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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2 부 제 8 강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임 바울  2014-01-27 18:54:11, 조회 : 2,437, 추천 : 424

                                                         제 6 장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빌 1:6


칼빈주의의 5대 교리중에서, 가장 격심한 증오를 일으키는 것중에 하나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택자들을 위해서 죽었다는 교리이다. 이 교리를 제한속죄라고 부른다. 그러나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확정된 속죄( definite atonement)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나라, 민족, 방언,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구원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점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서 죽지 않았다는 것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보편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이것으로부터 지구에 있는 모든 나라로 들어가는 세상의 혜택들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전 세상은 갈보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좋은 땅이 되었다. 확실하게 어떤 칼빈주의자들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충분하고 넉넉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성경과 선택의 논리와 속죄 그 자체의 본질로부터 만약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도 그리스도가 죽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가 평가절하된다고 주장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속죄는 전 인류라기 보다는 그의 택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었다고 주장함으로서, 칼빈주의 반대자들을 격분시키는 경향이 있다.  때때로 우리는 4 대 칼빈주의( Four point calvinist)로서 자신을 언급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제한속죄 또는 확정적 속죄 교리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1. 제한 속죄/ 확정적 속죄


        A. 문제을 일으키는 교리

            왜 이 교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인가? 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사용되었던 유감스러운 용어가 한가지 이유이다: 제한 속죄. 많은 사람에게 형용서 “제한된”이라는 단어는 칼빈주의자들을 예수님을 자기들만 모시려는 마음이 좁은 사람이거나 칼빈주의의 하나님은 마음이 좁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다른 방식으로 설명을 하지만 알미니안과 칼빈주의 모두는 속죄가 제한되었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바르게 지적을 하였다. 그리스도는 택자들을 위해서 죽었고 그들의 구원은 보장된다고 칼빈주의는 말한다. 이런 경우에 제한은 속죄가 계획되고 실행되는 사람의 숫자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알미니안은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어떤 사람의 구원도 보장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의 주장에는 구원하는 속죄의 능력에도 제한이 있다.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할 모든 사람을 포함해서 예수님이 차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면, 그의 속죄는 분명하게 제한된 효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알미니안의 이해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사람도 구원하지 않는다. 회개하고 믿기 위해서 그들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용서해줄 수 있도록 만드는 일만 행한 것이다. 하나님은 특별히 어떤 사람의 구원을 보증하지 않는다.  원리적으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도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이 담겨져 있다.


        로레인 뵈트너는 예정론에서, 칼빈주의를 위한 속죄는 바다를 가로질러 세워져있는 좁은 다리와 같고, 알미니안을 위한 속죄는 반 밖에 다리를 세우지 않은 넓은 다리와 같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편구원론을 인정하지 않는 한, 제한의 특징을 갖지 않는 속죄 교리를 가질 수는 없다.


        확정된 속죄에 대해서 불편함을 가지는 두 번째 이유는 성경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위해서 죽었다고 말하고( 요 1:29, 3:16, 6:35, 롬 11:12, 15:2, 딤전 2:4, 히 2:9), 모든 사람을 위해서( 롬 5:18, 고전 15:22, 고후 5:14, 딤전 2:4, 6. 히 2:9), 우리 모두를 위해서( 롬 8:32), 그리고 전 세상의 죄를 위해서(요일 2:2)라고 말한다. 이런 구절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인상을 주고 있으며, 확정된 교리의 반대자들은 칼빈주의의 논리가 정신 착란이라고까지 묘사한다. 확실히, 잘못된 칼빈주의 형이상학의 철장에 있는 죄수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 사랑에 어떤 사람도 제한을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 교리에 대한 불쾌감을 느끼는 세번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은 말로서 제시된 복음을 들어왔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서 죽음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보였다. 그러므로, 너가 감사하고 그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과 신앙을 나눌 때에, 우리가 기억하는 메시지가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불하였다는 생각이 기독교 복음의 중심에 있기에 , 이것이 없는 복음을 전달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예수님이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람을 설득시킬 수가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초청을 할 수 있는가? 알미니안의 설교와 과정으로 양육을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확정된 속죄 교리는 이단적이고 절대로 설교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들린다.


        이 주제에 대한 짧은 고찰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속죄의 본질과 범위를 이해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여기에서 논의된 것 이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많은 논라의 구절들을 파고 들어가야 하면 논쟁의 양측의 말들을 들어보아야 하고, 어떤 관점이 가장 합리적인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신의 확신은 이런 주제에 대한 성경구절들을 해석함에 의해서 더 낫다고 생각한다. 다음부터 칼빈주의 논쟁의 간단한 개요를 제공할 것이다.


