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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부 기독교와 철학 : 제 15 장 우리의 감각너머의 세계 : 칸트와 이성의 한계
임 바울  2014-12-11 19:33:44, 조회 : 1,882, 추천 : 359

                                          제 5 부 기독교와 철학

                                                     제 15 장
                                   우리의 감각 너머의 세계 : Kant 와 이성의 한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려면 그 직무를 이성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 Critique of Pure Reason-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과 과학적인 설명을 생각하였다. 이제 세속주의 선두 주자의 가장 교만한 자랑을 조사하기 위해서 이 탐구를 확대하려고 한다: 그는 이성의 전도자이다. “자유사상가는 지구에 있는 근본적인 의문에 이성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다”라고 Susan Jacoby가 그의 책에서 썼다. 이성을 자신의 좌표로 삼는 무신론자들은 신앙, 미신 그리고 다른 비이성적인 형태를 취하는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상상한다. Sam Harris는 쓰기를, “아내가 너를 속이고 있다거나 또는 요구르트가 사람을 투명인간으로 만든다고 절실한 기독교인에게 말해보라. 그는 분명히 다른 어떤 사람만큼이나 증거를 요구할 것이며, 주어진 만큼만 받아들일 것이다. 침대 옆에 놓여진 책이 우주에 대해서 믿을 수 없는 모든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원한 불로서 너를 심판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보이지 않는 신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고 절실한 기독교인에게 말해보라. 그러면 그는 어떤 증거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한 주제가 있다: 인간의 이성이 실체를 이해하는 유일하고도  최고라는 주장이다. “자유로운 탐구”를 쓴, Vern Bullough는 “인문주의자들은 적어도 그들 편에서 실체를 갖고 있다.” Paul Bloom은  Atlantic Monthly에서 주장하기를, “맞다. 우리의 직감적 통찰과 가설은 불완전하며 믿을 수 없지만, 이런 사상들을 실체에 비추어서 실험하는 아름다운 과학이 있다.” Steven Weinberg은 과학자로서 그는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실체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탐구를 하는 사람이지 창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지식을 추구함에 있어서, 실체는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으로 가도록 인도를 한다”고 하였다. E.O. Wilson은 쓰기를, “우리 머리 밖에 있는 것은 지지될 수 없는 실체이다. 그에 반해서 우리 머리 안에 있는 감각적 입력과 개념의 자기 조립에 기초한 실체의 재구성이다.” 두 개를 연결시킴으로서, Wilson은 과학적인 이해에 기초한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계몽주의의 이상을 실현시키기를 소망한다.


        Weinberg, Wilson, 그리고 다른 무신론자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전제가 숨어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그들의 이성적, 과학적 접근법이 그들로 하여금 외부 실체에 대하여 완전한 접근을 하도록 한다고 추정한다. 무신론으로 하여금 특별히 교만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전제이다. Daniel Dannett과 Richard Dawkins는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종교적인 신자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을 “brights”라고 부른다. 이 장에서 이들의 교만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실체에 대한 무신론자 또는 “brights”의 접근은 필적하는 접근법을 가지고 평가를 해야 한다. 여러 세기에 걸쳐서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두 가지 수준의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여왔다. 실체에 대한 인간적인 관점이 있다. 이것은 실험에 의한 관점이다. 우리가 경험을 하는 실체이다. 그리고 초월적인 실체에 대한 관점이 있다. 소위 하나님의 관점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실체 그 자체이다. 인간은 일종의 피조물이기에, 제한적이고 왜곡된 방식으로 사물을 본다. 또는 어두운 안경을 쓰고 본다. 고전 13: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식으로 진술하였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하나님의 관점을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무상하고 표면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이런 사물들이 무엇과 같은 가를 구별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죽음 너머의 삶이 있다.


        이 두 가지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무신론자에 의해서 취해진 근거, 즉 경험과 이성에 의해서 논증을 전개하면서, 종교적인 관점이 옳은 것임을 나는 보여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서 제시된 방법을 선택하였다. 칸트는 자신을 현대 철학의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바른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칸트는 계몽주의의 주요 인물이며, 과학과 철학의 선두주자이며, 계몽주의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그는 보여주었다. 많은 현대 무신론자들이 정확하게 따랐던 오류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쓴 아더 쇼펜하우어는 쓰기를, “칸트의 가르침은 그것을 이해하려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 변화는 너무 커서 이것은 지적 재생이라고 불리울 수 있다..... 이것의 결과로서, 사람들은 근본적인 깨우침을 경험했다. 그 후로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기 시작하였다.” 칸트의 위대함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였다. 우리는 인식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칸트는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인식 밑에는 전혀 다른 수준의 것이 놓여 있음을 보여주었다.


