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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강 : 나의 구주 하나님
임 바울  2017-08-19 19:33:13, 조회 : 478, 추천 : 153

3. “나의 구주 하나님”


        지금까지 누가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격함과 무서운 실재임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구원받을 방법 또한 허락하셨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구원은 그의 기록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주제이다.


        누가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 쓰고 있다는 말로 복음서를 시작한다.

눅 1:1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마땅히 믿어진” 혹은 “완성된”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겔덴하이스는 “예수 안에서 옛 경륜 하에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전적으로 알려지고 기쁜 소식이 선포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결국 누가는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를 알려주고 있다.


        누가 복음서의 앞부분에는 아름다운 찬송, 특히 구원에 관련된 많은 내용의 찬송이 있다. 예를 들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하나님 내 구주”라는 말로 찬양한다.

눅 1:47


        스가랴의 찬송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눅 1:68 이하


        이 찬송은 넘치는 행복을 노래하거나 자신의 아이가 이룰 사역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이루시는 위대한 구원을 찬양하고 있다. 자신의 아이를 이야기 할 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관련된 그의 사역에 대해서 찬양한다.

눅 1:77-79


        천사들의 찬송도 구주의 탄생에 대한 기쁜 소식에 대한 것이다.

눅 2:11


        시므온도 아기를 보았을 때, 구원을 보았다.

눅 2:30


        이와 같은 찬송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을 의미한다.

눅 1:79, 2:14


        이 찬송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찬송한다.

눅 1:50, 54, 72, 78


        그리고 아브라함과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눅 1:55, 72 하반절


        이 찬송들에 나타나는 또 다른 표현들은 예부터 약속된 구원을 보여준다.

눅 1:68, 2:25, 31, 38, 21:28, 24:21


        이 말씀들은 모두 제각기 그 나름의 방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기로 한 약속된 구원들을 가르친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신 것이고 그분의 시간과 방법에 따라 이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누가는 이 구원이 바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의 사역 속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눅 1:70, 4:16, 21


        그는 수난 속에서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눅 18:31, 21:22


        특히 누가는 예수님이 “죄인 중의 하나로 여김 받았음”을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

눅 22:37, 24:25, 27, 44, 45, 46


        다른 공관복음서와 같이, 누가는 수난에 대한 예수의 예언들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후에 주어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말하자, 누가는 예수님이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밀라”고 명하신 후,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눅 9:20 이하)”라고 예언하셨다고 기록하였다. 누가는 “가라사대”라는 말을 사용하여 수난의 예언을 이전의 말씀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변화산 사건에서도 누가가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서 이 사건을 수난의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누가는 예수님 앞에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와의 대화의 주제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눅 9:31


        표면적으로 보면, 변화산에서의 사건은 죽음보다는 영광과 위엄에 관련된 이야기이지만, 누가는 죽음과 연관시킴으로서 그의 관심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의 수난이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의 계획 중에 있었으며 역사의 무대에서 명백하게 보여질 것임을 알려준다.

눅 9:51


        분명한 것은 예수의 수난은 생각지 못한 것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올라갔고 자신도 굳게 결심하고 의도적으로 올라가셨다. 즉 그에게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올라가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해서 누가는 세 편의 독특한 비유로 기록하고 있다. 15장에서 누가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탕자)의 비유로 전하고 있다. 이 비유들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져 있어서, 이 비유가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성품을 간과하기 쉽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도권 사상이다. 일반적으로 유대교는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과 그의 죄를 용서하신 후, 그를 원래의 지위로 회복시키시는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하나님의 주도권, 즉 죄인을 직접 찾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잃은 양을 찾고 소유권을 재확인하고 찾은 것을 기뻐하는 선한 목자의 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사람에게는 자신의 구원을 정당화할 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보여줌으로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함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떠나서는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이 복음서의 핵심이다. 사람에겐 구원받을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 어떤 주해가들은 이 비유가 구속적 사역에 대해서는 별로 의미하는 바가 없고 단지 사죄를 위해 필요한 것은 회개와 고백뿐이라는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맞지 않다. 만약 구속이 없었다면, 이 비유에는 그리스도도 없고 아버지가 밖에 나가 그 아들을 기다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죄에 대한 반감이나 탕자의 편에서의 그 이후의 생활 변화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비유는 실재적인 면에서 기독교의 중요한 수많은 부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를 예수님의 다른 가르침과 관련시켜 보아야 한다. 이것만 따로 떼어놓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오, 그분이 다른 곳에서 십자가가 구원의 도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통합적임을 가르치신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도 또 다른 면에서는 인간 스스로는 구원에 이룰 수 없음을 보여준다.

눅 18:11-13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외적으로 “경건한 입장을 즐길 수 있는 종교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이고 있다. 반대로, 세리는 그 눈을 들어 감히 하늘을 보지도 못한 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하나님이여 죄인인 나에게 화해하소서)”라고 말하며 통회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쳤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이 자신이 행한 바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이 비유에서 그가 자신에 대해서 말한 모든 것은 참이었다. 즉 그는 실제로 다른 사람과는 달랐었다.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라면, 사업에 열심내는 사람이라도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않고, 간음은 결코 하지 않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며, 아무리 흐트러진 순간이라 할지라도, 세리와는 같은 부류에 있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금식과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며 하나님을 체계적으로 섬기는 그런 사람이다. 이 비유에서, 그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전적으로 잘못된 길에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의 목적지는 너무 아득하여서 그가 결코 그곳에 이를 수 없을 곳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세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겼지만, 바리새인은 자신의 공로에 의지한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의 문제였다.

눅 7:30


        그들은 그들이 가진 특권 때문에 구원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알기를 기대되었지만,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임의대로 살아갔다.


        그러나 “택자들”은 그들과 달랐다. 택자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원수갚는 일도 하나님을 의지한다.

눅 18:7


        누가는 어디서든지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로,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이런 사상들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중심인물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필요한 것을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한분임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비유에서 말하는 “끈질기게 조르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이것은 구원에 관한 가르침과 관련을 가진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가진 위치를 신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외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신들의 혈통을 과시하는 유대인들은 옳은 삶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며 그들이 가진 율법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외적인 면에 상당히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교의 형태를 개선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메시지는 그들의 체계 내에서 절대 조화될 수 없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눅 5:3 이하


        구원에 대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 종교와 결코 접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함께 진리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형주의(formalism)를 비난하셨다.

눅 11:39-52, 13:25-30, 14:15-24


        누가는 구원에 대해 아주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전형적인 유대교의 접근방법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복음서와 같이, 누가복음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를 “좋은 소식”이라고 말한다.

눅 8:1


        그리고 그 소식을 전파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눅 9:2,6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눅 10:9,11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임재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물질적인 삶의 유지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한다.

눅 11:2, 12:31


        그 나라는 사람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이다.

눅 12:32


        그 나라는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들 “가운데”, 또는 그들 “중에”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나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눅 13:19, 21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이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눅 18:16,17


        그 나라는 결코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의 사명과 연관시킨다. 누가는 외형적으로 이 두 가지를 연관시키지는 않지만,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직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보여주는 개념인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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