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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3 부 제 11 강 그의 영광의 풍성함
임 바울  2014-03-07 14:46:34, 조회 : 2,105, 추천 : 360

                                                           제 9 장
                                                  그의 영광의 풍성함


롬 9:22-24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이 책에서 했던 다른 많은 질문들 뒤에 숨어 있다. 이제 직면해야 할 문제이다.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하다면, 각 사람들이 믿고 구속함을 받을 수 있도록 왜 그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보통 주어지는 대답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할 능력을 갖고 있지만, 이렇게 힘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에 대한 존중에 모순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들과 딸이 원하는 것이지, 로봇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지를 억지로 복종시켜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에게 자유롭게 가기 위해서, 그는 우리가 가지 않는 품위를 허락해야만 한다. 이런 본질 때문에, 자유는 보편적 구원을 배제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을 알미니안의 보편 구원론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이런 주장의 타당성을 의심해야 할 몇가지 이유들을 기억하자.

        한가지는, 인간 자유를 하나님의 뜻을 제한하는 위치에 두는 알미니안의 생각은 우리가 천국의 삶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의인의 마음은 거룩하다. 그들은 죄를 지을 수 없지만, 이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어떤 자유의 상실없이 행해진다. 알미니안은 이런 사실을 설명하는 일에 어려움을 갖고 있다.

        더 깊은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타락과 강팍함과 신적 선택에 대한 본질에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었던 모든 사람- 이 사람들만이- 그에게 오게 된다면, 그때에 하나님을 우리가 선택한 것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분으로서 설명하는 것은 다소 틀린 점들이 있다. 사람이 중생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리고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일단 사람이 새롭게 된 후에, 그는 믿음을 자유롭게 사용해서 그리스도에게 응답을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알미니안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1. 인간 자유에 대한 알미니안의 초점

        
        나의 알미니안 친구들은 이런 제안에 화를 낼 수 있지만, 의도적이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세상을 인간 중심적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물을 보는 그들의 관점에서, 인간 자유만큼이나 중요성을 가진 것은 우주에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그의 피조물과 교제를 원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들의 자유의지를 짓밟지 않는 쪽으로 그의 관심을 복종시켜야 한다.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지만 오직 그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할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구원보다 더 중요하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백성을 구속하는 일을 하나님이 성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의 자유이다. 어떤 면에서보면 하나님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

        나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유와 품위에 대한 이런 강조는 인간 자율성에 대한 현대인들의 강조와 더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가치있는 것은 개인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 그 자신에게 참이 되는 것이라는 문화와 아주 잘 들어맞는다. 이런 문화에 맞는다. 나의 자율성이 모든 것이기에 , 하나님조차도 내 자신의 뜻과는 동떨어져서 나에게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나의 삶에서, 내가 허락을 할 때에만 하나님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그렇게 할 때까지는,

        “ 그 문이 아무리 좁다고 할지라도, 성경에 아무리 무서운 형벌이 기록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의 운명의 주인은 나이다.  나는 내 영혼의 대장이다.”

        알미니안의 교리는 William Henley의 자아 중심적인 시 “ Invictus"에서 적절하게 예증될 수 있다는 나의 주장에 모든 좋은 알미니안들은 주춤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정복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의 교리에 기초를 둔 신앙이 알미니안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질문에 대하여 더 좋은 그리고 성경적인 답이 있다. 이것을 알미니안과 구분하기 위해서 칼빈주의 답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은 겸손하고 충격적인 답이다. 이것은 인간 자유를 폐하고 그의 모든 피조물에 하나님을 두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열중하기 못하는 굉장한 힘을 가졌으며 만족할 만한 대답이다. 나의 진술을 밝히면서, 조나단 에드워드의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글을 주로 의존할 것이다.


2.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이 우주를 왜 창조하였는가를 물음으로서 시작할 수 있다.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완전하고 온전하다고 기독교 교리는 말한다. 그는 자신 밖에 있는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는 창조되지 않았고 자존한다. 그는 어떤 물질, 에너지 또는 창조계의 어떤 부분도 필요치 않다. 피조물들은 자신이 존재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이기에, 그들이 그에게 더해줄 것은 하나도 없다.

