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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봄학기 신약신학 제 11 강 어디에서 사랑과 의가 만나는가?
임 바울  2013-05-27 08:40:13, 조회 : 1,845, 추천 : 379

                                                 제 10 장
                                  어디에서 사랑과 의가 만나는가?


삿 6:3

1. 하나님의 거룩성 이해하기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매우 비싼 향유를 취해서 예수님의 발에 쏟았고 자기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그의 발을 씻겼다(요 12:3). 집안에 있는 모든 방이 향유의 향기로 가득 찼다. 향기가 나지 않는 구석이나 틈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의 거룩성도 이와 같다. 거룩성은 그의 모든 존재에 충만하다. 부정적으로,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무한히 순수하고 도덕적으로 완전하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거룩하며 자신에게 영광이 되는 일만 하신다는 뜻이다. 창조의 장엄함과 구속의 계획에서 나타난 놀랄만한 은혜를 고려하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목적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이 문제를 고려해보자: 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었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에서 완전한 대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인간의 죄는 그의 거룩한 속성에 모욕되는 것이기에, 죄에 대한 무서운 결과로부터 어떤 사람도 보호할 의무가 하나님에게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서도 온전한 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거룩성과 의를 배제하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현재의 추세는 복음의 중요한 의미들을 없애버렸다. 예를 들면, 마치 복음의 모든 본질을 대표하는 것처럼 요 3:16절을 하루에 몇 번이나 우리는 듣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하고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전체 구절은 멸망하는 자리에서 믿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었다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세운 법의 저주에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성경구절은 또한 믿지 않게 되면 여전히 저주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는 것도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취하지 않는다면 결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사랑의 계획과 그의 의의 요구는 항상 함께 취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을 고려해보라.

롬 3:26

그리스도의 죽음은 두 가지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의 목적을 성취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요약하는 구약의 가장 유명한 구절은 모세에게 그의 영광을 설명할 때에 발견된다.

출 34:6-7

여기에 그의 사랑과 그의 의의 중요한 균형이 준수되고 있다. 그는 수천 세대에게 그의 사랑을 주시지만 그가 죄에 대해서 온화하다는 치명적인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의 의가 만족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신적 사랑과 신적 의가 균형이 유지 되지 않는다면, 복음 진리의 이탈은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맺어야 한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속 교리의 거절은( 벧전 3:18절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다고 가르친다) 최근에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재앙의 한 예가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의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에 실패는 복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또한 성도들에게 하나님 사랑에 대한 참된 감사를 빼앗아간다. 그러한 평가는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고 거룩한 사람을 살아가는 강한 동기로서 작용하기에, 이런 평가를 잃어버리는 것은 심각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에 대한 그의 전형적인 진술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로마서는 시냑에서 복음의 가장 간단한 제시로서 바르게 평가받고 있다. 바울은 질문에 답을 하거나 연설을 하는 일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편지 서두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을 한다.

롬 1:18

제 3 장 중간까지 그는 사랑의 선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하나님의 의-. 왜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해되고 평가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배경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적 사랑과 의의 균형을 잃어버림으로 치러야 하는 값이 엄청나다. 신적 사랑과 이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우리들의 몸부림은 - 적어도 죄를 진부하게 하려는- 우리 메시지의 효과를 크게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악화시킨다.


3. 하나님의 거룩함을 선포하자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예리한 인식은 복음을 이해하는 것에 필수적인데, 왜 우리의 가르침과 설교에 이런 것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가? 성도로 하여금 거룩하도록 부른 이유에 대해서 왜 교회는 침묵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한 삶에 대한 계시가 구약에서처럼 똑같은 타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인상이 주어졌다. 우리가 말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가 심각하지 않다는 개념을 교정해야 한다는 말들이 들려오고 있지 않다(롬 11:22). 아마도, 죄는 우리 사회가 인정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기에, 많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떠나버릴 것이다.

        기독교인의 거룩성에 대한 주제에 대한 가르침의 부족은 과거 250년 동안에 일어난 기독교인의 거룩성에 대한 많은 거짓되고 모순되는 사상에 대한 척도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들은 많은 아픔과 혼란을 일으켰다. 온전함이 믿음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다고 어떤 사람들은 가르친다. 온전함은 완전히 죄가 없는 것이거나 또는 모든 알려진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삶에서는 불가능하다. 거룩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한 행위에 의해서 얻어졌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성도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단 한 번의 행위로서 박멸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내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즉각적인 거룩성에 의해서 많은 사람에게 절망감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이런 관점들이 거의 버려졌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아직 제자리에 놓지를 못하였다. 과거 논쟁동안에,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기독교인의 삶에서 죄는 아주 심각하다는 것에 거의 동의를 한다.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성도들이 개인적인 성결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몇 몇 사람들만이 내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고뇌를 한다. 이 고뇌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울부짖는다.

롬 7:24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는 열정들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다. 그의 구속적인 사랑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명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다. 교회가 약하고 힘을 발휘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의아해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죄의 심각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그곳에서 나아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삶을 위한 그의 부르심과 분리될 수 없다는 핵심적인 진리의 재발견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완전한 형상으로 재 창조될 때까지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만족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이다.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살전 3:13-14

하나님의 사랑에 중점을 두고 그의 거룩성을 덜 강조하면 우리 사회가 복음을 더 많이 용납할 것이라고 어리석은 개념을 품고 있는 이런 설교자들은 그들의 위치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죄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도망가게 할 것이라는 원리를 가지고 일을 하게 되면, 우리는 진심으로 회개를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건강에 해롭고, 비생산적이라는 사실은 진리에서 도망가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진리는 견고히 세워져야 한다. 많은 사람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없는 죄가 있다.

