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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공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을 사랑하기
임 바울  2014-03-31 20:17:23, 조회 : 1,847, 추천 : 357

                                                         결론


공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을 사랑하기

          수년전에,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인간 아버지를 관찰하고 자녀를 위한 그들의 사랑을 배우면 된다는 것을 조오지 멕도널드로부터 들었다. 맥도널드에 대해서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연구할 때에 본질적으로 같은 접근법을 취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가 영원히 형벌을 주거나 또는 구원에 있어서 그의 주권을 행사하거나 또는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의 자리에서 그의 아들이 죽어야 함을 요구한다는 것들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를 보아야 하고 이것을 더 큰 종이위에 투영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이런 접근법은 너무 단순하고 또한 하나님을 향하기 보다는 성경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사랑하는 것은 나의 끊임없는 소망이다. 나의 독자들도 똑같은 소망을 갖기를 나는 바란다. 내가 신앙여정에서 배웠던 여러 가지 교훈들을 요약하려고 한다. 신학을 연구하면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나는 갖고 있다. 내가 질문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해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로 대했을 때에 우리는 낮선 사람이 아니라 오래된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라나면서, 우리들의 삶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가깝게 이끌게 될 것이다.


1. 정성을 다해서

        주님에 대한 지식이 자라기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한 지적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제일 먼저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모든 삶과 연관이 되어 있다. 청교도였던 William Ames는 신학을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가는 교리라고 규정을 하였다. 우리가 그의 뜻과 , 그의 영광과 우리 안에 있는 그와 함께 살아갈 때에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Ames는 신학에서 지적 정확성의 중요성을 무시하려고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의 정의에게 인상적인 것인 우리 마음의 상태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질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참된 신학자는 논증과 교리로 가득찬 머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변함없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는 사람들이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


        “ 열기가 없는 빛, 개념과 사색으로 가득찬 머리, 차갑고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가득찬 머리가 있는 곳에는, 신적인 것들이 전혀 없으며, 이런 지식은 신적인 것을 보여주는 참된 영적 지식이 없다.”


        우리가 신학에 대한 좁은 의미를 택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가장 순수한 지적인 면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어떤 다른 학문보다 신학은 더 인격적인 면을 우리들에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회피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수학에는 월등하지만 부패한 인간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면, 좋은 신학자가 될 수는 없다. 반항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로 나온 모든 것에 적대감을 갖기 때문이며, 신적 진리를 자신의 욕구에 맞게 끊임없이 개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정은 - 또는 그런 성향은-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일어나기에 , 탐지하기에 매우 어렵다. 우리가 하나님과 적의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어떤 교리를 반대함으로서 오해와 대하여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행해지는 권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깊이 심어있는 마음에 의해서 생각은 심한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예레미야가 말한 것과 같다;

렘 17:9

이런 거짓됨이 삶의 모든 국면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곤충학 또는 독일 문법을 연구하는 것보다 신학의 연구에 더 큰 지적 장애를 가지고 온다. 구속받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의 진리를 억누른다. 중생한 기독교인의 마음은 자율에 대한 자신의 끊임없는 욕구를 대항한다. 이런 안간힘이 신학을 어렵게 만든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 이상의 것을 행사해야 한다. 생각하고 연구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연구는 하나님에게 새롭게 헌신하려는 삶의 정황속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다. 이런 헌신에는 두가지 형태를 가진다.


2. 순종과 예배

        첫 번째로, 하나님의 뜻에 완전한 순종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신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직접적으로 순종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예수님은 말한다:

요 14:21

예수님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었고, 반역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을 숨겼다. 하나님에 대한 지적 추구를 우리의 삶과 분리시킬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거룩함을 목표삼아야 한다.

        이점은 매우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 자주 간과되어 왔다. 어떤 신학교에서 있는 어떤 학생이 그들의 성적 음란함으로 유명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소문이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다면, 이런 학생들은 그들의 신학에 속임수로 가득찬 것만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악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즉각적으로 진리의 어느 한 부분이 이런 속임수를 나타내는 것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결과는 나쁜 양심이라는 나쁜 기초위에 세워지는 왜곡되고, 잘못된 신학이다.

        신학적으로 우리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죄를 우리가 찾아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속임수와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특별히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솔직할 때까지는 우리의 신학이 온전히 바를 수가 없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좋은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해야 한다.

