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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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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강 (2) - 제 7장 물질주의적인 외부인들
김 에스더  (Homepage) 2014-08-12 23:45:49, 조회 : 1,852, 추천 : 289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 데이빗 F. 웰스 저, 홍 기영 박사 옮김


제 7장 물질주의적인 외부인들


        물질주의는 물질 이외는 없다는 견해이다. 즉 영적 차원도, 도덕적 세계도, 초자연적 존재도, 하나님도 없다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물질주의자들은 실재가 이데아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 반대하며, 세계 안에서 영적 측면을 보는 세계 이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물질주의자들은 두 종류이다. 막스주의자들과 같이 어떤 사람들은 철학적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의 서구인들과 같이 생각지 않는 자들이다. 막스주의자들은 이론적 무신론주의자들인 반면 세속적 서구인들은 실제적 무신론주의자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물질주의는 하나님을 생각에서 제외하도록 만드는 사고체계가 아니라 삶의 총체적 관계망이다. 그 관계망의 관심의 중심은 부유한 것이며, 그들의 사고의 기준은 "좋은 삶"(a good life)의 추구를 규범으로 만든다.


        물질주의로 인도하는 세속주의는 삶의 과정은 그들 배후에 있는 신적 혹은 도덕적 질서로부터 떨어져나가 있다는 가정에 있다. 하나님은 진실로 존재하실지 모른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그가 존재하신다는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삶의 어느 부분에도 의미없다. 그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지속적인 가치가 있는지, 옳고 그름의 궁극적인 구분이 있는지, 삶이란 무엇인지,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사람은 왜 살려고 하는 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를 부인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삶을 그 상태에서 이해하는 것이 전부이다.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시며, 희미하며,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그의 의미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참이고 거짓인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는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경험은 무슨 가치가 있는 지를 알려주고 그러한 가치 면에서 우리를 지도하는 스승이 된다. 그래서 다원주의는 현대적 실재의 불가피한 부분이다. 도대체 누가 한 가치가 다른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경험이 기준이라면, 또 우리가 의미를 얻는 원천이라면, 비록 잠시 일지라도 각 개인에게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동양사상의 현태들(특히 힌두교)은 서구에서 환영을 받거나 서구의 세속주의는 마치 에이즈 바이러스처럼 세계 도처로 번져 매우 종교적인 상황에서조차 자리를 차지하였다. 오늘날 서구와 동양의 세계관에 있어서 삶이 대부분 서로 바쁘게 교차하는, 서로 관계가 없는, 빠르게 움직이는, 그리고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경험들이라는 관념이 공통적이다. 동양에 있는 이 경험적 모호성에 관한 확고한 정신이 자연을 넘어 발견되어지며, 서구에서는 그것이 자연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동양사상의 신비주의는 보다 외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나 서구사상의 그것은 보다 내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 결과, 서구문화는 그것이 -그것의 필요, 느낌, 그리고 욕망 -오직 그 자체 안에 있기에 우리가 의미들에 접근할 수 있음을 수용하였다. 위의 세계는 가고, 오직 안의 세계만 남는다. 그러나 안의 세계는 어둡고 구분이 어렵다. 이해하는 것이 혼동이 오고 어렵다. 그것은 모순적이고 오도(誤導)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궁극적인 의미를 가지는 많은 종류의 경험들이 있다는 명제로 돌아온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경험들은 각각 가치를 가지며, 그래서 회심 경험을 주장하는 어느 개인은 그와 같은 것을 윈치 않는 사람과 같이 동등하게 옳다는 명제로 돌아온다.


        이러한 다원주의 그리고 근원적인 세속주의는 오늘날 그와 같은 사고의 습관을 요구하는 강력한 사회적 세력에 의해 서구에서 지지되고 있다. 어떻게 세속화(주로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한 현대 사회의 모습)가 세속주의(삶을 총체적 신적 질서로부터 끊어놓는 데서부터 기인한 가치)로 발전되는 가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도시들의 모습을 보라.


        제 3세계에서, 사람들은 가난하고, 젊고, 집 없고, 직업 없는 수백 만의 사람들이 있는 도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도시들은 고난당하고, 빼앗기고,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 자들이 모이는 곳이며,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존재는 도시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 서구에서, 도시들은 좀 다르다. 그 곳에도 가난한 자들과 실업자들이 있으나 그 수는 제 3세계에 비하면 훨씬 적다. 서구의 도시들은 역시 좀 더 기술적으로 방향지어진다. 그것들은 공장과 상업의 중심지이며, 그 곳에서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재화와 용역을 생산해야 하는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형성되어 왔다.


        가장 중요한 발달은 공적인 삶으로부터 사적인 삶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구두쟁이는 그의 일로서 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으로도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는 개인적 명예가 소중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성실한 책임수행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관계는 상실되었다. 왜냐하면 도시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을 위해 여행하도록 요구하며, 두 세계 즉 그들의 가정과 그들의 경제적 세계에서 살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경제적 세계는 사람들을 그들의 기능으로 규정한다. 즉 그것은 경제적 생산성의 용어로 가치 및 심지어는 인간존재의 가치를 생각한다. 가치가 실제적이고 유동적인 곳은 비인격적인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격은 생산성에 복종해야 하고, 윤리는 실적에 복종해야 하고, 옳은 것은 가장 중요한 결과를 생산하는 것에 복종해야 한다. 경제적 가치는 있을지언정 도덕적 가치는 없다.


