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Henderson Christian Seminary in New York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Home About Us Academic Program Admissions News &
Event
Gallery Contact Us
LOGIN

 



제 14강 (2) - 제 5장 종교적 외부인들 : 유대인들과 회교도들
김 에스더  (Homepage) 2014-08-11 12:46:08, 조회 : 1,989, 추천 : 265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 데이빗 F. 웰스 저, 홍 기영 박사 옮김


제 5장 종교적 외부인들 : 유대인들과 회교도들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들은 그들의 끊임없는 원한, 폭력, 보복, 그리고 보응과 더불어 사람들로 하여금 유대주의와 이슬람과는 아무 공통점도 없는 것같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서로 적대적이지만, 그들의 종교적 신앙들(적어도 그들의 기원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아주 양극화되어 있지는 않다.


        모하메드는 이슬람과 유대주의의 유일신론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유대주의의 기본적인 신조인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와 이슬람의 신조 "그는 한분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다"(수라 112:1)는 확실히 유사하다. 예수님이 계실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 속에 하나 이상의 인격이 계시다는 것을 거절했던 것처럼, 이슬람은 삼위일체의 기독교 교리를 삼신론이라고 해서 거절한다. 이슬람은 전적으로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강조한다. 이슬람과 유대주의는 천사들을 하나님 말씀의 계시를 전하는 사신들로 존경한다. 천사들은 토라를 모세에게 계시하였고(갈 3:19; 히 2:2), 모하메드는 가브리엘의 감독 하에 코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수라 2:97/91). 코란은 아브라함, 롯, 노아, 아론, 다윗, 그리고 솔로몬과 같은 구약의 많은 인물들을 예언자들로서 인정한다. 비록 성경이 이러한 사람들을 예언자들의 범주에 놓지 않지만, 유대인의 아가다(Aggada: 민간전승)는 후에 그들에게 이러한 신분을 부여했다. 두 종교는 미래의 심판의 날을 예고하며 공동체 생활에 대해 특이한 견해를 가진다.


        이슬람에 있어서 움마(umma)와 초기 유대주의 안에 있었던 신정 정치의 개념들은 매우 유사하다. 둘 다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모든 면을 규제하는 인간의 존재의 총체적 견해를 가진다. 종교와 정치, 혹은 사적인 도덕과 공적인 윤리 사이에 성속의 구별이 없다. 전적인 삶의 행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지시와 성경으로부터 발달된 법의 지시에 의해 결정된다. 거기다가 무슬림의 법과 정통 유대인의 법에는 밀접한 유사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둘 다 예전적 정결에 관한 규제들을 가지고 있고, ‘정결하고’, ‘부정한’ 것을 결정하는 음식에 관한 법을 가지고 있으며, 부정한 것을 고치기 위한 예전적 세정식을 가지고 있다. 둘 다 해야 할 의무들과 미리 규정된 예배 (기도, 금식, 그리고 순례)의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 둘 다 불리한 자들(고아와 과부)을 위한 선처, 결혼, 그리고 상속의 법과 같은 점에서 너무나도 비슷한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법률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의 메시아적 소망은 지구상에 완전한 정의와 의의 통치를 불러 올 이슬람의 마디(Mahdi)에 상응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마디는 쉬아(Shi’ites)파 사이에서 특별한 현저함을 가진다. 결국 사제의 개념과 관례에서도 유사성을 가진다.


        비록 유대주의가 분명히 규정된 의무를 가지고 임명된 사제직을 가지고 있지만, 이슬람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사제적 직분 혹은 임명된 중재자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무슬림의 지도력 (이만, 카디, 카팁 등)의 다양한 범주는 어떤 사제적 기능을 포함한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이슬람 속에 회심자들을 받아드리고 배교자들을 추방한다. 그들은 공중 예배를 집례하며, 두 가지 큰 종교적 축제에서 희생과 의식을 집행한다. 그리고 그들은 할례와 결혼과 장례의 예식에 참여한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중보적 권력이다. 가장 뚜렷한 사람은 모하메드 자신이며, 쉬아파에서는 후세인(Husayn), 그리고 숨겨진 이맘(Hidden Imam), 그리고 대중적 이슬람에서는 쉐이크(sheikhs), 왈리(walis), 퍼(pirs)들이다. (이들은 지도자들의 일종이다)


