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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 12장 내가 경배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임 바울  2015-11-27 18:10:22, 조회 : 1,500, 추천 : 235

                                                     제 12 장 
                               내가 경배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분명하게 명제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는 긍휼이 많고 은혜로우시며, 화를 더디 내고 인자하심이 풍성하시다. 그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매우 귀하고 값진 이런 성경적인 진리를 부인하거나 축소함이 없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을 없애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신적 단순성의 교리를 재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순한(simple)”은 하나님이 느리거나 또는 지혜가 어둡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또는 하나님은 쉽게 이해가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신적 속성으로서, “단순함(simple)”은 “혼합되었다(compound)”라는 단어와 반대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단순성은 하나님의 그의 속성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선함, 긍휼, 정의, 그리고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그의 본질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은 하나님의 속성에 불과하지만 사랑은 참된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종종 일어나는 오류이다. 단순성의 교리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런 것을 피하도록 해준다. “하나님은 공의와 진노를 가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참된 본질은 사랑이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것이 함축하는 것은 사랑이 다른 속성들보다 하나님의 본성의 중심이고, 그의 참된 신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단순한 존재라기보다는 복합적인 존재로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사랑을 중심주제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돋보이는 것은 적합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선포가 “하나님은 빛이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다. 하나님의 영이시다. 또는 하나님의 선함, 친절함, 능력 또는 전지성”보다 더 무게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논증으로 약화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단순성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속성을 다른 속성보다 높게 평가하는 것을 막도록 해준다.


1. 편협한 예수 그리스도


        결정적으로  우리는 문화에 채색이 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은 격려 연설이나 정치 선언과 혼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온전한 책임 있는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그의 모든 소원을 인정해주고,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소원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녀들이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을 더 잘 안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더 잘 아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참지 않는 것처럼, 모든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른 의견을 존경할 수 있고, 예의바르게 상대방을 대접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행동과 신조를 무조건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에베소 교회가 실패한 점이다.

계 2:4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도 반드시 미워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두아디라 교회가 실패한 점이다.

계 2:6


        계시록에 있는 일곱 도시 중에서, 두아디아는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가장 긴 편지를 그 교회가 받았다. 이 교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좋은 것이었고, 어떤 것은 나쁜 것이었다.


        좋은 것부터 시작을 해보자. 1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의 행위를 알고, 너의 사랑과 신앙과 봉사와 인내를 안다’고 하였다. 에베소서 교회는 그의 선한 행위와 강한 윤리적인 일로 칭찬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 두아디라 교회는 훨씬 더 낫다. 에베소 교회가 갖고 있는 행위가 두아디라 교회는 갖고 있었고, 또한 에베소 교회가 없는 사랑도 갖고 있었다. 두아디라 교회는 참다운 덕이 있었다.


        아마도 두아디라 교회는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교회였을 것이다. 섬기는 교회, 헌신하는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 이것은 분명 좋은 것이다.


        나쁜 점은 무엇인가? 20절을 보면 “책망할 것이 있고,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였다”고 하였다. 두아디라의 사랑은 분별없는 맹목적인 용납이었다. 교회는 거짓된 가르침과 부도덕적인 행위들을 받아주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지 못하는 두 가지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많은 면에서 사랑을 갖고 있다. 그러나 너의 용납은 사실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불충성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죄는 이세벨을 받아준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여자의 진짜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이 거짓된 여 선지자는 구약에서 유명한 이세벨과 같이 행동을 하고 있었다. 백성들을 우상과 간음으로 인도하였다. 이 두아디라 여자의 영향력이 공식적이었는지는 알지를 못한다(즉 교회의 인정을 받고 회중 앞에서 거짓된 교리를 가르쳤는지는 알지 못한다). 또는 비공식적으로(개인적인 대화나 또는 입을 통해서 거짓된 교리들이 퍼지게 하는 것) 행해진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잘못된 영적 위험성에 빠져있었다.


        이세벨(실제적으로 구약의 인물인)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이다. 그녀는 바알을 섬겼고 아세라를 섬겼고 그의 남편 아합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하였다. 이세벨은 포도원 때문에 나봇을 죽였던 사람이다. 그녀는 ‘저주 받은 여자’라고 불렸다.

왕하 9:34


        사악함에 대한 형벌로서, 창문 밖으로 던져졌고, 말에 의해서 짓밟혔고, 개에 의해서 먹혔다. 그녀는 악한 여자였다. 그녀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쁜 길로 인도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의 백성들을 흔들어놓는 이세벨과 같은 여자를 용납하였다. 왜 그녀를 가만히 두었느냐? 그녀를 받아들이지 말라. 그녀와 말하지도 말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지 두고 보자고 말하지 말라. 지금 당장 없애버리라…….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제거할 것이다.’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은 벌써 회개를 하라고 경고를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하였다. 지금 회개를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그녀를 병든 침상에 던지고, 그의 추종자들도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아니다. 그녀의 사악함은 죽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죄이다.


        이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 죄이다. 두아디라는 많은 상업조합을 지원하였다. 두아디라는 벽돌 노동조합의 회원에 속하였다. 어느 날 조합은 잔치를 열었다. 그들은 테이블 주위에 앉아서 이 축하파티에 참석을 하였다. 주연을 베푼 주인공이 나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벽돌 조합 회원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런 잔치를 베풀 수 있게 되어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한 많은 것들을 준비하였다. 먼저 식사를 하기 전에, 우리의 위대한 제우스신에게 감사를 드렸으면 합니다. 제우스는 우리들 벽돌 노동조합 회원 여러분들을 돌보아 주셨고, 이런 저녁 식사를 가능하게 해준 분입니다. 제우스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 분 앞에서 식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식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있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머물 것인가 또는 나갈 것인가? 기독교 형제자매들에게, 그리고 지켜보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참석이 어떻게 보였을 것인가? 고대에 기독교인들은 우상을 찾으러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문화 전체가 우상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방인 예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조롱과 낙오를 부르는 것이다. 우상 숭배와 종종 함께 베풀어졌던 성적 관계를 가진 이런 잔치는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는 정상적인 삶의 일부분이었다.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재앙을 불러왔다.


