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Henderson Christian Seminary in New York

Sinners in the Hands of a Good God

Home About Us Academic Program Admissions News &
Event
Gallery Contact Us
LOGIN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3 부 제 9 강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징계
임 바울  2014-02-10 20:22:21, 조회 : 2,425, 추천 : 427

                                                            제 3 부
                                                            제 7 장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징계



사 53:5

        신학은 가장 인격적인 학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넓어지기 위해서는 내 자신에 대한 지식 또한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녀야 하는 지식은 주로 고통스럽고 싫어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정당하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죄는 무한한 크기의 악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심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며 영원토록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거짓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매우 이상하고, 어려운 것이지만 이런 모든 진리들이 우리의 마음과 일상적인 삶속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하나님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어느 하나라도 이런 지식에 반대를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바른 신학에서 벗어나게 되고, 왜곡된 신학을 갖게 된다. 우리가 죄책과 악한 마음 때문에 넘어진다면,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신을 우리가 만들어가게 된다. 의지의 종속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거절한다면, 우리에게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주지만 실제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신을 창조하게 된다.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성경의 어려운 말씀들을 직면하기를 꺼려한다면 자기의 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관점을 발전시키게 되고 우리로 교만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형상에 따라 하나님을 만드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1. 환영받지 못하는 속죄 교리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 속죄교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삶을 전가된 의를 위해서 죄책과 진노에서 우리들을 풀어주기 위하여 제공된 대속물로서 묘사한다.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값을 예수님이 지불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을 예수님이 죽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형벌을 그가 대신해서 받았다. 그가 우리 자리에 서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죄가 받아야 하는 저주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이것이 환영받지 못하는 속죄교리이다. 이것은 너무 분명하게 그리고 엄청나게 말씀하고 있기에 성경을 읽는 사람이 놓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구약에서 모형과 약속들이 있다: 레위의 희생 제사, 오순절, 속죄일, 종살이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구속, 고통받고 그들을 대신해서 죽는 종에 대한 말씀들이 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모든 모혀와 약속을 성취한 분으로서 제시된다. 그는 참된 희생양이다. 그의 죽음은 구속을 위해서 지불된 값이다.  그는 고난받는 종이다.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통해서 중요한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도, 그의 죽음은 죄의 값을 지불한 것이고 십자가는 우리의 죄책을 속죄하였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켰다.

        이런 진리가 복음의 중심에 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전달한다. 이런 것에 대한 묵상은 우리들의 마음을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차게 한다.



2. 신학자들과 속죄 교리

    명료성, 충만성, 그리고 이런 개념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학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 그리고 그들의 신학은 결과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중생시키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예수님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성경적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보편적인 속죄교리로 인도됨을 이미 보았다. 이것은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으로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 해준 것이 전혀 없다.  알미니안 속죄는 실제적으로 속죄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자신들을 구원하라는 초청에 불과하다.

        A. 주관적인 속죄
           하나님이 죄인을 벌주시는 것이 옳다는 -형벌이 그들의 개선을 위한 것인지에 상관없이- 옳다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에 심각한 왜곡을 주게 된다. 조오지 맥도널드는 속죄교리를 거절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독특한 웅변과 의분을 가지고 응답을 했지만 그의 비난자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임을 나는 믿는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가 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들과 화해하는 것에 대해서 한 마디도 없다.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다......(I believe that Jesus Christ is our atonement; that through Him we are reconciled to, made one with God. There is not one word in the New Testament about reconciling God to us; it is we that have to be reconciled to God ….)