        유대주의와 이슬람 사이에 있는 이러한 평행의 관점에서 볼 때, 무슬림 회교도에서 기독교에로의 회심은 유대인의 회심이 그 사람의 유대적 뿌리를 완성하는 것처럼 진정한 무슬림(무슬림은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하는 자를 의미한다)을 결과로 가져 올 수 있는가? 복음은 이슬람에서 부족한 것을 완성하는가? 그것은 유대주의의 이상과 매우 비슷한,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얻을 수 없는, 이슬람의 이상을 실현할 능력을 공급하는가? 회심된 무슬림들이 이전과 같은 하나님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면서 계속적으로 예배할 것을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우리의 용어로 볼 때,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의 회심은 "내부인" 또는 "외부인"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유대인이나 무슬림은 복음의 짜 맞추기(퍼즐)에서 당연히 놓여져야 할 마지막 조각이 될 만큼 지식의 충분한 틀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유대인과 무슬림 신앙체계의 근본이 오류에서 영향을 받았기에 회심된 유대인과 무슬림들은 새롭게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추상적으로 답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무슬림 또는 유대인의 개인적 신앙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보통 생각되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단일적으로 통일된 종교가 아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큰 맥이 있다. 하나는 순니(Sunni)파요 다른 하나는 쉬아(Shi’ites)파이다. 각 파는 정통 무슬림, 대중 무슬림, 그리고 수피(Sufis)파와 같은 많은 계파들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슬람은 성격상 매우 혼합적이다. 모하메드 이후부터 이슬람 이전의 아랍 종족의 종교적 요소를 비롯하여 많은 정령적인 특징들이 이슬람에 들어갔다. 지금 세계에는 이슬람 가운데 수많은 지역적 다양성이 있다. 예를 들면, 대다수의 인도네시아 무슬림들은 서로 다른 정도로 힌두교, 불교, 신비주의, 그리고 전통적 종교(정령주의)를 흡수하였다. 이것은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말레이지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있는 지역의 무슬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사실 모든 무슬림의 70%가 정통 이슬람에 반하는 토속에 영향을 받았다.


        유대주의 역시 정통으로부터 보수까지 그리고 개혁으로부터 재건까지 여러 종류의 신앙과 관례를 가지는 만화경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대주의가 현대적 사고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의 많은 유대인들이 세속주의를 받아들였다. 비록 그들이 유대인으로 남아 있지만, 그들의 신앙과 관례는 구약의 계시로부터 너무 이탈되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나 목적적으로 볼 때 외부인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세속주의자들이다.


        유대인들이나 무슬림들이 내부적 혹은 외부적 회심을 경험하는가를 추상적으로(이론적으로)결정하는데 있어서의 우리는 그다지 무능력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두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신앙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구인들의 신앙과는 달리, 유대적 그리고 회교도적 신앙은 매우 밀접하게 공동체, 자기 정체성, 그리고 국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회심은 신앙을 요구하는 교리로만이 아니라 그들의 공동체, 정체성, 그리고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회교도들에게 미치는 복음의 영향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틀 안에서 고려되어져야만 한다.