        물론 이 상황은 특히 미국에서 아이러니컬하다. 미국인들은 매순간마다 그들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보지만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오싹하지만, 공적인 삶에서 무신론을 실천하며 공적인 장소에 종교적 상징들을 보이려고 하지만 미국 시민 자유 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과 싸워야만 한다. 미국 사람들은 막스주의의 일차원적인 관점에 대해 혐오를 느끼지만,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그들의 일차원적 물질주의를 실천한다. 막스주의 정부가 조직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데 중요한 자유를, 그리고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보존되어온 자유를 파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히 물질주의적인 미국인들이 세계에서 다른 물질주의자들을 포함하며 심지어는 제거하도록 꾸며진 외교정책을 세워야하는 것은 확실히 아이러니하다. 미국인들에 의해 소중히 간직된 자유가 물질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미국이 그럭저럭 해나가는 것은 내적으로 약화된 원수에 대해 그리고 혼란 속에 빠진 그 원수에 정면대결하기 때문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비록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막스주의자들과 연결되는 것을 혐오하지만, 서구의 실제적 물질주의와 막스주의의 이론적 물질주의는 서로 너무 밀접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회심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러한 범주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되며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1. 단계별로 배움


        서구의 세속주의는 그것이 나온 유대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점점 상이한 문화를 생산하고 있다. 삼십년 전에 보통 사람이면 알고, 생각하고, 믿는다고 추정한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추정될 수 없다. 사실, 서구는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적 커뮤니케이션에 관여해야만 할 정도로 기독교 문화로부터 충분히 소외되어 왔다.


        그러나 서구에서의 전도는 복음의 간단한 제시가 - 아마도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더 좋다 - 기독교 신앙의 수용에 가장 적은 장애물을 만들어내며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다른 무슨 이해가 필요하든지 공급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접근은 선교현장에서 거절될 수 있다 -그 동안 그렇게 되어 왔고 -그러나 그것은 이상하게 서구에서 부적합하다. 그것은 빠르고, 기술적인, 그리고 바로 결정해야 하는 시대에 호소한다. 다시 말해 즉시 수백만의 사람들이 복음에 의해 복음화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중에게 간단한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은 그들을 복음화한 것과 동일시 될 수 없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이해되어지기까지는 전달되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속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최소한의 포장된 복음을 듣고 즉각적인 동의를 요구받는다면 기독교 진리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에 관하여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기독교와 함께 하는 가정들에 관하여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삶과 매우 관계가 깊으며 그를 삶의 중심과 초점으로 만드는 것이 의미를 찾는 첩경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옳고 그름의 구별이 있음과, 인간 존재는 단순히 화학적이고 전기적인 힘이 아니라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 형성을 위한 힘을 가지고 있음과, 그들은 영적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단계적으로 믿음을 갖는다. 그들이 "좋은 삶" (good life)과 같은 종전의 충성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옴이 그려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극적인 "다메섹" 경험으로 절정에 이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적인 재 정돈과 새 충성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의 점증적인 지식 후에 온다.


        다시 말해서 이 결정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는 주요 결정에 관하여 역할을 수행하는 양식의 범주 안에 속하게 된다. 이러한 "확장된 문제해결"은 분명히 분별할 수 있는 단계를 갖는다. 즉 필요가 느껴지며, 정보에 대한 탐색이 따르며, 정보는 평가된 대안을제공하며, 일련의 행동이 선택되어지고 취해지며, 헌신한 후에 본래의 필요가 채택된 해결과 함께 병존하는 동안 재평가가 계속된다. 그와 같은 과정이 기독교의 회심에 있어서 계속된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해명될 필요가 있다.


        첫째, 사람들은 그들의 집을 구입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결정하지 않는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 과정은 필요와 대안과 해결이라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집을 구입하는 것은 충성의 변화를 포함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충성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합법적으로 포장될 수 없으며 물건처럼 팔리지 않는다. 깊은 의미에 있어서, 복음은 사람의 필요를 채우나 죄인은 소비자가 아니다. 완전한 복종의 필요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 복음제시와 부적격한 그리스도에의 충성은 비성경적이다.


        둘째, 개인의 필요는 반드시 해석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소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죄로 인하여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음과 그들의 문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죄는 신학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의되어야 하는 실재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진리를 버리고, 그의 법을 거절하고, 그의 그리스도임을 부인하고 우리 자신을 창조주의 자리에 놓았기 때문에 죄인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법과, 진리와, 그리스도(Christ)가 되었다. 죄는 비록 그것이 규율을 어기는 것을 결과로 나타내지만 주로 규율을 어기는 것에 관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항상 자기중심적이지만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에 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그분께 중심과 초점과 그의 영광을 드리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느껴진 필요"(feet need)는 이러한 빛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계속하여 건강하고 부유해야 하는 "필요"를 해결로 연결시키는 "건강과 부의 복음" (health and wealth gospel) 즉 건강과 부(富)를 제공하는 복음과 같은 이상한 변이를 만든다.


