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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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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강 - 제 8장 미래를 향하여
김 에스더  (Homepage) 2014-08-12 23:56:58, 조회 : 1,538, 추천 : 289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 데이빗 F. 웰스 저, 홍 기영 박사 옮김



제 8장 미래를 향하여


        190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성경적 가르침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 기간에 일어난 거의 모든 다른 사건 -모든 성취, 모든 잔인한 행동, 그리고 모든 사상과 욕망 - 은 잊혀졌다. 시간은 힘 있는 자들을 낮추었으며, 유명한 자들을 희미하게 했으며, 왕들과 통치자들을 제거했으며, 제국들을 와해시켰으며, 문명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식을 말살하지 못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지우지 못했다. 음부의 권세도, 세월도 그의 교회를 제거하는 데, 그리고 회심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그것으로부터 빼앗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 우리에게 잘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거대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다른 세대에서와 같이 복음의 구원하는 진리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어느 세대에서나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았다. 각 시대의 특징들이 교회가 가르친 것에 그들의 인상을 남겼다. 새로운 문제들 혹은 도전들이 일어나면, 그들은 새로운 답을 요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에 관해 새롭게 생각하도록 자극한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그 인상은 추천할만하지 아니한 문화적 정신구조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그 문화적 정신구조의 힘과 방향은 과거와의 연속성이 긴장되거나 부서질 정도로, 숙고되어진 바의 본질을 변화시킨다.


        우리의 시대도 회심의 이해를 채색하는 새로운 도전들 혹은 문화적 영향의 용어로 볼 때 예외는 아니다. 두 가지 발달은 특히 의미심장한 것처럼 보인다. 첫째, 이 시대는 텔레비전의 시대이다. 1988년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토론에서 일어났던 것보다 여론의 분야에 미쳤던 텔레비전 영향의 예화만큼 더 분명한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음의 비교를 고려해보라! 19세기 중엽에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n)과 스티븐 더글라스(Stephen Douglas)는 7회에 걸쳐 공적으로 토론했다. 그들이 따른 형식은 그 당시의 기준에 의하면 짧았다. 더글라스가 먼저 한 시간 동안 말했다. 그는 한 시간 반 동안 링컨에 의해 반박을 받았다. 그 후 더글라스는 30분의 항변으로 결론을 지었다. 대조적으로, 주지사 듀카키스와 부통령 부쉬는 오직 두 번 토론했다. 소위 각각의 토론에서 그들은 단순히 리포터의 질문들에 답변만 하였다. 링컨-더글라스 토론들은 오늘날 사라진 것을 요구했다. 즉 일에 집중하는 시간, 연설에 경청하며, 일관적인 논지를 따르며, 아이디어를 평가하는 능력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다. 이러한 능력의 부족 속에서 -서구 여러 나라들에서 그것은 더욱 부족하다-기독교신앙 역시 말해지기 쉬우며, 1세기 전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설교되어지기 쉽다. 지금 복음의 메시지는 자주 작은 조각으로 축소되며, 희극적인 안도와 함께 점점이 장식된 불연속적 인상의 흐름 속에 제시된다. 왜냐하면 보통의 청취자는 즉각적으로 접근 가능치 않고, 입맛에 맞지 않는, 자료에 인내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찮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공적인 담론을 하찮게 여기는 것의 일부이다. 기독교도 이러한 두통거리로부터 제외되지 않았다. 서구에서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세계의 많은 다른 지역에서 올 것들의 전조이다. 텔레비전과 현대성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제 3세계의 어느 나라도 "현대적"인 것들을 기다리는 아량을 무감각하게 할 여유가 없다. 그런 아량의 일부분이 집에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주요 발달은, 첫 번째 것과 연결이 되어있는 것인데, 심리학적으로 다루는 믿음의 습관이다. 이것은 특징상 서구의 현상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처럼 그것은 서구세계를 초월하여 멀리까지 여행을 하게 되어 있다. 심리학적으로 다루는 관심의 개입은 균형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믿어진 것으로부터 믿는 행동으로, 진리인 것을 좋게 느껴지는 것으로 전환시킨다. 그것은 나쁜 성격을 나쁜 태도로 축소시키며 행복을 한 때 의(義)가 차지했던 곳에로 높인다. 이렇게 진리를 분위기로 대치하는 것은 실재를 이미지의 텔레비전으로 대치하는 것과 상응한다. 한 사람에 의한 환상의 선회는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환상적 사랑을 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회심의 이해에 이상한 것들을 행한다. 이러한 두 가지 환상적 흐름들의 복합적 효과는 종종 한편으로 삶의 실재를 위해 최소한의 집중하는 시간을 가진 자들에게 호소하는, 잘린, 축소된, 정말 최소한의 기독교 메시지를 생산하며, 다른 한편, 개인의 내부에 회심 "사건"을 생산한다. 그와 같은 사건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어지고, 그 안에서 주관적인 실톱(jigsaw)이 평화와 성취감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런 사실이 소위 간증이라고 불리는, 공적으로 표현된 자서전들에 대한 널리 퍼진 관심과 확신을 낳는다. 우리의 지친, 근심 걱정으로 여윈, 불안한 시대에, 성공적으로 끝난 개인적, 내적, 평화의 추구에 관하여 압도적으로 강요하는 어떤 것이 있는 듯하다. 어떻게 그 자서전은 그런 일을 하는가? 그들의 비밀은 무엇인가? 아마도 나는 그들이 가진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들과 욕망들은 모두 잘못되지 않았기에, 간증들은 복음주의적 관례상 행복하고 의심할 바 없는 자리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이 간증과 간증이 표현될 때 항상 만들어지는 가정의 형식에 의해 답변되는 방법 때문에, 기독교 회심은 항상 반복적으로 분명하고 성서적인 방법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이러한 근본적인 교리가 형성 되도록 만든 변수들은 무엇인가?