        두 번째로, 예배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게 끊임없이 바쳐야 한다. 하나님앞에 우리를 낮추어야 하고, 이렇게 함으로서 반역을 할 때에 발견된 그런 기쁨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기쁨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분명해야 한다. 예배는 우리 삶의 흐름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주마다 다른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고 스스로 예배를 드리고 우리 가족과 예배를 드릴 때에, 이런 예배의 습관이 바닷가에서 물결이 흘려드는 것처럼 흘러나와야 한다. 순종에서처럼, 예배에 대한 훈련이 쉽게 간과되거나 또는 신학을 통달하려는 우리의 열심 때문에 소홀히 될 수 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논쟁으로 가득차는 것이 훨씬 용이한 내 자신을 발견한다. 삶에서 예배를 생략하는 매우 부지런한 많은 뛰어난 신학도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사랑을 깊게 하고 동요시키는 것이 예배이다.

        신학자가 되려는 사람을 위한 첫 번째 교훈이다.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죽여야 한다. 예배의 정신을 배양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모든 선생들보다 우리를 더 현명하게 한다.

시 119:99


2. 현재 우리 지식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기

        두 번째 교훈은 지적 겸손함이다. 서론에서 주목한 것처럼, J. I. Packer의 책인 “ Knowing God"이 처음에 나를 괴롭했던 것은 처음에는 모순처럼 보였던 것들을 포함해서, 여러가지 관점으로 하나님에게 접근할 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속성과 방법에 대하여 더 간단하고, 온전한 지식을 원한다. 얼마나 동안 멕도널드의 신학적인 방법에서 이런 지식들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멕도널드는 실수를 하였따. 하나님이 아버지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니다. 단 하나의 유비로 하나님의 충만하고 완전한 지식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지 못한다. 단 하나읭 신적 속성이 다른 속성과의 신중한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를 완전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어떤 모순과, 분열과 갈등이 없다는 점에서는 단순하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복잡하고 단편적이다. 우리는 유리를 통해서 흐미하게 볼 뿐이다. 우리가 알려진 것처럼 알 수 없다. 지식의 한계를 반드시 용납하고 과도하게 단순화시키려는 유혹을 억제해야 한다.

        여기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여러신학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과 같이, 학자들이 한가지의 진리를 이해하고 다른 것, 동등하게 중요한 진리들을 희미하게 하거나 부인할 정도로 주장하려는 경향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려는 노력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인한다. 우리들의 도덕적인 책임에 대한 그의 언약을 강조하려는 희망속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한다. 우리의 삶에서 그의 간섭을 인식하려는 소망속에서, 우리 행동에 대한 그의 예지를 그들은 부인한다. 모든 교리들을 측정하는 시금석으로 하나님의 부성애를 만드려는 멕도널드의 결정은 동등하게 중요한 신적 속성의 다른 국면들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식으로 신학에 접근하려는 모든 사람들과 같이, 멕도널드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을 부인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모든 진리가 멕도널드가 만들어 놓은 영역에 들어맞도록 정돈이 되었다.

        
        A. 미완성의 수수께끼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 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성장시키는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발전하기를 원한다면, 때때로 신학은 완전하게 맞지 않는 것과 같은 수수께끼와 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멋있게 조화시킬 수 없는 진리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한 하나님속에는 세분이 있다. 니케아 신조는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삼위일체 교리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적 속성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들을 전부 파헤쳤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의 주권적이고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작정하신다. 그러나 그는 죄의 조성자가 아니며, 인간 의지를 침범하지 않으며 2차적인 원인의 자유을 빼앗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를 어떤 사람도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기도의 효력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작정이 우리의 기도에 의해서 바뀐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김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을 펜처럼 사용한 것임을 부인한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임을 인정한다. 그의 인성이 그의 신적 속성을 없앴음을 부인한다. 하나님이 사랑임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의 자비함이 악한 자의 영원한 형벌과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한다.

        지식의 괴리 현상에 우리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이런 틈을 메우려는 유혹을 저항해야 한다. 이런 불규칙을 없애기 위해서 모양을 만들어나감으로서 이런 조각들을 맞추려는 노력을 거절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의 신비앞에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고, 그 분을 닮아가는 과정속에서, 그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점점 더 자라나갈 것을 믿어야 한다.

