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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강 긍정적인 전도의 능력
김 에스더  (Homepage) 2018-03-03 19:40:41, 조회 : 174, 추천 : 46


제 9장 긍정적인 전도의 능력


        긍정적인 생각은 세계의 관심을 끈다. 1800년대에 한 프랑스 병원에서는 이런 긍정적인 말을 그의 환자에게 인용하도록 했다.

“매일 저는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졌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긍정적인 것을 말하곤 하였다. 그것은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치료를 넘어서 시장 업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판매사원들은 종종 긍정적인 곡조를 스스로에게 인용하도록 요구받는다.

“저는 판매사원입니다. 저는 이 일을 사랑합니다.(반복)”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의 부족으로 인한 이런 전제는 우리의 잠재력을 좀먹는다. 만약 당신이 단지 자신만을 믿는다면, 당신은 어떤 것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어느 한 지점까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의 능력은 세상적인 것에 제한된 것은 아니다. 50년대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개념을 대중화시킨 노만 빈센트 필이라는 사람은 목사였다. 그의 책 “긍정적인 사고의 힘”은 수백만 부가 팔렸다. 그의 가르침은 교회와 우리 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일부 사람은 그의 책이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들을 인도하는데 사용된 하나님의 수단이라고까지 주장한다. 필은 긍정적인 사고가 믿음을 고려하는데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의 증거자료로서 바울의 말을 사용하였다.

빌 4:13


        그러나 나는 필의 제자들이나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나는 마음이 불안해진다. 로이 클레멘츠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능력을 쫒는 사람들은 거의 자기최면을 믿음으로 보는 실수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당신이 자신을 열심히 믿기만 한다면,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우리를 믿든지 간에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대학 시절에 나는 의대를 가라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었다. 나는 첫 번째 화학시험에서 100점 만점 중 13점을 받았지만, 나는 진정한 성도였다. 용감하게도 나는 미생물학의 전공자로서 몇 년 동안 땀을 흘렸지만, 여전히 나는 의대보다는 예과 수준이었다. 나 자신을 믿는 것은 요인이 아니었다.


        증거들에 의하면, 필의 충고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그들 자신을 그들의 믿음의 자리에 놓도록 격려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믿는 것은 이단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결코 믿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한다.


        물론, 긍정적인 것에는 힘이 있다. 긍정적인 행동과 사고를 실천에 적용하는 것을  보지 않고는 사도 바울의 삶을 보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잘못된 것에 대한 긍정적인 것은 위험하다.


        바울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안락의자조차 없는 감옥에서 그들에게 이 말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긍정적인 사고의 대상이 좋은 것이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이 신뢰할만하고 신실하시며 진실하시기 때문에 찬양을 드린다. 그 때문에 바울과 필의 확신이 반대되는 것을 보고나서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나는 바울의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필의 생각은 두려워 한다”


        불행하게도, 그러나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생각의 위력은 전도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것은 전도를 마케팅과 혼돈하기에 너무 쉬웠다.


        나는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분은 삶의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다가가신 분이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도 나는 영적인 주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내 안에 망설임을 느낀다. 이 부분은 건강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나눌 때, 우리는 어느 정도의 무게가 실린 영생의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설임은 또한 자신감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1. 진정한 자신감


        그래서 우리는 긍정적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잘못된 방법으로 한다. 우리는 심리적인 생각을 부풀림으로서 자신감을 더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믿음을) 나눌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천국에 갔을 때, 나는 거기서 그 열매들을 보게 될거야.”


        나는 그것이 참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자신감있는 것처럼 조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자신감이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우리를 믿는 믿음과 우리가 나눈 메시지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자신감이 나온 곳이다. 예수님이 조작한 심리적인 생각으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신분이 주는 확신으로부터이다. 거기에 긍정적인 전도의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우리가 올바른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에만 그렇다. 예수님은 그것의 모범이 되신다.

요 4:10


        이것은 자신감이 없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확신은 그분이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접근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전도의 능력을 가지고 접근하도록 허락하였다.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그분은 당황하며 의기소침해지지 않으셨다. (오, 당신이 옳아요. 저는 당신과 말을 해서도 안되죠. 내가 뭘 생각하고 있었지? 나를 용서하세요.) 아니다. 그분은 기분좋게 그리고 담대한 주장으로 대화를 계속 이어가셨다.


        예수님의 반응은 비유로 표현되었지만, 예수님은 그분이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는 더 중요한 사람임을 주장하셨다. 예수님의 확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정체성으로부터 솟아난 것이다.

