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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임 바울  2018-06-23 19:15:04, 조회 : 207, 추천 : 75

                                                        왜 세례인가?
        
                                                                                                      W. Robert Godfrey


개혁신학에서, 세례는 은혜의 수단이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신앙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그들이 받은 세례를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성장의 중요한 요소로서 바라보고 있는가?


1. 마술도 아니고 망상도 아니다.

우리가 성례( 세례와 성찬)을 연구할 때에, 두가지 피해야 하는 오류가 있다고 칼빈은 경고한다. 한편으로 이런 오류들을 마술의 오류라고 부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망상의 오류라고 부를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특별히 마술의 위험에 민감하다. 어떤 마술적인 능력을 물에 또는 빵과 포도주에 집어넣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은혜가 임재하는 것을 본다면 꼼짝없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여기에 보여지는 위험은 우리가 이런 물질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우리의 마음이 그를 경험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향하여 올려지지 않는다고 칼빈은 말한다. 또하나의 큰 위험은 ( 아마도 복음주의자들에게는 더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성례를 망상 또는 어떤 실제적인 의미도 없는 단순한 의식으로서 다루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령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성례를 한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것으로서 실체감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축복을 우리들의 삶에 가지고 오는 것으로 그들을 보지 않는다.


2. 탁월한 성례


세례는 신약에서 놀라웁게 현저하다. 우리는 성경적 계시의 진리가 붙잡을 필요가 있다.

주님의 사역에서 세례의 현저함을 본다. 그의 길이 세례요한에 의해서 준비되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한 사람이다. 우리 주님도 그의 공적인 사역을 세례를 통해서 시작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세례라는 말로서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기대할 때에 “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눅 12:50)”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제자에게 했던 최후의 명령은 세례를 강조했다; “[마 28:18-20]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사도 행전을 읽어가면서, 세례는 사도들의 경험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교회는 오순절날 성령에 의한 세례로 인해서 세워졌다. 사도들이 설교를 하면서, 반복적으로 사람들이 믿었고 세례를 받았음을 보게 된다. 교회는 말씀 설교에 대한 응답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에 의해서 여러 곳에서 세워졌다.


        서신서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도덕적인 권면을 위한 이유로서 세례에 대한 수 많은 언급을 본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증거한다. 따라서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삶을 살도록 성도들을 촉구한다. 롬 6장, 고전 10장, 엡 4장, 골 2장, 딛 3장, 그리고 다른 많은 곳에서 이런 종류의 권면을 만나게 된다.


        세례에 대한 성경의 진술중에 어떤 것들은 매우 강하다. 바울이 회심한 후에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행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갈 2:2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벧전 3:21절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런 강력한 표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3. 하나님의 맹세

세례에 대한 주요한 역할과 그것에 대한 강한 진술들은 하나님이 이런 성례 안에서 우리들에게 맹세를 하였음을 증거한다. 칼빈은 반복해서 우리들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맹세를 하였다고 강조한다. 기독교인이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들은 약하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서 그들에게 한 하나님의 맹세가 필요하다. 왜 그런가? 칼빈이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육체를 갖고 있지 않는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 강요 제 4권, 14장 3항) . 우리는 말씀을 듣는 귀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에 유혹과 의심으로 투쟁하는 사람들은 말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하다.   


        성례에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제시를 한다. 특별히 우리들의 감각에 말씀하는 동일한 말씀이지만, 다른 형태를 가진 말씀이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연약함과 전혀 관계가 없을 만큼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오히려, 우리가 믿음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보이는 말씀이 얼마나 값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설교된 말씀이 있다. 쓰여진 말씀이 있다. 성육신된 말씀이 있다. 영원한 말씀이 있다. 그러나 또한 연약함에 싸여있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우리의 감각에 말씀하는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연약함에 빠져 있는 우리들을 도울 수 있는 성례를 세울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믿음을 세울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유익한 물질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는 그의 교회안으로 우리들이 들어가는 예식으로서 세례를 주었다.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주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큰 응답이 있었던 오순절 뒤에 교회에 대한 시작으로 세례를 본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 [행 2:38]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에 성도의 수가 증가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3. 하나님의 맹세

세례에 대한 주요한 역할과 그것에 대한 강한 진술들은 하나님이 이런 성례 안에서 우리들에게 맹세를 하였음을 증거한다. 칼빈은 반복해서 우리들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맹세를 하였다고 강조한다. 기독교인이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들은 약하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서 그들에게 한 하나님의 맹세가 필요하다. 왜 그런가? 칼빈이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육체를 갖고 있지 않는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 강요 제 4권, 14장 3항) . 우리는 말씀을 듣는 귀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에 유혹과 의심으로 투쟁하는 사람들은 말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하다.   