1. 공동체 안에서의 생존


        유대민족의 역사는 생존의 이야기이다. 비록 이것이 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나치에 의해 의도된 유대민족의 학살이 가장 신랄한 것이지만, 그 투쟁은 유대인의 삶 혹은 의식으로부터 결코 멀지 않다. 많은 “기독교” 혹은 회교국들 가운데서 소수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은 "손님"으로서 위치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쓸모 있는 낯선 자들"로서 여겨졌다. 그 결과 그들은 불안한 존재였다. 18세기까지, 어느 국가도 그들에게 법의 보호를 베풀지 않았고 그들을 시민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소수민족으로서 살아남는 것을 배웠다. 가장 중요한 생존법 중 하나는 대다수의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들을 회심시키려는 대다수의 시도에 저항하는 능력이었다. 유대인들은 조소를 거절의 잠정적인 무기로 사용했다. 경멸이 실려진 그러나 유모로 가장된 비웃는 웃음은 생각지 못한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어떤 유대인도 감히 사제들의 개종에 관한 논의를 비웃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제들은 세속적 권위의 지원을 종종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신성모독을 방지하는 법도 있었다. 그러므로 랍비들은 유대인이 기독교의 교리를 믿는 것이 불가함을 보이기 위해 몇 가지 영리한 주장들을 고안해냈다. 이 주장들은 삼위일체, 성육신, 대속, 신약의 일관성과 같은 중요한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히브리 성서의 유대적 이해를 대립시켜 놓았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주의 깊은 해석을 준비한 그리스도인들은 랍비들이 그들의 논리적이고 잘 준비된 답변들에 의해 전혀 설득당하지 않자 크게 실망하였다. 이 학자들은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저항이 성경으로부터 나온 교리의 정확성을 보이는 것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알지 못했다. 그 유대인들은 그들을 "목이 곧은" 그리고 "마음이 강팍한' 등으로 묘사한 성경의 말씀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각 진영에서 적대적인 주장들을 준비하지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서의 공식적 논쟁은 많지 않았다. 때때로 교회적 명령들이 유대인들을 공식적 논쟁으로 이끌었지만, 그것들은 주교들에 의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식으로 계획되었다. 자기보존의 수단으로, 유대인들은 거의 변동 없이 자신들의 것을 유지하였다. 사실 게토(ghetto)라는 단어는 유럽의 도시들에 사는 유대인들의 집단을 말한다. 이러한 유형은 중세에 생겼으며 오늘날까지 지속되었다. 같은 장소에 살고 같은 민족성을 가지는 사람들은 같은 종교를 믿는 일반적인 기대가 있어 왔다. 이 기대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유럽에 있는 다른 집단들에게도 마찬가지 였다. 폴란드에서의 종교적 신앙의 다양성은 곧 많은 마을들이 서로 왕래하고 교류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많은 마을들과 읍들이 로마 카톨릭이었고 동부 국경근처에는 많은 마을들이 러시아 정교회였고, 프러시아 국경근처에는 몇몇 마을들이 루터교였다.


        심지어 많은 도시들은 같은 신자들이 모여 사는 범위에 의해 지방의 경계로 나누었다. 제정 러시아법 밑에서 서로 다른 소수민족들은 서로 다른 권한들을 가졌는데 유대인들보다 적은 권한을 받은 민족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러시아의 대도시들은 유대인에게는 "금지구역"이었다. 그러나 유대교 자체에서도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구분하였다. 그 예로, 유대인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 공동체 안에 살도록 요구하였으며(열 명의 유대인들은 미냔(minyan) 혹은 기도 정족수를 위해 필요했다), 안식일에 2,000큐빗 이상 여행을 금지하였고 그들이 먹는 고기를 정결한 도살자에 의해 도살되고 판매되는 고기로 제한했다. 대다수의 종교가 그들을 배제하던 안하던지 상관없이 유대인들은 아직도 어떤 요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동체들을 이룰 필요가 있었다.


        비록 각 유대인 공동체가 그 자신의 역사와 경험을 반영하는 다소 다른 문화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유대인 공동체들은 유대적 종교와 정체의식에 의해 단결되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유대인들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이방인들을 배제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공동체들은 주위의 공동체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문화를 흡수했다. 예를 들면, 1492년에 스페인과 포루투갈로부터 추방된 유대인들은 지중해 지역의 국가들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페인어로부터 분류된 라디노(Ladino)라고 불려지는 은어를 계속 사용했다. 중앙 그리고 북부 유럽의 유대인들은 독일어에 기초한 이디쉬(Yiddish)라고 불려지는 언어를 사용했다. 유대인 공동체들은 상이한 음식과 관습을 가졌으며, 그들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유대인의 명절들을 지켰다. 서로 다른 결혼 관습은 주위의 문화를 반영했다. "기독교" 나라에 사는 유대인들은 일부일처주의를 실시했다. 일부다처에 대한 탈무드의 금지규정이 없기 때문에, 회교도들 혹은 조로아스터교도들 사이에 사는 유대인들은 한 아내 이상 갖는 것을 허용했다.