        칸트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이성과 감각이 우리들에게 외적인 실체- 우리 밖에 있는 세계-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고 가정하였다. 인간에게는 알 수 있는 유일한 한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 한계는 실체 그 자체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에 의해서 넓게 주장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은 어떤 것도 발견할 것이 없을 때까지 이성과 과학의 도구를 사용해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계몽주의 오류는 인간 이성과 과학이, 원리적으로, 실체 전체에 접근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순수 이성 비판”이라는 책에서, 칸트는 이런 가정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인간이 알 수 있는 데에는 훨씬 더 많은 한계와 제한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이성은, 우리의 본성이지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이성을 사용해서 이성이 한계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성이 어떤 주장들을 판결할 수 있는가를 조사함 없이 이성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것이 매우 독단적이다. 합리적이기 위해서, 이성은 그 자신의 영역을 검사해야 한다.


        칸트는 매우 간단한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모든 인간 지식은 경험에 의존한다.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서 실체에 접근한다. 이 감각 작용이 우리의 뇌와 중앙 신경 체제를 통과한다. 이것을 한번 생각해보라: 모든 생각, 우리들의 상상까지도,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을 보는 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우리가 외부 세계에서 온 피조물을 상상하여 그림을 그린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네 개의 눈과 열 개의 다리를 줄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 인간 경험으로 표현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인식하거나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우리의 다섯 감각은 실체를 인식하는 유일한 렌즈라는 것이 경험적인 사실이다.


        이제 칸트는 놀랄만한 질문을 던진다: 실체에 대한 인간의 지각은 실체 그 자체와 어떤 상관이 있는가? 칸트 전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당연히 깊은 관계가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믿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 “상식”은 너무 강력해서 많은 사람들은 칸트의 이 질문이 그들에게 던져졌을 때에 화를 내고, 참지 못하였다. 이것은 마치 그들이 존재하는가를 증명하라고 그들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일종의 농담처럼 조롱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결코 비관적이 아니었다. 자신은 회의론주의 논박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생각하였다. 그러나 회의론주의에 대답하기 위해서, 회의론의 논증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회의론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길은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진리를 공평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인간 지각의 신뢰성에 대한 칸트의 질문은 Descrtes 이후로 서구 철학의 중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Locke는 물질적인 것은 두 가지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 1차적인 특성과 제 2차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제 1차적인 특성은 물자체(物自體)이다. 그에 반해서 제 2차적인 특성은 우리 안에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과를 인식할 때에, 사과의 질량과 모양은 사과 그 자체의 성분이다. 그러나 Locke는 사과의 빨강색, 그의 향기, 그리고 그의 맛은 사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영리하게 지적하였다. 사과를 보고, 냄새를 맡고, 먹은 사람 안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외적 실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두 가지 근원에서 우리에게 온다는 점이다: 외적인 대상과 내적인 인식 장치이다. 실체는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가 제공하는 렌즈를 통해서 여과된다.


        철학자 George Berkeley는 이런 종류의 탐구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였다: “외적인 실체를 인식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때에,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응시할 뿐이다.” Berkeley의 논증은 우리 마음과 감각의 인식 장치 밖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대상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상의 제 1 차적인 특성과 제 2 차적인 특성은 이런 식으로 인식된다. 우리는 오대양을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대양에 대한 우리의 영상, 소리, 느낌을 경험한다. Berkeley는 우리 마음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물질적인 실체가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결론 맺었다.