        A. 속죄의 논리

교리의 논리를 생각하면서 시작해보자. 확정적 속죄는 칼빈주의 논리의 괴물이라고 어떤 사람은 주장한다. 실제로, 알미니안과  칼빈주의는 일관성 있는 논리 체계를 갖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리고 선택이 그에게 돌아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면, 그때에 필요한 유일한 속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응답하는 (알미니안) 인간을 용서를 허락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이 그들의 죄성에 붙잡혀 있으며,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없다면, 또는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그리고 선택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문제라고 한다면, 요컨대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게 사람들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때에 우리는 실제적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속죄를 기대해야 한다. 칼빈주의의 성경 이해의 관점에서, 괴물처럼 보이는 것은 알미니안의 속죄원리이다. 영적인 죽음으로서 그들 자신을 일으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속죄의 약속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깊은 물의 바닥에 있으며, 올라올 힘이 없다고 한다면, “복된 소식입니다. 물위로 올라오기만 한다면 제가 당신을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라고 어떤 사람이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어떤 위로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관점에서 보면, 알미니안 속죄에서 제시하는 도움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반대로, 칼빈주의 속죄는 실제로 사람을 구원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선택한 자들의 죄에 대해서 신적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며 그들 구원을 위해서 요구되는 모든 것을 지불한다: 효력적인 부르심, 신앙, 칭의, 성화, 천국에서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영화. 이 모든 구원의 복들이 십자가에서 그들에게 쏟아진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값을 지불하였다. 그들을 위해서 물 바닥까지 내려가셨으며, 그들을 구하는 일에 실패를 결코 하지 않는다.

요 6:39

        칼빈주의 견해에서, 논리적인 불가능을 제시하는 것은 알미니안이다. 알미니안은 예수님이 복음을 듣지 못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결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죽었다고 말한다. 우리들이 받아야 하는 형벌을 그 자신이 직접 짊어졌다고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의 죽음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효과가 없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위해서 전에 고통을 받았지만, 똑같은 죄 때문에 그들은 지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의 속죄는 처음에 매우 관대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더 면밀히 조사하면 할수록,  우리는 전혀 감명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사람의 속죄를 보장하는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죽었던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응답을 할 것을 보장하는가?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죄를 없애거나 줄이는가? 아니다. 실제로, 알미니안 속죄는 속죄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영접할 수 있는 길만을 열어놓은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타락한 사람이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알미니안의 속죄는 죄인들의 구원에 맞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으로 본다.


        B. 성경에서 보여지는 속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에서 보여지는 속죄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인가? 아니면 죄인들이 자신을 구원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가?

우리는 쉽게 이 점을 혼동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떨어질 수 없도록 하나님은 작정을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준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발적인 헌신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경이 구속에 대해서 말할 때에, 구원을 주는 그리스도 죽음의 효력을 강조한다.

갈 1:4
갈 3:13
롬 5:10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이런 일을 했다고 말하면, 우리가 불가능한 곤경에 처하게 됨을 발견한다. 이 악한 세대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않으며 또한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되지 않으며 또는 하나님과 화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주신 복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택자들만이 즐길 수 있는 복들이다. 어떤 곳에서도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믿는 사람들을 위한 복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복을 주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위해서 죽은 사람은 용서를 받고, 화해가 되고, 자유롭고, 구속이 된다. 피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모든 종족, 언어, 백성, 나라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람을 샀다. 그가 산 사람들이 왕국과 제사장이된다(계 5:9-10).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엡 5:25).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왕국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가지 않음으로, 이런 구절들을 엉뚱하게 해석하지 않고서는 이런 구절들을 모든 사람을 포함시키로록 보편화시킬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복들이 믿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 인간 결정에 의해서 나타난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선택이 인간 결정에 대한 예지에 근거한다는 개념만큼이나 성경과는 다른 개념을 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아마도 이 문제는 롬 8:28-39절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롬 8:28-39
        이 구절에서 바울의 요점은 무엇인가?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중에서 어떤 것도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이 사랑의 기초가 무엇인가? 영원전부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 그리고 예정이다. 그들은 항상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보증과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그의 아들을 주었다면, 그때에 그들에게 다른 모든 것도 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천국에 안전하게 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았고, 어떤 사람들을 그들을 고소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지할 수 있으며 삶의 모든 어려움과 죽음의 고통에서 보호하는 능력을 의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그들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영원전에 선택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영원히 사랑을 받을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에게 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어떤 것도 분리할 수 없다는 이런 말이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라는 주장이 합리적인가? 분명히 아니다. 구원받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가 이런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런 복들이 그들의 것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의 아들을 주었다면, 그때에 그는 확실하게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줄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갖지 않는다면- 구원에 관계된 것들-, 그때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따라서 그리스도가 선택된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결론을 피할 만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를 간과하고 있다”라고 알미니안은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들은 믿음을 통해서 주는 복들이다. 확실한 말이다. 그러나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믿음은 우리 인간 행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믿음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구절의 함축적인 의미는 믿음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보장된 것들중에 하나이다. 하나님이 예정한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 그가 부른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시고, 칭의가 믿음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때에 그가 예정한 사람들이 참으로 믿음을 가지도록 하나님은 보장할 것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의롭다함을 받을 수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면, 우리가 믿게 될 것도 진리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모든 ”또는 “세상”을 위해서 죽었다고 말하는 구절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확정적 속죄 교리의 반대자들이 이런 구절들을 인용해서 칼빈주의 교리를 타도하였다고 선언을 한다. 그러나 단어는 항상 문맥속에서 해석되어져야 하고, 모든 또는 세상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모든 경우에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풍부한 증거가 있다.

