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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기독교와 철학 : 제 16 장 고래의 뱃속에서 : 왜 기적은 가능한가?
임 바울  2014-12-18 19:42:14, 조회 : 2,082, 추천 : 300

                                                      제 16 장
                                   고래의 뱃속에서 : 왜 기적은 가능한가?



“ 모든 마술에서 웃기 위해, 우리는 온전하게 알려질 수 있는 세상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눈을 찌푸리면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나 또는 사물에 대해서 수수께끼와 불가해성 그리고 철저하고 직접적인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암시를 인정해서는 안된다.”
                                                                 -Arthur schopenhauer-



        이성의 한계를 설정한 우리는 매우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과학적이고 자연적인 법의 세상에서, 기적은 가능한가? 21세기에서 동정녀 탄생과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 그리고 부활 등을 믿는 것이 가능한가? 이런 사상들이 현대 과학과 온전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나는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기적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논증- 철학자 David Hume에 의해서 전개된 -을 보여줄 것이고, 흄 자신의 철학의 근거에 의해서 이 논증이 무효하다는 것을 제시할 것이다.


        기적의 문제는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는 기적에 의존하는, 세상에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같은 다른 종교는 기적을 말하거나 허용한다. 그러나 기독교만 기적에 근거한다.  기독교 종교의 중심에는 기적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울은 고전 15:14절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러나 부활은 신약에 보고된 유일한 기적이 아니다. 이슬람 창시자인 선지자 모하메드는 단 하나의 기적도 수행했다고 주장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는 항상 기적을 행하였다. 그는 물위를 걸었고, 폭풍을 잠재웠으며, 군중들을 먹였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였고, 심지어 죽은 자를 다시 살렸다.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은 오직 기독교만이 믿는다.


        Richard Dawkins는 ‘기적은 종교와 과학이 경쟁하는 공통기반임’을 영리하게 알았다. 생물학자 Stephen Jay Gould는 Rock of Ages라는 책에서 과학과 종교는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기에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자연 세계의 사실적인 속성들을 제공하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동등하게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 목적, 의미 그리고 가치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일을 한다.” 이런 구별이 항상 성공하는 것이 아님을 바르게 관찰하였다. 종교가 자주 자연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은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고 말을 한다.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서 살았다고 보고한다. 신약은 마리아라는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며 인간의 설명을 거부하는 수없이 많은 행동들을 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과학은 증명될 수 있는 근거에 의존한다,” 고 Dawkins는 말한다. Dawkins에 의하면, 기독교의 기적 이야기는 과학 영역을 침범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모든 기적들은 과학적인 주장에 도전을 하는 것이다. 자연 세계에 운영되는 자연법을 범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적에 대한 어떤 믿음도 과학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과학의 정신에도 위배된다. Dawkins의 계산에 의하면,  기적은 나쁜 과학이다. 과학법을 범하지 않는다면,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합리적인 사람은 기적을 부인해야 한다고 하였다.


        많은 자유주의 기독교인들은 과학의 권위에 두려움을 가짐으로 기적을 없애는 일에 열심히 경주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1835에 출간된 David Strauss의 “예수님의 생애”라는 책에서 말하는 성경비평의 이론위에 그들의 신앙을 세운다. Strauss는 기적을 신화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어떻게 몇 개의 떡과 고기로 수 천명을 먹였는가? 아마도 숨겨놓은 음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점심을 가지고 온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는가? 아마도 물 밑에는 떠다니는 물체가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주었는가?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황홀경에 빠져있었다. 어떻게 예수님은 무덤에서 살아나셨는가? 아마도 그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추종자들이 그가 살아났다고 믿은 것이며, 이런 기쁨과 소망으로 그들의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이런 설명들이 실제로 신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되고 있다. 그들은 기적을 없앰으로서 기독교를 없애려고 하였다.


        나는 기적을 반대하는 강한 논증에 반박함으로서 기적이 가능하다는 변증을 할 것이다. 특별한 기적의 진실을 변호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기적을 비과학적 또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서 미리 기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모든 기독교인들과 같이 나는 기적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으며 또한 일어난다. 기적도 마찬가지이다.