        성례에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제시를 한다. 특별히 우리들의 감각에 말씀하는 동일한 말씀이지만, 다른 형태를 가진 말씀이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연약함과 전혀 관계가 없을 만큼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오히려, 우리가 믿음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보이는 말씀이 얼마나 값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설교된 말씀이 있다. 쓰여진 말씀이 있다. 성육신된 말씀이 있다. 영원한 말씀이 있다. 그러나 또한 연약함에 싸여있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우리의 감각에 말씀하는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연약함에 빠져 있는 우리들을 도울 수 있는 성례를 세울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믿음을 세울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유익한 물질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는 그의 교회안으로 우리들이 들어가는 예식으로서 세례를 주었다.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주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큰 응답이 있었던 오순절 뒤에 교회에 대한 시작으로 세례를 본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 [행 2:38]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에 성도의 수가 증가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세례는 교회안에서 우리들의 삶의 시작을 위한 하나님의 맹세로 온다.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으로서, 단 한번 주어진다. 칼빈은 말하기를 세례의 성분 그 자체가 시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물이 세례를 주는 일에 사용된 것은 특히 적절하다. 물은 죄를 씻고, 회심하게 하고, 중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가 우리에게 맹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죄성과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 맹세는 하나님이 약속과 함께 우리에게 온다. 세례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씻김을 받았고, 용서를 받았고, 새롭게 되었다는 점이다. 세례에서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고 그리고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생명의 새로움을 얻게 되었고 성화되었임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이 세례에서 우리들에게 제공되고 약속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세례의 위대한 기능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개인적으로 확신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는 개인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설교에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 일반적으로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말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례의 물을 각 사람에게 부어주는 것이다. 그의 가시적인 말씀인 세례를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에서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나는 너를 위하여 약속을 하였다. 우리 모두가 아니라 바로 너를 위한 약속이다.”  


        그러므로, 곤란함 중에서도, 의심의 순간에도, 약할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객관적인 약속들을 돌아다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들에게 용서와 새로움을 약속했고, 하나님의 약속에는 후회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강하게 다시 일어서야 한다.


        성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칼빈은 “ 이와 같이”라는 표현법을 좋아한다. 물이 몸에서 더러운 것을 씻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영혼의 더러움을 씻어버린다. 이 두가지에는 상응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육체를 물로서 씻을 필요가 있는 것과 같이, 영혼도 그리스도의 피로 씻을 필요가 있다. 세례는 그것이 보여주는 것을 제시한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이것은 단지 상징하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주는 것이다. 그것이 말하는 복의 전달을 주는 것이다.


믿음이 성례를 만들지 않는다.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창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 전에 오는 것이고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성례를 복으로 받아들인다. 성례는 설교된 말씀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생명의 구원자이고, 죽음에서의 구원자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 사람만 복을 받는다. 성례를 받고 실제로 말씀을 듣는 사람들만이 그들 자신의 삶에서 이런 확신을 경험하게 되고, 세례의 합당한 기능인 성화되고 강화되는 복을 받는다. 칼빈의 이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이고 믿음만하다. 그러나 이 약속을 우리들의 마음에 심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 안에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경이로운 맹세를 세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했다. 우리들은 약하기 때문에 이런 약속을 반복해서 보아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재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것이다. 사도가 반복적으로 성도들에게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성도는 그들의 세례를 다시 회고할 권리가 있으며, 하나님이 그들의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였고 우리들을 영생으로 새롭게 하였다는 것을 볼 권리를 가진다.


        마틴 루터가 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십니까?”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응답을 하였다, “ 저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물을 내 몸에 뿌렸습니다, 또는 물 속에 잠겼습니다“라는 이유만을 가지고 ”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면, 이런 응답은 바보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틴 루터가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라는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서, 나는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나의 감정에 맡겨서는 안된다. 감정은 적당하지 않다. 하나님은 오직 나를 위해서 객관적인 어떤 것에 대해서 말씀해주었다”라고 응답을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 세례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루터는 믿음으로 이런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나는 안다. 내가 세례를 회고할 때에, 내가 그리스도인 임을 나의 영혼은 확신한다. 나는 그것을 믿음으로 바로 본다.”


4. 하나님의 백성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자리에 왔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이런 맹세를 하였는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어떤가? 오직 신자들만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이것은 침례교의 입장이다. 또는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이것은 유아세례론자( paedobaptist)의 입장이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누가 교회의 회원인가? 누가 그의 언약 공동체의 회원인가? 구약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분명하다. 신자들과 그의 자녀이다. 이것은 창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명확한 답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다. 아브라함과 맺어진 언약의 의식은 할례이다. 아브라함은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로마서 4장에서, 그가 믿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에게 할례가 주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사도는 이것에 근거해서 할례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고 말한다. 이것이 믿고 할례를 받았다의 근거이다. 그러나 이런 패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옛 언약에 포함되어 있다. 여호수아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을 섬길 것이다( 수 24:15).” 그들의 가족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조사하고 난 다음에 여호수아가 이런 결론에 이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는 그의 전체 가족을 주님에게 바친 것이다.


