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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봄학기 신약신학 제 10 강 세 분의 사랑
임 바울  2013-05-16 16:13:36, 조회 : 1,655, 추천 : 356

                                                        제 9 장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고
성령님이 나를 사랑한다.

벧전 1:2


1.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 성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 성령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 그러나 세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한 하나님 안에 있는 세분에 의해서 사랑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삼위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 이것은 조금 전문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할 때에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세 분 안에 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세 분은 각각 동일한 사랑과 동일한 목적을 다른 두 분과 같이 마음에 담고 있다.

        우리들의 문 앞에 종종 나타나는 ‘여호와 증인’의 모든 사람들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부인하다.( 그들은 또한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한다. 그러나 이런 논증은 반박할 가치가 전혀 없다.) 이단의 회원들은 새로운 성경 번역에 근거한 잘못된 학자들에 의해서 제공되는 성경 해석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불이익을 갖는다. 이런 버전의 번역자들은 유능한 성경 번역자들의 고생을 무시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가르침에 맞도록 성경 본문을 자유롭게 바꾼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성경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하나님이고, 아들이 하나님이고, 성령이 하나님이고, 또한 성령은 3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피할 길이 없다.

        총선에서, 두세 명의 후보자들이 경선을 벌인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 선택이 된다. 다른 사람들은 패배를 인정해야만 한다. 몇 명의 수상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세 하나님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라는 것은 절대자를 말한다. 그로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다. 세 분 사이에는 어떠한 갈등이나 경쟁이 없다. 물론, 각 분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일에 다른 기능을 하시지만, 경쟁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이다. 이 세 분 모두는 완전히 조화가운에 살아간다.

        불가사의한 것을 설명하기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어떤 사람은 말을 한다. 세 개의 잎을 갖고 있는 클로바( clover)와 같다. ‘아니다’라고 다른 사람은 말한다. 이것은 방( room)과 같다. 방은 하나이지만 3차원의 면을 공간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삼위일체를 사람이 구성요소로 비유를 한다. 사람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몸과 혼과 영이다. 이런 시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유일한 것은 모두가 무익하다는 것이다. 거룩한 삼위일체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다(이 세상에는 삼위일체를 비교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 계시하신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신앙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계시된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다고 해서 우리가 계시된 진리를 거절한다면, 기독교 신앙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논리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거절해서도 안 된다.

        그때에 삼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버지, 아들, 성령이 거룩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경험으로 우리는 충분히 안다. 물론 경험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삼위 일체 교리를 공식화한다. 우리의 경험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 일치시켜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안다(롬 8:15). 그리스도가 항상 우리의 형제가 됨을 알고 우리는 기뻐한다( 히 2:11). 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아버지에게 기도한다.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롬 8:16).

        오랜 성공회 배경을 갖고 있는 독자들은 아타나시아 신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를 적합하게 설명한 신조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에서, 감독의 비서로서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이 능력 때문에 AD 325년에 개초된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을 하였다. 그 당시에 그는 29살 밖에 되지 않았다. 후에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었다. 그의 신조는 , 아타나시우스 자신이 쓴 것은 아니지만, 다소 육중하고, 합법적이다. 특히 처음 나왔을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신조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즉 하나이신 삼위 하나님을 예배한다.
인격을 혼동해서도 안 되고, 본질을 분리해서도 안 된다.
한 분 성부와 또 다른 분 성자와 또 다른 분 성령이 존재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성과 동등한 영광과 함께 영원한 위엄을 가진다.
성부의 본성이 바로 성자와 성령의 본성이다.
성부도 피조 되지 않았고, 성자도 피조 되지 않았고, 성령도 피조 되지 않았다.
성부도 무한하고, 성자도 무한하고, 성령도 무한하다.
성부도 영원하고, 성자도 영원하고, 성령도 영원하다.
그러나 영원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그와 같이, 피조 되지 않은 본질이나 무한한 본질도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성부도 전능하고, 성자도 전능하고, 성령도 전능하다.
그러나 전능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신이고, 성자도 신이고, 성령도 신이다.
그러나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주님이고, 성자도 주님이고, 성령도 주님이다.
그러나 주님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기독교 진리가 우리에게 세분이 각기 신이며 주님임을 인정하도록 요구하지만, 동시에 세계교회의 신앙은 우리에게 세 신이나 세 주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금한다.
성부는 타자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피조 되거나 출생되지 않았다.
성자는 만들어지거나 피조되지 않았지만, 오로지 성부에 의해 출생되었다.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피조되지 않았지만,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세 아버지가 아니라 한 아버지가 있으며, 세 아들이 아니라 한 아들이 있으며,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이 있다.
이 삼위일체에서 선후나 대소가 없다. 세 분 모두 다른 분과 같이 영원하고 동등하다.
따라서, 상술한 대로, 일체가 삼위로, 삼위가 일체로 예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삼위일체를 믿어야 한다. “