        기적을 반대하는 강한 논증은 철학자이자 회의론주의자인 David Hume이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이라는 책에서 제출되었다. Hume의 논증은 무신론자에 의해서 널리 인용되었다: Dawkins와 Christopher Hitchins는 기적의 거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흄에 논증에 호소하였다. Hume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 기적은 알려져 있는 자연법에 위배된다.
2. 계속되고 끊임없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법을 안다.
3. 기적을 말하는 사람의 증거는 알려진 과학적인 법의 작동과 모순된다.
4.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도 합리적으로 기적을 믿을 수 없다.


        기적에 대한 흄의 반대는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 이것에 답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흄 자신의 작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의 책들은 인간 지식이 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적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기적에 대한 그의 반대를 정리해보면, 흄 자신이 자기가 쓴 책을 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나의 반증은 다음과 같다:


1. 기적은 알려진 자연법의 위배이다.
2. 과학적인 법은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흄 자신의 평가에 근거한다.
3. 알려진 자연 법의 위배는 종종 일어난다.
4. 따라서, 기적은 가능하다.



        흄의 영향력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현대 추종자들을 살펴보자. 전형적으로 그들은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무신론자들과 "brights"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를 조사해보면 그들은 논리적인 실증주의에 근거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논리적 실증주의는 과학은 증명될 수 있는 법과 사실의 영역에서 작용을 하며, 윤리는 주관적이고 증명될 수 없는 선택과 가치의 영역에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논리적 실증주의는 과학적인 지식이 가장 좋은 지식이며  이런 과학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으로서 거절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았고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하기에, 그들이 말한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들에게 대답하기가 곤란할 정도이다.


        논리적인 실증주의자들에게는, 두 가지 진술이 있다: 분석적인 진술과 종합적인 진술이다. 분석적인 진술은 진리 또는 거짓은 진술 그 자체를 검사함으로서 판단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나의 이웃은 아름다운 부인과 사는 독신자이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우리는 즉시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독신자라는 단어는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신자는 부인이 없다. 수학적인 공리는 정의에 의해서 판단된다. 공리는 본래가 참된 것이다.


        종합적 진술은 사실을 검사함으로서 증명될 수 있다. “내 이웃은 3백 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며 리차드 도킨스의 책을 즐겨 읽는다”라는 말은 진술 그 자체를 조사함으로서 사실 여부를 증명할 수 없다. 우리는 이웃의 집을 방문해야 하고 물어보아야 한다. 흄은 분석적 진술이 정의에 의하면 참되다고 주장될 수 있지만, 종합적 진술은 증거를 살펴봄으로서 참된 것이 증명된다고 하였다. 흄에게 있어서, 물리학은 종합적 진리의 기준을 제공한다. 과학적 방법- 전제, 실험, 증명 그리고 비평-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종합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에 기초해서 Hume은 그의 유명한 형이상학의 포기라는 연설을 하였다. 형이상학에는 어떤 진리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 뒤에 삶이 있다” 또는 “하나님이 우주를 만들었다”라는 중심적인 종교 주장을 생각해보자. 이런 진술들은 정의에 의해서 참이 아니며 사실을 점검함으로서 증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Hume의 요점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진술은 거짓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진술은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Hume은 쓰기를, “우리 손에 신성이나 형이상학과 같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질 또는 수에 대해서 어떤 추상적인 논리를 포함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없다. 사실이나 경험에 관한 어떤 실험적인 논리를 담고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불에 태워야 한다. 왜냐하면 궤변 또는 환상 이외에는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Hume의 경험적 증명 원리라고 불린다. 오직 두 종류의 진리만을 인정한다: 정의에 의해서 참인 진리와 실험에 의해서 확인된 진리이다. 그러나 당장 우리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흄의 기준을 흄 자신의 교리에 적용을 해보자. 증명의 원리는 정의에 의해서 참인가? 아니다. 그것을 실험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흄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거짓도 아니고 또한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불에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흄의 논리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명백한 것은 아니지만 심각한 것이다.  완전하게 흄의 관심을 벗어난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서 임마누엘 칸트의 천재성을 취해보자. 흄의 강조와는 달리, 수학적인 진리는 분석적이 아니다. 두 점에서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라는 유클리드의 기아학에서 유명한 수학적 전제를 고려해보자.  이것은 자증하는 진리이다. 그러나 진술을 조사함으로서 확인될 수는 없다. 그것을 참으로 만드는 용어의 정의 속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인지를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점검을 해보아야 한다. 두 점을 종이위에 그리고 연결을 하였을 때에 두 점 사이에서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다. 많은 수학적 전제는 이런 종류의 것임을 칸트는 보여주었다.

