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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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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강 - 제 6장 종교적 외부인들 : 힌두교도들과 불교도들
김 에스더  (Homepage) 2014-08-12 23:07:04, 조회 : 1,571, 추천 : 250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 데이빗 F. 웰스 저, 홍 기영 박사 옮김


제 6장 종교적 외부인들 : 힌두교도들과 불교도들


        고대의 대단히 발달된 힌두교와 불교는 분석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종교적 복잡성 때문이기도 하고 또 부분적으로 양쪽 다 그들의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그들의 문화들과 별개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부분적으로 둘 다 모두 애매한 정신구조(분명한 구분이 없고 오히려 그들의 진리는 계속성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하는 구조를 뜻함)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양쪽의 경우 모두 하나님 혹은 궁극적인 것이 지식과 정의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종교들 간의 틈은 대단히 깊다. 그것은 또한 동은 동이고 서는 서이며 그 둘은 만날지 모르나 대단히 힘들게 만나게 될 것이다!



1. 경계선이 없다


        우리는 이미 기독교의 믿음은 경계를 짓는 사고와 관계적 혹은 중심적 사고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옳고 그름 사이와 진리와 거짓 사이를 구별하는 분명한 감각을 가지고 작동한다. 기독교의 복음은 동의를 묻는 진리로서 제시된다. 이러한 진리, 예를들어 말씀의 성육신, 우리 죄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으심,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 있음, 은혜의 의미, 그리고 믿음의 자리 같은 것이 부족한 복음은 성서적 복음이 아니다. 진리의 집합이 있으며, 그 주위에는 그것과 다른 아이디어를 구별하는 경계선이 있다. 그러나 그 복음은 믿음의 대상이 되는 진리만이 아니라 인식되어져야 하고, 믿어져야 하고, 경배되어져야 하고, 섬겨져야 하는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이것이 복음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죄인을 진리의 경계선 안으로 불러와서 진리이신 주님에게 헌신하고 새롭게 충성하도록 요구한다. 그와 같이 복음은 경계성을 가지고 있고 중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힌두교와 불교에는 사고의 습관이 전적으로 다르다.


        힌두교도에게 종교는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의식에 참여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통찰(darsana)을 가능케 하는 실제(anubhava)의 경험이다. 대부분의 힌두교도들은 힌두이즘이 교리적 신조가 아니라 영적 사고와 실현의 거대하고, 복잡하고, 묘하게 통일된 총체라고 인식한다. 삶의 위대한 목적은 지고(the Supreme)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고에 이르는 길들은 모두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법을 초월하시고, 그가 내리는 판결을 초월하시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 이상이시기 때문이다. 힌두교도의 이런 모순되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도는 지혜의 근원이고 모든 종교들은 궁극적으로 힌두교의 계율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크리슈나는 지고의 브라마나의 총체적 실재를 대변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인도에 대한 새로운 자랑의 결과일지 모른다. 사실 하나님은 정의를 내릴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짧은 수명 안에서 그분의 모든 존재의 수없이 많은 표현들을 경험할 수도 없다. 대부분의 힌두교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려고 하나 그들은 그의 유일성을 부인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이르는 길들 중에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힌두교도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현현임을 수용한다. 그리고 그가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가 오직 하나님의 성육신이시며 오직 유일하게 우리의 죄를 지신 분이라는 것은 힌두교도들에게 거슬린다.


        힌두교도들은 하나님이 수많은 방법으로 현현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로서 기꺼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고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외의 것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교를 평생동안 추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특히 영원에 대한 중요한 것들에 관해 그렇게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을 거절한다. 심사숙고를 해야 하는 신비함과 거대함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실재에 관해 또는 그리스도에 관해 가능한 것이 더 알려지고 경험되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그것을 결정하는 행위는 건방지고 무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신적 기초는 더욱 모호하다. 사실 어떤 정의에 의하면 불교는 무신론적이다. 불교인들은 "회심"을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환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본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벗어나는 것인지는 말과 정의를 초월한다. 사실 경계선적인 사고이든 중심적인 사고이든 말과 정의 (Definition)를 향한 욕망은 그 자체가 환영에의 노예 및 각성의 부재의 증거가 된다.