        셋째, 해결(복음)은 필요와 상관이 없으면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결정’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이고 엉성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이 관계하는 필요는 사람들이 꼭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 연구에서, 미국 대학생들은 물질적 성공을 그들의 가장 큰 필요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물질적 성공이 행복에 있어서 근본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필요는 행복이었다. 그래서 그것에로의 가정된 길은 부유였다. 그래서 유혹은 행복에로의 최선의 길인 복음을 판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요를 충족시키며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중간단계가 간과되었다. 복음은 죄인들에게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의와의 화해를 약속한다. 신약의 관심은 도덕적이나 오늘의 관심은 심리적이다. 행복에의 욕망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서적으로 훈련되었다면 그것은 부차적일 것이다. 하나님과의 도덕적 관계가 초점화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바르게 그리스도 안에서 정립되면, 행복은 아마도 그것의 결과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행복을 추구하는 어떤 이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돌연한 것이다. 장기 전략은 행복을 추구하는 자에게, 목표가 회개의 과정과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부유를 추구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충성의 변화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알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과정이지 순간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과정과 더불어 인내로써 일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필요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가 개인이 정의한 필요들에 대한 분명한 대답으로 보여질 때, 그분은 그 개인이 반응하는 성경적 그리스도는 아닐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서구 세속주의자들은 결정을 하는 확장된 과정을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필요들은 가끔 혼동스럽고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발견되어질 수 있는지, 또는 진리와, 옳고 그른 것이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해석할 수 없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을 설명하기 전에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마치 기초를 놓기 전에 지붕을 씌우는 것과 같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복음주의자들의 인내하지 못함, 또는 예비적 사역이 행해질 때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느낌은 그러한 일을 그르치게 하는 죄의식을 낳는다. 우리는 더욱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 적지 않게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2. 고독한 군중


        이러한 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더욱 충분히 다루어쳐야 한다. 이 세계는 무엇과 같은가?


        이 세계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세속화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덜 종교적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도 어느 때보다도 영적 추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회의 기관들이 그들의 거룩한 신분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동의를 한 적이 없다. 법정, 교회, 학교, 정부, 그리고 병원들도 거룩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관한 공적인 계약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더 이상 정당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에 관해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보인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맹점들 중 하나이다. 아주 가까이 있는 것들을 분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와 다른 체제를 조사한다면 우리 자신의 환경을 조명할 수 있다.


        유럽의 중세사회는 세속화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중세시대의 세계에서의 모든 것은 아름다운 수정 장식 전등(chandelier)과 비교될 수 있는 계급적이고 복잡한 시스템인, 의미있는 "거룩한 질서"속으로 통합되었다. 모든 것은 전체에 복종된다. 그 단어를 정의하면, 개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은 주기적이고 직선적이지 않다. 계절의 주기와 교회력의 규칙적인 공휴일은 매일의 삶을 규정한다. 이 사회의 심장은 성당이며, 성당에서 거룩한 것 중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 집례를 통해 이루어진다. 성육신의 기적이 미사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은 빵과 포도주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성당에서부터 거룩함이 모든 사회 영역 -예술, 과학, 사업, 가족 -속에 나타난다. 중세시대의 읍내에서 시장은 성당 바로 밖에 위치하고 있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것들은 주변의 거리들에서 만들어졌다(그래서 빵 굽는 거리 옹기장이 거리 같은 이름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들의 일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가족으로부터 상속받았다. 결혼의 선물은 결혼하는 개인들보다 더욱 중요했다. 직장에서와 가정에서 일은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자아실현" 혹은 "완성"의 목표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중세사회에서는 확장, 발전, 그리고 진화는 중요한 말들이 아니었다. 목적은 미래의 목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신적인 실재인 하늘의 양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사회에 대한 단테의 묘사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더 나은 혹은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전체를 구성하는 작은 상세함이 무한하게 의미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실 안에서 기뻐하였다. 단테는 그것이 자유라고 말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카톨릭 성당의 핵심적 지위에 도전했다. 현대의 사고는 하나님의 중심성에 도전해 왔다. 중세시대의 전체적 계급구조는 무너졌다. 인간 존재들은 그들을 보호했던 기관들 없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다. 이것이 17세기에 고통이 되었고, 18세기에 개인들의 권리개념으로 발전했고, 19세기에 이런 권리들을 향한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했다.


        20세기에는 시간적으로, 인간적으로, 역사적으로 르네상스 견해가 역사는 인류를 위한 중단 없는 발전을 가져온다는 확신 속에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오늘날 20세기말에 와서 이 확신은 붕괴되고 있다. 그 대신 사람들은 안으로 향한다. 과거도 현재도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삶 가운데 무슨 내용이 있는가? 오직 마음의 주관적인 경험만이 남는다. 개인은 중세시대에서와 같이 의미 있는 상황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분해된다.


        몇 세기를 거쳐서 "거룩함"의 개념에 무엇인가가 의문이었다. 개인에 강조점을 두면서 유럽의 사고(思考) 역사는 거룩함을 내적 자질로 정의하였다. 그래서 회심은 개인의 경건한 행동으로의 전향, 즉 "거룩함의 표시"의 정해진 나열(list)로의 전향이 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거룩함의 성서적 개념은 또 다른 주인을 위해 분리됨 즉 다른 어떤 사람에게 속함을 의미한다. 만약 어떤 것이 거룩하면, 그것은 시장 밖에 있으며, 그것은 팔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회가 거룩한 것이 무엇이고 거룩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공통된 합의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거룩하지 않다는 결론과 함께 남겨져 있다. 성형산업은 우리의 몸을 원한다. 미용 및 유전 산업은 우리의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을 원한다. 열대림은 팔기 위해 내놓았다. 전쟁들 중에 어떤 것들은 2차 세계대전보다 긴 것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계속되며, 그 결과로 무기시장은 번창일로에 있다.


