 있을거야!


        케냐에서의 집안일은 어렵다. 조앤은 미국에서의 집안일도 많이 알지 못했는데 케냐에서는 더 몰랐었다고 나중에 말하였다. 모든 집안의 빨래를 손으로 한다고 상상해 보라. 조앤은 시장에서 음식을 위해 가격을 깎았고 마룻바닥을 닦았으며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기도 했다. 조앤은 청소를 했고 닭을 요리했다(느두티리스 씨는 자신이 닭을 직접 잡을 때, 조앤이 토하는 것을 의아해했다). 그녀는 음식을 날랐고 설거지도 했다. 그녀는 케냐의 관례대로 하루에 두 번씩 차를 대접했다. 케냐의 또 다른 관습은 손님이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에 계속 방문하는 것이었다. 조앤은 이국 땅에서 이국의 일상적인 일의 서투름 때문에 매일 저녁 피곤으로 침대에 나가 떨어졌다.


        처음에 조앤은 복음전도의 진정한 사역이 시작될 때까지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처음 생각은 분노 보다는 더 이성적으로 들렸다. 분노의 첫 생각은 항상 그렇게 시작된다.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자랐어. 나는 먼 길을 왔어. 나는 어떤 유익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느두티리스의 가족은 부탁이나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앤에게 고마워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이었다. 그러나 케냐인들은 부탁이나 고맙다는 말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들의 감사함을 표현한다. 이런 말들은 스와힐리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조앤은 그것을 몰랐다. 그녀에게 이런 요청은 무례하게 들렸다.

“조앤, 차를 끓여줘. 설거지 해줘. 기저귀 갈아줘.”

‘나는 간호사 자격증을 받으러 온 게 아니야! 확실히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거야.’ 조앤은 생각했다.


        두 번째 주에 그녀는 왜 그들이 고등학교에 가지 않는지 궁금했다. 처음에 그녀는 느두티리스 씨가 게으름을 피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느두티리스 씨는 아기가 조만간 태어날 것 때문에 그들의 모든 약속을 취소했고 조앤은 고등학교 학생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에는 집안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조앤은 두려웠다. 3주 동안... 느두티리스 씨의 집에서... 집안일을 하다니...

‘내가 단기선교에서 한 모든 일이 집안일 이었다고 나의 후원자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녀는 궁금했다.


        고등학교의 복음전도에 대한 조앤의 꿈이 어이없이 끝나갈 때, 그녀는 다른 학생들의 신나는 모험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녀는 그들의 영광스런 기회들을 상상했다. 그녀는 사기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두 번째 주가 끝날 무렵에, 그녀는 빨래를 걸고 있었다. 그녀는 충분히 했다.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무너지면서 다른 문화의 무게감이 더해져서 속이 타고 있었다.

‘나는 이 집에 손님으로 있어. 그런데 그들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지?’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 그녀는 그녀의 발을 굴렀다. ‘왜 그들은 나를 돕는 사람으로 대우하는 거야. 그들은 단지 내가 그들의... 그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고 있어.’


        종. 갑자기 그녀에게 떠올랐다. - 바나나 나무와 빨랫줄 사이에 한 아프리카의 뒷마당에서.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나이든 사람이 말한 것이 무엇이었지?’ 그리고 나서 빌립보서에서  공부한 풍성한 의미가 그녀를 치고 지나갔다.

빌 2:5-7


        아프리카의 하늘만큼 분명하고 밝은 바로 그것이었다. 느두티리스 씨의 빨래를 너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었다.


        집안의 일은 바뀌지 않았다. 만약 바뀐 것이 있다면, 조앤의 마지막 주 동안 느두티리스 부인이 그들의 세 번째 아이를 출산 한 이후에 더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앤은 바뀌었다. 아기는 기쁨이었고 조앤은 이제 그 가족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느두티리스 씨의 가족과 함께 화려함이 거의 없는 그녀의 시간을 마쳤다. 조앤은 비록 몇 명의 고등학교 학생을 전도했을 뿐, 케냐의 위대한 전도자는 결코 되지 못했다. 프로젝트 보다 더 중요하게 그녀가 한 것은 종됨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주일 뒤에 쉬로는 나이로비의 한 거리에서 몇 명의 친구들을 만났다. 케냐의 학생인 시로는 우리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 앞으로 왔다.