        “아버지와 자녀사이에 있는 영원한 악의 심연속으로 주님께서는 자신을 던지지 않았는가? 그는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소개하지 않았는가? 참된 아들의 얼굴에 있는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를 보라!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그를 사랑하도록 아버지의 참된 형상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는 우주의 한가지 진리 즉 구원하는 한가지 진리만을 주장하지 않았는가? 주님은 끝까지 이것을 주장하지 않았는가? 아버지의 발앞에 우리들의 생명을 놓으라고 설득하기 위해서 주님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은 것은 아닌가? 그가 버렸던 생명을 그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이 아닌가? 그들을 재 창조함으로서 오직 생명가운데 살도록 한 것이 아닌가? 무서운 바다의 거친 모든 파도가 자신에 임하게 하고, 반항하지 않고 죽음으로서 악을 물리치고 파괴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분노를 소모시키고 패배시키지 않았는가? 진실로, 그는 속죄를 하였다. ”

        맥도널드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회개를 하도록 함으로서 예수님이 속죄를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 우리는 갑자기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가를 알게 되고, 우리의 죄를 회개할 욕망을 갖게 되고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는 아버지의 발 앞에 우리들의 생명을 내려놓는다. 예수님의 죽음은 “주관적인 ” 효과를 가지며, 이런 식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 우리들에게 도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어떤 객관적인 변화를 창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이도 우리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지만, 우리와 하나님과의 기본적인 관계를 전혀 바꾸지 않는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진노를 피하거나 우리의 죄책을 전혀 제거하지 않는다. 맥도널드의 글의 취지로부터, 속죄의 객관적인 이해를 - 즉 하나님과 죄인과의 관계를 실제적으로 바꾼다는 이해- 미개하고,  저열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욕적인 생각으로 그는 보고 있다.  

        맥도널드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중심 사상은 성경이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하여 권위있는 지식의 원천이 아니다. 대신에 신학자들은 성경적인 자료를 가지고 창조적으로 작업을 하며,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그림을 그 자신의 삶의 경험을 가지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런 과정이 전개될 때에, 인간 죄에 대한 신적 심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항상 제일 먼저 버려져야 하는 조항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적대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이 성경 이야기의 주요 원동력을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제일 먼저 사라져야 하는 개념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우리가 죄에 빠져 타락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미워하고 그것을 처벌하기로 결정했으며, 우리의 곤란한 상태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신학자는 그들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비 성경적인 언어로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재 해석해야 한다.  


        위르겐 몰트만( Jurgen Moltmann)은 이런 성향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그의 책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은 십자가에 대하여 300페이지에 달하는 연구를 하였다. 십자가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묵상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심리적인 강박관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십자가는 하나님을 사랑으로 그리고 압박받는 사람들과 같이하려는 마음을 보여줌으로서, 정치적인 불공평과 물질 환경의 악함을 우리로 하여금 이겨나가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한다. 이 모든 해석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몰트만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거절한다. 신적 진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예수님은 대표적인 고통의 예로서 죽었으며,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 자신도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빚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 희생의 모델을 제공하기 위해서 죽었다고 한다.

        성경적 교리의 이런 곡해를 위한 몰트만의 유일한 정당성은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였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말하하지 않았다는 지지받지 못하는 증거를 제시한다. 대속적이고 형벌적인 속죄에 대한 생각은 초기 기독교인의 설교에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속죄에 대한 성경 그 자체의 노골적인 설명을 전혀 보지 않고 300페이지에 달하는 십자가에 대한 그의 책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B. 희미한 초점 : 십자가의 도덕적인 영향력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는 맥도널드가 말한 것은 틀리지 않다. 신약은 종종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살 것을 촉구한다;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그 분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고후 5:15). 대인관계에서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빌 2:5-8).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심리적인 완전과 정치적인 평화를 가지고 오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전혀 실수를 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신학자들은 첫 번째 중요한 의미를 다루지 않고 십자가의 제 2 차적인 혜택만을 잡으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의 초점이 흐려졌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십자가의 효과를 바르게 탐구하기 전에 우리의 심리와 우리의 정치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런 신학자들은 친구들과 싸움을 하면서 이 문제에서 일어난 자신들의 잘못된 점들을 직면함이 없이 그냥 그냥 지나가자고 말하는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실제적인 문제의 경계선만을 따라간다. 그들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귀잖아 한다.

