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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봄학기 신약신학 제 7 강 어떤 희생을 치루었는가?
임 바울  2013-04-26 17:47:16, 조회 : 1,777, 추천 : 357

                                                  제 6 장
                                   어떤 희생을 치루었는가?




롬 8:32



1. 최고의 희생
        1965년 11월 13일 베트남에서 준사관 사령관 Kevin Wheatly는 압도적인 열세속에서 부상당한 동료와 함께 있기를 고집하였다. 피할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동료를 보호하면서 함께 죽어갔다. 1901년 5월 19일 남아프리카 Lambrechtfontein에서, 후방지원을 하는 동안에, 부관 Gustavus Coulson의 부하였던 상등병의 말이 총에 맞아 죽었다. 이것을 본, 부관은 내려서 자기의 말에 그를 태웠다. 얼마의 길을 간 후에 말이 부상을 당하였고, 두 사람이 넘어졌다. 부관은 상등병에게 가능하면 빨리 부상한 말을 타고 도망가라고 하였다.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심한 상처로 인해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 점증되는 포 사격이 진행되면서, 1915년 9월 3일 케냐의 Maktauan 가까운 곳에서 적들이 가까이 접근을 하였고,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기가 불가능하였다. 상관 Wilbur Dartnell는 부상당한 사람을 업고 탈주를 하려고 하였따. 그러나 적군이 부상자들을 죽일 것을 알았지만, 그들의 생명을 구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남기를 고집부렸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요 15;13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배신하기 보다는 순교를 택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너무 깊어서, 위기가 왔을 때에 그들은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Thomas Crammer가 죽음의 위협을 받았을 때에 배신을 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종교개혁의 반대자인 Mary Tudor는 영국 여왕이었고, 그녀는 켄터베리 대주교인 Crammer를 이단으로 고소하였다. 크레머가 자기의 어머니 이혼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는 이유로 복수하려는 마음에서 이런 일을 조작하였다. 화체설을 부인했다는 근거로 대주교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성찬식때에 제사장이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제로 바꾼다는 설-. 나무에 매달려 화형을 당한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크레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로마카톨릭에 대한 지신의 충성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그는 괴로워서 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를 해야 할 때에, 다시 그는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1556년 3월 21일에 나무에 매달려 화형을 당했다. Hugh Latimer, Bishop of Worcester, Nicholas Ridely, Bishop of London, John Hooper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수없이 많은 평신도들이 Mary의 통치기간동안 화형으로 죽어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16C를 순교자의 세기로만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지난 19세기를 다 더한 것만큼이나 20C에 더 많은 기독교 순교가 일어난 것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는 것만이 희생하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남녀가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살고 있다. 부모들이 자녀의 유익을 위해서 희생을 한다. 자녀들도 “병든 부모”를 돌보기 위해서 큰 희생을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좋은 직장을 버린 재능이 많은 남녀들이 있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근과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희생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설명해준다. 이런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매우 천박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이와같은 희생을 헐뜯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다른 범주에 속한다. 비교를 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부적합하다. 죄인을 위해서 죽으러 이 땅에 오신 분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났지만 죄가 없다. 그는 자신을 낮추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었으며, 그리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었다.

빌 2:9

지난 세기동안에 남녀에 의해서 행해신 희생중에 어떤 것도 다른 사람의 죄를 속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도, 어떤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희생의 결과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몇 년동안 지역부대에서 교회목사로 시무하였다. 기념식에서 부르도록 되어 있는 찬송가를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J.S. Arkwright에 의해서 작곡된 추도곡은 “작은 갈보리( 갈보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장소이다)”로서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천국에서 깊은 만족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주제넘게 언급하면서, 추도곡은 시작된다.


        “ 오래 전에, 지구가 어둡고 고요하였을 때에, 인간을 만들 진흙이 연약한 채로 있었을 때에, 우리의 구속자 그리스도가 동일한 길을 갔다. 무서운 죽음의 시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십자가는 서 있고, 어두운 심연위에 매우 밝은 별처럼 서있다. 휘장을 지나서, 승리자의 긍휼에 찬 눈이 우리 작은 갈보리를 복주기 위해서 내려다 보고 있다.”


        이것이 신성모독이 아니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주는 중압감이 너무 컸다. 나는 전통을 깨고 있으며, 아마도 어느 정도 고통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허용할 수가 없었다. 종군목사의 직분을 사직하려는 마음도 갖고 있었다. 내가 교구 목사로 있는 교회에서 예배가 이루어졌기에, 그것은 해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있었다. 나의 주된 문제는 부대의 어떤 동료들도 이런 나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가 똑같은 길을 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볼 수가 없었다. 나치의 속박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죄있는 남녀들의 희생과 죄의 속박에서 그의 백성을 구하려는 죄없는 아들의 희생을 비교하는 것이 틀렸음을 그들은 보지 못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구별하였다.