        
        흄에 대한 칸트의 수정이 이런 수학적인 명제가 틀렸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님을 언급하였다. 내가 제안코자 하는 것은 그들의 진실성이 단지 종합적으로만 설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데이터를 검사함으로서만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수학법은 일반적으로, 과학법과 같다.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을 점검함으로서만 그들을 증명할 수 있다. 우리가 주위에 있는 세상을 점검할 때에, 우리는 흄 그 자신에 의해서 제일 먼저 주목된 것이 혼란스러운 발견임을 알 수가 있다.


        과학적인 법들은 증명되어질 수 없다. 그들은 실험적으로 확인될 수 없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의 법에 기초한다. 이 법은 경험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 흄의 논증은 폭탄적이었다. 이 논증의 의미는 너무 광범위해서 소수의 사람만이 이해를 하였다. 오늘날까지 흄의 망령이 현대 과학의 화랑에 배회하고 있다. 스스로 “bright"라고 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지성인들이 흄에 의해서 2세기 전에 폭발된 과학에 대해서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우스운 일이다.


        과학적인 법들은 왜 증명될 수 없는가?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한정된 숫자의 관찰은 논리적으로 방어될 수 있는 제한없는 일반적인 결론을 추측하는 일에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흄의 주장이다. 모든 백조가 백색이라고 말을 했고, 과학적인 가정으로서 그것을 제시하였다면, 어떻게 나는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단 한가지 방법은 모든 백조를 검사해보는 것이다. 수 백만명의 백조. 또는 수 천만명의 백조. 이것을 기초해서 나는 모든 백조는 백색이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흄의 요점은 나는 실제로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내일 나는 흑색의 백조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법칙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시시한 예가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발견되기 오래전에, 서구에서 사람이 보았던 유일한 백조는 백색이었다. 결과적으로, 서구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든 백조가 백색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서구 문화를 보면 백색 백조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에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들이 흑색의 백조를 보게 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유럽인들이 도착을 하고 나서이다. 전에 과학적으로 불가침의 진리로서 간주되었던 것이 이제는 사라져야만 했다.


        이 시점에서 많은 과학의 선두주자들이 자신들의 등을 두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에 대해서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항상 과학은 수정과 개정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실수를 통해서 과학은 배워야 한다.” 분명히, Carl Sagan은 그 자신과 같은 과학자들을 서로의 주장들을 점검하는 전통 때문에 칭찬 할 것이다. Sagan의 견해는 Daniel Dennette에 의해서 메아리치고 있다. 그는 쓰기를, “과학의 방법은 바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과학은 무한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오류가 발견될 때마다 발견되는 곳마다 개선을 요구하는 비평의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흄의 요점을 놓친 것이다. 과학이 먼저 이런 규칙들을 제시하였다고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과학적인 법칙들은 실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빛이 초당 186,000마일의 속도로 운행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그것을 측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 또는 열 번 또는 수 백만번 측정했다고 해서, 빛이 항상  모든 곳에서 이런 속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이것을 추정할 뿐이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내일 우리는 빛이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상황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흑색 백조를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과학적인 법칙들은 원인과 결과사이에 있는 논리적인 연결로부터 나올 수 있는가? 아니다. 원인과 결과에는 어떤 논리적인 연결이 없기 때문이라고 Hume은 주장한다. 우리는 사건 A를 보고 그리고 나서 사건 B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건 A와 사건 B를 일으켰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확신할 수가 없다. 우리가 관찰한 모든 것은 서로 연관이 있으며, 수없이 많은 관찰이라고 할지라도 필연적인 상호관계로 연결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한 아이가 처음으로 땅에 공을 떨어뜨렸다. 놀랍게도, 공이 튀어 돌아왔다. 그때에 MIT 공대를 졸업한 이 아이의 삼촌이 공과 같이 동그란 물체를 떨어트리면 그것이 다시 튀어 오르게 된다고 아이에게 설명하였다. 속성과 인과 작용과 같은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무의미한 용어가 아니라면, 경험한 어떤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 흄이 일으켰던 질문을 다시한번 고려해보자. 아이가 갖지 않았던 어떤 경험을 삼촌은 가진 것일까? 공을 떨어뜨릴 때마다 다시 튀어서 돌아오는 경험을 삼촌은 가졌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결과가 똑같았다. 이것이 그가 말하게 된 기초이다. 유일한 기초이다.