        롬 8:32절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주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맥속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말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죽음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부활하고 나면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겠다고 요 12:32절에서 말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올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 2 장에서 본 것처럼, 롬 5:18절을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했다면 이것은 잘못 읽은 것이다.

롬 5:18

바울의 요점은 아담을 통해서 그들이 구원을 잃어버렸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저주아래 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자녀들 모두는 의롭다함을 받을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모든 또는 세상”과 같은 용어들은 모든 종류 또는 모든 민족 즉 유대인과 이방인, 세상의 모든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이지, 모든 개인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 속죄를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든 구절을 여기에서 주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구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속에서 이런 구절들에 대한 신중한 연구없이 성급하게 알미니안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연구를 더 하도록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들중에 어떤 것들은 알미니안 해석과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러나 어떤 구절도 우리로 하여금 이런 해석을 채용하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C. 확정적 속죄를 설교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확정적 속죄에 대한 믿음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반대를 고찰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서 죽었다고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음으로  복음이 항상 이런 식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George Whitefield, Jonathan Edwards, Samuel Davies, Charles Spurgeon, 또는 과거의 많은 칼빈주의 복음주의자들의 설교에서 우리는 이런 진술을 헛되이 찾는다. 우리의 위대한 선교사들 - William Carey, Adoniram Judson, Hudson Taylor-이 칼빈주의 정통의 견고한 옹호자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점이 있는 복음을 설교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들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먼저 말하지 않고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가?

        첫 번째로, 그리스도가 모든 각 개인( each and every person)를 속죄하였다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면, 그때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를 위해서 죽었다고 불신자들에게 말할 권위가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할 권세를 받았다.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서 죽었고 구원을 위해서 오도록 모든 사람을 초청할 권세를 받았다.  그가 회개하고 믿으면,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옛 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게 될 것으로 약속할 권세를 받았다.

        끝으로, 할 수 있는 한 정열과 사랑을 가지고 이런 진리를 진술할 권세와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강권하여 채우라고 했을 때에( 눅 14:23), 열정과 진심으로 격려하고 경고하고 설득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성령이 그의 진리를 고치기 위해서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임무는 증명할 수 없는 진리를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제공하는 것이다.


        D. 알미니안 복음을 설교하기

           두 번째로,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불신자들에게 말함으로서 성취될 수 있는 좋은 영향력들이 지금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일보다 그를 위해서 한 일이 더 적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다면, 결코 우리들의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칼빈주의 설교자들은 불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라고 정열적으로 초청할 수 있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서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그에게 말함으로서 먼저 불신자의 마음을 붙잡아야 하고, 그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한 것은 사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그 구절의 힘을 약화시켜야 하며, 그리스도가 유다의 생애에서 하지 못했던 것처럼 잠정적인 회심자의 삶에서 더 이상의 구원하는 은혜를 그리스도가 행사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표현은 그리스도안에 불신자의 확신이나 존경심을 일으키기에 적당하지 않다.

        사실, 알미니안 복음 제시는 즉각적으로 불신자들을 전능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보다는 그 자신의 영적 자원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면,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를 믿겠다고 결심함으로서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달려있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들을 도와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지금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으로서 그의 역할을 이미 수행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구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알미니안 설교자들은 그의 보편적인 구속을 선포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높이지만, 곧이어 그리스도를 뒷전으로 밀어버리고 인간의 독립적인 자유의지를 높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알미니안 접근법의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칼빈주의 복음전도는 잘못된 신앙고백에 매우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유일한 실제적인 회심은 그 영혼에 단독적인 신적 사역의 결과이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본 것과 같이 거짓된 회심이 있으며, 그들 자신을 어떻게 시험하며 그들의 부르심과 선택함을 어떻게 견고하게 하는 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데에 칼빈주의 복음전도는 뛰어나다(고후 13:5, 벧후 1:10). 회심자를 성급하게 계수하지 않는다. 손을 들고 설교단 앞으로 나왔다고, 그리고 기도의 모습을 보고서 구원받았다는 잘못된 개념을 주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이런 전통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신앙의 열매가 드러날 수 있도록 몇 달이고 심지어는 몇 년이고 종종 기다린다.

        가장 나쁜 것은, 이런 종류의 복음 전도는 그들 자신의 회심의 증거에 전혀 만족감을 느끼지 않는 연약한 성도의 마음에 불필요한 염려를 줄 수 있으며 또는 이런 목회자들은 분별력을 발휘해서 그들을 도와주는 일에 서툴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칼빈주의 설교는 그들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참된 증거를 가질 때까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위한 탐색을 하도록 도와준다.