한 분의 사역은 보충적이거나 다른 분의 사역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은 이 정의에 의하면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기 위해서 학식 있는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세 분이 똑같은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삼위일체에 대한 것을 논할 때에  눈을 깜짝 거리면서 말을 한다.  보통 신성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 돌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세분이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일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각 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함을 인식하는 일에 종종 실패를 한다. 보통 계획은 아버지에게 돌리고 있고, 계획의 실행은 아들에게 돌려지고 있으며, 성령에 의해서 성취된 복들이 우리들에게 적용이 된다.  이런 진술대신에, 그들은 각 분이 독립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서 예수를 알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은 믿고 있으며, 성령이 없이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함으로서, 성령을 여전히 우리들의 삶에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다.

        보통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 하나님의 연합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연합을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분명하다. 아들을 알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 없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요 14:6-7

성령을 이방인으로 만들고서 예수님을 아는 일도 또한 불가능하다.

롬 8:9


2.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
        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잴 수 있는가?

빌 2:6-8

하나님이신 그는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요 1:1,14). 하늘과 땅을 창조한 그는 사람이 되었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대속물이 되었다. 우리의 사랑을 전혀 필요로하지 않는 그는 죽기까지 고민과 고통을 받았다. 죄가 전혀 없는 그는 죄의 형벌과 권세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저주를 자청해서 받으셨다(갈 23:3). 죽음은 그와 전혀 상관이 없지만 그는 죽기까지 순종하였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였다. 그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우리 속에 전혀 없고 거절 받아야 하지만, 그는 자기가 가야 하는 길을 갔다.

고후 8:9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복종하였다는(요 14:28)말에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이 있다. 아들보다는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해석을 하려는 자들이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라면, 복종은 열등한 것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고 말했을 때에, 그는 성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아래 있으며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사람의 아들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고 다시 죽을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죽음이 왕 노릇을 하지 못한다. 성육신으로 사람이 되었을 때에, 이것은 분명 낮아지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영화롭게 하였기에 이제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항상 아버지에게 복종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추가적으로, 그리스도가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였을 때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복종하였다고 바울은 말한다. 이것은 복종한 것이 중보자로서의 직분을 수행한 그리스도를 말한다. 찰스 핫지가 지적한 것처럼, 왕의 아들은 속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하다. 그러나 직분적으로 열등하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와 동등하지만, 직분적으로 종속을 해야 한다. 어떤 어려움이 여기에 숨어있는가? 나의 아버지의 아들로서, 항상 나는 그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보다 열등하지 않다. 같은 것이 영원한 아들에게서 해당한다. 그리스도는 구속자 그리고 중보자로서의 직분 때문에 아버지에게 복종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내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3. 성령이 나를 사랑한다.
        과거 40년 동안 삼위 중에 세 번째인 성령의 사역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 삼위에 대한 가르침에 심각한 무지에 의해서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어떤 사람은 성령을 비인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예수님을 사랑의 구원자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같이 사랑스러운 분이지 또는 능력인지 또는 어떤 종류의 강력한 영향력인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 사역과는 별도의 것으로 또는 보충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보다 더 고급의 그리스도인으로 보았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성령의 사랑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는다.  확실히 성령의 사역은 그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놓는 분이시다(롬 5:5).