        선불교는 이러한 유형의 사고를 예증한다. 이러한 형태의 불교에서는 비록 서로 상당히 다르지만, 회심의 동등어로 ‘각성’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한다. 각성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서의 변경 및 의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순수한 자기초월을 성취하기 위해 주관과 객관의 구조(세계를 주관적인 요소로 보는가 혹은 그 세계 자체를 객관적으로 보는가에 대한 사람의 의식)를 극복하려는 급진적인 시도를 낳는다. 그러나 무엇이 자기초월이고 어떻게 그것은 성취되는가?


        동양종교들에 있는 중심적 관례들 가운데 하나는 명상(dhyana)이다. 그것은 집중하고 마음을 침착하게 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개발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깊은 단계의 집중을 통해 마음은 통일되고, 지능의 주객관적 구조를 초월하고, 자기초월이 실현된다. 그러나 우리는 명상의 과정에 있어 두 가지 접근을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 접근에서, 개인은 평온과 이완을 위해 바른 신체적 자세와 호흡의 통제를 통해 특별한 말 혹은 이미지에 집중한다. 그러나 선불교에 의해 차첸(zazen)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접근이 있다. 차첸의 특이성은 마음이 전적으로 비워진다는데 있다. 이러한 자기 비움이 없이는, 개인은 그 사람의 특별한 존재를 초월할 수 없고 사물의 실재를 볼 수 없다. 그와 같은 단계의 집중은 물론전자보다 더 초월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관과 객관사이 그리고 개인의 마음과 외부세계 사이의 분리를 순수하게 용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선불교의 린차이(Rinzai) 종파는 자기초월을 성취하기 위한 보다 극단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만약 초월이 주관과 객관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면, 린차이 첸은 차첸(생각함이 없음)마져도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만약 자기초월 가능이 차첸에 국한된다면 거기에는 자신의 일상생활과 차첸 안에서의 삶과의 괴리가 있다. 그와 같은 일상생활로부터의 후퇴와 이별은 자기초월의 최고의 단계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초월의 최고의 단계는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유지한다. 목표는 해안의 가장자리가 삶의 요구와 활동에 의해 지장을 받을 때에도 ‘조용한 자아’ 즉 내적 고요함의 섬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평화의감각’을 갖는 것을 초월한다. 사람이 삶의 한 가운데서 일하여도 삶으로부터의 해방과,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사고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한다. 이 자기초월은 ‘마음이 없음’의 상태이다. 세상으로부터의 내적 변위, 듣지 않음의 들음,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부분이 아님, 세상을 알지만 세상이 자신의 사고를 정복하지 않음의 실현이다.


        냇가에 와서 건너주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한 두 선불교 스님들에 관한 일본의 이야기가 있다. 한 스님은 여자와의 신체적 접촉을 금한 규정을 기억하면서 그녀를 도와주는 것을 거절한다. 다른 스님은 그녀를 잡아 일으켜서 그 냇가 저편으로 건네주었다. 얼마 후에 스님들은 그들의 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그 때 첫 번째 스님이 두 번째 스님을 책망했다. 두 번째 스님은 그들이 내를 건너자마자 그녀를 내려놓은 반면 첫 번째 스님은 그의 마음속에 그녀를 계속 나르고 있었다고 반응했다! 그때 각성은 물건들과 경험들에 집착하지 않으며, 사고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경험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불교도들은 우리가 아는 세상 배후에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의 특정한 것들 배후에는, 부처의 성격(bussho)이 있다. 동시에 그 성격은 이 부처의 성격을 포함하고 지향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 속에 잠재하거나 임재한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하고 자의식의 개별적 감각을 갖기 때문에, 그들은 이 실재에 대하여 눈이 먼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목표는 이러한 종류의 자비의 성격에 대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자비의 성격은 우리의 개별성으로 말미암는 예속성을 이해한다. 그것은 비존재의 궁극적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케 한다.