        유대인이 되는 것은 유대인 공동체 안에 사는 것을 포함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공동체 밖에서도 그 사람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실제이든 상상이든). 반샘족주의에 대한 유대인의 두려움은 밖에 나가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을 두렵게 하였다. 회심에 관한 유대인의 지식은 유대주의로 회심한 이방인들을 위한 랍비적 요구에 기초하였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회심한 유대인들에게도 같은 요구가 적용된다고 추정했다. 유대교에로의 이방인의 회심은 마치 룻이 에돔에 있는 그녀의 가족을 떠났던 것처럼 회심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전의 종교, 가족, 그리고 전통을 버리고 그들의 민족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미쉬나(Mishnaic)와 탈무드(Talmudic) 시대의 랍비들은 유대교로의 회심을 위한 절차와 규정을 개발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대교로의 회심은 믿음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다른 종교의 새로운 공동체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회심은 법적인 절차였으며,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의 원리는 없었다. 바빌론 탈무드는 이 회심의 과정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우리의 랍비들은 이렇게 가르친다. 현재 어떤 사람이 개종자가 되기를 원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받는다. 즉 '당신은 무슨 이유로 개종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지금 이스라엘이 핍박을 받고, 억압당하고, 멸시당하고, 이용당하고 고통에 의해 진압당하는 것을 모르는가?" 만약 그의 대답이 "나는 알고 있으나 부족하다"이면, 그는 받아들여지며, 몇 개의 사소하고 중요한 교훈을 받는다. 그는 이삭줍기, 잃은 곡식단, 구석, 그리고 가난한 자의 십일조와 계명을 소홀히 하는 것, 즉 죄에 관해 교훈을 받는다. 그는 역시 계명들을 어긴 것에 대한 벌에 대하여도 듣는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이와 같은 말을 듣는다. "이와 같은 상태에 들어오기 전에 만약 당신이 쇠기름을 먹었으면 '카렛'(유대 백성으로부터 삭제 혹은 단절)으로 처벌받지 않을 수 있으며 안식일을 더럽혔어도 당신은 돌에 맞는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쇠기름을 먹으면 당신은 카렛으로 처벌되며 안식일을 더럽히면 돌에 맞는 벌을 받을 수 있다.

        계명들을 어길 경우에 받는 벌에 대해 알았을 때, 그는 그것들을 지켰을 경우에 주어지는 상에 대해 듣는다. "앞으로 올 세계는 오직 의로운 자들을 위해서 준비되었다. 현재 이스라엘은 너무 많은 번영과 너무 많은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설득 당할 수도 있고 단념할 수도 있다. 그가 받아들이면, 그는 할례를 받는다 ‥‥ 그가 나아지자마자 그를 깨끗이 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다(침례). 그의 침례식에 두 사람의 배운 사람들이 그의 곁에 서야만 하며 몇 가지 사소한 계명들과 몇 가지 중요한 계명들을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그가 침례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인으로 여겨진다.

        여자 개종자인 경우, 두 사람의 배운 사람들이 밖에 서서 그녀에게 몇 가지 사소한 계명들과 몇 가지 중요한 계명들로 교훈을 주는 동안 여자들이 그녀를 물이 목까지 닿도록 물속에 담근다(47:a-b).”


        곡식 단의 법과 가난한 자의 십일조에 관한 언급들은 회심자들로 하여금 룻기와 그녀의 나오미의 진술에 관해 알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룻의 진술은 이렇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1:16). 이 절차는 간단해 보이지만, 유대법에 관한 한, 그것은 많은 세칙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오늘날 비정통 랍비하에서 이루어진 회심의 가치에 대해 열띤 논의가 있다. 회심자는 모든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키며 적법한 랍비들에 의해 전통적인 절차를 따르도록 함으로써 유대인 공동체 내에 그 사람이 자리를 취할 수 있도록 확인되어진다.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회심자들이 그들의 가족과 국적과의 관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혹은 정통 랍비들의 기준이다. 보수적인 그리고 개혁적인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 관대하다.


        유대주의로의 회심이 새로운 백성의 일부가 되기 위해 그들의 가족을 버리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에로의 회심자들도 반드시 유대인들을 버려야만 한다고 추론한다. 사실 1978년에 크네세트(Knesset, 이스라엘 국회)는 이스라엘에 있는 선교사들이 기독교로 회심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돈을 주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것에 대한 그들의 염려에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 법은 복음주의적 회심의 성격에 관해 크네세트의 오해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 국가가 부분적으로 회심을 통해 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명히 회심한 유대인은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라는 가정이 있다.

    
    회심자를 배제하기 위해 어떤 랍비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은 죄인으로 여겨져야 하며 그 동료 유대인들에 의해 멀리 떠나야한다고 가르친다. 회심자는 유대인이 누리는 모든 특권을 버리고 유대인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으로서의 모든 의무는 갖는다. 아이러니컬하게 그가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이것은 그에게 죄의 짐이 된다. 한편 회심자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배제된다. 다른 한편 그는 공동체를 떠났기 때문에 랍비들에게 저주를 받는다. 회심자는 "도대체 승리가 없는" 상태에 놓인다.