        우리들은 이런 것보다 더 나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의미를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순순한 놀라움과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기쁨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성경적인 범주에서 속죄의 본질적인 속성에 분명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3. 속죄 : 새롭고 , 객관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는 객관적인 속죄를 가지고 시작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 변화를 시켰기 때문이다. 속죄가 진노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꾸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를 위해서 속죄를 하도록 그를 움직였던 것은 그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죄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받아들이는 장애물을 없앴고 그럼으로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도록 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리고 말해야 한다.


        A. 우리 죄책의  속죄
이런 장애물중에 하나는 우리의 죄책이다. 모든 사람은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 죄는 형벌을 요구하고, 죄를 결코 사하지 않는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신다(나 1:3). 우리의 죄책이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요 1:29). 그는 죽음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졌다고 하였다(사 53:12). 그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마 1:21).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죄를 알지 못하는 그를 죄인으로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셨다( 고후 5:21). 예수님은 그 자신을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주셨다( 갈 1:4). 그는 죄로부터 우리를 정결케 하셨다( 히 1:3). 자신을 단번에 드림으로서 죄를 없이 하셨다(히 9:26). 그는 자신의 피로서 우리의 죄에서 자유롭게 하셨다( 계 1:5).

        “죄를 짊어지셨다, 죄를 없앴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였다, 죄가 되게 하였다, 죄 때문에 그를 주었다, 죄로부터 해방시켰다”라는 이런 표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이 죄인이 되었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우리의 죄를 속제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를 믿는 그들은 그들이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다. 하나님과의 즐거운 교제를 누리는 일에 방해물이던 그들의 죄책이 제거되었다. 그들의 죄에서 일어난 법적인 문제들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해결이 되었다.


        B. 하나님의 진노를 속죄
           하나님이 우리들을 받아들이는 일에 또 다른 장애물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혐오감이다. 하나님의 법은 그의 속성과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범죄는 강한 분노를 일으킨다. 이 분노는 분개, 진노, 격분등으로 성경에서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다.

시 7:11
요 3:36
롬 2:8
엡 2:3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화목제물이다. 그의 죽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고, 만족을 시켰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 것은 우리의 죄이다. 많은 영어 성경이 이 진리를 분명히 하지 않았지만, 신약에서는 매우 긴급하게 제시한다. 롬 3:25-26절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희생제물로서 세웠다고 하였다. 그럼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의롭다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의로우심도 나타내었다고 하였다. 히브리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으며, 똑같은 말씀이 요일에서도 2번이나 보인다.

히 2:17
요일 2:2
요일 4:10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로부터 돌리는 수단이다라고 말한다.

        많은 학자들은 비합리적이고 반 기독교적인 분노를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근거로서 화목의 교리를 거절하여왔다.  다른 사람들은 죽음을 통해서 아들이 하나님를 화해시켰다는 것이 신적 삼위일체에 불합리한 분리를 도입한다고 불평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수많은 영어번역이 화해를 속죄 또는 속죄 제물로서 번역을 한 이유이다.

사실, 이런 반대는 어떤 의미도 없다. 헬라어 번역은 확실히 화목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이 사용된 구절들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이런 개념이 하나님에게는 전혀 필요없다는 불평의 근거들을 전부 제거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합리적이다. 악에 대하여 명료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반대이다. 이 진노를 달래는 것은 에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아들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협약에 의한 것이라고 분명히 진술한다.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웠던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다. 우리의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자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본질적으로, 화목의 의미는 삼위 하나님이 자신의 진노를 그 자신에게로 돌린 것이며, 그럼으로서 그의 진노가 우리들에게 쏟아지는 것을 막은 것이다.


               C. 화해
                    속죄가 우리 죄책의 제거라면, 그리고 화해가 하나님의 진노의 제거라면, 화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장애물이 없으며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화해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이다.