시 50:12

        하나님이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우주를 창조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영원하고, 삼위 본성에 의해서,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온전한 교통과 충만한 기쁨을 경험한다. 신적 본질이 우리들에게는 신비스럽지만, 기쁨과 만족의 공동체로서 영원토록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언어를 남용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갈 때에, 창세전에 나누었던 영광을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요  17:5). 창조는 하나님안에 어떤 필요나 부족함때문이라는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엇인가 부족하다면, 그때에 그는 왜 창조를 하였는가? 그는 사랑으로 창조를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것이 삼위간의 영원한 사랑과 다른 존재에 대하여 이런 사랑을 공유하기 위한 그들의 욕망을 의미한다면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창조를 결정한 것은 논리적으로 창조된 것을 향한 사랑이 논리적으로 선행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창조할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요점을 인간 출산계획과 비교될 수 없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아이를 가지기로 결정을 했다. 그 아이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부부는 먼저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사랑을 즐겨야 한다. 시간이 지나서 임신을 하였고 태어났으며, 사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한다. 부부가 부모가 되겠다고 결정을 하였을 때에, 아이는 실제로 그들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이를 갖겠다는 결정은 부모의 성숙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들의 사랑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갖겠다는 결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들의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가 세상을 창조하겠다고 의도를 하기 전에는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창조를 하겠다는 그의 결정은 논리적으로 그가 창조한 대상을 향한 그의 사랑보다 선행해야 한다.


A. 하나님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창조했다.

           우주 창조의 의향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있었던 의향이라고 말을 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이지,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할 필요가 없지만, 그는 창조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음악가들의 작곡을 하고, 작가들이 책을 쓰는 똑같은 이유라고 나는 믿는다. 즉, 그는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망속에서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공의롭고, 강력하다. 그는 자신의 본성의 완전성을 기뻐하였다. 창조 그 자체는 이런 완전성을 표현하는 외적 표현을 위한 욕망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이런 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상의 창조는 전에 그가 갖고 있지 않았던 어떤 것을 갖도록 만들지 않는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창조하는 것을 그는 기뻐한 것이다. 그가 만들은 것에서 기쁨을 가진다.

창 1:10
하나님의 선한 즐거움과 그의 영광을 보여주려는 것 때문에 우주가 창조되었다. 또는 에드워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보이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교리이다.

롬 11:36
골 1:16
히 2:10

이런 구절들은 하나님의 즐거움 때문에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제외한 어떤 다른 창조질서에 대한 근거가 제시될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그 자신을 위해서 만들었다.

        하나님이 창조속에서 가진 즐거움은 그의 영광을 반영하려는 피조물의 능력에서도 추론될 수 있다고 여러구절들이 말한다.

시 19:1
시 104:31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그의 속에 있는 영원한 완전함이 밖으로 표출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도 창조주의 지혜와 선함의 표현으로서 창조되었다. 우리는 영원히 그를 알고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우리가 모든 것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배움으로서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의 성취와 우리의 삶의 의미를 알 수가 있다. 고백록이라는 책에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표현을 한다. “ 당신은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당신에게 정착할 때까지는 어떤 평화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죄의 본질이고 우리의 비참함이다(롬 3:23). 즉 우리는 모든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즐거움을 가져야 하고 우상과 허무한 것에서 돌아서야 한다.

        심지어 우리의 죄도 세상에 표현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지 못할 것이다. 구속의 드라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의 긍휼의 전시를 위하여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죄인들을 대항해서 그의 분노를 연기한 것은 찬양을 위한 것이다(사 48:9,10). 의인의 길을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시 23:3).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도록 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빌 2:10-11). 사 43장에서 하나님의 그의 선택된 사람들을 “ 나를 위하여 지었고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고 하였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우리의 죄를 도말(塗抹)한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43:25).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 창조, 섭리, 구속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 지혜, 능력, 거룩함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질문을 답을 하기 위한 첫 발걸음이다.


                B. 자기 중심적인 독재자
우리의 논증을 앞으로 진행하기 전에, 중요한 반대를 다루기 위해서 멈추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의 찬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 다는 교리로부터 도망을 간다.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존경을 보이도록 하는 사람을 경멸한다. 하나님을 그와 같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만들도록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우리는 본성으로 안다. 조오지 멕도널드는 문제를 이런 식으로 보았고, 모든 것 위에 자신을 높인다는 하나님의 생각을 조롱하였다:

        “얼마나 못되게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는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대한 보좌위에 있는 분으로 설명을 하며, 그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존재와 목적이 자신의 영광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만들며, 그의 이름을 헛되게 하는 것들을 대항해서 쥬피터의 창을 던진다.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하지만, 그들의 논리를 따르다보면 여기에 도착을 한다. ”

        멕도널드에게 있어서, 칼빈주의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설명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기에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겸손하고 온유한” 하나님을 취해서 일종의 네로와 히틀러, 그들의 피조물보다는 자신에게 몰두하는 헛되고 자아중심적인 통치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멕도널드는 합법적인 질문을 하였다. 자신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그의 속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이 두가지에는 치명적인 모순이 존재하는가?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신다는 것과 그의 모든 일속에는 친절함이 있다는 이 두가지 사이에는 모순이 있는가? 나는 이 두가지에 모순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멕도널드에게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응답을 할 수 있다.