롬 3;19-23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선포에 불신자들로부터 받는 성난 반응은 희생의 첫 단계가 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렸다.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였을 때에 그들의 분노는 끝이 없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정할 때까지 거의 1년 이상을 나에게 화를 내었다. 회심 뒤에 한 사람은 나의 교역자들에 의해서 소속감을 강탈당하였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에게 말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베레아 사람처럼 그는 성경을 탐구하였고 이런 말들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의 위대성을 찬양하려면,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기에, 사랑을 하나님의 거룩성에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

엡 3;18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을 함께 유지하면, 일관적으로 율법 폐기론의 악을 없애는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지킬 의무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율법 페기론은 이단이다. 이 오래된 사상들이 우리 시대에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믿음에 의해서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칭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 형벌을 받지 않고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게 만든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전혀 아니다. 종교 개혁 기간 동안에 로마 가톨릭은 영광스러운 칭의 교리는 율법 폐기론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특권을 사용할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롬 6:1,2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고, 도덕적인 해이함을 가지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아래 있다는 선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 심각한 오해에서 이런 오류가 나온다(롬 6:14).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사도 바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도의 뜻은 우리 구원의 조건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저주아래 있지 않다.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들을 법의 의무에서 해방시키지 않았음을 계속해서 주장한다.

롬 6:15-18

        성도들이 이제 죄를 지어도 된다는 생각의 어리석음을 폭로해야 한다. 의롭다함을 받은 뒤에, 죄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를 한번 상상해보라.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호의(kindness)는 결코 되풀이 되지 않는 단 한 번의 회심으로만 인도될 것이다. 성화는 구원 얻은 믿음의 확실한 결과가 더 이상 아니다(살후 2:13). 우리 구속의 목적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예수를 얼굴로 대면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형상을 점점 닮아가야 한다는- 전부 버려지게 될 것이다(요일 3:2-3). 이런 종류의 신앙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좋을까?

        마지막 그러나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들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에, 우리의 입장에서 더 이상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자동으로 해결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이웃의 부인에게 음욕을 전혀 꿈꾸지 않기에, 이것을 금지하는 율법을 잊어버려도 된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원리상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그를 위해서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준을 성취할 수 없기에, 사랑의 의무를 우리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고, 우리가 얼마만큼이나 모자란 가를 기억나게 할  계명이 여전히 필요하다.


4. 죄의 심각성
        누가 인간 타락의 깊이를 잴 수 있는가? 해방 뒤에 나치의 수용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도 나는 그 장면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화로가 놓여 있는 방에는 산더미처럼
뼈들이 널려 있었고, 탄 시체의 냄새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영국 군인들은 13,000명의 매장되지 않는 시체를 찾았고, 해방을 맞이하고 나서 일주일 뒤에 같은 숫자의 사람들이 다시 죽었다. 6백만 명의 유대인이 이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스탈린은 수백만 명의 자기 민족을 살해하였다. Pol Pot은 캄보디아 국민의 1/3을 죽였다. 중국에서도 수백만 명이 불법으로 살해당하였다. 남아프리카에서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최근에 르완다의 Hutu 족속이 그들의 이웃인 Tutsis 사람 800,000명을 살해하였다. 지난 백 년 동안에 약 1억의 사람들이 사람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이런 것이 필요하고, 결국 선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사 5:20). 약 1960년도에 , 윤리의 문제에 대해서 맨체스터 성당에서 영국 국교회ㅢ 목사가 강의를 하였다. 그에 의하면,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하였다. 옳고 그름은 그 당시에 처한 상황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내 아이가 배가 고프면 그들이 음식을 훔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웃의 부인을 사랑하면 관계를 맺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1960년도 이후로, 도덕에 대한 이런 접근법이 학교에 번져나갔고, 우리 자녀들은 간음이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그들 자신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죄는 잔인한 행동, 살인, 도덕적 방탕과 같은 행위로만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죄들이 성행하는 곳에 살았다.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인 죄에 많은 화를 내었다. 산상수훈에서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가르쳤다. 마음은 우리의 말과 행동이 흘러나오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마 5:21-22. 27-28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우리 사회가 특정한 것을 죄로 평가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 주제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인간 이웃에 있는 죄는 질병과 같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것은 증상이 아니라 조건이다. 사람이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은 죄에 의해서 손상을 입었다. 그의 아들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인간 본성은 소망이 전혀 없다. 우리의 죄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영원토록 멸망시킬 것이다. 본질적으로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기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즐기고 있고, 앞으로 즐길 수 있도록 정해진 우리의 창조주와 구속자와의 기쁜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이 죄이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임을 새롭게 의식해야 한다(롬 7:12). 그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거룩한 기준이다. 이것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인식되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하였다.

롬 7:7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불쾌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함에 빚진 자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알기 위해서 계명이 필요하다. 주님에 대해서, 이스라엘 다윗 왕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시 5:4

또한 하박국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한다.

합 1:13

그들의 말을 날의 말로 삼고 자주 그것을 되풀이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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