        어느 유럽 도시 속의 성당 혹은 어느 뉴잉글랜드 읍내 중심에 있는 교회가 예배 외에는 어느 목적에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강력하게 상징적이다. 건축학적인 언어는 강하게 은혜의 중심성과 자유를 선포하였다. 즉 은혜는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며 구입될 수 없다. 예배하는 것은 삶의 무자비한 시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이며, 은혜는 팔리기 위한 것이 아님을 하나님의 은혜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 그의 사용과 일을 위해, 그리고 그의 놀라운 위대함과 영광에 경탄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해방이요, 기쁨이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그들의 고독한, 내적인 삶 속에서 오직 그들 자신들과만 이야기하는 20세기의 발가 벗겨진, 고독한 남녀들을 만날 때 일해야 한다.


        현대성과 세속주의는 삶의 신비와 의미를 삶에서부터 떼어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서로 간에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 왔다. 20세기말을 향하여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 왔다. 즉 스스로 자신의 세계가 된 나르시스적인 사람은 자폐적이라서 내적세계의 갇힘으로부터 도망칠 용기도 욕망도 없다. 외부세계는 나르시스적인 사람에게 관심을 주지 못한다.


        자폐적인 사람에게 외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내적 경험이 중요하다. 세계는 그 자신의 객관적이고 실존적인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 세계에 관해 무엇인가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와의 대화는 없다. 세계는 말하지도 않고 행동하지도 않는다. 자폐적인 사람이 해변 가에 서 있을 때, 그 사람은 바다를 만나지 않는다. 단순히 바다의 경험을 가질 뿐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가라앉는 배에 있다면, 그 사람은 재난을 피하는 길을 찾는 것보다 그 재난을 경험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렇게 완전한 고립과 소외 속에 있는 것은 고통 당하는 무리는 실제로 더욱 고독하며 그들 자신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갇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집합을 그리는 지옥의 고전적인 그림들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가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에서, 신문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우리의 밤의 환상에서 현실적이고 인공적인 폭력의 흐름에 의해 홍수재해를 맞는 동안 누가 죽음의 오한에서 그리고 매일 우리의 일부를 먹어치우는 이러한 무지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동시에 우리는 음식과 옷과 여행과 섹스와 스포츠와 문화와 그리고 종교에서 더욱 많은 다채로운 "경험들"을 얻는다.


        세례 요한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분이 서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음성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들려온다. 그의 말들은 책속에 적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경험이 아니라 사실적이고, 측정가능하고, 객관적인 존재에 관한 책이다.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분이 서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에 관해 말했다. 소위 기독교 국가들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 알면 우리는 적어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안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예수의 그림은 수세기 동안의 친밀함 속에 찢겨지고 창백하다. 그리고 색깔들은 토발드센(Thorvaldsen)의 그리스도(실재를 감싸고 있는 붕대)처럼 희고 악의 없을 만큼 얼굴의 모습을 벗겨 떨어지게 했다. 우리는 예수에 관해 쓰여진 모든 책들에 그리고 그의 이름을 사용한 모든 기관들과 회사들에 무엇인가를 첨가할 수 있을까? 아마도 더할 것은 없고, 오히려 벗겨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많다! 그리스도는 선동자가 아니다. 그는 새로운 강렬한 경험을 주지 않는다. 그는 어느 것도 팔지 않는다. 그는 다만 연기와 대화 속에 있는 테이블 위의 꽃과 같다. 이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오늘날 약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광고에서, 포르노 신문에서, 새로운 영적 운동에서 메시지는 분명하다. 즉 우리는 당신이 찾는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있소! 우리는 당신을 위해 삶의 신비를 똑바로 펼 수 있소! 이러한 단순화는 모든 사람을 얄팍한 소비자로 밖에는 만들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소비를 위해 있는 분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시다.


        하나님을 외부에 계신 - 우리가 경험들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경험들 이상으로 만나는 -절대 타자로서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보기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실재인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능케 하는 비실재를 돌파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역시 실재를 가지며, 그들은 우리와 다르며,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그들을 또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위치에 있다.