“네가 만일 ...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그분은 말씀하셨다. 목마르고 피곤하였지만,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치있는 선물을 가지신 분임을 주장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요구하기만 하면, 그녀의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아주 다른 반응을 보이실 수도 있었다. 그분은 그녀의 삶의 방식과 그녀가 생수를 얻기 전에 변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에 대해 부정적인 비난으로 시작하실 수 있었다. 우리가 다음 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 여인의 성품은 어떤 면에서 개선되었다. 그러나 그분은 긍정적인 빛에서 그의 메시지를 표현하기로 선택하셨다. 제공된 것은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그녀가 받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한 긍정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확신있고 긍정적인 전도를 행하셨다. 그리고 우리도 그래야 할 것이다.


2. 말이 모순된다고?


        내가 여기서 다른 역설을 만든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겸손함이 우리들의 주의를 끈다고 말했었다. 나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겸손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겸손의 요구가 힘 겨루기보다 더 낫다고 말하였다. 지금 나는 예수님의 자신감이 우리의 본이 된다고 또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자신감은 겸손의 반대말이 아니다.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함이다. 유약함-목적에 대해 약함-은 엄청난 자신감을 필요로 한다.


        C. S. 루이스는 이런 방법으로 이야기 하였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어린 아이의 두려움과 바로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까지 포함해서 유치한 모든 것들을 버렸습니다.”


        켄터키에서의 어느 봄이었다. 켄터키 대학에서는 야구시합과 경마가 있는 때였고 우리의 연중행사(전도)도 있었다.


        그날, 우리는 토론회와 책 전시회 그리고 학생 전도활동의 모임을 개최하고 있었다.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오하이오에 있는 대학교에서 사역자와 학생들이 왔다. 전도행사 중 하나가 끝난 후에, 오하이오에서 온 IV의 새로운 사역자 알렌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음, 맥” 그는 망설이며 말하였다.

“당신은 전도에 대해서 많이 알지요? 저는 사실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어요.”


        나는 그가 고백하고 있음을 알았다.

“당신이 전도하는데 저를 데리고 가주실 수 있나요?” 그가 불쑥 말하였다.


        나는 전도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사역자가 된다고 해서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처음에 사역자가 되었을 때, 나도 그와 같이 느꼈다고 말할 시간조차도 없었다(차이가 있다면, 나는 전문가인 척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전도를 하는 것’만 마음에 두었다. 나는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물론이지”


        그리고 나서, 나는 도서관 옆 잔디밭에 앉아있는 일부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에게 말을 걸어보죠.” 나는 걷기 시작했다.


        알렌은 그의 이빨 사이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몇 발자국 안가서, 우리는 작은 무리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내가 말했다. 그들은 올려다보았다.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였다. 그들은 그들의 담배를 내려놓았다.

“제 이름은 맥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알렌입니다.”


        알렌의 입은 열려져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말했을 때, 그는 손을 약간 들고 그들에게 희미하게 인사를 했다. 그들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알렌.”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히피족 지망생들이었다. 긴 머리와 염색을 한 셔츠를 입고 구슬과 마리와나 입사귀의 악세사리를 하였다. 나는 향수를 느꼈다.

“알렌과 나는 어떤 미친 짓을 하고 있어요.” 나는 시작했다.


        그들은 알렌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는 (내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InterVarsity 라고 불리는 기독교 모임에 함께 있어요.”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 주간의 행사로서 그리스도가 주장하신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죠.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실 우리는 단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나는 덧붙였다.

“글쎄요. 그러세요” 그들 중 한명이 말했다.

“사실 우리도 배너를 보았어요. 그리고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했어요.”


        그들이 자신들을 소개한 후에 나는 말했다.

“저 배너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네요. 당신은 기독교에 대한 어떤 포스터나 배너를 볼 때, 가장 먼저 어떤 인상을 받나요?”


        대화가 진행되었다. 우리는 질문을 했고 그들도 질문을 했다. 재미가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 했던 것 중 하나가 기억난다.

“우리가 신실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든지 간에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토론에서 주로 아돌프 히틀러의 신실함에 대해서 물어본다. 그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기의 여학생이 이쁜 미소를 지으며, 마치 나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말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는 저에게 전혀 진리로 보이지 않아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알지요?” 내가 물었다.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나무를 보았다. 그 누구도 이전에는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한 것을 살펴 보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해 결론을 내립니다. 당신은 놀랄 거예요. 그분이 당신에게도 진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요”


        몇 분 후에 알렌이 끼어들었다. 그는 C. S. 루이스의 말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말했다.

“예수님은 그분이 주장한 그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가능성을 전혀 열어두지 않았어요...”