“여기 미국인들은 도대체 뭐하는 거야?”


        미국과 미국인들이 항상 외국에서 사랑받고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오, 그러지 마세요.” 쉬로가 설명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아요.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케냐의 가정에서 집안일을 도와주기도 했어요.” 그녀의 친구들은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 말은 퍼져 나갔다. 아프리칸 기독교인들은 우리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곧 우리는 케냐 대학교의 기독교인들과 우리의 모임이 함께 일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 다음 여름에 케냐와 미국인 학생들은 일주일간의 전도여행을 함께 하였다. 우리는 리프트 계곡의 끝에 있는 마사이 지역을 방문했다. 그 여행은 내가 본 가장 능력있는 전도여행 이었다. 부분적으로는 미국인과 케냐의 기독교인 학생들이 함께 일하며 보여준 증거 때문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왔다.


        우리의 여행 중 어느 날 밤, 나는 침낭에서 나와, 아프리카의 별들 아래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조앤 없이 우리의 여행이 가능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녀가 증인으로서 섬겼던 것은 그녀의 능력이 아니라 그녀의 겸손함 때문이었다. 조앤은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열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기대했던 방법대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성경이 말씀하는 별들에 대해 생각했다.

빌 2:14-16


        아프리카에서 우리가 했던 모든 능력있는 프로그램과 프로젝트 중에, 기아 구제로부터 가정 방문 전도에 까지, 병원 봉사에서부터 고등학교 청년 그룹에 설교하는 것까지, 케냐의 가정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미국인이 한 것보다 더 비그리스도인에게 우리가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은 없었다.        


        나는 조앤이 요점을 잡은 것에 대해 기뻤다. 그녀는 그리스도처럼 그녀 자신을 겸손하게 내주었다. 그것은 어려움과 함께였지만, 어느 중요한 일에 그것이 없었겠는가? 조앤은 그리스도를 따라 더 성장했다. 그것이 그 여행을 가치있게 해주었다. 그녀의 후원자가 뭐라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사단은 예수님이 그분의 능력으로 자신을 섬기도록 유혹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화도 이와 같이 유혹을 받는다. 기독교인은 묻는다.

“기독교인들도 왜 그런 능력이 없나요? 우리의 전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능력을 사용합시다.”


        능력이 많은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겸손은 쉽게 잊혀진다.

고후 10:4


        그리고 전도의 능력은 화려하게 행해진다. 우리의 문화적 강점은 우리의 영적인 약점이 되었다.



4. 힘겨루기를 조심하라.


        나는 ‘힘겨루기’라는 말을 헌신하도록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되고 조작된 방법을 의미하는데 사용한다. 힘겨루기는 조작된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을 넘어선 시장 기술과 개성을 영광스럽게 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잘못 제시한다.


        힘겨루기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들은 하나님의 방법이 권력, 능력 혹은 강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임을 우리로 하여금 잊어버리도록 유혹할 수 있다. 여기에 우리의 전도의 노력 가운데 힘겨루기를 피하는 네 가지의 사항이 있다.


1) 복음전도에서 힘겨루기를 피하는 것은 미묘하다. 만약 어떤 복음의 형태가 힘겨루기의 속성을 가지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았다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렇지 않다. 우정 전도(friendship evangelism)는 조작일 수 있고 접촉 전도(contact evangelism)도 미묘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접촉전도를 하셨다.

        이런 복음 전도의 방법들은 왔다가 사라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방법들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어떤 방법들은 과거의 방법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어떤 방법은 과거에 효과적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인기가 없다. 당신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겸손한 접근방법으로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라.


2) 프로그램들은 능력을 남용할 커다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프로그램에서 능력을 남용하는 가장 큰 실수는 영웅 숭배이다. 우리 문화에서 영웅들은 그들의 권리는 포기하지 않고 겸손한 척 하며 십자가를 걸고 다닐 뿐이다. 그들은 돈을 많이 벌고 스포츠를 즐기며 멋있게 보인다. 이런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순수하고 진정한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대해 위험한(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들에게도 해로운) 방법으로 나타난다. 주의하라.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그들의 마음안에 있는 영웅을 받아들이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3) 또한 우리가 개인적인 전도를 할 때 피해야 할 함정들이 있다. 우정전도에서, 당신을 완벽하게 보이려는 노력에서 자신을 지켜라. 나는 나의 자녀들과 이야기 하는 동안 이런 경향을 발견했다. 내 자녀들에게 말했던 나의 이야기는 그들의 아버지가 어떤 커다란 도덕적으로 혹은 물질적인 문제에서 얼마나 용감하게 이겨내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았던 그런 훌륭한 사람으로 그들에게 생각되었다. 이것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나의 실수와 그리스도가 내게 필요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해 더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는 더 흥미로웠다.