        회심은 종교적이지만 인간적이지 않는, 그리고 영혼 안에서 무엇인가를 행하지만 감탄과, 웃음과, 의지와, 어디론지 가기를 원하는 곳과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좁은 거래로 이해되어지곤 한다. 이것이 사회학자들이 공적인 것으로부터 사적인 것을 분리하는 것에 관한 그들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 속으로 형성하는 것 대신에 신앙으로 돌아올 때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은 신앙의 왜곡이다. 결국 성서는 요한복음 3:16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창세기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가, 우리는 누구인가, 그의 피조물은 어떠한가, 왜 우리는 그 안에 있는가, 그리고 이것의 종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이해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회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성서적 틀로부터 잘라내는 것은 인간성의 모든 구석까지 파고 들어가기 힘든 종교성의 파편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에 사녹(Sanok)이라는 도시로부터 몇 사람들에 의해 방문을 받은 리친(Rhizyn)의 랍비에 관한 이야기가 하시딕(Chassidic) 전통에 있다. 그들은 그들이 동이 틀 때 기도하고 미쉬나의 한 장을 배우면서 규율을 면밀히 따르는 동안, 하시딤(Chasidim)들은 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불평했다. 그 하시딤들은 동이 틀 때 항상 기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끝났을 때 둘러앉아서 술을 마셨다. 사녹으로부터 온 사람들을 혼란하게 한 것은 그들이 "적들"이라고 불리어지는데 반하여 하심딤들은 경건하다고 판단되는 것이었다.


        리친의 랍비는 하심딤들의 행동은 진실로 마귀를 속이기 위한 장치였다고 설명한다. 정해진 시간의 기도 후에 그들은 앉아서 같이 술을 마셨다. "삶을 위하여!" 각자는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을 말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간에 "하나님이 당신의 욕망을 허락하시기를 빕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기도는 어떤 언어로든지 말해질지 모르지만, 그들은 이것 또한 기도로 본다. 한편, 마귀는 둘러앉아, 술을 마시면서, 일상적인 언어를 말하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떠났다!


        이것은 물론 농담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종교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성은 종교성에 의해 윤택해지며 정상적인 위치에 있을 만큼 서로 연결되어져 있음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와 같이 우리가 부유함과 감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속적이고 외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성경적 명령을 기억해야만 한다. 즉 그들을 하나님의 충만한 지식과, 그의 세계와, 그의 그리스도와, 그의 법과, 그의 진리로 인도하여 그들이 겸손하게 순종함으로써 그에게 돌아오도록 하라.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자폐적인 세계의 그늘에서 해방시켜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에서부터 창조의 이 부분을 창조주의 본래의 의도에 가까운 것에로 회복케 하는 온전한 인간성을 갖는 데로 인도하라. 비록 그것이 목적이지만,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창조주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뿐이시다



3. 막시즘(Marxism)


        북미 기독교의 유리한 고지로부터 볼 때, 막스주의 연구는 비밀적이고 무관한 일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인류의 3분의 1이 막시즘이 정립 (establishment)된 신학으로 여겨지는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수백만의 인구가 일상적으로 막시즘과 만난다. 사람들이 정립을 주어진 이데올로기의 마침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근에 유고슬라비아의 저명한, 의견을 달리하는, 막스주의자인 밀로반 드질라스(Milovan Djilas)에 의해 제시된 평가는 사실이다. 즉 소련의 막스주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수준에서는 죽었으며, 정책의 수준에서 살아있다. 그러나 막스주의는 세계 도처의 많은 상황에서 힘의 원리 이상을 의미한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나라들에서는, 막스주의가 아직 상당히 경쟁력 있는 이데올로기이며, 때때로 변화를 갈망하는 사회적 상황에서의 총체적 변화의 청사진을 제공한다. 그 때, 막스주의는 현재의 인간소외를 초월하여 참 인간존재의 설득력 있는 분석과 종합으로 보여진다.



4. 막스주의의 안건


          막스주의의 빛에서 기독교적 회심의 개념을 조사하는 것은 적합하다. 왜냐하면 기독교와 같이 막스주의는 사람들이 급진적 변화를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더구나, 막스주의의 변화의 개념은 기독교의 개념과 비교된다. 보통의 잘못된 개념과는 반대로, 막스주의자들은 사회구조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이러한 구조들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삶 속에서의 보충적 변화도 주장한다.


        그와 같은 변화의 요구는 초기의 현존하는 칼 막스의 저작물들을 지적함으로써 구체화될 수 있다. 즉 17세의 학생으로 쓴 종교에 관한 입학논문이다. 인류의 역사와 개인들의 발달을 조사한 후, 그는, 인간은 "존재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오직 유일한 자연 속의 존재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막스는 인간 속에서 "선한 것에의 열정, 진리에의 추구, 덕을 위한 열심"을 관찰했다. 그러나 "영원의 불꽃은 거짓의 달콤하게 아첨하는 힘에 의해 꺼진다. "인간의 깊은 도덕적 문제는 "고삐를 매지 않은 이기주의"이다.


        이 도덕적 문제는 역시 막스의 공산주의 관점으로부터의 진술들, 동시에 필요성뿐만 아니라 필요한 변화의 성격도 해명하는 진술들 속에서 자주 나타난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에 의해 성취된 외적인, 정치적인, 헌법적인 해방을 보면서, 막스는 소위 "인간성의 변화"의 임무에 관해 썼다. 장 쟈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를 인용하면서, 막스는 이 변화의 성격을 "자신이 고독한 전체인 개인을 더 위대한 전체의 일부분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그의 말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오직 참 개인이 개별적인 인간존재로서 그의 매일의 삶에서, 그의 특별한 일에서, 그리고 그의 특별한 상황에서, 인종적 존재(사회적 존재)가 될 때, 인간의 해방이 성취될 것이다."