        신약은 어떤가? 신약에서는 신자들의 자녀에게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명령이나 분명한 예가 없다. 신자의 자녀는 유아때에 세례를 주어야 한다 또는 그들이 신앙고백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어떤 명령도 없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판단하도록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구약에서 보다 더 제한되었는가?


        새 언약에서 정상적인 패턴은 하나님의 은혜가 구약에서보다도 신약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베풀어졌다. 옛언약에서 제한된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은 확장되었다. 이런 추세에도 불구하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직 아이들에게만큼은 더 강하게 제한되어야 하는가? 옛 언약에서 포함이 된 아이들이 새 언약에서 배제될 정도로 더 악화되었는가? 어떤 사람은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그들은 갖고 있는가? 전에 포함되어 있던 아이들이 지금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진술이 성경에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진술을 갖고 있지 않다. 신약에서 여러 증거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아이들이 구약에서와 같이 신약에서도 정확하게 동일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신약에 보여지는 것들을 가정해보면 신자들의 자녀들은 언약 공동체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로서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갈 3:29절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세례를 통해서(갈 3:27) 우리들에게 ( 그리고 우리들의 후손들에게)주어진 약속과 관련시키는 일에 사도 바울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이들을 언약 공동체의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마 19:14절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제자들은 아이들이 구원자를 괴롭히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는 제자들을 참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오게 하라고 책망했다. 그는 그들을 받아들였고 또 그들을 축복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가나안 여자를 축복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마 15:21-28). 그러나 예수님은 언약의 자녀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축복하였다.


        고전 7장에서, 바울은 신자들의 자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믿는 자의 자녀는 거룩하다고 가정을 하고 글을 쓴다. 그는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신자의 자녀, 한 편만 믿는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다는 가정하에 결혼을 논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신자의 자녀도 거룩하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골 2:11-13절에서 더 강조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세례와 할례를 동일한 의식으로 비교하고 있다. 사도 행전에서, 우리는 가장이 믿고,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된 가족 세례의 5가지 사례를 본다. 이 구절중에 어떤 것도 이 가정에 유아가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에서 보고 있는 한 가정의 패턴은 이런 새언약에서도 고려되는 것이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오순절 끝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만나게 된다. “ [행 2:39]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물론 이 구절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약속은 너가 믿는다면 너희 것이 될 것이고, 자녀들이 믿는다면 자녀들의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믿는다면 먼 데 사람들의 것이 될 수도 있다. ” 그러나 만약에 이렇게 해석을 하게 된다면 여기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했던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 [창 22:17-창 22:18]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베드로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맞다. 이 원리는 너에게 그리고 너의 후손들에게 적용이 된다. 그리고 이제 여러 국가들도 또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약에서 유아 세례의 사건이 실제적으로 있다. 고전 10:1-2절을 보라. “  [고전 10:1-2]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 장에서 바울은 교회에 대한 경고로서 홍해를 건너가는 이스라엘의 경험을 반여하고 있다. 그는 교회와 이스라엘의 경험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홍해를 지나가는 이스라엘의 경험을 세례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간 이스라엘의 나라에는 유아들이 없었는가? 바로가 매우 효과적으로 행동을 하였기에 이스라엘에는 어떤 유아도 남지 않았는가? 물론,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이스라엘( all Israel)이 - 유아를 포함해서- 홍해를 건너가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바울은 구약과 신약에서 아이들을 다루는 일에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들은 항상 언약 공동체의 회원으로서 다루어졌다.


        우리가 이것을 상고하면서, 어른 만큼이나 아이들도 하나님의 맹세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짓지 않는가? 그들이 자라면서 하나님의 객관적인 약속이 필요하지 않는가? 믿음이 어린아이의 마음에 언제 태어나는 시기에 대해서 전혀 알지를 못한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세례로 인해서 그들에게 이루어진 맹세에 의해서 자극되고, 강화되고, 그리고 확신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전혀 기억할 수 없는 맹세이지만, 공동체의 의해서 그들에게 증거될 수 있다.