        기독교 회심이 유대인의 공동체를 깨뜨린다는 두려움은 몇 가지 다른 사실들과 더불어 결합된다. 첫째, 유대인들의 수가 감수한다는 점이다. U. O. 슈멜쯔(Schmelz)와 써지오 페르골라(Sergio Della Pergola)에 의하면, 세계의 1,300만 유대인들은 1982년에 제로 성장에 다다랐다. 주요 문제는 낮은 생산성이다. 어느 연구 조사에 의하면,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영국의 유대인 인구는 410,000로부터 354,000으로 줄었다. 이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비록 고통스럽게나마 살아남은 민족에게 경고하는 암시임에 틀림없다.


        둘째, 비유대인들과의 결혼은 지구적 현상이 되고 있다. 프랑스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파리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결혼율은 50%이다. 1971년 미국에서 유대인의 비유대인과의 결혼은 32%이다. 1976년에 그 비율은 40%로 올라갔고,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유대인의 타민족과의 결혼율은 더 높다.


        셋째, 경고를 위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만족과 동화의 점증하는 문제들이다. 너무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인들로서 살지 않고 다른 유대인들과 관계하지 않는다. 유대교 기관인 히브리 유니온 대학 총장 알프레드 고트솰크(Alfred Gottschalk)에 의하면, "미국의 반 이상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공동체의 삶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회당에 다니거나 기타 다른 유대인 기관에 속해 있는 것을 포함한다.


        유대인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종교는 초문화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족과 공동체와 나라를 보는 관점과 밀접하게 관계하는 요소이다. 그리스도에게로의 부름은 단순히 그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유대성을 버리고, 그의 가족을 버리고, 그의 나라를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치에 의해 요구 당했던 것과 같은 죽음과도 같은 위협이다. 랍비들은 유대인을 없애는 두 가지 방법은 '그를 죽이거나 그를 회심시키거나이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슬람 공동체에도 놀랄 정도로 비슷한 그리고 비교할 만한 요인이 있다. 비록 이슬람 공동체들의 생존의 문제는 눈에 띄지 않고 이슬람의 역사는 유대교의 역사와 상당히 다르지만, 이러한 요소는 신자가 세례를 받을 때 아주 분명해진다. 세례는 신자가 자신을 그리스도와 공적으로 동일화하는 결정적인 단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믿지 않는 공동체로부터 구분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변화는 윤리적 행동과 삶의 양식의 변화된 기준에 의해 증명된다.

  
      회교 공동체는 이러한 자기 구별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용어로서가 아니고 신분의 변화로서 해석한다. 종교적 진리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근원으로서의 이슬람을 부인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을 그 공동체로부터 빼내올 수 있다. 세례는 구원의 근거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슬람의 배교에 관한 법은 그와 같은 이단적 행위는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한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공동체의 유익들 즉 재정적, 물질적, 법적, 사회적, 그리고 심리적 지원체제로부터 단절된다. 실제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혹은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때때로 장례식도 보류된다.



2. 교리


        유대교와 이슬람의 공동체적 의미 속에서 복음의 수용은 사회적, 문화적 충성에 있어서의 거대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특히 회교도들에게는 낯선 문화의 연장으로 여겨진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기독교는 서구의 문화, 식민주의적 지배, 착취, 그리고 제국주의와 일치된다. 소위 서구의 기독교 사회의 도덕적 퇴폐는 회교도의 경건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거절된다.


        비록 유대주의와 이슬람은 다른 신앙체계이지만, 히브리서의 수신인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오늘날 회교도들 사이에는 몇 가지 재미있는 비교될 만한 점들이 있다. 기독론적으로, 이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뜻의 최종적이고 권위 있는 중개자로서 수용치 않았다. 분명히 그들은 천사(히 1:4-2:18)와 모세(3:1-6)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그들은 예수에게 주어진 신분과 역할에 대해 경쟁자로 보았다. 구원론적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효과와 그의 중보적 능력을 완전히 수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레위족속의 제사장직과 희생적 의식을 인정했기 때문이다(4:14-5:11; 7:1-10:39). 그들에게는 구원이 믿음 하나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결예식, 안수, 어떤 음식규정에 가치를 부여했다(6:1-2:9:10, 14; 13:9). 교회론적으로, 이러한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은 몇 가지 서로 조화되지 못함(아마도 소수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히 13:17) 때문에 그리고 박해를 피하기 위해 (12:1이하) 넓은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철수했다. 이러한 세 가지 오해들은 기독교에 몇 가지 유대적 신앙과 관습을 불러오려는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의 욕망의 결과였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중요성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도록 하고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와 일치시킴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형성했던 그러한 의식들(rituals)을 다 뒤로 하며 유대교와 분명히 단절할 것을 권면했다.