        그와 같이, 막스에 의하면, 개인들을 자족하며, 이기적인 부르조아(bourgeois)대신 사회적으로 책임 있고, 헌신된 시민(citoyens)이 되도록 돕기 위해 구조와 헌법에서의 변화 이상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분명히 공산주의는 생산의 (무정부적인 것 대신에) 결사된 형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존재의 전체를 사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산주의는 태도, 행동의 변화와 '경제적 인간'의 용어로 뿐만 아니라 좀 더 기본적인 인류학적 형태의 용어로서 변화를 고취한다.


        변화를 위한 공식과 더불어 막스의 설명서는 "진정한 인본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을 나타낸다. 그의 목표는 의식의 단순한 제목, 이름, 그리고 이론의 수정이 아니라 개인적 일의 실재성과 구체적인 관계성의 수정이다. 막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전 동료인 브루노바우어(Bruno Bauer)와의 계속적인 논쟁에 있어서 이 실제적 연대의 중요함을 공고히 했다. 막스주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변화를 요구한다. 막스는 그의 철학적 선배인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Rudwig Feuerbach)와의 교제를 이렇게 요약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요체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람들"의 요구는 언제나 새로운 세대가 진정으로 비이기적인 사람들의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꿀 때에는 막스 -레닌주의의 역사 속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그것은 1960년대 소련에서의 이데올로기적 토론을 지배했다. 그러나 당시의 소련과 중공으로부터의 결정적으로 실제적인 발표 속에서 그 주제는 분명하였다. 이것은 1986년에 만들어진 두 개의 문서들로부터 보여 질 수 있다. 즉 27회 전당대회에 보내는 중앙위원회의정치보고서(더불어 27회 전당대회 결의안)와 진보적인 문화와 이념과 더불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지도 원리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안(1986년 9월)이 그것들이다. 미카일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의 보고의 주제는 '사회경제적 개발의 촉진'이었다. 강조점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대화 즉 "새로운 경제 관리법"에 있었다. 따라서 고르바쵸프는 이념적인 자극의 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세심하게 주의한 듯하였다. 그는 거주, 식량의 공급, 소비재의 질, 그리고 건강보호의 수준이 분명히 인간의 의식과 감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쵸프는 소위 생산과정의 심리적인 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의 언어로 이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변화를 전적으로 주의했다. 그는 '만약 사람들이 무관심하다면 우리의 계획은 어느 것이든지 허공에 걸려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필요는 "인간의 사회적 정신적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외에 어느 것도 사람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고르바쵸프는 경제를 맡고 있는 당의 기능 중 몇 가지 타성과 위선에 대하여 계속적인 논쟁에 관여한다. 그는, 그들이 설교하는 바를 거의 실천하지 않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판단을 받아야하는 "언행일치"가 결여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으로부터 그것의 신빙성을 빼앗으며 진정한 인본주의로서의 사회주의의 매력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의 도덕적 건강은 사회의 진실한 건강이다." 그러므로 당은 정직과 진리를 위해 싸워야하며, 자주 목격되는 겉치레를 지각 있는 자아비판 정신으로 대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산당은 국가의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전위"가 될 수 없다.


        진보적인 문화와 이념과 더불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지도 원리는 방금 묘사된 그것과 다르지 않은 사고의 절차를 보인다. 소련 공산당 27회 전당대회의 정치보고서 및 결의문과 비교할 때, 그것은 문화, 이념, 그리고 교육의 관심에 제한되고 있다. 그것은 경제의 (또는 외교정치의) 관리문제를 다루지 아니한다. 그 경제관리 문제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같은 회기 내의 다른 결의문의 주제였다. 여기서 다시 전체적 지평은 경제적 발전과 발달의 대중적인 욕망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사회주의 현대화'라는 프로그램이 이미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이 목표 때문에 이데올로기 특히 윤리의 발전을 위한 여지를 만드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높은 목표와 도덕적 통합성을 가지고 잘 교육받고, 스스로 훈련된 사회주의 시민들이 되도록 도우며 전국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을 높이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 현대화’의 이익을 위해서 이러한 일들을 하는 것이다. 윤리적 수준이 높아지는 곳에서, 그 효과는 ‘물질적 진보의 발전에 스며든다’ 그리고 노동생산성의 제고와 "평등, 연대, 우정, 그리고 상호협조로 특징지어지는" 대인관계의 새롭고 더욱 높은 형태를 불러온다. 다시 말해서, 압도적인 질문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당원들이사실 "백성을 전심으로 섬기는지 아니면 백성을 짓밟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관리와 지주들처럼 행동하느냐이다." 고르바쵸프 보고서에서와 같이, 이것은 "실제적인 일을 위해 공허한 탁상공론을 거절하는 것"의 문제로서 보였다. 그와 같이 헌신적이고 비이기적인 행동을 위한 동기부여는 공산사회의 이상이 "항상 힘의 원천이며 도덕적 지원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만약 참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성취되기만 한다면 비록 사람들의 도덕적 발전을 강조하기는 해도 중국의 보고서류는 용납할 수 없는 현재의 관행에서 미래의 더 나은 삶에로의 돌연한 회심의 용어로서가 아니고 발달과 더 나은 완성의 용어로서 생각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발전이 더 높은 단계에 이를 때에 사회주의적 윤리가 자연적으로 역사 속에서 발달된 여러 종류의 윤리적 체계와 전통에 있어서 가장 좋은 요소들을 동화하며’ 오직 ‘모든 퇴폐적인 이데올로기와 윤리를 거절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교육이 이러한 목표를 이루는 수단 중에서 가장 뛰어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도덕적 발전과 완성의 아이디어와 조화를 이룬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초기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재교육이 제국왕조의 마지막 자손에 의해 쓰여진 ‘나는 중국의 황제였다(I was Emperor of China)’에서 증명된 바처럼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러나 더 높은 도덕적 표준의 성취와 실천의 길로서의 "윤리에 있어서의 교육"은 중국에서는 물론 소련에서 선호되어진 지혜였다. 이점에서, 막스주의는 계몽주의의 이상주의적 전통에 서있다. 1835년에 막스가 스케치했던 존재와 당위 사이에 있는 깊은 인류학적 모순은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되어야 했다. 즉 "만약 인간이 선한다면, 그는 선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요약하면, 더욱 실제적인 최근의 막스주의 관료체제의 발표 중 몇 가지에서 아직 나타나는 본래의 막스주의적 비전은 인간들 안에서의 도덕적 변화의 필요에 집착한다. 사람들은 반드시 이론과 기존의 목표에 대한 명목적인 말로서 뿐만 아니라 매일의 인간관계적 관례에서도 현존하는 이기주의로부터 사회주의의 바람직한 연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이것들은 분명히 타당하고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딤전4:10)은 막스주의에 의한 도덕적 변화의 동기에 의해 제외되었으며, 어떤 권유가 있든지 그것은 세상적인 대리인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드시 권유로든지, 명령으로든지, 혹은 법으로든지 사회에 의한 인간을 향한 요구의 형태로 나타나져야만 한다. 신학적 용어로, 그와 같은 요구들은 율법의 형태고 온다. 성서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이론으로부터 실제로의 전환의 문제를 계속적으로 일으키며 자극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에 의하면 율법은 중생과 그 자신의 요구의 실천을 야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5. 성경적 대응