        화해가 객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인가? 양쪽이 다 맞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때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증오가 없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속에서 ,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졌음을 발견한다. 이것은 분명히 주관적인 화해이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강조는 우리속에 주관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을 향한 화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화해를 하였다는 진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전에 그들의 죄로 인해서 소원해진 사람들을 받아들일 길을 열었다.

        우리는 이것을 고후 5:18-21절에서 이미 보았다.

고전 5:18-21

하나님이 우리의 범죄를 계산하지 않는다는 지식이 그를 향한 우리의 증오를 버리도록 인도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요점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범죄의 책임을 제거할 때에, 바로 이것이 화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요점이다. 하나님을 전혀 죄를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죄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였다. 하나님과 소원해진 근거를 제거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을 그리스도에게 전가한 것이다. 바울이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화해를 하라고 촉구할 때에,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의 복음 메시지를 믿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능케한 화해의 체험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멕도널드는 바르게 말하였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화해 교리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기 위해서 먼저 시작을 하였다는 것이다. 밀라드 에릭슨이 말한 것처럼, “ 화해의 과정은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것이다.”

        D. 속죄의 필요성
           속죄를 제일 먼저 하나님과 우리와의 객관적인 관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아야 하는 또 다른 표지는 성경이 속죄를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의 구속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제한하는 어떤 도덕적인 원리나 법이 있다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위해서 필수적이라는 것은 부적당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갖고 있음으 리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영원토록 형벌을 주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우리의 죄를 해결할 방법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구원을 원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성경구절이 그리스도의 죽음 이외의 것을 가지고 우리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과 속성에 위배가 된다는 것을 내포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필수적이라고 기술한다. 그는 예언자에 의해서 예언된 일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영광을 들어가게 되어 있다(눅 24:26).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 3:14-16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마 26:39-42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한 것이라고 서신서들은 또한 말한다. 화목제물로서 그리스도의 봉헌만이 하나님이 그의 의로우심을 확증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롭다할 수 있다고 한다(롬 3:26).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소나 양의 피는 죄를 없앨 수 없다고 하였다(히 10;4). 그러나 예수님의 피흘림이 없으면 죄에 대한 어떤 용서도 없다, 따라서 더 좋은 희생이 꼭 필요하다. 희생의 모든 국면들을 포함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밖에는 없다. (히 9:22-23).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죄가 만들은 문제는 완전하신 하나님 아들의 순종과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어떤 율법이나 제한을 받지 않지만, 이것과는 낮은 것으로 우리를 용서하는 것은 그 자신의 거룩한 본성을 배반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을 그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속죄의 주요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 본성의 요구사항에 만족하게 행동했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구원을 그가 준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4. 속죄 : 우리의 대속물인 그리스도
속죄는 객관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감정에 영향만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소생을 위한 기초이다. 추가적으로, 속죄는 대속적이라고 분명하게 진술해야 한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로 죽었다. 그는 자신을 우리의 자리에 놓았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

        A. 구약 희생 제사의 의미
           구약의 희생제사를 묵상하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계를 짓자마자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적임을 알게 된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제물로서 해석을 하는 것을 매번 본다. 엡 5:2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제공하였다고 보고한다. 히 9:26절은 “ 그 자신을 단번에 제사로 드려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라고 말한다. 사실 히브리서의 대부분이 예수님은 제사장과  제물의 구약의 예표를 성취하기 위한 것을 증명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예수님의 피에 대한 신약에서의 암시는 그가 제물로서 죽었다는 신호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제사를 연구하려고 한다.

        옛 언약하에 동물 제사가 제공되는 방식을 보았을 때에, 희생된 동물이 희생을 드린 사람을 위한 대속물임을 알려주는 두가지 요소를 발견한다. 첫 번째로, 예배자는 그것을 죽이기 전에 동물의 머리에 그의 손을 놓아야 한다( 레 1:4, 3:2, 8; 4:24.). 성경은 이런 행동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예배자의 죄가 희생된 동물에게 상징적으로 전달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으로, 예배자는 그의 죄가 죽음을 받아야 함을 인정하는 표시로서 동물을 죽인다(레 1:5). 이것을 함께 생각하면, 이런 예식은 예배자의 죄가 동물에게 놓였고, 이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지금 죽어야 함을 알려준다.