        위대한 Samuel Jonson은 바위를 발로 차서 Berkeley를 논박하였다. “보라, 바위가 있다! 이것은 논박이 아니다.” Johnson에 대한 Berkeley의 응답은, 바위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그것을 찼을 때에 그가 느끼는 날카로운 고통까지, 그의 마음에서 전적으로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Hume은 이것을 인간 그 자체에게 적용함으로서 Berkeley의 회의론적인 논증을 완성하였다. 우리는 감각, 느낌 생각을 제외하고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떤 것도 경험하지 않는다. 감각과 느낌과 생각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만, 이런 반응을 가질 것이라고 가정하는 ”나“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칸트의 논증은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 그 자체를 닮았다고 가정할 만한 어떤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사물 그 자체를 통찰할 수 없다. 실체는 영원히 우리들에게 숨겨져 있다. 칸트가 말하는 요점의 힘을 보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실체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실체 그 자체와 “같은 가”를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는가? 학교 선생님을 그린 딸의 초상화가 그녀의 선생과 어떻게 같은가를 보려면 같이 나란히 놓고 비교함으로서만 알 수 있다. 복사판이 원본과 얼마나 같은가를 비교함으로서 “정말 같은지”를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실체에 대한 경험과 실체 그 자체를 결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칸트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경험이고, 이것이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복사판만을 갖고 있으며, 원본을 가지지 못한다. 게다가 복사판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만 우리들에게 온다. 원본은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의 감각과 독립해서 존재한다. 두 개를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할 만한 근거조차 갖고 있지 않다. 우리 경험이 실체와 일치한다고 가정할 때에, 우리는 정당하지 않는 도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칸트가 현상계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무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은, 이 시점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매우 중요하다. 이 세계는 인간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현상계를 믿는 것은 전적으로 합리적이다. 사물의 작동하는 원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과학과 이성을 사용하는 것도 매우 합리적이다. 인정된 과학자요 수학자인 칸트는 과학의 가치를 전혀 멸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은 물자체(物自體) 또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현상계(現象界)에 적용함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칸트는 믿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외적 실체의 존재를 칸트가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회의론자가 아니다. Johann Fichite와 같은 다른 철학자들은 회의론주의로 나아갔지만, 칸트는 그렇지 않다. 칸트에게 있어서, 물자체는 분명하게 존재하며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를 일으킨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경험은 어떤 것의 경험이다. 게다가, 칸트는 세상에 대해서 어떤 사실들이 예를 들면, 물자체 영역을 고찰함이 없이 이해되어 질 수 없는 도덕성과 자유의지등과 같은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것을 이해하는 최상의 방법은 두 가지 종류의 실체를 가정한 것으로서 칸트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체와 물자체.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더 실체적인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이 경험이라는 현상적인 영역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자체의 영역은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역에 대해서 어떤 것도 알 수가 없다. 인간 이성은 실체 그 자체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칸트의 논증은 너무 강력해서 그의 비평가들은 단지 상식을 조롱했다는 응답만을 할 수 있었다. 칸트 논증의 정체를 밝혔다고 Wall Streey Journal에 기사를 썼던 Daniel Dennett을 비평하였을 때에, 몇몇 사람들이 충분하게 칸트를 반박하였다고 말함으로서 그의 홈페이지에 화난 응답을 게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반박도 제시하지 않았고, 어떤 이름도 주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Dennett는 청중의 무지에 근거한 논증에 기초해서 말을 하였을 뿐이다. 그의 추종자들이 이런 반박이 어떤 곳에 존재한다고 믿음을 가지기를 원한다. 사실, 이런 반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의 생각은 반직관적이라서 감정적인 저항을 일으켰다. 실체는 그것이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개념은 어리석고, 사실이 아니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기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논증이 아무리 강하다할지라도 우리는 칸트를 직감적으로 반대를 한다. Dennett과 같은 보통 합리적인 사람은 확실히 성급하게 칸트에 대해서 반응을 한다. 그들은 칸트의 논증에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반응을 한다. 이런 태도를 “이성의 근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본래 너무 확실해서 이성적인 비평을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성이 비 이성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그들은 상식이라는 직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상식은 진리를 인도하는 신뢰할만한 인도자는 아니다. 지구는 고정되어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회전한다고 상식은 우리들에게 말한다. 물체는 항상 멈추어져 있고 움직이는 물체는 자동적으로 멈추게 된다고 상식은 말한다. 우주와 시간은 절대적이라고 상식은 말한다. 이 모든 간단한 직감은 거짓이다. 사실 현대 과학의 위대한 발견은 - 코페르니쿠스로부터 갈릴레오 그리고 뉴튼에서 아인슈타인, Bohr에서 Heisenberg에 이르기까지, 상식에 대하여 중대한 침해가 있었다. 여러 경우에 이런 사상들을 표현한 천재들은 미친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미친 사람들이 맞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체는 항상 매우 이상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상식은 세상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우리들에게 주지 않는다. 항상 상식이 이런 업무를 수행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무식한 사람으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철학자 Bertrabd Russell이 전에 말한 것처럼, 상식은 “사나운 형이상학”이다.


        칸트는 인간 이해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았다.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뒤집어놓고 태양과 지구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던 것처럼, 칸트도 그 자신의 철학이 생각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을 사실적으로 인식을 하는 경향이 보인다. 시간당 몇 천 마일로 우주를 돌고 있는 혹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일상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런 사실성은 환상으로 간주를 한다.