1. 믿어지는 복음


        기독교 복음은 비록 그것이 내적 만족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주로 내적 만족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행복을 만든다고 하지만 그것은 행복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건강과 부유를 향한 지름길이 아니라 고통과 많은 지역에서는 박탈을 향한 지름길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자는 자기 자신을 성취하는 것을 추구하지 말고 그들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서구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만족과 부유의 용어로 변조하여 왔는가? 복음이 이러한 방법들로서 곡해되는 때보다 어떻게 복음이 더욱 결정적으로 거꾸로 서며 그 의미를 상실해왔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이 먼저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부족해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얻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개발 혹은 자기성취를 위한 테크닉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자신의 내적 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도구로서 그 자신을 제시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믿도록 초대받지만, 그것은 전혀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순종 속에 그에게 절할 수도 없는 죄인들을 찾아가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롬 8:6-8).


        바울이 복음에 관해 에베소 교인들에게 썼을 때도 그러했다. 첫 장은 길고 중단되지 않았는데, 그 안에서 그는 그의 독자들을 아버지의 활동들을 서사시적으로 축하하는 데로 이끌고 간다. 아버지는 믿음을 통해 후에 그에게 온 자들을 선택 속에서 그의 아들과 연락되게 하셨다(엡 1:3-6). 그리고 그의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계획들은 알려지며 그가 이루신 구속과 아들이 이루신 용서 때문에 알려질 수 있다(엡 1:7-10). 그리고 성령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백성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며 그들의 믿음을 통해 그들에게 구속의 확신을 준다(엡 1:13-14).


        확신하건데, 비록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러한 요소들이 나타나는지를 알 때, 우리는 순화되어지는 느낌을 갖는 이유를 갖기는 하지만, 이 복음의 모든 요소들이 바울이 설교할 때마다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자주 듣는 축소된 번역들은 우리가 바울이 행한 것에 관해서 아는 것과 비교할 때 그들이 마치 다른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안디옥, 아덴, 그리고 루스드라(행 13:16-41; 17:22-31; 14:15-17)에서 행한 그의 세 복음주의적 설교들을 보라. 여기에는 융통성 있는 글이 쓰여있다. 그것이 바로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설교들이 마치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청중이 다르기 때문에 설교들이 다른 것뿐이다. 첫 설교에서, 그는 유대인에게 말한다. 그래서 그는 유대의 역사를 검토하는 것을 시작했다. 두 번째 아덴에서의 설교에서, 그는 희랍인들에게 말한다. 그래서 그는 토착적인 숭배로 더불어 시작했고, 그들의 시들 중 하나를 인용했으며, 그들이 적게 알고 있으며 적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대의 역사를 피했다. 세 번째, 희랍 문화도 유대의 성서도 가지고 있지 않은 루스드라에서의 설교에서, 그는 창조와 그들과 친숙한 자연과 삶의 경험과 더불어 시작했다. 그러나 이 설교들에 관하여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형태에 있어서 다르지만, 그들의 본질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각 유대인들(13:16-23),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찾음(17:23-28), 그리고 과거 종교(14:15-17)의 역사를  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두 설교들에서 바울은 예수가 이 역사의 절정이요 완성이라고 보여 주었다(13:24-25; 17:31). 그리고 루스드라에서의 설교는 끝이 잘린 것이며 소요를 일으킨 군중들에 의해 분명히 짧아졌다. 그래서 바울은 이 완성된 두 설교들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13:26-29; 17:30-31), 그를 통한 용서와 의인과(13:39; 17:31), 그의 아들과 그의 계획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13:40-41: 17:31) 선포했다.