        거룩한 성령이라는 타이틀은 아버지 또는 아들보다 더 비 인격적인 것은 사실이다.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는 성경구절들은 쏟아놓는다( 행 10:45).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들에 대한 구절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인격성에 대해서 놀랄만한 증거를 제공한다.

고후 3:17

이 구절을 보면 주제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령이 아들과 아버지와 똑같은 관계를 갖고 있는 분임을 사도는 보여주고 있다. 성령이 인격이 아니고 능력이나 영향력이라면, 성령과의 교제는 불가능하다.

빌 2:1

        성령이 하나님이기에, 삼위 중에 성령 하나님이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는 나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본질을 성경이 묘사하는 것을 통해서도 이것은 확실하다. 구원자의 완성한 사역의 혜택을 그들에게 성령은 적용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한다.

        두 가지 예가 이 점을 강조한다. 첫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고, 이렇게 성령을 받은 것을 양자의 영으로 받았다고 말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로서의 새로운 신분을 우리가 가졌음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분이시다. 그럼으로써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다.

롬 8:15-17

        두 번째로, 성령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위해서 중재하시는 분이다. 성령은 우리의 약함을 도우신다.

롬 8:26-27

여기에 우리는 커다란 위로가 있다.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에, 곤란을 당하고 있을 때에 우리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 우리를 위한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응답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어떻게 성령의 사역을 사랑의 사역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성령이 주시는 복이 아버지에 의해서 계획되고, 아들에 의해서 성취된 것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모든 기쁨과, 모든 복들과 다가올 모든 영광에 대한 시식은 성령 때문이다. 성령은 진짜로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마음에 담아야 할 세 가지 경고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해주고 있다. 성령의 거룩하고 사랑하는 사역에 초점을 맞춘 경고이다. 첫 번째로,

엡 4:30

두 번째로 성령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말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에 의해서 슬픔을 가질 수가 있다. 사랑은 이런 식으로  상처받기 쉽다.

고전 6:19-20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않도록 성적 방탕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세 번째로

고전 3:16-17

여기에서 사도는 교회를 생각한다. 책임이 맡겨진 사람들은 가짜로 교회를 세워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 속에서,

엡 1:14

엡 1:5

사랑 속에서 아들은 양자로 받아들이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기를 주셨고, 사랑 속에서 성령은 미래에 우리가 받을 영광의 보증물이 되었다.

        현대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보다 성령이 하신 일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던 곳까지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성령은 초점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한 적이 없다.

요 16:14-15

아버지와 아들과 독립돼서 일하기보다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은 그를 통해서이다(고전 12;13). 그를 통해서 우리가 아버지에게로 나아간다(엡 2;18). 그리고 성령은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해주시는 분이시기에, (롬 8:15-17), 그 분이 독립적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기원된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의 사랑의 바른 이해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이 중요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세 분 사이에- 성부, 성자, 성령- 긴밀한 사랑은 시간적으로 그리고 중요성에 있어서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을 선행한다. 세 분 사이에 있는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났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 3:35

요 5:20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은 그의 아들을 위한 아버지 사랑의 연장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랑을 받는다.

        삼위일체 사이에 있는 사랑은 오늘날 완전히 잊어버린 사랑의 국면이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생각하고 말할 때에, 세 분의 사랑에 대한 것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 손실은 중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가지는 기쁨은 우리가 아들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화된다. 그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으로 예정했다는 것은 그의 아들에게 준 영광이다. 우리가 그의 아들에게 준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값진 말씀들은 바로 이것을 설명한다.

요 17:24

        컴퓨터의 능력에 익숙한 사람들은 “hardware conflict"가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나의 제한된 이해에 근거하면, 장치의 배열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 이 두 장치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을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컴퓨터는 싸우게 된다. 놀랄만한 기술 향상을 이루었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조금 생소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무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삼위의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에게 온전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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