        모든 피조물은 부처의 성격을 공유한다는 믿음 주위에 세워진 문화들은 개별적인 형태들을 가진다. 예를 들면, 일본예술의 불균형, 부조화, 단순화, 과격한 창의성과 더불어 그것의 스타일은 선(禪)각성에서의 비형식, 반교조주의, 그리고 주, 객관을 돌파하는 것의 강조를 특징으로 한다. 또 다른 일본 문화의 특이함은 다(茶)의 예술(chano-yu)이다. 다방에서 차를 대접하는 것(다례:tea-ceremony)은 개인의 의식을 초월하여 집중의 강렬한 단계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예식 중 주요 강조점은 다시 말해서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는 것인 단순화이다. 그와 같은 단순화와 제거의 아이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선(禪) 안에서의 집중과 고요함을 추구하도록 상기시킨다. 물론 선과 자연에 대한 일본인의 견해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연에 대한 일본문화의 강렬한 사랑의 존재론적 근거는 부처의 성격에의 믿음까지 추적되어질 수 있다. 부처의 성격의 급진적 현존의 개념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강한 일치감을 준다. 우리는 일본식 건축양식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다(보통 대나무와 나무인). 건축자재뿐만 아니라 건축물의 디자인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의 시도를 보인다. 일본의 오두막은자연과의 조화를 위해 설계되었으므로 그 안에 사는 사람은 그 자신의 위치를 새들과 꽃들과 곤충들과 냇물 사이에 잡음으로써 자연의 또 다른 일부가 된다.

        일본 부쉬도(Bushldo, 무사의 길)와 무인정신의 근거가 되는 기본적인 철학은 개인의 절대적 충성과 죽음의 견해이다. ‘사는 것은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은 사는 것이다’라는 사무라이 (samurai, 전사)의 견해는 비집착의 선(禪)적 이상이다. 사무라이는 그의 삶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그에게 그렇게 대수롭지 않으며, 그는 그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2. 대결


        예를 들면, 인도와 일본에서의 기독교 복음의 전파는 많은 장애물들에 의해 지장을 받는다. 그것들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은 문화적이다. 종교는 문화들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그 문화들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각각의 종교들과 더불어 인도인 또는 일본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다른 믿음으로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낯선 문화의 침입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서구적이다. 복음은(아마도 일본에서보다는 인도에서 더욱 그렇겠지만)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의 수단으로서 보여질 수 있다. 이 어려움은 특히 인도에서 믿는 자들에게 뒤따른 결과들로 인하여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이 만약 상위층 출신이면 회심한 힌두교도들은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거절된다. 그들은 역시 사회적으로 추방된다. 그들의 거절을 보완하기 위해 그 회심자들은 종종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가치관, 그리고 서구 문화를 받아들인다. 완전히 이해되어지지만 그 과정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인도 문화에서 낯선 것처럼 보이게 한다. 대부분의 인도인들의 마음속에서 복음은 그와 같이 더욱 서구화되었다.


        동일하게 뒤따른 사회적 저주 때문에, 힌두교도는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선포하기를 주저한다. 이것은 특히 그 사람이 상위층의 배경에서 나왔으면 더욱 그렇다. 회심자들은 인도의 대의명분에 반역자들 같이 느끼도록 만들어지며 그들의 가족들에게는 수치로 여겨진다. 전체 가족은 - 인도에서 가족의 띠는 매우 단단하다 - 그리스도인이 라고 선언한 그 사람을 부끄러워한다.


        적어도 최근까지 인도의 대부분의 기독교 회심자들은 하층 카스트 출신들이다. 이 새로운 회심자들은 고유하게 하나가 된 서구와 인도의 문화적 삶의 방식을 채택하였다. 상층 카스트 힌두교도들은 전적으로 이 새 회심자들을 사회적으로 동등한 사람들로 수용하지 않았다. 인도에 있는 서구 선교사들은 문화적 문제들에 관하여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러한 특별한 문화와 계속적으로 연결된다.


        그 사람은 예수의 주장을 확신하더라도 상위층 힌두교도는 엄청난 문화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그와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려 할지 모르나 인도에서의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과 관련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의 문화, 그들의 가치, 그리고 그들 인도인의 성격을 포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에게 돌아 왔을 때, 그들은 실제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말하지 않는 다른 인도 기독교인들에게 둘려 싸였음을 발견한다.