        대조해보면, 알미니안 전도에서, 가라지에서 알곡을 찾으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면, 그리고 우리가 선택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우리에게 달렸다면, 그리스도를위한 어떤 결정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하도록 했던 방식은 유효한 것이다. 영향력이 있는 큰 교회를 담당하고 있던 목사가 ,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길만 찾을 수 있다면, 자신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사람의 삶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를 믿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외롭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외로움을 채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진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준다. 다른 사람들은 낮은 자존심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 자신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할 수 있게 해준다. 각 개인의 필요성을 알기만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의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가를 그 사람에게 보여줌으로서 예수님을 믿겠다는 대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알미니안 전도에 있어서, 이것이면 충분하다. 예수님에게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다. 혹 그 사람이 “추가적”인 것과 훈련이 필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회심의 유효성은 의심받아서는 안된다. 이런 그럴듯한 결과때문에 자신을 성도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를 속고 있는 것이다.


         E. 확정적 속죄를 설교하기

            칼빈주의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가?  강하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우리는 누가 선택이 되었고 누가 선택이 되지 않았는가를 말할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서 죽었다고 불신자들에게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가 그 자신을 위해서 셀수 없는 많은 무리들을 샀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을 찾으라고 명령하였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시한다. 우리는 요 3:16절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한다.

요 3:16

그리고 듣는 모든 사람에게 믿으라고 초청한다.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물을 때에, 그들 자신을 보지 말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고 끝까지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하신 그리스도를 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기도하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촉구하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들이 한 결정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증거와 변화된 삶의 증거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이런 일들을 계속할 것이다.


2. 불가항력적인 은혜/ 효력적인 부르심( Irresistible Grace/ Effectual Calling)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것 때문에, 마지막 두 개의 칼빈주의 조항들을 빠르게 다루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줄려고 결정했을 때에, 그렇게 행하시는 그의 은혜는 저항될 수 없다. 성도와 불신자들이 성령을 여러 가지 면에서 저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칼빈주의자들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성령을 근심시키고 소멸시킨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의 목적을 반대할 수 있다.

엡 4:30
살전 5:19
행 7:51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이해할 수 없고 또는 사랑할 수 없다면, 그들의 증오를 이기도록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역사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돌어서지 않을 것은 필연적인 결론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가 없다; 첫 번째 출생처럼, 이 출생은 수동적인 행위이다.  우리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탄생이다. 성령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간다(요 3:1-8). 우리가 태어나게 되면, 그리스도에 대한 회심과 믿음을 시점으로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의 특징들이 자연적으로 개발될 것이다.


        A. 하나님은 인간 의지를 침입하는가?

         하나님이 사람의 의지를 침범한다고 가르침으로서 이 교리를 알미니안은 끊임없이 반대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자유를 침범함이 없이는 어떤 개인의 구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C.S. Lewis는 보편 구원론을 반대한다는 것을 제 2 장에서 보았다. John White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서, 그들의 눈을 열어달라고, 그들의 자기 기만을 없애달라고 , 그리고 그들의 어두운 마음을 찢어달라고 하나님에게 요청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게 강요해달라고 요청할 수 없다. 압도적인 유혹에서 그들을 구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들에게 모든 기회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온유함과 용서하심을 계시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의지를 대항해서 무릎을 꿇게 해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 없다.”

        “chosen but free"라는 책에서, 가이슬러는 발로차고 소리를 지르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끌고 감으로서 우리의 인간성을 처참하게 부수는 신적 독재자를 칼빈주의는 믿게 한다고 비난하는 일에 피곤해하지 않는다.

        이런 말에 대해서 우리는 무슨 응답을 해야 하는가? 확실히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바꾸지 않으면, 그때에 어떤 사람도 믿지 못한다. 표범은 그의 반점을 바꾸지 않는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는 일을 멈추도록 단독적인 결정을 하지 못한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 갑자기 그들을 살리려는 결정을 할 수가 없다. 인간 타락의 정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취한다면, 그때에 선택받은 자녀들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저항할 수 없는 사역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의지를 침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순수하고 , 자발적인 열정을 이상하게 묘사하고 있다! 죄는 도덕적인 질병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우리가 육체적인 죽음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 그것을 고칠 수가 없다.하나님이 우리를 고치도록 선택했다면, 그렇게 하신 것 때문에 그가 우리를 무시했다고 불평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의 긍휼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B. Cilantro and Grace
        
        아마도 아늑한 예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멕시코, 중국, 남 아시아 음식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음식에 자주 사용되는 한가지 원료를 싫어한다. Cilantro이다. Steamed fish, soup위에 조그만 분량의 cilantro라고 할지라도 입맛을 잃게 한다.

        Cilantro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한다. 사실 나는 이것을 상당한 결점으로 본다. Cilantro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중에 하나이며, 대부분의 사람이 좋아한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사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바꾸고 싶다. 그러나 바꿀 수가 없다. 내 앞에 Cilantro가 있는 국과 없는 국을 주면, 나는 cilantro가 있는 국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cilantro를 좋아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다.