롬 5:7,8

사도 바울은 비교를 하지 않았고, 대조를 하였다. 의인(도덕적으로 결점이 있으나 스스로 의롭다고 말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죽을 준비를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관대하고 인정많은 사람- 다른 사람을 향해서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0을 구하기 위해서 기꺼이 죽으려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롭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지만 그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골 1:21
롬 5:10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면전에서 영원토록 배제되어야 할 존재들이다. 사랑이 전혀 없는 사람을 위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 사랑의 척도이다. 신적 사랑의 질(質)과 정도는 매우 비싼 값을 지불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은 요 3:16절에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요 3:16

바울은 이것을 조금 다르게 표현했지만, 답은 똑같다;

롬 8:32

하나님 아들의 희생이 모든 선한 것과 완전한 선물의 보장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제 15장에서 이 주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바울의 매서운 말에 대한 진지한 숙고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의 크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빌 2:6-8

        
2. 대속적인 희생

        “canny the can"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짊어지는 것이다. 군 복무기간동안에, 이 표현은 너무 흔해서 하루도 몇 번을 듣지 않고는 지나가지 않는다. 이것은 불의가 얼마나 많이 실행되어 지고 있는 가를 증거한다.

        군사훈련을 마치고 일어난 한 사건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50명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곧 시작될 강의를 기다리면서 Nissen에 있는 오두막에 앉아있었다. 이 무료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새롭게 창설될 부대의 마크에 대해서 농담을 나누었다. 지금 속해 있는 막사에는 벌레가 많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벌레를 무섭게 그렸다. 이것을 본 나를 미워하는 방금 승진된 상사가 있었다. 군기에 해가 디는 행동을 하였다고 하면서 그는 나를 비난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한 비난을 고통스럽게 참아야 했다.

        구약의 희생제도에서 사람들의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동물들이었다. 경배자가 제단에 동물을 가지고 온다. 안수를 하고, 죄를 고백하고, 동물을 죽인다. 이런 제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한 것으로 경배자의 죄를 사함받는다. 동물의 생명이 경배자의 생명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제도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책에서 이것이 무슨 연관을 갖는가? 오히려 구약의 희생제사는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 진노를 동시에 알려준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시사해주는 제도이다. 제사를 진해하는 방법은 매우 복잡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목적이 있음을 부각된다. 희생제사는 죄를 속해주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주님이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레 1;1-4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생물을 제단에 가지고 오면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 늘 궁금하다. 하나님 속성의 양면을 확실하게 그들은 보았을 것이다. 첫 번째로 주님이 흠이 없는 동물을 생명을 요구한다는 것은 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상을 경배자에게 심어준다. 두 번째로, 죄인의 생명대신에 짐승의 생명을 용납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배자들은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런 은혜스러운 대책이 없었다면, 하나님과의 경배자의 관계는 없었을 것이다.

레 17:11

속죄날에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나서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속죄 희생을 드려야 한다. 그날에 제사장은 희생의 피를 지성소로(성전 휘장 뒤에 있는 작은 방) 가지고 들어간다.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 지성소이다.

출 30;10

        20세가 되었을 때에 오마르 성전에 있는 큰 바위에 서 있었다. 그 곳은 예루살렘 옛 성전이 세워졌던 곳이다. 솔로몬 성전의 뜰에 있었던 번제단의 위치라고 한다. 레위기의 기록을 보면 속죄제물로서 죽었던 수천의 동물에 의해서 흘러나온 피가 흘러들어간 구멍을 유심히 보았다. 이런 잔인한 일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궁금증이 일어났다. 후에, 이스라엘 자녀의 죄를 사하기 위한 이런 피 제사의 준비는 사실 신적 사랑의 선물임을 알게 되었다. 주님이 지를 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완전한 생축의 생명을 받았던 것이다. 백성들과 언약관계을 가지기 위해서, 그는 은혜스럽게 대속물로서 죄를 속한 속죄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죄인으로부터 희생물로서의 죄의 전가는 속죄날에 행해진 아사셀 양에서 잘 그려놓고 있다. 두 개의 양이 선택되었다. 하나는 속죄제물로, 다른 하나는 아사셀 양이다. 대제사장은 아사셀 양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고백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죄책을 양에게 전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양을 광야로 보내게 된다.