        막스주의는 기독교적 이단이라고 말해져 왔다. 그것은 믿음의 형태와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내용을 가진다. 이것이 사실일 정도로, 막스주의는 기독교적 신앙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차이점을 가질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막스의 초기 분석에 동의한다. 즉 그것은 인간에서의 존재와 당위 사이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그의 평가에 동의한다. 그것은 계속적인 자기 비판적 의식은 물론 기본적이고 계속적인 도덕적 변화의 필요에 대한 그의 개념에 동의한다. 성서적으로 교훈된 기독교 신앙은 이 사회적으로 관계가 있는 도덕적인 일과관계가 있다. 즉 그것은 단순히 우주철학의 체계도 아니고 소수민족의 관습의 이상한 체계도 아니다. 진실로, 그것은 이러한 도덕적 변화의 중심을 주장하며 교조주의와 실용주의의 대안적인 물결 속에서 사라질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많은 수의 무리를 먹이신 예수는 그들이 그를 환영받는 물질적 시혜자로 간주하는 것을 거절하셨다(요 6:15). 기독교도 역시 모든 사람이 생활의 필요를 공급받아야 함을 긍정적으로 관심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는 것을 주장한다. 이 절은 비록 전반부만이지만 막스주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었다. 기독교적 관점으로부터 보면, 삶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의 문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타고난 물질주의는 마치 완전한 복음으로 내세우는 반쪽 진리를 통해 막스주의를 심술궂게 속인다. 진실로, 우리는 떡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가졌을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 없다. 물질적 수단은 도덕적인 문제들을 풀 수 없다. 특히 이 문제들이 자기의 우세함 속에서 보여질 때 더욱 풀 수 없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인간적 삶, 일, 그리고 관계 속에서의 변화를 고취하는데 있어서 막스에 동의한다(즉 구체적인 적용에 있어서 그러하다). 비록 기독교가 사회적 구조와 헌법에 있어서의 변화의 필요를 말하지만, 그것은 막스주의자들이 종종 선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 구조, 법, 그리고 인사에 있어서의 단순한 변화의 주장보다도 개인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알려진 바와 같이 도저히 인간들이 실천할 수 없는 계획들인, 사회구원의 높은 세계적 계획들을 철저히 의심한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신학은 인간 안의 그와 같은 변화가 다른 사람을 돌보며 인류를 위한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막스주의에 동의한다. 여기서 막스는 인간의 도덕적 소외의 수수께끼를 지적함에 있어서 매우 옳다. 즉 그것은 이웃에 대한고려의 부족이다. 기독교 안에는 더욱 정의롭고 형제적인 사회를 세우겠다는 의도를 비웃는 냉소주의를 위한 여지가 없다. 인간의 삶과 결사를 유지함과 관련된 인간의 도덕적 문제들은 그것들이 무시된다면 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동양에서와 같이 서양에서도 계속적인 관심을 요구한다. 어떻게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야기 시키느냐 하는 것은 "나의 세대"의 철학에 의해 지배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 안에서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기독교 신학은 구체적인 회심의 개념을 지원한다. 그러나 성서적 신앙은 어떤 사람이 단순히 이웃에게로만 향하여 돌아오는 것뿐만 아니라 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의 의미에서 완전한 회심을 요구할 것이다. 이것은 동기부여에서 근본적이다. 하나님이 목표이자 보증인이 아니시면 절대적인 도덕적 표준을 세울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무시되고, 변화가 인간의 권위에만 기초한다면, 도덕적 결정의 권한이 도덕적 표준과 그들의 이익을 혼동하는 개인들 또는 선택된 집단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도덕적 상대주의가 불가피하다.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 대의명분을 위한 부정직함은 어떤 개인적 목표를 위한 부정직함이 될 수 있다. 그 때에는 어떤 교정도 불가능하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관계된 모든 자들 사이의 도덕적 담화의 종료를 의미한다. 그것은 어디에 담겨질 수 없으며 최종적으로 가장 선한 의도로 그것을 주창한 자들까지 배신할 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의 정의에의 헌신은 논리적으로 절대적인 도덕적 표준들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나님의 권위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다.