        대속이론은 속죄일의 예식에서 훨씬 더 잘 보인다. 이날에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한 제사로서 소를 바쳐야 한다. 그리고 사람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소를 위한 속죄로서 양을 죽인다. 그때에 제사장은 두 번째 양을 취해서, 머리위에 손을 놓으며, “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죄를 고한다(레 16:21).” 이렇게 함으로서, 상징적으로 양의 머리위에 그들의 죄와 불의를 상징적으로 놓는다. 그리고 사람들의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광야로 보낸다(레 16:20-21). 신약이 이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에, 소와 양의 피가 실제적으로 죄를 없앨 수 없다고 주장한다(히 10:4). 그래서 예수님이 이것보다 더 좋은 제물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짐으로서 아사셀의 역할을 성취한다(히 9:28). 아사셀의 죄를 짊어지는 것은 임시적이고 상징적이다; 예수님이 죄를 짊어지는 것은 영원하고 실제적이다.

        유월절은 대속의 이론을 가르친다. “주님은 문턱에 양을 잡아서 피를 바른 이스라엘 가족들을 넘어간다(출 12:21-23).” 이런 경우에, 양은 그들의 초태생을 위한 대속물이다. 그들의 자리에서 죽은 것이다. 예수님을 세상을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세례요한이 설명한 배경이다(요 1:29).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이 희생을 하셨다”라고 말했을 때에 예수님을 유월절 양과 직접적으로 연결을 시킨다(고전 5:7).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갔다.

        희생제도는 또한 사 53장의 가르침을 위한 배경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켰다(눅 22:37, 사 53:12). 이 구절은 하나님의 종에 대하여 말한다. 그의 고통은 자신의 죄때무이라고 잘못 해석을 하였지만, 실제로 그의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6절은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놓았다고 말한다. 10절은 종의 죽음이 죄를 위한 제사로서 기술하고 있으며, 11절과 12절에서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졌다고 반복하고 있다.

        5절은 대속 이론이 분명하게 제시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달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하는 형벌을 받은 것이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


        B. 구속과 배상금
           대속의 원리는 또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술하기 위하여 구속과 배상금 개념을 성경이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이런 개념뒤에 있는 기본적인 사상은 소유물 또는 사람을 해방하기 위해서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소유물의 경우에, 해방은 본래의 주인 또는 가족이 할 수 있다(레 25:29-33, 룻 4:4). 사람인 경우에, 이 해방은 종살이( 출 6:6, 레 25:48, 신 7:8), 죽음의 형벌( 출 21:29-30), 또는 죽음 그 자체( 시 49:15)이다. 각 경우에, 화폐나 동물의 희생이라는 값을 지불함으로서 해방이 된다.

        예수님이 그의 생명을 대속물로서 주러 왔다고 말한 배경이다( 마 20:28, 막 10:45). 그리고 딤전 2:6절에서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서 자신을 주었다는 유사한 말씀이 있다. 누가 이 보상금을 지불했는가는 물을 필요가 없다. 요점은 예수님이 그 값을 지불함으로서 우리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이 값이 대속적인 성격이 갈 3:3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갈 3:3

저주는 우리들에게 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것을 자신이 직접 짊어짐으로서 우리를 구속했다.

        그리스도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했는가? 죄의 형벌( 저주) 그리고 죄의 권능으로 부터의 해방이다. 엡 1:7, 골 1:14에서 구속은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딛 2:14절에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한다. 우리는 전에 죄의 종이었다. 이제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다(롬 6:20-22, 갈 5:1). 이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다.