        어느날 우리는 지금은 그림자와 같았던 것들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희미한 곳에 살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우리가 본 진리를 대담하게 진술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마치 이해한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참된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관점은 진지한 많은 자연 과학자들이 취하는 똑같은 태도이다. 과학적인 발전은 그들의 이론에 맞도록 증거들을 조작하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라는 믿을 만큼 겸손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겸손은 자연 과학자들보다 신학자들에게 더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에 대한 연구는 그가 만들은 피조물에 대한 연구보다 더 무한하고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다. 그의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그의 판단은 측량할 수가 없다. 그의 길은 우리가 알 수 없다. 그의 말씀에서 계시한 것 이외에는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조차도 많은 연구를 통해서 알려질 뿐이다.

        우리가 멈추지 않고, 경외하고, 그리고 기도를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에 떠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리들을 거절할 만큼 자신들을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을 하나님은 비웃을 것이다.


3. 사랑이 없는 정통의 죽은 능력을 조심하라.

        나의 마지막 논평은  교훈이라기 보다는 경고이다. 이 책에서 조금 잔인하게 조오지 멕도널드를 비평하였지만, 멕도널드는 그리스도를 깊게 사랑하는 품위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가 이런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내가 옹호하는 종류의 신학이 진실로 매력적이지 못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추상적인 사상에 반발한 것이 아니라이런 사상들이 추하게 나타나게 하는 사람들에게 반발한 것일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 견해에서, 칼빈주의 정통은 겸손, 감사, 사랑 그리고 모든 거룩함의 모습들이 보여져야 한다. 그러나 항상 이런 것이 아닌 것이 사실이다. 정통이 교만, 자만심, 다른 사람의 사람들을 향한 바리새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지식을 주려는 우리들의 노력은 큰 방해를 받는다.

        “Tales of a Wayside Inn"에서 칼빈주의 설교자에 대한 Longfellow의 정직한 평가를 생각해보자. 그는 불쾌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즐거움 때문에 동물들을 죽였다.  같은 유해함이 그의 설교와 글에서 보여주었다. 그의 주제는 신적 분노였다. 그의 책은 해로운 조나단의 철학적 작품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불공정한 풍자였으며 실제적인 경험보다는 편견으로 가득찬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해서 불평을 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에 롱펠로로부터 경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 세상은 모든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큰 편견을 보인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칼빈주의에 대해서 많은 편견을 갖고 있다. 우리가 칼빈주의가 된다면, 이런 풍자로 우리를 묘사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을 해야 한다.  위대한 복음을 믿고 선포한다면, 그때에 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신중해야 한다.

        보편적 인류의 죄책에 대한 교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성급하게 판단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영원한 형벌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봉사하게 해야지, 우리 동료의 운명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선택의 신비는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게 해야지, 만족하게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신다는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 매일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태도와 행위속에 그를 더 반영시켜야 한다. 그의 선함에 더 많은 기쁨을 가져야 한다.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진지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

        이런 태도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어떤 경우에 거절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들이 거절하는 것이 그리스도여야지, 우리의 영혼속에 비추어진 주님에 대한 잘못된 인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의 아들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경고를 가지고 끝을 맺으려고 한다. 거만은 하나님을 알려는 우리의 지식에 방해가 된다. 또한 지식은 우리들을 교만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감으로서 이런 교만과 싸워야 한다. 경배를 해야 한다. 너의 신앙을 나누어야 한다. 봉사해야 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나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신앙에 덕, 지식, 절제, 견고함, 선함, 형제 사랑을 더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벧후 1:5-8).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즐거움의 원천임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높고, 좋고, 행복한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들의 신앙에 강팍함이 붙어있서는 안된다. 그들을 믿어야 한다.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주님이 선하다는 진리속에 우리들의 마음의 근거를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빛이다. 그 안에는 어떤 어둠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요일 1:5).


4. 저자의 기도 원문

Dear Father, again I pray that both my reader and I may grow in our knowledge of You. Life in this world is not easy. We often feel that we are walking and suffering in darkness; and when we lift our eyes to look at You, what we see both attracts and terrifies us. But whom have we in heaven but You? And what is the value of earth’s joys without You? Who but Jesus can give us the words of eternal life? So, Father, lead us on. In these few years we have on this earth, expand our minds and our hearts to the fullest possible extent. Let us know; let us see; let us love. Free us from our sins; heal our wounds; set our hearts ablaze. Prepare us for the day when we will rejoice in Your presence forever. And grant that we may bring with us as many others as we can. Amen.

Clotfelter, David B. (2004-10-01). Sinners in the Hands of a Good God: Reconciling Divine Judgment and Mercy (pp. 262-264). Moody Publishers. 결론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이 책의 모든 번역을 마쳤습니다.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게 하여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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