        동기부여의 분야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단체, 집단 사회와 국가는 근본적으로 비이기성의 동기부여 자들로서 부족하다. 개인은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 요구들에 의문을제기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 없이 도덕성이 있을 수 있는 지에 대한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윤리적 요구들을 신적 권위로 확인하는 구약의 소위 동인적 구절에는 깊은 지혜가 있는 듯하다. 즉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5:17; 창 50:19).


        또 하나의 문제는 어떻게 객관적인 도덕적 요구들이 주관화되며 내면화되느냐이다. 기독교 신학은 도덕적 변화를 야기 시키기 위한교육의 능력 혹은 단순한 아이디어의 제시를 근본적으로 의심한다. 막스주의가 이러한 과정을 추구하는 곳에서는 그것은 아직도 이상주의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민족주의의 강한 힘은 바람직한 도덕적 목표를 향한 동기부여 자들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사회주의로 가는 길 위에서 주기적으로 자본주의의 원리를 재도입 하는 것과 같이 그것은 "악어의 등을 타고 강을 건너는" 또 다른 시도와 같이 보인다. 즉 민족주의는 확실히 "새로운 사람들"과 "사람들의 형제의식"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가장 세력 있는 그리고 싫은 화육들 중 하나로 쉽게 나타날 수도 있다.


        "행정적인 측정들" 혹은 사람들을 바른 종류의 행동으로 밀어 넣는 것은 다만 무모한 것으로 판명된다. 우리가 기억하기에 근본적인 도덕적 변화가 모색되는 곳에서의 힘의 사용은 오직 위선과, 불신과, 광범위한 허세, 바로 우선적으로 문제로 느껴졌던 것을 야기할 것이다. 교육과 강요는 마음과 뜻을 관통하지 못하는 외적 수단들이다. 죄인이 자신의 회심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익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회심을 성취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더욱 무익하다. 하나님을 향한 회심 없이 책임 있는 이웃을 향한 회심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재발견 없는 이웃의 재발견은 무익하며, 막스주의의 무신론은 그 자신의 높은 목표들을 사정없이 파괴한다.


        이것이 왜 젊은 막스가 목적을 성취하지 못한 피조물 속의 유일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문제를 스케치하면서 기독교는 온전한 도덕적 발달을 위해 필요하다고 계속 주장했던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선(善)이 믿는 자들의 자생적인 발표가 되도록 선(善)의 내면화의 문제에 관계한다.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는 곳에서(세금쟁이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처럼), 도덕적 변화가 요구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강제의 필연성에서가 아니고 결과의 필연성에서부터 야기되었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 버나드, 그리고 칼빈이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언급한 이유이다. 성령은 말해진 객관적 메시지에 권위를 부여하며 그것을 개인의 가장 깊숙한 속성으로 만든다. 이것은 개인의 동기부여의 중심인 ‘마음’ 속에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요구로서의 도덕적 변화 이상이다. 그것은 사랑을 우리의 마음 속에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선물로서 말한다(롬 5:5). 그것 없이, 우리는 자기비판과 옳은 것의 절대적 표준들을 향한 단호한 헌신을 결합한 도덕적 변화를 헛되이 찾을 것이다.


        막스주의자들의 이상주의는 종종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의 비전과 프로그램은 한편 운명적으로 이기주의와 불공평에 관한 그들의 평가에 의해 흠집이 났으며, 다른 한편 용서와 변화에 의해 흠집이 났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이야기가 종종 슬프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 철저하게 삶의 과정을 바꾼, 창의적인, 확신과 용기의 남녀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삶을 지탱하시며,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시며, 도덕적 질서를 다스리시며, 역사의 과정을 지시하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를 섬기며 선하고, 바르고, 명예로운 것을 보존하도록, 같은 방법으로, 동일한 복음을 통해, 사람들을 같은 부활의 삶 안으로 부르시고 계신다. 실제적이든 이론적이든 물질주의의 물결은 마치 높이 솟아오른 산들과 같으며, 그들의 힘은 거대하고, 그들의 호소는 불가항력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삶의 견고한 실재와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자 그리고 여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편으로 허풍쟁이인 이상주의, 다른 한편으로 도구들과 폴쉬 (자동차의 일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 는 항상 불안하다.



* 본 내용은 데이빗 F. 웰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홍기영 박사 옮김)"의 제 7장 내용을 본 강의에 맞추어 편집하여 올린 것입니다.

* admin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4-08-22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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