        우리는 신약에서 믿음이 매우 이른 시기에 아이들의 마음에 시작된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세례 요한의 경우이다. 마리아가 그의 사촌 엘리사벡을 방문하였을 때가 눅 1:44절에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에 멜리사벳은 그의 엄마의 뱃속에서 기뻐서 뛰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구원자 자기의 집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참으로 엘리사벳은 세례요한이 “ 기쁨으로 뛰었다”라고 기록한다. 현대 사람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질 것이지만,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이다. 구원자의 임재에 태어나지 않은 아기가 기쁨의 반응을 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이다. 그리고 기쁨은 믿음의 열매이다. 따라서 믿음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마음에 있다면, 우리 아이들은 그들의 뱃속에서 자라고 살아가면서 하나님 약속에 의해서 신앙의 영양분을 섭취하고 강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Pierre C. Marcel은 세례라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조금씩 조금씩 아이들은 그의 세례의 중요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의 믿음의 성장을 위한 중요한 원인이 될 것이다‘ (Baptism: Sacrament of the Covenant of Grace, Cherry Hill, NJ, 1973, 227). 그렇다면 언약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양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 너는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이 너에게 약속을 하셨다. 너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며, 거기에 의존해서 살을 필요가 있다. ” 칼빈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다소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였다; “ 사단이 우리 자녀들에게서 세례의식을 빼앗으로고 애를 쓰는 이유는 그들이 즐거워할 복들을 우리들에게 주겠다고 정한 증명서를 바라보는 것을 없애버리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조금씩 조금씩 주님이 그들에게 하신 약속들을 잊어버리게 하려는 의도이다. 이것이 성공하게 된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할 수 없게 되고 경멸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양육하고 훈련을 시키고 그리고 복음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성장시키는 일에 우리는 실패를 할 것이다.  아이들의 탄생부터 주님이 그들을 그의 백성중에 한 사람으로 그리고 그의 교회의 회원으로서 받아들였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때에,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참된 경건함으로 양육시키는 아주 큰 동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큰 친절함에 우리의 등을 돌려서는 안된다. 담대하게 우리 자녀들을 그에게 바치도록 해야 한다( cited by Marcel, 241).”


        교리 문답에서 칼빈도 ,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 성례는 언제 그 효력을 발생합니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한다, “ 믿음으로 성례를 받을 때에, 오직 예수 그리스와 그의 은혜를 찾을 때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소 자서전적인 성명을 발표한다, 물론 칼빈에 있어서 이런 발언은 극히 드물다. 그는 말하기를, “ 오래 동안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우리는 잊어버렸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에, 그것은 고정되고, 단단하게 그리고 신뢰할 만하게 여전히 남아있다. 그 전에는 세례가 우리들에게 어떤 유익도 주지 않았다. 그러가 하나님의 약속이 세례안에서 우리들에게 제공되었다. 이런 약속이 없었다면 세례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세례를 너무 무시하였음을 고백해야 한다( 기독교 강요 제 4권 제 15장 17장).”


        성령이 믿음을 창조하기 위해서 활동할 때에, 매우 오래 전에 실행된 세례는 효력을 발생할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가치는 맹세가 증거가 될 것이다.


5. 영원한 혜택


        우리는 세례의 영원한 혜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신 약속은, 그의 맹세는 기계적인 관계에 대한 맹세가 아니다. 마치 경사진 길을 내려가는 기차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작만 하면 자동적으로 아래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너무나 자주 이런 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계적이지 않다; 살아있고 성장을 한다. 세례는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에 매우 중요하다고 개혁자들은 강조했다. 기독교인의 삶을 시작을 알리는 세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함께 간다. 루터는 이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입어야 하는 “ 평상복”이라고 불렀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매일 우리들과 함께 있다는 의미이다. 칼빈은 이것을 “의심을 쳐부수는 방패”라고 불렀다. 우리는 의심을 없앨 방패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실제로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없애는 방패이다. 사방에서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는 현대 세계의 의심들에서 보호하는 방패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 사후 세계는 존재하는가? 기독교는 유일한 진리라는 기독교의 독선적인 주장은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의심속에 빠졌을 때에, 이런 문제들과 씨름하고 방황할 때에, 세례는 방패가 된다. 세례는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 맞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너는 내 것이다.” 물 세례는 너가 믿음으로 살 수 있다고 내가 너에게 준 맹세이다.“


마지막으로 칼빈의 말을 한번 더 인용해보자;


“ 우리가 언제 세례를 받았던지 간에, 전 생애의 죄가 씻겨졌고 제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어졌을 때에, 우리는 세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을 그것을 가지고 강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죄에 대한 용서를 항상 확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정결이 우리들에게 제공되었다. 그의 정결함은 차고 넘친다. 어떤 더러운 것도 남기지 않는다. 우리들의 모든 더러움을 묻어버리게 하고 그리고 정결하게 씻길 것이다( 기독교 강요 제 4권 25장 3).”


        세례를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정결함이 우리의 불순함을 덮을 것이고 ,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아야 한다.


Dr. W. Robert Godfrey, a member of the Council of the Alliance of Confessing Evangelicals, is president and professor of church history at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in California. Educated at Stanford University and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Dr. Godfrey is the editor of Through Christ's Word (Presbyterian and Reformed) and the co-editor of Theonomy: A Reformed Critique (Zonderv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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