        이 공통된 핵심이 종합될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바울의 복음, 즉 그가 실제적인 복음주의적 현장에서 설교한 복음을 가진다. 그의 출발점은 만족을 위한 필요가 아니었다. 그는 마치 소비자의 이론이 그렇게 요구하는 것처럼 복음의 의미를 개인의 필요의 한정된 범위로 제한하지 않았다. 그는 넓은 범위의 역사, 죄인의 밖에 있는 역사로 더불어 시작했다.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는 창조와 문화와 관련하여 활동하시며, 특별하게는 그의 백성인 유대인들의 삶속에서 활동해 오셨다. 그것은 바울이 지적한 객관적인 진리이며 결코 주관적인 필요가 아니다. 하나님은 남녀 사람들을 그의 아들의 오심에 대비하도록 준비하셨으며 결코 삶과 무관하지 않으셨다. 그는 아들의 인격 속에서 활동하셨다. 그 아들의 오심과 죽음은 성서에 의해서 예언되었고, 사도들에 의해 증거되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잘 것 없이 그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거절되었다. 그 아들 안에서, 십자가에서, 그는 최종적으로, 그리고 단순한 인간존재는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죄를 다루셨다. 하나님으로서, 그는 그 아들을 통해 그의 세계를 망치고 파괴한 모든 것에 대항하여 승리의 행동을 취해 오셨다. 그 일이 이루어지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그로부터 마침내 명령받은 모든 것들에게 마지막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얼마나 귀한 복음인가! 비교할 때, 우리가 종종 듣는 복음은 얼마나 작은 것인가? 현대의 메시지는 내적 경험에 의해 제한을 받고, 당연히 이 우주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조건에서 그 죄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지 않는다면 적어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나님은 죄인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한 죄인에게 가치를 가지고 계시며, 죄인에게 흥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평화와 만족이다. 구원이란 것이 죄인이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의 왕권과 용서의 계획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닐 때, 죄인에게 하나님의 상품으로 보여지기 조차하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가.


        분명히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내적으로 느끼는 것, 우리에게 강하게 현존하는 필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외적으로 하신 일 사이에 있는 연결이다. 이 연결은 필히 만들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인적인 믿음은 우리를 의인화하시고, 우리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삶에 참여하도록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들과 상속자들로 받아들이시고, 우리를 내주 하시는 성령의 선물로 그의 것으로 인치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일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결이 애매해지고, 내적인 필요가 외적인 계획을 가리도록 허용될 때, 인간의 측면이 신적인 측면을 불가피하게 애매하게 한다. 설교가 상담이 되고 설교된 것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발견하도록 연결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행동하는가를 발견하도록 연결되어진다. 십자가가 분명히 보여질 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진리가 보여진다. 개인적 경험이 지배적일 때, 오직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진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면 복음은 인간중심이 되며, 그 과정 속에서 구원의 확실성과 믿음의 기쁨은 증발된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우리의 내적 경험의 일시적인 기분 위에서 견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그리고 아들을 통해하신 일의 존엄성과 은혜와 놀라운 기적은 사라진다. 남아있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영리한 죄인일 뿐이다.



2. 믿는 사람들


        기술은 전능의 추정을 하게 하는 사람들을 생산한다. 왜냐하면 기술 자체가 빠르게 전능적으로 되어가기 때문이다. 기술 사회에서 ,비록 답이 즉시 명확하지 않더라도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있다고 항상 가정한다. 모든 문제는 어느 날 기술, 땀, 응용, 그리고 인간의 천재성 앞에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가 오늘날 인간정신의 분열은 특별한 것이 아니며 영리한 분석, 근면한 노력, 그리고 사회의 변화 앞에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외적인 세계의 눈부신 정복은 내적인 세계의 정복으로 이월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시대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d;다. 인간 정신의 어둔 열정과 악들은 한 때 활들과 화살들을 통해 표현되었는데, 지금은 전쟁이 독과 가스를 통해 표현되었는데, 지금은 전쟁이 독과 가스를 통해 표현될 수 있으며, 전쟁은 한 때 국지적이었으나, 지금 그것은 종종 비인격적이고, 전체 사회들이 질식되어지고, 주입되어지고, 통제되어질 수 있다. 인간정신은 더 이상 더럽고 잔인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결과 잔인함을 위한 수단들은 우리의 최악의 악몽을 초월하면서 확대되어져 왔다. 우리의 외적 삶의 많은 영역에서 우리가 가깝게 가지고 있는 전능은 심리학적이고 정신적인 공학의 과정으로 우리자신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우리를 속이지 말아야만 한다. 우리의 커다란 외적세계에서의 정복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용됨은 물론 우리 자신을 배반할 수 있는 양날 가진 검이 된다.