        C. 예수님의 의
           최종적으로, 예수님의 완전한 의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대속의 원리를 볼 수 있다. 속죄에 대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지만, 신약에서는 그의 전 생애, 성육신과 승천, 사람과 하나님과의 화해에 초점을 맞춘다. 특별히 예수님의 완전한 의는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을 순종함으로서 얻어진 것이고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되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우리를 영생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서 보는 이유이다. 빌 3:9-1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율법으로 통해서 얻어진 자신의 의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의이다. 이렇게 됨으로서 마지막에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신학자 웨인 그루뎀을 다음과 같이 주석을 하였다, “ 바울이 그리스도로부터 필요한 것은 죄가 용서를 받는 깨끗한 상태가 되는 도덕적인 중립성이 아니다. 확실한 도덕적인 의이다. 그것은 자신을 통해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다시 우리를 대신한 예수님의 행동의 대속적인 성격이 매우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없으며 우리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자리로 들어오셨으며, 죽어야 할 우리를 위해서 죽었으며, 또한 우리가 위해서 살아나셨다.


5. 속죄 : 그리스도가 우리의 형벌을 받았다.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형벌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장황한 설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해야 한다. 신학적인 용어로서 속죄는 객관적이고 대속적이고, 형벌적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형벌을 몸소 지신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그리고 죽음은 예수님이 받으신 것이다.

이것은 부당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 우리가 마치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이 어떻게 옳을 수가 있는가?  예수님이 죄가 없다면, 어떻게 그가 죄가 있는 것으로서 취급할 수 있는가? 대리 속죄 교리는 하나님을 법적 의제( legal fiction)로서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대답으로서, 이 교리를 틀리게 이해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로 중요하다.  예수님이 문자적으로 우리 죄에 대하여 죄를 죄의식에 잡힌 것이 아니라, 법적인 죄의 책임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롭다고 선포될 때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록 이것이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설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죄가 있고 우리가 의로운 것으로 가장하지 않는다. 이런 결과들을 그의 아들에게 임하게 함으로서 우리의 죄에 대한 법적인 결과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 것이다. 동시에 아들이 우리들을 위해서 획득한 지위를 우리들에게 허락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제 9장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전가된 의와 관련이 있는 교리이다.

        추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움으로서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다른 좋은 구절들이 있다. 하나님을 죄를 알지 못하는 예수님을 죄있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그럼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고후 5:21).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면, 우리가 전가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된다. 우리의 바른 반응은 감사하고, 찬양하고 겸손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불평할 일이 아니다.

        형사적이고 대속적인 것으로서 속죄 교리의 이해를 반대는 또 다른 논증은 자신의 아들을 다루는 아버지를 잔인한 것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최근의 불평중에서, 여성 신학자는 전통적인 기독교가 아동학대를 조장한다고 말한다. 오직 학대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만이 그의 자녀들에게 부당한 고통을 받도록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런 관계를 우리 신앙의 구조로서 사용함으로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녀들을 학대할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게 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속죄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따. 아버지가 거절한 아들을 붙잡아 그로 하여금 우리의 대속물이 되게 한 것이 아니다.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서 아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속죄물로 내어놓은 것이다. 아버지와 그리고 그가 구속한 사랑하는 자녀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는 기쁨을 스스로 취한 것이다.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생명을 그로부터 빼앗지 않았다.

요 10:18

거룩하신 상위 하나님이 협력해서 활동했고 우리를 구속하고 화해시키는 일에 온전히 동의를 하였다.

        하나님 자신의 아들의 완전한 생명과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는 구속함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아버지,아들, 성령은 이 구원을 함께 계획하고 함께 실행한 것이다. 십자가를 아동 학대의 예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죽음의 필연성과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려는 그의 자발적인 의지를 잘못 평가한 것이다.