        긍휼에 의해서 하나님이 나를 바꿀기를 결정했다고 가정해보자. Cilantro를 좋아하기 시작했으며, 국에 집어넣기를 원하며, 심지어 cereal에 집어넣기까지 한다고 가정해보자! 나를 이렇게 변화시킴으로서 나의 의지를 침범했다고 나는 불평을 할 것인가? 나는 하나님에게 감사할 것이다. 음식에 Cilantro가 있는 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에게 감사할 것이다. 사실 ,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을 즐길 수 있도록 더 큰 자유를 허락하기 위해서 그가 나에게 한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릴 것이다.

        물론 Cilantro를 싫어하는 것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는 것은 내 의지속에 있지만, 내가 cilantro를 싫어하는 것은 어떤 화학적인 원인을 가질 수 있다. 아마도 내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보다 내 혀의 맛을 침범한 것이 적은 이의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두 경우에, 우리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결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점있는 혀의 맛은 나에게 당혹감 또는 식당에서 불편함을 주지만, 하나님의 권위와 은혜에 혐오감을 가지는 결점있는 의지는나를 영원토록 저주할 것이다. 내 자신의 삶을 회상해보면, 하나님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나는 하나님이 나의 의지를 침범했다고 전혀 느끼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감사함을 가진다.

        사실, 나는 하나님이 나의 의지를 계속해서 간섭해주기를 소망한다. 나는 하나님을, 나의 이웃을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는 이기심과 교만에 쩌들어있다. 나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나는 내 자신을 바꿀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천국의 삶에 맞아야 한다면, 나는 더 많은 변화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필요하다.

시 86:11

        중생에서는 아니지만 성화에서 의지가 중요하다. 중생에서 의지는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만, 성화에서 우리는 성령과 협력을 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들의 의지를 사용한다. 이런 대조가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회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원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좋아하도록 하지 않으면,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을 인식할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성화에서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경우에,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수동적인 대상이다. 중생에서 성령의 사역을 반대하고 성황에서 신적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를 싫어하지 않기를 독자들에게 바란다.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선천적이고 자멸적인 미움으로부터 은혜가운데 자유롭게 해주었고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회심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

  
3.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TULIP의 마지막 교리는 신앙의 삶을 지속에 대한 것이다. 진실로 중생을 하고 회심을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떨어져 최종적으로 잃어버릴 수 있다고 알미니안들은 믿는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개념은 그리스도에게 중대한 모욕이 된다고 생각한다.

        칼빈주의자들은 견인 교리가 전적인 인간 의지를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고 믿는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배도의 위험에 대해서 조심을 하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을 위한 궁극적인 소망을 하나님의 능력에 두고 있지, 그 자신의  나약한 의지에 두지 않는다.


        A. 성경적인 증거
          
        하나님의 그의 성도들을 끝까지 보존할 것이라는 교리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는, 로마 8장에서 볼 수 있으며, 이 구절은 전에 두 번이나 고찰하였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한다면, 그리고 그가 은혜롭게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었다면, 그리고 어떤 것도 그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고 한다면, 그때에 그가 그들을 배도에서 보존할 것이라는 결론을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결론을 부인한다면, 그가 의롭다한 사람중에 얼마를 영광스럽게 하였고, 그리스도가 위해서 죽은 사람들에게 얼마를 주었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에서 분리할 어떤 것을 허락했다고 말하 도록 이 구절들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신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빌 1:6

그리스도 피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신적 진노에서 확실하게 보호를 받을 것이다.

롬 5:9
요 6:37,39
요 10:28

성도의 견인교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선택을 해야만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의미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손에서는 빼앗을 수 없지만, 자신만은 자기를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은 유비적이다. 그는 어떤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선한 목자인 예수님이 그의 양떼에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이리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잘못된 것에서도 보호를 할 것이다.

        한 구절만 더 고찰해보자. 엡 1장에서, 바울은 성도들은 창세전부터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선택을 받았다고 말한다(엡 1:4). 그는 그들을 자기의 아들로서 선택을 하였다( 5절). 그는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의 보증으로서 성령을 주었다( 14절).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켰던 똑같은 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그들 가운데서 역사를 할 것이다(19-20).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타락하고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들을 거룩하도록 예정을 했지만, 그들이 거룩하지 않게 되는 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이 우리들을 자녀로서 입양을 했지만, 동시에 그가 우리들을 부인할 수 있는가? 그가 구원의 보증을 주었는데, 다시 빼앗을 수 있는가? 이런 신적 능력을 이길 수 있을 만큼 인간 의지가 강한가? 확실히 그렇지 않다! 그가 끝까지 우리들을 붙잡아 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확신을 했다면 무엇을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있는가?


         B.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인가?