        그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였다. 그리고 그들 중의 한 학생이 그의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은 너무도 좋은 포인트였기 때문에, 나는 알렌이 내가 없이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약간의 자신감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저는 가봐야 겠어요.” 내가 말했다.

“이 분들은 이제 당신의 몫이야.”

“안녕히 가세요. 맥” 그들이 말했다.


        나는 알렌을 숫자적으로 우세한 곳에 두고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하나님은 항상 다수를 만드신다.


        아마도 알렌처럼, 당신은 당신의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믿음을 전해 주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 또한 그의 망설임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그 어떤 바보같은 말을 함으로서 그런 기회를 날려버리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주제를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에 대해 어려움을 가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거리의 이상한 전도자와 같은 사람으로 치부해버릴 것을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당신은 정경과 위경의 다른 점을 설명하기 위해 지적인 머리를 굴려야만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심지어 누군가가 당신에게 다가와서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이 의무적으로 외워두었던 복음의 개요를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당신은 자신감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것이 항상 빠져 나가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좌절하지 마라. 우리 대화에서의 나의 자신감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것은 약간은 어렵고 서투른 배움의 순간을 통해 얻어진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는 복음전도의 순간에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오늘날 긍정적인 복음전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울 앞에 선 나 자신을 최면(催眠)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에서 나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진리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3. 당신 자신을 알고 있는가?


        전도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이는 어렵고 강제적인 활동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나는 종종 자아상의 강의와 함께 선교와 복음전도의 교육을 시작한다. 대개, 사람들은 이것을 이상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해 들으러 온 것이지, 그들의 자아상에 대해 듣기 위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계는 다음과 같이 작용한다: 나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성경의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 나는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제안할 만한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나의 반응이나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상관없이. 나의 정체성이 성경의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면, 나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유감스럽다. 이 사실은 내가 몇 번을 그것에 대해 가르칠 때까지도 나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리엔과 나는 해외문화 선교를 위해 학생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디자인된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신뢰의 훈련으로 이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독교 자아상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르치기는 쉽지만 깨닫기란 참 어렵다. 첫 해에, 나는 서투르게 이 강의를 했다. - 내가 가르치려고 애쓰는 바로 이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좋지 않았던 강의가 서투른 나를 반영한 것이라고 느꼈다. 리엔과 큰 싸움이 일어났고 그것은 그녀가 가진 자신감도 무너뜨렸다. 내가 학생들에게 하지 말라고 말했던 바로 그 방법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강의에 대한 부끄러움은 희미해졌다. 내가 실패했을 때에도, 여전히 내가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얼마간의 영적상태를 검토하고 난 후 (그리고 리엔에게 사과를 하고 나서), 나는 내가 가르치기를 원했던 것을 내 것으로 먼저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을 신중하게 돌아보았다. 내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친구 모두는 내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그 즐거움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좋다. 나를 그렇게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문제는 내가 나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에게서가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얻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당신의 정체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조심하라. 세상은 그리스도보다는 다른 길을 통해 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제공하고 있다. 세상은 우리의 정체성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보다 크지 않다고 믿게 만든다. 세상의 관점은 우리가 무작위로 뭉쳐진 원형질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우리가 단지 기능장애 부모로부터 나온 기능장애의 아들과 딸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말한다.

“좋은 거울과 긍정적인 곡조로 당신은 세상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셨다.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입양하셨고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가신다고 말씀한다. 그분은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가 하늘에 계신 사랑과 치유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라는 사실에 뿌리를 둔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영광스런 미래를 위해 우리를 사랑 안에서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너무 강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멈출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이 너무 완전하고 완벽해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다고 말씀하신다. 만약 우리가 모든 교회의 순서에 참여한다할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시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증거한다 할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지 않으신다. 만약 우리가 Mombasa(케냐 남부의 한 도시)에서 선교를 한다 해도 그분은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는 쇠약한 것을 한 번에 치료하도록 제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의 쇠약함과 고통을 다루는 것은 수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개발해 나가는 것은 자신감 있는 증인이 되는 토대가 된다. 우리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진리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준다. 그때 그것은 전도의 기초가 될 것이다. 만약 복음이 나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후 3:4-5


        우리는 사역을 할 만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어서도 아니라,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의 정체성에서의 이 자신감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다가가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평범한 만남을 거룩한 약속으로 바꾸어 준다. 그것이 바로 긍정적인 전도의 힘이다.



<토의를 위한 문제>


1. 고후 3:4-6을 다시 읽어보라. 바울은 우리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가?

2. 당신의 전도에 대한 자신감은 무엇으로 인해 사라지는가? 당신은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서 다른 것으로부터 자신감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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