        6. 속죄 교리 요약 : 신적 공의의 만족

            역사적으로, 신학자들은 속죄의 의미를 그리스도가 믿는 그들을 대신해서 신적 공의를 만족시켰다고 요약을 한다. 하나님의 공의 - 그의 본질과 속성-은 죄인이 사악한 죄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는 것을 요구한다.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항해서 지은 죄는 무한한 죄이기 때문에, 만족은 오직 영원한 형벌을 통해서 또는 무한한 가치를 갖고 있는 존재의 형벌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죄가운데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신적 공의를 만족시킬 만큼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미 온전하게 만족이 되었음을 발견할 것이다.


        7. 십자가의 영광
        
            속죄가 객관적, 대속적 그리고 형사상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요일 4:10

타락한 자의 마음이 놀랄만큼 사악하다는 것은 이 교리를 반대하는 매우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도 잘 설명이 된다.  대신에 우리는 이 교리에 접붙어야 하고 온 힘과 정성을 기울여서 선포해야 한다. 십자가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과는 다른 기초석에 신학을 쌓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하늘아래에서 이와 같은 교리는 어떤 종교나 철학에도 없다. 하나님 율법의 엄격함에 대해서 알고는 있지만 그 분의 은혜에 대해서 모르는 종교가 많이 있따. 거룩함을 없애면서까지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가 있다. 오직 기독교만이  대속적인 그리스도의 죽음 교리를 통하는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종교이다. 그는 온전히 거룩하시며 어떤 악에 대해서도 타협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얼마나 황홀한 비전인지 모른다. 이렇게 거룩하고 ,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과 생동감 넘치게 관계를 맺으면서, 이 진리의 빛에 사는 것이 영원한 행복의 시작이다.

전 4:18


7. 저자의 기도 원문

O my God, my holy, loving, gracious triune God! The doctrine of the Cross makes my heart sing for joy; would that I had a poet’s skill to put that joy into words suited to the grandeur of Your grace! Thank You for the Atonement! I thank You, loving Father, for sending the Son as a propitiation for my sins. I thank You, Lord Jesus, for freely shedding Your blood for my redemption. I thank You, eternal Spirit, for opening my heart to grasp and receive this inexpressible gift. Above all, I thank You, dear God, for the sheer, startling beauty of Your moral nature: Your blinding holiness, Your unfathomable compassion, and their astonishing resolution in the agony of Golgotha. Let me live ever close to the Cross, not that I may wallow in my guilt, but that I may exult in Your holy love. And let me radiate that love to all around me, that they, too, may see Your light and enter into Your grace. Amen.

Clotfelter, David B. (2004-10-01). Sinners in the Hands of a Good God: Reconciling Divine Judgment and Mercy (p. 206). Moody Publishers 제 7 장을 번역한 것입니다.



  추천하기   목록보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2  결론 : 공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을 사랑하기    임 바울 2014/03/31 357 1849
11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3 부 제 11 강 그의 영광의 풍성함    임 바울 2014/03/07 360 2103
10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3 부 제 10 강 피를 통한 구속    임 바울 2014/02/22 454 2441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3 부 제 9 강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징계    임 바울 2014/02/10 427 2425
8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2 부 제 8 강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임 바울 2014/01/27 424 2436
7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2 부 제 7 강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다.    임 바울 2014/01/21 358 1801
6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2 부 제 6 강 그의 선택, 나의 선택    임 바울 2014/01/10 334 1961
5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5 강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될 것이다    임 바울 2013/12/31 303 2021
4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4 강 영원토록 지속되는 형벌    임 바울 2013/12/25 278 1929
3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3 강 죄를 짓는 영혼은 반드시 죽는다    임 바울 2013/12/24 347 1919
2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2 강 들어가는 말    임 바울 2013/12/24 366 1771
1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1 강 강의 계획표    임 바울 2013/12/24 347 1689

    목록보기 1
       

 
www.hendersonny.org // email: info@hendersonny.org

Copyright © 2018 Henderson Christian Seminary in New York
NY : 40-36/38 78th Street, Elmhurst, NY 11373
General and Admission Office of NY & NJ 718.810.3248 or 646.338.7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