        물론 중요한 차이점들도 있지만 초기 유대적 그리스도인들과 오늘날 회교도들 사이에는 몇 가지 유사점들도 있다. 그리스도에게 온 회교도들은 이슬람으로부터 버릴 필요는 없지만 깊고도 완전한 의미를 갖는 어떤 개념들을 가져온다. 계속성의 이러한 요소들은 한 분의 참 하나님, 천사들, 예언자들(성경으로 전이되어져야만 하지만), 계시된 성서, 심판,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을 포함한다. 다른 신앙들과 관례들은 더욱 의문을 품게 한다. 이것들은 이슬람의 실천해야만 하는 의무들(din)을 포함한다. 즉 신앙고백(Shahada: 하나님 외에 신이 없으며, 모하메드는 하나님의 사자이다), 기도(salat), 자선(zakat), 순례(Hajj), 그리고 금식(Ramadan), 그리고 전투(jihad)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성경적 병행구들을 가진다(사실 그들 중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성경적 기원들이 더욱 정확하다). 그러나 회교도들이 이러한 의무들을 실천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주어진 이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결과 또는 열매로 영적 행위들을 실천한다. 그러나 회교도들은 하나님 앞에 이익을 얻기 위해 선행을 실천한다. 회교도는 선행은 자비와 용서를 가져오며 지옥에서 구원으로 인도한다고 기대한다. 회교도는 이러한 의무들이 구원적 의미를 가지며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진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러한 논의의 관점에서, 과연 회심된 회교도들은 이슬람에서 그들이 전에 가졌던 의미로부터 종교적 의무의 형태들을 충분히 구별할 수 있을까?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의 경우와 같이 이 형태들의 지속적 사용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의 올바른 이해를 방해할 위험은 없는가? 그 결과는 아마도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집단도 아니요 참회교도 집단도 아닌 그 중간의 집단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이슬람, 기독교, 그리고 유대교 사이에 있는 공통점들이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에서보다는 하나의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의 전환을 좀 더 부드럽게 한다는 가정도 있다. 불완전한 그리고 궁극적으로 비효과적인 회심의 가장 큰 위험은 정확하게 기독교와 회심자가 전에 속해 있던 종교적 전통 사이에 높은 정도의 계속성이 있는 곳에 있다.


        이것은 제 3의 그리고 가장 문제가 많은 범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범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 위해 필요한 것들의 주위에 집중한다. 어려운 것들은 개혁자들이 소위 말하는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원칙들, 권위와 구원으로부터 나온다.


        첫째, 회교도들은 성경을 부패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것을 진리의 근원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다른 종전의 어떤 계시들보다 우수한 코란(Quran)의 신적 기원을 믿는다. 그 코란은 폐기가 필요한 곳을 폐기하였다. 이것은 특히 토라(Torah), 자부르(Zabur), 인질(Injil)과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성서에 적용된다.


        둘째, 이슬람은 삼위일체는 하나님, 예수, 그리고 마리아라고 잘못 믿는다. 그러므로 회교도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삼신론이라고 거절한다. 불가피하게 이것은 성육신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슬람에서 가장 큰 죄는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견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가치 있는 예언자이지만, 모하메드보다 못한 예언자였다.