        복음주의적 설교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정복하고 구원할 수 있다는 주제 넘는 주장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좀 부드럽고 덜 불쾌한 형태로 같은 종류의 아이디어가 죄인이 그 자신 혹은 그녀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일으킬 수 있으며 회심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자주 가정된 견해 속에 있다. 이것이 현대에 있어서 기독교 사상을 따라잡은 비범한 변화 중에 하나이다. 죄가 인격을 철저히 침입하고, 심장과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서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간섭하는 은혜 밖에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유럽에서의 종교개혁부터 미국에서의 19세기까지의 가정이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의 의미이다. 이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바 죄의 노예가 된다는 것 속에 포함된 것이다. 그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0-18)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백성이 어떠한지를 알리는 것이다. 일찍이, 이러한 이해는 모든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지지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개혁주의자들이었으며, 어떤 다른 사람들은 알미니안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공통적으로 지지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죄의 성경적 이해의 시력을 잃었으며, 우리의 복음적 설교는 그것을 보여준다. 그 결과 복음적 설교는 메말라 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위해 완전한 죄의 교리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전능한 문화의 유혹에 등을 돌리고, 성경과 더불어 죄 안에 있는 남녀들은 잃은 바  되었으며,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성령의 생명을 주는 사역 없이는 하나님, 그의 그리스도, 혹은 그의 복음을 향한 좋은 기질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자신의 제안에 의한 스스로의 회심은 자신의 일로써 스스로를 의롭게 하는 것처럼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모든 것과 관련하여 허약하고 무력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회심은 신적 창조의 활동이다. 그 활동 안에서 자연의 창조에서처럼 대리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일 수 있다.


        이것의 당연한 즉각적 결과는 회심이 전체의 인간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심오한 그리고 포괄적인 일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하나님과 죄인이 합력하여 구원을 가져오는 어떤 종류의 협력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어떤 복음은 -그리고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아이디어에의 의식적 복종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의심스러운 소리를 내는 복음주의적 복음의 설교는 - 항상 불완전한 구원과 묽게 희석된 회심의 개념으로 끝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구속을 받아야 할 죄를 제외하고 그 사람이 구원에 기여한 정도는 그 일이 신적이 아닌 정도이기 때문이다. 신적이 아닌 정도는 하나님의 구속하는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인간의 협력을 더하는 것은 풍부한 구원이 아니라, 빈약한 구원을, 심오한 일이 아니라 천박한 일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안으로 들여와야 할 것을 밖에 내버려두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와도 나눌 것이 아닌 것 즉 그가 하신 것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과 나누는 것을 추정 한다.


        그래서 회심의 성서적 관점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해 읽혀지고 들려진 진리들의 실재가 삶을 취하고 느껴지기 시작할 때 믿음이 마음 속에서 삶이 된다. 어떤 모양 또는 형태로, 이러한 진리들은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 우리를 위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그리고 죄, 사망, 그리고 마귀에 대한 그의 승리, 그리고 우리의 부패, 죄의식, 비참함, 그리고 절망에 대한느낌에 집중한다. 우리는 은혜의 말을 듣는다. 감정이 당연히 동요된다. 비록 영적 실재 그 자체가 감정적이지는 않지만, 고통, 절망, 두려움, 수치, 그리고 기쁨은 서로 다른 때에 종종 그 결과가 된다. 지식으로서 시작(기독교 신앙의 진리들을 이해함)하는 믿음은 의지가 이제 작용하는 동의 속으로 만발한다. 동의는 마음으로 느끼는 신뢰를 만들며, 그 신뢰로부터 참 회개와 죄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들어옴이 흘러 나온다.


        이와 같은 회심은 죄에 대한 급진적인 겸허의 형태 속에서 마음의 준비를 요구한다. 오직 결정을 얻어내는 것으로만 복음의 메시지를 기울이는 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이것은 불필요한 복잡화이며 그것은 잠정적인 회심자들을 제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도 상업적 세계에서 모든 것은 소비자로 하여금 쉽게 구입하도록 이루어졌음을 알지 모른다. 가라앉은 그리고 얌전한 배경 음악으로부터 해서 그 생산품이 포장되는 방법으로 하여 신용이 연장되는 편리함까지 구입을 쉽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어느 것도 고객과 흥정이 되는 순간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면 왜 믿음을 간단히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가?