레 16:20-22

        이런 희생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미리 알려주는 것임이 신약의 제자들 특히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언급하였을 때에 증명이 되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희생제사는 장래에 올 좋은 것의 그림자이고, 실체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마음을 정결하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소와 양의 피로는 죄를 완전히 없앨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 10:1

히 9:13,14

히 10:4

        구약 희생이 대속적이기에- 죄인을 위해서 동물이 죽는 것- 이것들은 하나의 완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전제하는 것이기에, 그때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또한 대속적이고 완전하다. 구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해석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구약 희생이 죄에 대한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낸다면, 구속을 위해서 준비를 함으로서 그의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때에 그리스도의 희생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사랑이 구약 희생에서보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전하게 나타났다는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에 보다 더 사랑했다거나 또는 더 완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사랑의 계시는 더 충만한 사랑의 계시가 아니다. 똑같은 사랑의 충만한 계시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서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이 방법에 의해서 그리고 이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의로움에 남아있을 수 있고, 불경건한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만 죄의 형벌을 짊어질 수 있기에, 우리가 죄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아제 받아들일 수 있다.

벧전 1:19

3. 최종적인 희생
        가좌시위에서 불만족한 노동자들은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도구를 놓고 해야 할 일을 거절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도 일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일터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일을 마치고 앉아있는 것은 만족과 완성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위하여 단번에 자신을 드린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던져준다. 앉아있는 것은 그가 한 희생이 항상 효과적이고, 그럼으로서 최종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히 10:12

        대조적으로, 구약의 제사장들은 그들의 일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앉아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고 같이 설명한다.

히 10;11

        특별히 저녁에 자주, 피곤하기 때문에 앉아있는다. TV를 보면서 잠이 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곤하기 때문에 잠을 자지는 않는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것은 육체적인 휴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구약 제사장들의 마치지 못한 일과 대조하기 위해서 완성된 사역을 설명하는 저자의 방식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가 앉아있다고 말한 것에는 두가지 이유이다. 첫째로, 그의 단번에 드린 희생이 영원히 료력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사탄에게 완전한 승리를 기다리고 있다.

히 10:13-14

        그러나 그는 게으르지 않다. 자주 그는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있다. 다시 한번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 현재 사역과 구약 제사장들의 사역을 대조한다:

히 7:23-25

이 대조는 분명하다. 구약언약에서 많은 제사장들이 있다; 신약 언약에서 오직 한 사람밖에는 없다. 그들은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있다. 그들의 제사장직을 자손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사역이 끝났기 때문에 어떤 후손도 필요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간구한다는 가르침에 성도들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가 하늘에게 자신을 반복해서 희생제사를 드렸다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우리 죄를 위한 그 자신의 희생은 최종적이기에 터무니 없는 말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기를 싫어하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대표로서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마치 하나님이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다. 그를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에게 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대표로서 예수님이 오른 편에 앉아있는 것이다. 백성들을 중재하기 위해서 구약 제사장이 성전의 휘장을 통해서 지성소에 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상징적인 임재), 오른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중재하기 위해서 하나님 임재안으로 들어간다.


히 10:19-22

        게다가 하늘에게 그리스도의 임재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한다. 그의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가 언약관계에 동참할 수 있는 제사장을 갖고 있으며, 또는 KJV가 번역한 것처럼 “ 그는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았기에 우리의 언약함을 체휼한 사람이다.”

히 4:14-16

        끝으로, 그의 중보를 이해하는 일이 어렵다고 한다면, 요 17장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그가 지상에 있을 때에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를 한 것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우리가 생생하게 마음속에 그릴 수 있다면, 그의 현재의 중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 나은 생각을 우리는 가지게 된다.

<연구문제>

a. 왜 20 세기가 순교의 세대로 불리워야 하는가?

b. 그리스도의 희생과 순교자들의 희생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c. 사도 바울이 두 종류의 순교를 비교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d. 죄에 대한 구속의 희생제도를 간단하게 설명하라

e. 이 제도가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표함을 설명하라

f. 그리스도의 두가지 사역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구약 제사제도는 무엇인가?

h. 그리스도의 희생은 최종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I. 이런 관점에서 카톨릭의 미사의 정당성은 옹호될 수 있는가?

j. 그리스도가 보좌 우편에 앉아있다는 구절의 부정적인 의미와 적극적인 의미를 분류해서 설명하라




P.S. 제 6 장 “어떤 값을 치루었는가?”는  FRANK ALLRED의 " Rediscovering God's Love"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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