        두아디라의 이세벨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과 버가모의 니골라당과 같은 사람들이 지지를 받았던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많은 희생을 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타협한 기독교이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참지 못한다. 예수님이 불꽃같은 눈을 가지고 있으며 주석과 같은 발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든 교회에 보여주기 위해서 두아디라 교회를 예로 세웠다. 예수님은 마음을 살피고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을 벌주신다는 것을 모든 교회에 알리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주위 환경에 넘어가지 않고 진리를 충성스럽게 잡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하였다.

계 2:26-28


2. 어디에 이런 구절들이 있는지 보여 달라.


        성과 성적 경향에 대한 토론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열광적인 토론들을 좋아하던지 또는 기적처럼 이런 무서운 논쟁들이 사라지기를 원하던지 간에 상관없이, 이런 토론들이 계속해서 진행되는 세계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문제는 너무 심각하고, 위험은 너무 높고, 침묵을 지키면서 조용히 있게 하지 못할 만큼 감정적이다. 세상(그리고 교회)은 동성애 행위와 동성애 결혼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동성애 결혼식에 참석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공정하다. 우리는 자유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 공공장소에서(이런 장소는 교회의 회원들이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만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거칠고 야유하면서 자기들의 생각과 논쟁을 하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논쟁이 아니라 억지를 부르는 경우도 있다. 고함을 지르는 것은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논쟁이 아니다. 확실히, 우리가 각자를 어떻게 느끼게 하는가는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의 없는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화를 나게 하는 것은 어떤 논증의 일관성과 설득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명확하지 않는 생각을 전달할 때가 아니다. 분명한 정의(定議)에서 부끄러워 회피할 때가 아니다. 기분을 논리에 대체할 때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것들은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들이다. 이런 것들은 복잡한 문제들이다. 우리의 윤리적인 인생행로를 기분이 좋은 것으로서 결정할 수 없다. 우리를 멋있게 만드는 것에 기초해서 신학을 세울 수 없다. 지성인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지적 책임감을 버릴 수 없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들은 성경은 덮어둘 수 없다. 우리는 성경에 순종을 해야 한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거짓말쟁이라고 규정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리로 소리쳐야 한다.

롬 3:4


결국, 우리는 모든 거짓말의 생산자이다.

롬 1:30


그러나 예수님에 의하면, 성경은 폐할 수 없다.

요 10:35


        우리는 모두 베뢰아 사람과 같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들은 것이 믿을 만한 것인지를 매일 매일 성경을 상고하면서 점검해보았다.

행 17:11


        우리는 구호와 상투적인 문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랑은 종교보다 중요하다. 또는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놀라움과 사람들을 창피하게 만든다. 또는 예수님은 그 당시에 전통을 전복시키고 거절된 사람들을 영접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경건한 것처럼 들리는 이런 말들이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 종교, 은혜, 전통주의자들, 영접함 그리고 거절된 사람’이라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공허한 말들만 진열해놓은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말을 가지고 쉽게 일반화를 시킬 수 있다; 산상설교의 첫 번째 장을 통해서, 세상은 거룩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미워한다(마 5:10-12,13). 1세기의 종교 지도자들은 영적이지 않았다(17-20),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윤리적인 포괄주의를 증오하였다(21-48). 각각의 말은 충분히 옳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술들은 정의와 차이점들을 요구한다. 구름과 같은 영적 감정에 대한 깜짝 놀랄만한 진술은 어떤 세계관도 만들지 못한다. 관련된 구절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고, 관계된 구절들을 연결시켜서 보여주어야 한다. 일반적인 주제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의 구절들을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해서 많은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시대가 사랑이라고 이해하는 하나님과는 매우 다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라고 사도 요한은 기록을 하고 있다(요일 4:10). 사랑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그와 화목하게 한 것이다.

롬 5:8


사랑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킬 때에 우리가 비로소 사랑을 하는 것이다.

요 14:15


사랑은 곤란함에 빠져있는 형제자매와 나누는 것이다.

요 3:16-18


사랑은 서로를 친절함과 인내함을 가지고 다루는 것이다.

고전 13:4


사랑은 방황하고 있는 죄인들을 징계하는 것이다.

잠 3:11-12


사랑은 반항적인 성도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히 12:5-6


그러고 나서 사랑은 자신의 죄를 알고 집을 향해서 돌아오고 있는 탕자의 어깨에 팔을 얹는 것이다.    

눅 15:17-24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성적인 범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있는 수없이 많은 구절들의 증거에 의하면, 모든 성적인 죄들은 바뀔 수 있고, 구속될 수 있고, 놀랍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



<< 연 구 문 제 >>


1. 하나님의 단순성에 유념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


2. 왜 이세벨과 같은 사람들이 선지자 역할을 할 수 있는가?


3. 사랑하면 동성애를 용납해야 한다는 논리가 비 성경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라



P. S. Kevin Deyoung의 “What Does the Bible Really Teach About Homosexuality” (P&R) 제 12 장 "The God I worship Is a God of Love"를 번역한 것입니다. 저자의 의도에 벗어난 것은  오직 저의 잘못입니다. 많은 이용과 공부는 번역을 한 저의 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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