        이 문제는 힌두교, 불교, 그리고 기독교에서의 다른 사고양식에 의해 뒤섞이게 된다. 복음은 구도자들이 그들 자신을 잃을 수 있는 신비로서가 아니고 믿어져야 할 진리로서 제시되어 왔다. 복음은 끝없는 발견과 탐구의 가능성을 닫으며, 그것은 그 자체가 추구의 끝이라고 발표한다. 힌두교도와 불교도에게 이것은 심오하게 잘못된 것처럼 들린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목표가 저 멀리 있는 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진리는 여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은 진리로서 진술되고 믿어져야 할 명제로서 진술된 복음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나타낸다고 믿는다. 이 둘은 배타적인신앙의 "교조주의"에 대단히 반대한다. 불교도들은 특히 말들 안에 진리를 가두어 두는 것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말들은 이 환영의 세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문화들과, 사회적 규범들과, 사고의 관습이 견고하고, 보호적이고, 거의 들어갈 수 없는 상자들로 변한다.


        이것은 분명히 에베소서 2:1-10에서 바울이 설교한 진리를 강하게 상기시키는 바, 그 곳에서 그는 세상과 육신과 악마 사이의 상호관계를 발전시킨다. 그는 우리 모두가 ‘이 세상풍속을 좇는다’(엡 2:2)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문화적 규범과 관습을 따랐다. 그것은 각각 다른 방법으로 죄와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바울에 의하면, 문화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한다(엡 2:20).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대한 문화적 장애물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마귀적인 장애물들이다. 바울에 의하면, 회심 전 우리는 모두 이러한 영향을 받고 살았다. 그들은 우리의 타락을 만족시키도록 그리고 우리가 진실로 누구인가를 보이도록 허용한다. 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가 진노의 자녀들이었다"(엡 2:3)는 사실을 안다.


        이러한 상호관계는 아마도 이러한 문화들 속에서의 전도에 있어서 열쇠이다. 왜냐하면 만약 문화들이 해안가에 있는 그들을 보호하는 위대한 장애물 방파제 같이 보인다면 가장 효과적인 전도자들은 이미 그 문화들 속에 있는 자들일 것이다. 인도에서, 그들은 서구화되지 아니한 인도인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들, 간증들, 노래들, 예배들, 그리고 기도들은 물론 힌두교의 속삭임을 듣지 않고 인도인의 사회문화적 유산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도인들은 종교에 관해 공적인 대화를 하는 ‘거룩한 사람들’이 거룩하며 정결과 경건을 보일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심오하고 면밀하게 조사하는 질문들이 제기되는 대화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겁내지 아니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불교와 힌두교에 있어서 이것은 어떻게 종교적 진리가 발견되는가를 보여준다. 누구나 필요한 모든 진리는 복음의 간단한 해석 속에 포함된다는 근거 위에 토론과 사고를 단절시키는 서구의 복음주의적 습관은 힌두교도들과 불교도들에게 대단히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신자들이 그들의 가족들로부터 추방당하고 아마도 고용인들과 지주들로부터 버림받게 되는 문화권들 속으로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려할 때 가져야 할 중요한 윤리적 책임들이 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기독교적 공동체가 아니면 어디서 물질적 도움은 물론 영적 심리적 도움을 발견할 것인가? 이러한 문화들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오라는 부름이어야 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합류하라는 초청이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철저하게 다른 이해가 말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유일하신 그에게 가는 길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신비도 아니다. 우리는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성서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신 그 자신의 계시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그를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지만 모든 생명체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그로부터 떨어져 있다. 우리의 자기중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자의식을 죽게 하는 것과 같지 않다. 진실로 하나님은 그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성경 속에서 그를 아는 지식 속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그의 속에 합일시키지 않고 다만 우리는 창조주 앞에 피조물이라는 것을 앎으로써, 그리고 자아의 소멸을 향해 나가지 않고 그에게 의존함으로써 우리 개인들의 인격이 그의 사역을 위해 구속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기쁨과 함께 그의 조건을 따라 그의 세계에서 살 수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계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하며,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 그것을 그것의 부유함과 아름다움과 더불어 하나님에게 가져가려고 한라. 이것은 이러한 문화들 가운데 토착적인 방법들로서 만들어질 수 있으며 만들어져야만 하는 긍정적인 기쁨이다.



* 본 내용은 데이빗 F. 웰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홍기영 박사 옮김)"의 제 6장 내용을 본 강의에 맞추어 편집하여 올린 것입니다

* admin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4-08-22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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