        물론 대답은 우리가 믿음에 있어서 어려움과 단순함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함과 부정함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순수한 믿음은 단순히 들어 올 수 있다. 그러나 거짓으로 도달한 믿음은 가질만한 가치가 없고, 교정 없이는, 그것은 삶의 폭풍을 견딜 수 없다. 이러한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짊어질 필요가 있는 죄에 관해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죄를 짊어지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추구할 욕망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내재적인 영적 가치도 없으며, 이것에 특별한 가치는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의 중요성은 그것 없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죄인들이라는 것과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으려고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놓여있다.


        율법은 우리가 그것의 요구와 어울려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 율법은 우리의 내적 실패를 노출하며, 우리의 부패된 동기를 밝히며, 우리 안에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우리와 우리의 관심으로 대치하려는 충동을 나타낸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 하도록 계획된 것이다. "당신 자신에 관해 얼마나 좋게 느끼는가?"라는 제목을 가진 십계명에 관한 시리즈 설교를 행한 잘 알려진 캘리포니아 목사는 분명히 율법이 어떻게 작용하며 무엇을 행하는지에 관하여 아주기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율법의 진리들을 추구함으로써 겸허하게 된다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종전의 죄의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과거에 대한 낙담, 공허, 격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도록 촉구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오직 유일한 구원의 소망으로 보도록 준비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여정의 끝이다. 그 여정의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복음은 구속의 내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이 여행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데, 구속의 신앙 문제에 있어서 다른 지름길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는 그와 같은 여행자가 목적지에 이르고, 율법이 율법의 일을 이루고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는가를 아는가? 그 대답은 두 가지다. 첫째,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확신을 통해서 온다. 이 확신이 믿음의 일부인지 혹은 믿음의 결과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확신이 전통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입장에 반대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생득권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관하여 어떤 의식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그의 존재, 그의 사랑과 선의, 그의 거룩을 의심하는 삶에 있어서의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실 변함없으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것인 모든 자들을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둘째, 회심의 기준은 회심됨의 삶이다. 토양의 비유는 우리에게 기독교적인 것들에 대한 열심은 반드시 영적 재생(rebirth)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한다. 결점은 잘못된 정보 혹은 불완전한 지식에 근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결정들은 그 결정들의 활동이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으로 느끼는 믿음을 결여한 결정일 수 있다. 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에 의해서 그 결정들이 스스로 회심의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믿음이 증거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역의 현존 속에 있다.


        그러므로 회심의 기준은 죄인이 계속적으로 죄를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으로 보며, 그것으로부터 떠나며, 삶과, 용서와, 은혜와, 안내를 위해 그를 신뢰하는가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 자신을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그를 따르고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지며 그를 따르고, 우리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여 그의 나라를 구하고,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의 백성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그를 따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적 인격의 은혜가 나타나기 시작하느냐이다. 그것은 그를 주권적인 창조주이시고, 모든 것의 운행자이시라고 인정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그가 주신 좋은, 선물과 경험을 받아들이고, 그의 동행하시는 선함을 깊이 느끼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복종과 더불어 실망도 수용하면서, 그의 조건에서 그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는가이다. 회심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영광과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서 그를 섬기고 그에게 영광 돌리는 헌신으로 인도할 때, 그 회심이 참 회심이다. 우리가 개인적 신앙고백의 실재적 증거를 얻는 것은 신앙적인 삶의 이러한 길들을 통해서이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기독교 신앙은 결코 소멸되기까지 일 세대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각 세대는 그 믿음이 완전한 통합성을 가지고 보존되어야 함을 주의해야만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숨고 싶은 곳, 삶의 고통과 당황으로부터 압력을 받지 않고 악과 오류에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피난처를 동경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그 자신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주님 외에는 아무도 발견할 수 없다. 그분은 우리가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 불의한 자를 위한 의로운 자로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그 자신을 주셨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스러운 한계들과 상처받기 쉬운 점들은 오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힘과 소망을 발견하도록 인도한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배우고, 보존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인간적으로만 할 수 없다.



* 본 내용은 데이빗 F. 웰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홍기영 박사 옮김)"의 제 8장 내용을 본 강의에 맞추어 편집하여 올린 것입니다.

** 이것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의 또 한권의 책을 마칩니다. 그동안 부족했던 강의에 늘 함께 하여 주시고 용기도 주시고 열심히 함께 공부해 주신 평생 대학원 학생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admin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4-08-22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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