        사실주의(realism)의 환상은 실체에 대한 우리 환상을 실체 그 자체라고 잘못 생각하게 한다. Denette과 같은 사실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을 감성적이 아닌 경험주의자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허용된 모든 것이 경험이고 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인식할 만큼 경험적이지 않다. 경험을 가지고 출발을 하고 이성이 정당함을 나타내는 과정으로 나가가는 사람은 초월적인 이상주의자이다. 반면에, 경험주의자들은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가정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의 모든 철학은 의심스러운 전제 위에 세워진다. 경험주의자들은 그의 경험이 실체에 대한 마법적인 접근을 준다는 것을 어떤 증거 없이 가정된다. 경험과 실체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봄으로서 이 두 개를 하나로 그리고 똑같은 것으로 본다. 경험과 실체를 동등한 것으로 봄으로서 그는 논리에 벗어난 절차를 밟는다. 이런 논리의 붕괴는 Denette 또는 우리가 인식하기에는 쉽지가 않다. 우리는 환상을 향한 고정된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체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정확하게 같다는 환상. 이런 비이성적인 절차를 밟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정확하게 이성의 길을 쫒아가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그들이 이런 토대를 스스로 조사하지 않는 한 그들의 자신들의 잘못을 찾지 못할 것이다.


        칸트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의 논증에 대답을 하려는 몇 몇의 “brights”가 있다. 우리가 실체에 접근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실체를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방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똑같은 램프와 테이블과 선반에 있는 책을 본다. 확실히 이런 것들은 존재하며 직접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똑같은 인식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대답은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감각 기구를 갖고 있으며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을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경험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 우리가 동일한 또는 유사한 경험을 한다는 것이 경험 너머에 있는 실체에 접근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생물학자 E.O. Wilson은 다른 방향을 택했다. 과학은 전에 우리가 가진 인식적인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제공한다고 한다. “적당한 도구를 가지고 우리는 세상을 정밀한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다. 수상기, 변압기, 그리고 야간 촬영술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을 박쥐와 같이 경험할 수 있다. “물고기”는 규정된 몸짓을 통해서 서로 대화를 나눈다. 동물학자들도 발전기와 수화기를 통해서 동물과 대화가 가능하다.”


        이제 우리가 칸트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윌슨이 그것을 손상시킨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야간 촬영술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눈을 가지고 영상을 본다. 우리는 발전기와 수화기를 사용할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런 도구들이 말하는 것을 읽고, 듣고,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을 사용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인식 도구는 경험이라는 영역에 갇혀있다. 항상 이것은 변함이 없었으며 우리가 인간으로 있는 한 항상 변함이 없을 것이다. 미래 과학의 발견이 우리의 한계를 바꿀 수는 없다. 이런 발견들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한정된 인식 장치를 통해서 만들어져야 하고 경험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칸트의 결론은 이성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이성의 영원하고 버릴 수 없는 한계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우리 경험 한계 안에 제한되고, 본래 실체는 영원토록 감각의 한계 때문에 우리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색다른 것처럼 보일 것이지만, 사실은 바로 이것이 서구 철학의 중심에 놓여있다. 아마도 서구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서, 플라톤은 인간은 동굴에 살고 있으며, 태양의 빛에서 차단된 사람으로 비교되었다. 그가 보는 모든 것은 어두움이기에 그로 하여금, 실체로 보지 못하게 한다. 플라톤은 우리의 인식을 심오하고 고상한 실체의 영상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며, 소위 이것을 플라톤의 형태라고 부른다. 실체는 항상 인간 경험 영역 너머에 있다고 하였다. 플라톤의 선생인, 소크라테스는 그 자신을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보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은 별로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칸트는 서구 철학의 주류임에 틀림이 없다.


        세상의 주요 종교의 중심 교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칸트를 이해하는 일에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의 철학적 시각은 힌두교, 불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를 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경험 세계는 있는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 이들이  공유하는 중요 교리이다. 우리의 세계는 보이는 세계이다. 더 높고, 영원한 실체에 의존하는 일시적인 세계이다. 이 실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실체와는 전혀 다르다. 영원한 실체이며, 우리 세계를 지탱시켜주며 그것을 우리들의 감각에 제공한다. 이성이 이 높은 영역의 존재를 지시하지만, 바로 이곳이 또한 이성이 멈추는 장소라고 기독교는 가르친다. 스스로 이 영역을 탐색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날에, 우리의 지상 생애가 멈추게 되면, 우리는 이 높은 영역을 알고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자 Peter Berger는 쓰기를, “이 세상에서 경험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종교적인 동기와 탐구는 인간의 영원한 특징이다.” 이제 칸트는 이런 종교적인 확신을 온전하고 이성적인 기초에 두었다. 칸트의 사상, 종교적 사상의 중심요소에 일치하지만, 전적으로 세속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칸트는 이성만으로 이런 영역에 도착했다. 어떤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믿음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의 한계를 보여줌으로서, 칸트는 신앙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칸트는 우리의 Virgil이다. 그는 이성이 갈 수 있는 곳까지 우리들을 데리고 갔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다른 인도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만을 닦아놓은 사람이다. 칸트의 업적은 계몽주의의 지적 가면을 벗겨주었다; 이성과 과학은 실체와 진리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 이런 환상이 오늘날 우리들을 붙들고 있으며, 우리에게 이런 지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따라서 “brights”는 그들의 역할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며, 칸트는 그들이 지적으로 벌거벗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칸트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상황이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은 지금 교리적이고 또한 교만함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인 성도들은 온유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교만하게도 이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깨닫는 유일한 도구라고 환상에 빠져있지만, 종교적인 성도들은 인간 지식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있으며, 더 높은 실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의 감각과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너머의 실체가 있음을 알고 있다.