왜 이 교리에 대해서 망설이는가?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경고와 믿음에서 떨어질 것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 먼저, 믿음에 대한 우리의 보존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증된다면, 그때에 그가 떨어질 것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경고할 필요가 없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라고 권면하는 구절들은  이 교리에 반대되는 논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남을 수긍케 하는 반대가 아니다. 하나님이 목적으로 작정했을 때에, 또한 그는 이 목적이 성취되어야 할 수단도 작정하였다. 우리 각자에게 정해진 인생을 하나님이 분명히 정했다. 그러나 이것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것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작정을 하였다면, 우리를 순종과 신뢰까지 일으키게 함으로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또한 작정하였다.


        틀림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노력 없이도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기를 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협력이라는 특권을 우리들에게 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보존하기를 원하는 것을 보존하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딸, 사라가 어려서 함께 길을 건너갈 때에, 나는 딸에게 내 손을 꼭 잡으라고 명령을 하고, 그러지 않았을 때에 일어날 결과를 그에게 경고를 하였다. 딸이 성장하고 성숙해졌을 때에도 이런 식으로 딸에게 말을 했다. 그러나 내가 딸을 너무 사랑해서 내 손을 놓고 다가오는 차량에 뛰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딸은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나는 사라의 협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녀의 안전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내가 가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안전하게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적인 예를 들어보자. 다윗은 왕권을 허락받았다. 확실히 사울이 그를 죽이는 것을 허락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창을 피해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도망을 해야 했다. 그가 살아남을 것이고 왕이 될 것이라는 궁극적인 확신이 하나님을 통해서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그의 모든 노력을 경주할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는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온전하게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동시에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두기를 원하신다.



        C. 배도의 문제( The problem od Backsliding)

           두 번째로, 적어도 기독교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때때로 배도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다시 신앙을 회복한다; 다른 사람은 전혀 신앙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다. 어떻게 이것인 견인 교리와 일치할 수 있는가?


        경험적인 관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데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는 것 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종종 보는 것처럼, 배도가 수년동안 또는 수십년동안 지속되었을 때에,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거나 불치의 병에 걸린 것처럼 가족들과 동료들의 고통은 엄청나다. 아무렇게나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치 않는다. 마치 이것은 간단한 신학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 않다. 견인 교리의 의미에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고뇌의 문제로서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 내 아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다시 돌아올 것인가?”


        불행하게도,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배도에 대하여 두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적용해야 할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한가지 가능성은 배도한 이 사람이 한 번도 기독교인으로서 믿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에 나타난 땅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마 13:1-23). 믿는 것처럼 보인지만 결코 믿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즐거움으로 말씀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영원토록 배도를 한다. 바로 이런 현상을 사도 요한이 말을 하고 있다.


요일 2:19


그들이 떠나기 전에, 그들이 성도들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부모들과 목회자들이 그들의 부르심과 택함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보호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야 하는 좋은 이유중에 하나이다.


        다른 가능성은 그 사람이 참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의 아픔과 용성의 기쁨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동안 배도하는 것을 허락했다. 참 신자도 , 얼마동안 심각한 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아니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하였다. 베드로는 주님이 가장 원했을 때에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였다. 우리가 죄를 위한 이유로서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은 종종 구원의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서 자녀들이 방황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이 방황을 하는 동안에, 그들과 또는 어떤 사람도 구원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갖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은 회심의 여매를 맺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배도의 특별한 경우는 설명되어져야 한다. 현상 그 자체는 우리를 보존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약속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죽었고 ,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고 있으며, 결코 잃어버릴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4. 신적 예정과 인간 행위

        A. 운명주의( Fatalism):  예정에 대한 오해

        
           예정에 대한 또 다른 반대가 기술되어야 하고 대답되어져야 한다. 칼빈주의는 운명주의라고 주장한다. 이런 전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현상들을 일어나게 한다. 하나님이 누가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했다면, 그때에 기도와 전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면, 기독교인의 삶에서 경고와 노력의 필요성이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은 모든 성경적인 교리는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유대인과 모슬렘은 기독교인들이 다신론자들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다신론으로 인도하지 않음을 안다. 하나님이 세분으로 있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똑같은 성경이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즐겁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안에 영원한 교제를 완전하게 이해할 무능력을 인정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많은 신을 믿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또 다시, 이신 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무관심하도록 필연적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종교 개혁시대에 로마 카톨릭의 불평이었다. 구원받기 위해서 오직 믿기만 하며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은 거룩한 삶을 향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잘 교육을 받은 개신교들은 그들의 비난이 잘못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을 찾으려는 책임으로부터 그들을 면제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들을 기만하는 경우가 있지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참다운 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거룩함이 자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성경적인 부르심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거룩하게 되기를 원할 것이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만족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칼빈주의 체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칼빈주의는 필연적으로 운명주의로 인도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지만, 이 체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런 비난이 잘못된 것임을 안다. 왜 이것이 거짓인가?  하나님이 우리 구원의 최종적인 근원이라고 선포한 똑같은 성경이 구원을 위한 인간 노력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하고, 전도해야 하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믿으라고 명령을 받았으며,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하며, 죽을 때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한다. 알미니안이 신적 주권성을 부정하면서 인간 노력을 강조하는 잘못을 저질렀음을 알았다면, 칼빈주의자들이 노력하라고 권고하는 구절들을 부인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는 그들의 주장이 또한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B. 하나님은 수단을 사용한다( God Uses Means)
            