        이제 흄은 그의 깜짝 놀라게 하는 결론을 내렸다: 삼촌은 기본적으로 아이와 다른 경험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 실험을 되풀이 한 것에 불과하다. 그로 하여금 “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럼으로 이런 것이 다시 일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그의 습관이며 버릇이다. 그러나 삼촌은 필연적인 관계를 설정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예상을 단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가지게 된 것이다. 과거의 경험이 미래에 매번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실, 그는 알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흄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인정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자연이 법칙을 갖고 있다는 것을 흄이 부정한 것이 아니다. 이런 법들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흄은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법칙들을 가정할 때에,  “이것이 과거의 실험을 통해서 얻은 가장 좋은 추측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흄은 제안한다.


        “확실히, 과학적인 법칙들은 100% 옳은 것은 아니지만, 99.9% 옳다. 확실한 것이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도 옳은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흄의 논증을 반박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당신은 이런 진술을 증명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서, Newton의 역제곱 법칙과 같은 것들을 확립할 수 있는가?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들은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에 역제곱으로 서로를 잡아당긴다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법칙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물체의 관계를 실제로 측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증명될 수가 없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유한의 실험은 뉴톤의 법칙이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어떤 결론도 맺을 수가 없다. 수천만만번의 실험은 99.9%의 가능성을 세울 수 없다. 또는 50%의 가능성도 세울 수가 없다. 뉴톤의 법칙이 부적당한 것으로 발견되어지는 곳에서 실험되어지지 않는 시도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천문학자 Neil deGrasse Tyson의 폭발한 분노를 잠시 고려해보아야 한다.  타이슨은 과학적인 법칙들이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과학의 성공은 사실에 의존한다.” 과학이 정확하게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때에 비행기는 날지 못할 것이고 의학적인 치료를 받는 사람들은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는 날아다닌다. 병자들이 병원에서 치유를 받는다. 이런 기초에 의해서 과학은 참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Vedic 사람의 점성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비행기에 탑승하기 보다는 물리법칙에 의해서 만들어진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과학이 유효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Vedic의 점성술의 한계에 대해서 나는 확실히 인정한다- 과학적인 법칙들이 모든 경우에서 사실로서 알려졌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다. 이런 깜짝 놀랄만한 현실을 생각해보자.  뉴톤의 법칙은 거의 2세기 동안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법칙은 놀랍게도 잘 작동을 하였다. 모든 기계는 이 원리를 받아들였고, 전 산업혁명은 뉴톤의 법칙과 뉴톤의 기계에 기초하였다. 뉴톤은 하루에도 몇 백 만번씩 증명되었다. 그의 이론은 전례 없는 물질적인 성공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뉴톤의 법칙과 반대된다. 셀 수 없이 행해진 실험적인 증명에도 불구하고, 뉴톤의 법칙은 중요한 점에서 잘못되었거나 적어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었다. 아인슈타인의 법칙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래에 어떤 점에서 잘못된 것임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예들로부터 철학자 Karl Popper는 어떤 과학적인 법칙이 어떤 것도 증명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맺었다. 과학은 이론을 증명할 수 없다. 과학은 단지 이론이 거짓임을 증명할 뿐이다. 우리가 한 이론을 수없이 실험을 하였지만 거짓임을 증명하지 못하였을 때에,  우리는 임시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뿐이다. 그러나 이론이 증명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사실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좋은 방법을 아직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발견할 때까지는 의심스럽지만 이론들은 많은 혜택을 준다. 과학법칙들이 자연의 법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들은 인간 법칙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에 대해서 가장 좋은 추측을 보여준다. 우리가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관찰된 패턴과 연속에 불과하다. 세상은 미래의 경험이 반대를 보여주기 까지는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주저없이 흄의 철학을 인정하기 위해서 회의론주의를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목적은 흄이 사용한 경험적 그리고 회의적인 철학을 이용해서 기적을 반대하는 흄의 타도하기 위한 것이다. 기적은 알려진 자연법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흄의 회의주의 철학은 알려진 자연법이라는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과학법이 필연적으로 사실일 때에만, 그리고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을 때에만 기적은 무효화될 수 있다.