<<제 17 강 시험문제>>
1. 세상의 주요 종교들이 인정한 실체의 두가지 측면은 무엇인가?

2. 임마누엘 칸트가 문제를 제기한 계몽주의의 오류는 무엇인가?

3. 실체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실체 그 자체는 같은가?

4. 물자체와 현상계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무엇인가?

5. 칸트는 인간 경험을 환상이라고 말하는가?

6. 경험주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어떤 문제점을 주는가?

7. 칸트의 논증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수세기 동안 유지했던 것들을 지지하는가?


<<눅 13, 장14장의 조명을 가지고 눅 15장 연습하기>>질문의 범위 : 눅 15:11-20

a. 어떤 사람에게 있는 두 아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비유한 것입니까?


b. 누가 첫째 아들이고, 누가 둘째 아들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c.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c. 아담의 사건과 비교한다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인지 설명하시기 바랍니다.


d. 신학적으로 회개의 정의를 본문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e. 둘째 아들이 회개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구원에 대한 신학적인 결론을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f. 아버지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g. 이 구절과 눅 13, 14장은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P.s. : What's so great about christianity?  Dinesh D'souza의 책 "제 15 장"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해와 문맥상의 흐름을 위해서 조금 수정, 보완을 하였습니다. 잘못된 해석이 있다고 한다면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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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 5 부 기독교와 철학 : 제 16 장 고래의 뱃속에서 : 왜 기적은 가능한가?    임 바울 2014/12/18 300 2083
 제 5 부 기독교와 철학 : 제 15 장 우리의 감각너머의 세계 : 칸트와 이성의 한계    임 바울 2014/12/11 359 1882
16  제 4 부 설계로 부터 논증 : 제 14 장 창세기 문제 : 과학의 방법론적 무신론    임 바울 2014/12/04 325 1967
15  제 4 부 설계로 부터 논증 : 제 13 장 Paley는 옳았다: 진화와 설계 논증    임 바울 2014/11/22 378 2017
14  제 4 부 설계로 부터 논증 : 제 12 장 설계자의 혹성 : 창조에서 인간의 특별한 위치    임 바울 2014/11/13 335 2014
13  제 4 부 설계로 부터 논증 : 제 11 장 시작을 가진 우주: 하나님대 천문학자    임 바울 2014/10/18 287 1881
12  제 3 부 제 10장 무신론자의 전설 : 갈릴레오 사건 재개    임 바울 2014/10/06 288 1978
11  제 3 부 제 9 장 로고스에서 우주로    임 바울 2014/09/26 233 1731
10  제 3 부 : 기독교와 과학 : 제 8 장 기독교와 이성    임 바울 2014/09/18 220 1868
9  제 7 장 동등하게 창조되다    임 바울 2014/09/10 280 1720
8  제 6 장 내가 원하지 않는 악    임 바울 2014/09/10 266 1599
7  제 2 부 기독교와 서구 문명 : 제 5 장 씨이저의 것은 씨이저에게 : 제한된 정부의 영적 기초    임 바울 2014/09/08 308 1766
6  제 4 장 청년들의 교육을 그르치다    임 바울 2014/09/01 303 1566
5  제 3 장 하나님은 위대하지 않다    임 바울 2014/08/22 280 1714
4  제 2 장 종교의 부활 : 왜 종교는 승리하게 되는가?    임 바울 2014/08/22 275 1576
3  제 1 부 기독교의 미래 : 제 1 장 무신론의 쇠태 : 기독교의 대대적인 승리    임 바울 2014/08/22 229 1760
2  서론 : 신자와 불신자에게 도전    임 바울 2014/08/22 253 1334
1  What's so great about christianity?    임 바울 2014/08/22 27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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