            
        실제적으로, 신적 주권의 교리와 인간 책임의 사이의 다리는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1979년 가을에 내가 기독교인이 되도록 하나님이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성취할 수 있는 수단들도 작정을 하였다. 다른 많은 수단중에서, 하나님은 “ Mere Christinity"라는 책으로 편찬이 된 라디오 시리즈로 방송된 C.S Lewis의 강연을 사용하기로 결정을 하였고, " Basic Christinty"라고 불리우는 좋은 책을 쓴 John Stott를 사용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나에게 증거를 한 많은 기독교 친구들을 사용하기로 하나님은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그리고 지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사용하기로 하나님은 결정을 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노력을 사용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나의 구원의 수단으로 삼았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간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유사한 방법으로 나를 사용한다는 것을 왜 우리가 의심해야 하는가?  내가 C.S. Lewis 와 John Syott의 지적인 논증, 친구들의 인격적인 격려, 그리고 나를 믿음으로 나아오게 하는 기도의 신비한 능력를 필요로 했다면, 그때에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자신의 목적을 성취케 하기 위해서 나를 사용할 수 있도록 좋은 변증가와 선교사가 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경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영혼의 구원에서 이런 수단들을 효력적으로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서 변증가와 전도자가 되려는 격려를 내가 받지 말아야 하는가?        

                                        
        그의 선한 목적을 따라서 내 안에서 나에게 소원을 두고 역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성경이 나에게 알려주었다면, 어떻게 이 진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라는 책임을 나에게서 빼앗갈 수 있는가( 빌 2:12).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은 어떤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함으로서 너와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라는 바울의 경고를 무시하게 할 수 있는가?

                                                                                                
       C. 운명주의 회피하기( Avoiding Fatalism)

                                                        
           예정 교리는 운명주의(결정론)으로 바뀔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은 바뀔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삼신론으로 , 이신칭의 교리를 율법폐기론주의로,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몸이 고치는 교리를 병이 낫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다고 생각으로 바꾸는 것처럼 충분히 바뀔 수 있다. 예정론을 왜곡한 사람들이 운명주의라고 비난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예정론은 결코 운명주의가 될 수 없으며, 운명주의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인간의 책임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면,  예정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얻어지는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하도록 만들어준다.



5. 결론

        몇 년 전에 , 나는 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 있는 서점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책방에 들어와서,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칼빈주의를 반박할 책들을 찾는 일을 도와달라고 직원에게 요청을 하였다. 나는 그 여자의 고뇌를 잘 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느끼면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충격을 준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것은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알미니안( 사람의 자유를 위해서 자신의 손을 스스로 묶는 하나님)과 칼빈주의(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선택을 한다는)는 일정의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을 하지만, 우리가 딜레마에 빠지는 것은 칼빈주의를 만날 때이다.

        제 4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칼빈주의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하나님을 귀신으로 만들고 인간 자유와 품위를 가짜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열어서 신적 작정의 진술을 읽었을 때에, 나는 숨을 쉴 수 없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예정론을 보는 것을 배울 때까지 예정 교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제 9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제 9장을 다루기 전이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도 예정론에 둘러싸인 많은 어두운 면들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

A. 우리의 죄를 위한 비난을 받아들이기

           첫 번째 소견은 찰스 웨슬리의 비난과는 달리, 칼빈주의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지옥으로 집어넣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죄를 짓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비록 그는 확실하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작정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를 짓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우리가 지옥을 가면,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 때문이다. 택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의 인간 의지를 하나님이 침범한다고 칼빈주의자들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틀린 만큼이나, 그들을 저주하기 위해서 유기자들의 의지를 침범하였다고 제안하는 것을 엄청나게 잘못된 것이다. 그는 단지 그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하였다. C.S. Lewis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말씀하였다.

        어떤 저주받은 사람도 자신의 저주 때문에 하나님을 저주할 수 없다; 지옥을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의 형벌은 그가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B. 찬양을 위한 이유

           두 번째로, 예정의 교리는 항상 추상적인 사색의 주제로서가 아니라 찬양과 경배의 문제로서 성경에서 제시된다. 에베소서 제 1 장을 읽어보라. 이 구절은 철저하게 예정론자이 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는 찬양에 대한 위대한 표현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사실, 선택의 교리는 찬양의 중심에 있다: 그가 우리를 선택하고, 우리를 예정하고,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쏟아부어주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찬양을 받아야 한다. 결코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찬양을 받아야 한다.이 구절에서 칼빈주의의 개념을 벗겨버려보라! 바울은 더 이상 감사할 어떤 것도 가질 수가 없다.! 구원이 완전히 하나님 자신의 분별력과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완전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서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바울은 가르친다.