        내가 말했듯이, 우물가의 여인과 함께 했던 예수님의 방법은 “접촉전도”였다. - 이 용어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복음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접촉전도”는 우정전도와 대조되어 사용된다. 나는 이 두 용어가 혼란스럽다. 우리는 우정전도에서 접촉을 피해야 하는 것인가? 접촉전도에서는 친절하지 말아야(unfriendly) 한다는 것인가? 적어도 우정전도는 친절해야 할 것처럼 들린다. 접촉전도는 미식축구에서의 밀접한 접촉을 연상시킨다. 그들을 예수님을 위해 때려 눕혀서 데리고 와야 하는가.


        나는 새로운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 모두 이 용어들을 버리자. 오늘날의 복음전도는 겸손한 자발적인 행위와 친구들과 낯선 이들과 함께 주고받는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운동의 표어는 “당신과 함께 하고 있는 그 사람을 전도하라”가 될 것이다.

        기억하라.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겸손한 인간의 모습이셨다. 당신의 약함을 사람들과 나누어라.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우리의 강함으로 만드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겸손함으로 다른 이들에게 나아가라. 만약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하라. 그리스도가 당신의 의심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달라지도록 하셨는지 그들에게 알리라. 그리스도가 당신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만나주셨고 그 가운데서 그분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셨는가를 사람들에게 말하라. 이것은 “완벽한 기독교인”의 모습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더 진실한 것이다.


4) “하는 것(doing)”은 북미인과 유럽인에게 자연스럽게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종종 전도를 하면서 불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함으로서 그것을 지나치게 보상하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대신에 우리 자신을 부추기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지만 위험하다.

        내가 역설을 말하고 있음을 나는 안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전도를 행하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전도를 하라고. 이제 나는 다시 되돌아가서 전도를 하는데 주의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해 누군가와 믿음을 나눈 것과 전도라고 부르는 어떤 일을 바쁘게 하라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일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신 모범이 아니다. 그분은 그 자신을 살아있는 크리스마스 트리로 만들어서 우물가의 여인에게 인상을 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단지 앉아있었고 마실 것을 달라고 요청하셨다.

        계속해서 일을 하는 것은 마약과 같다. 그것은 우리가 귀찮게 여기는 전도의 부담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를 선하고 능력있고 심지어 도취감을 일으키지만,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아픔이며 고통이 될 것이다. 일하는 것은 중독성이 있다. 우리가 일하는 것을 멈추면 우리는 심지어 뒤처짐과 좌절감을 가질 수도 있다. 슬픔의 아이러니는 우리가 바쁜 것을 진정시키고 나서 우리의 길에 놓여진 복음전도의 기회를 놓치게 한다는 것이다.


        기억하라. 우물가의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이것이었다.

“물을 좀 줄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은 그분의 마지막의 말씀과 비슷하다.

“내가 목마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죽음은 겸손과 종 됨의 궁극적인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을 위해 -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의 사역을 통해 자유를 주셨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전할 때, 우리의 메시지 안에는 겸손과 약함이 내제해 있다. 만약 우리의 복음전도의 노력들이 능력있고 강해보인다면, 그것은 종종 십자가의 메시지와는 모순이 될 것이다. 강함이 아닌 겸손함은 전도에서 그리스도의 방법이었다.



<토의를 위한 문제>


1. 우물가의 여인에게 가신 예수님의 접근은 어떤 겸손의 본보기가 되었는가?

2.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기 위해 조앤이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3. 전도에서 힘겨루기를 피하기 위한 네 가지 사항 중 당신이 가장 공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전할 때,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겸손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 교재 "Speaking of Jesus"의 "7. Jesus Had an Attitude" 를 번역하였습니다. 오류나 수정사항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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