        그러나 흄은 어떤 실험적인 전제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과 법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풍부해서 신적인 원인을 무효화시킬 때에만 기적이 비과학적이 될 수 있다. 흄으로부터, 인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 가를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외적인 경우로서 신적 원인인 기적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우리가 기적을 말할 때에, 과학적으로도 가능한 매우 드문 사건을 의미한다. 또는 세워진 자연법을 다소 뛰어넘는 사건을 의미할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사건을 고려해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도 그것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지극히 가망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모든 의학적인 시도는 지금까지 실패하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자연법의 위반이라고 말할 수 없다. 미래에 의학의 발전이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을 받은 사람을 살리는 경지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없다는 과학적인 전제는 실제적으로 진리일 수 있지만, 필연적인 진리는 아니다.


        미래에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과거에도 죽은 사람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 날에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면,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인 가능성이 미래 사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에 일어났다면, 그것은 기적이 될 것이다. 미래에 일어난다면 우리는 이것을 과학적인 진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연법들이 필연적으로 허물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법칙들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적은 자연법의 실제적인 정지로서도 볼 수 있다 .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 과학과 논리는 말할 수 없다. 이런 법칙들이 불변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런 포괄적인 결론에 대한 증거는 전혀 있지 않다. 확실하게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기적은 가능하다. 자연법칙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대 물리학도 자연 세계 너머에는 자연법이 적용되지 않음을 인정한다. 우주 너머까지 적용되는 자연법은 없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지옥과 천국도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계 안에서도, 하나님은 제한되지 않는다. 소설의 저자와 같이, 하나님은 전적으로 줄거리의 책임자이다. 그가 고안한 규칙과 줄거리에 어떻게 그가 묶여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갑자기 이야기의 줄거리를 벗어난다면, 결과적으로 분열과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이유이다. 일상적인 과정을 뛰어넘어서 줄거리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관심을 모으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만들었다면, 또한 그가 자연법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원한다면, 이것들을 이용해서 지금까지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사건들을 일으켜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제 18 강 시험문제>>

1. 왜 기적의 문제가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중요한가?

2. 종교는 가치에 과학은 사실에 근거하기에 어떤 갈등도 없다는 생물학자 Stephen Jay Gould의 진술은 타당한가?

3. 자유주의 기독교인들은 기적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그 위험성은 무엇인가?

4. 논리적인 실증주의자들은 무엇을 믿는가?

5. “수학적인 진리는 분석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칸트의 주장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6. 왜 과학적인 법칙들은 증명이 불가능한가?

7.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대한 흄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8. 과학적인 법칙들이 필연적으로 사실일 때 기적은 무효화될 수 있다는 말은 옳은가?


<<눅 13, 장14장, 15장의 조명을 가지고 눅 12장 연습하기>>질문의 범위 : 눅 12:1-12

a.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b. 바리새인의 누룩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눅 11장에서 예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c. 참새의 비유를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d.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을 한다는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e. 말로 인자를 거역해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설명하시기 바랍니다.

f. 예수님을 부인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과( 9절),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는다는 말씀(10절)은 모순입니까?

g. 아니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쉽게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h. 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함을 받을 수 없는지 눅 12:1-12절 안에서 그 답을 찾아서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p.s. : What's so great about christianity?  Dinesh D'souza의 책 "제 16 장"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해와 문맥상의 흐름을 위해서 조금 수정, 보완을 하였습니다. 잘못된 해석이 있다고 한다면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p.s. 이것으로 2014년도 제 3학기 수업을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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