        하나님의 주권에 이를 갈기 보다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도록 그를 움직인 사랑 때문에 그를 존경해야만 한다. 우리가 전에는 “ 죄와 허물로 죽었고, 본성적으로 분노의 자식이며, 이제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게 되었다”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타는 불에서 뽑아낸 사람들이다. 예정 교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경배하도록 인도한다.


        C. 주권적인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배우기

           예정론 때문에 여전히 몸살을 앓는 사람에게, 기쁨을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교리는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성경에서 가르쳐지고 있으며, 그것을 거절하려고 결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를 향하여 나아가기 보다는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예정론에 욕을 퍼붓고 싶어한다면,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확실히 함께 욕할 많은 친구들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말하지만, 가장 훌륭한 친구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은 선택이 성경에 있는 교리라는 것을 의심없이 믿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솔직하게, 강조적으로, 되풀이해서 가르치는 교리이다.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일을 할 것임을 미리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엡 1:1-4
요 15:16

우리가 믿음을 가질 것을 미리 보았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작정을 하였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믿는다고 말한다.

행 13:48

하나님은 우리의 일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목적과 은혜 때문에 우리를 구원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에게 은혜가 주어진 것이다.

딤전 1:9

하나님은 그자신의 즐거운 목적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마 11:26

그는 불쌍히 여기고 싶은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예정교리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에 의해서 영광을 받는다. 우리는 예정교리에 넘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예정교리를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의 책임에 함께 맞추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온전하게 할 수 없는 작업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신을 매마르게 함이 없이 하나님의 어떤 진리로 거절할 수 없다. 모든 진리의 국면들이 이런 알맞은 관계속에서 보았을 때에, 우리들의 기쁨은  엄첨나게 아름다울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 교리를 고수해야 한다.

        성경적인 진리를 찾기 위한 실제적인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한다: 우리의 지적인 노력은 적어도 기도와 함께 진행이 되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엡 1-2장, 롬 9-11장, 요 6장을 읽어보라. 그리고 당신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라. 당신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분노으 대상임을 인정하라.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적대적이었음을 고백하라. 그리고 성령의 일을 당신에게 어리석었다는 것을 고백하라. 하나님이 우리들을 어둠에 내버려두고 우리의 죄 때문에 처벌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것임을 고백해보라.



        그리고 은혜로서 당신에게 지금까지 했던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하라. 창세전에 당신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 그의 아들을 당신을 위해서 죽음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결정에 감사해보라. 당신을 미리안 것에 감사하라. 당신을 예정한 것을 감사하라. 당신을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라. 당신을 의롭다 칭하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하라. 천국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완전한 선한 일을 마칠 때까지 놓지 않으시는 성령을 주신 것을 감사하라. 이런 위대한 진리를 알려주시고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 수 있게 하여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하라. 하나님 만이 믿지 않는 사람과 나를 구분하는 유일한 원인임을 감사하라.

        선택의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속에 나타난 이런 즐거움을 우리들이 가지는 것을 반대할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해서 교만한 마음을 가질 것이라는 근거로서 반대를 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언듯보면, 다른 사람보다 너를 더 사랑한 것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을 영원한 구원으로 선택을 해주신 하나님에 의해서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왜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했다면, 왜 그는 세상을 구원하지 않는 것일까하면서 의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물론, Geisler의 해결책은 하나님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구원받은 자들에게도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가 기독교인이 된 것에게 대해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구원을 제공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를 해야 할 뿐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제공들을 받아들일 만큼 현명하고 선한 것에 대해서 감사를 받아야 할 것은 당신 자신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교리에 귀을 기울이지 말기를 간절히 권면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도록 하는 일을 배워야 한다. 그가 한 모든 일 때문에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그때에 우리의 신학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6. 저자의 기도 원문

Gracious Father, let others boast of their free will and their decisions; as for me, I will boast in the Lord. I know that I am responsible for believing in Christ, but I would never have believed had You not first enabled me. I know that I am responsible for persevering in faith, but my hope that I will succeed is based entirely on Your promise to complete what You have begun in me. I know that I am responsible to pray for the lost and invite them to Christ, but I also know that unless You empower them, they will not come. I do not understand all of these things. I see, but only as through a glass, darkly. Yet I understand enough to believe, and I see enough to adore. And in the end, that is all I need. Give me sufficient light to walk a straight path, and I will be satisfied. Let me not dishonor You, whether by assuming credit for that which only You can do or by falling into listless fatalism. Let me pray as if all depended on You, and work as if all depended on me. Let me love You with all my heart and my neighbor as myself. To the glory of Your Son, amen.

Clotfelter, David B. (2004-10-01). Sinners in the Hands of a Good God: Reconciling Divine Judgment and Mercy (pp. 184-185). Moody Publishers.
제 6 장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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