        이슬람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함은 그의 십자가에서의 사역도 부인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슬람은 두 가지 이유들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불필요하였다고 주장한다. 첫째, 이슬람은 원죄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원래 인간은 선하며 오직 바른 것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알기 위한 안내를 필요로 한다. 둘째, 명령으로 용서하신다. 그가 원하는 사람을 용서하시며 원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신학적 문제들을 떠나, 십자가는 회교도들에게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그의 예언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써 불명예스럽게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회교도들과 복음사이에 있는 두 가지 교리적 장애물들은 죄와 그리스도이다. 죄의 깨달음은 회교도들의 정상적인 경험밖에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도록 동기를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회교도들은 원죄의 교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은 상당히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이슬람 문화는 죄의식의 문화가 아니라 수치의 문화이다. 가장 높은 가치는 명예의 보존이다. 특히 알라의 명예를 보존하는 것이다. 선행을 통해 용서를 구하는 동기는 개인의 잘못을 덮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더럽힌 데 대한 대속을 위한 것이다.


        성경적 신앙은 어떤 문화이건 어떤 종교이건 간에 누구나 예수가 하나님께 순종(islam)하는 수단이며 길이라는 것을 믿도록 요구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우리가 순종해야할 하나님이시다. 어떤 회교도들도 예수를 이러한 측면에서 보지 않고는 구원의 신앙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예수를 보는 것은 개인 회교도들에게 약간 다른 것들을 요구할지 모른다.


        순니(정통) 회교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삶과 신앙을 위한 계시된 진리의 알려진 근원으로서 모하메드를 대신해야만 한다. 이것은 또한 코란 대신 성경을 수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쉬아파 회교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의 백성을 위한 대속물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중재자로서 후세인을 대신 해야만 한다. 대중적(혼합주의적/정령주의적) 회교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인간을 악의 세력들과 마귀의 활동으로부터 효과적으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식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정령주의적 세계관에서, 마귀의 활동은 인간경험의 영적/심리적/정신적 범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병, 사고, 재정적 재해, 곡식의 실패, 자연재앙 등을 통해) 신체적 물질적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수피(신비주의) 회교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궁극적 영적 진리의 근원으로서, 하나님과의 합일을 위한 유일한 길로서,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를 체험하는 수단으로서 인정되어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회교도들에 관한 몇몇 언급들은 확실한 차이점들이 있지만 유대인들에 관하여서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양쪽의 경우에 있어서, 복음은 변화를 포함한다. 회교도들과 유대인들은 예수가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의 통치가 시작된 약속된 메시아이며, 아버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의 죄를 소멸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워진 자들의 세계적인 가족에게 인도하시는 자로서 인정해야만 한다. 유대인들과 회교도들은 각각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보는 데 그들 나름대로의 어려움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을 믿는 신앙 없이는 하나님과의 화해는 없다. 예수를 메시아로, 죄를 짊어지고 가는 자로, 그리고 구주로 보는 것은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관계적이고, 종종 재정적인, 힘든 재평가 속에 유대인들과 회교도들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자가 되는 것과 세례를 받음으로 이 신앙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가족과 나라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적 거절은 물론 집과 직장과 수용성 (받아줌)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교들 속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복음을 수용함으로써 그들과 친했던 모든 이들로부터 떠나고 버림받은 회심자들을 위한 사명을 감당해야만 한다.



* 본 내용은 데이빗 F. 웰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홍기영 박사 옮김)"의 제 5장 내용을 본 강의에 맞추어 편집하여 올린 것입니다.



* admin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4-08-22 06:53)


  추천하기   목록보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9  제 16강 - 제 8장 미래를 향하여    김 에스더 2014/08/12 267 1459
8  제 15강 (2) - 제 7장 물질주의적인 외부인들    김 에스더 2014/08/12 271 1736
7  제 15강 - 제 6장 종교적 외부인들 : 힌두교도들과 불교도들    김 에스더 2014/08/12 250 1572
 제 14강 (2) - 제 5장 종교적 외부인들 : 유대인들과 회교도들    김 에스더 2014/08/11 265 1989
5  제 14강 - 제 4장 교회의 회심에 관한 견해    김 에스더 2014/08/11 323 2392
4  제 13강 - 제 3장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는 회심하는가?    김 에스더 2014/08/02 196 1567
3  제 12강 - 제 2장 내부인들    김 에스더 2014/07/28 227 2479
2  제 11강 - 제 1장 기독교 회심    김 에스더 2014/07/19 259 2011
1  제 10강 - 서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김 에스더 2014/07/12 236 1359

    목록보기 1
       

 
www.hendersonny.org // email: info@hendersonny.org

Copyright © 2018 Henderson Christian Seminary in New York
NY : 40-36/38 78th Street, Elmhurst, NY 11373
General and Admission Office of NY & NJ 718.810.3248 or 646.338.7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