        
        C.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정당한 관심
           첫 번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에게서는 허영심이 강하고 경멸적인 행동들이 하나님 안에서는 의의 정수이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존재한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때문이다. 피조물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의 중심으로 나를 가장한다면, 그리고 모든 것보다 뛰어나고 심지어 하나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마땅하며, 창조주로부터 진노를 받아야 한다. 나의 주장이 거짓됐기 때문이다. 보좌에 있는 독재자로 빈정되는 그림이 매우 빠르게 우리의 동정을 받았던 이유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인간은 경멸을 받아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다. 그는 창조주이다. 그는 모든 선, 아름다움, 우수함의 근원이다. 그가 우리를 만드신 분이다. 모든 지성인들은 그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 그의 영광이 우리 삶의 모든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어떤 다른 것을 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성경적인 작가들이 주님을 찬양하라고 우리들에게 말할 때에( 시 103), 또는 모든 영광과 명예를 주님에게 주어야 한다고 그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에, 우리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할 때에, 그들은 자신이 선하고 옳다고 하는 것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모든 영광과, 찬양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그가 중심이시다!

        한 단계 더 나아가보자!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이라면, 그리고 그의 피조물들이 그를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면, 하나님이 다른 어떤 것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옳은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보다 다른 어떤 것들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우상숭배이다. 피조물을 자신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둔다면,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면, 그는 그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다(사 42:8). 이때에 그는 불의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진리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진리는 다른 어떤 피조물들을 다 더한 것보다 더 위대하신다는 점이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 따라서 그 분 자신이 모든 것의 기준이다. 모든 것보다 자신을 더 위대한 것으로 보는 것이 거룩함이다.”

        이제 우리는 멕도널드가 왜 잘못되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거룩함이  모든 다른 피조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피조물속에 거룩함을 표시하는 것은 겸손이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취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다. 즉 성육신에서, 피조물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거룩함을 피조물처럼 창조주를 보는 것은 대단한 잘못이다. 하나님보다 다른 어떤 것을 높이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것처럼 낮출 필요가 없다. 사실 그는 비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낮아진다는 것이 다른 존재의 위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모든 다른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행위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찾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3. 창조에서 하나님의 다른 목적



        멕도널드에게 우리는 두 번재 응답을 할 수 있다. 우주에 대한 칼빈주의의 이해는 하나님을 허영심이 강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멕도널드는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드에게 배운 것처럼, 그는 매우 잘못되었다. 그의 영광에 대한 추구와 피조물의 행복에 대한 그의 추구는 실제적으로 두가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어떤 이기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별한 통찰력이다. 에드워드의 에세이 "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를 내가 읽었던 가장 도움을 주는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에드워드가 등장하기 훨씬 오래전에, 어거스틴 신학 정통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서 만들었으며 피조물의 행복은 하나님을 영원히 영광스럽게 하고 즐기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전의 어떤 신학자들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과 택한 피조물의 행복에 대한 열심을 일치시키지는 않았다. 하나님을 자신 안에서 그의 피조물들이 영원히 행복하도록 그의 영광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그들에게 전달함으로서 그의 피조물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이것을 설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보자.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어떻게 이것을 하는가? 창조주의 위대함이 무생물의 무언의 증거뿐만 아니라, 지적 피조물의 의식적인 반응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과 천사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창조하였다. 하나님 자신의 속성에 계속해서 닮아감으로서 그의 거룩함을 반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높은 수준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즐거움속에 참여하도록 창조하였다. 그가 자신의 지식, 거룩성, 즐거움을 우리와 나눔으로서, 더욱 더 그와 같아지도록 하였으며, 그 안에서 더 많은 만족감을 갖도록 창조하였다. 그를 닮아가면서, 그의 내적인 영광을 계속해서 반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행복과 그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표출은 온전하게 일치한다. 우리는 점점 주님을 닮아가고, 즐거움이 넘친다. 우리의 증가하는 일치와 기쁨은 그의 영광을 가장 크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하늘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닮음과 즐거움이 끊임없이 증가하는 축복받은 존재들이 사는 사회이다. 하나님은 지식과 거룩함과 즐거움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연합은 영원토록 가까워질 것이다.

        자신의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그로 하여금 피조물과 자신을 공유하도록 움직였다. 하나님에 대한 결론적인 지식들은 그들에게 복이 된다. 에드워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최고로 평가하는 것은 인간 행복을 평가하는 것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하나님을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의 이기심은 수없이 피조물의 영원하고 끊임없는 기쁨을 의미한다!


4. 그러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왜 구원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악을 싫어하고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살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을 행복하게 만듦으로서 영원토록 영광을 받아야 한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지 않는 것인가?  왜 모든 피조물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 것인가? 사랑의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되는 지옥이 어떻게 자리를 잡을 수가 있는가?

        A.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서 창조된 지옥
           여러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이제 분명하게 말해야 할 시간이 왔다. 모든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뜻과 목적에 맞게 만물을 다스린다면, 그때에 지옥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구속받은 자의 즐거움속에서 주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지만, 부가적으로 잃어버린 자의 형벌속에서도 자신을 영화롭게 한다. 조오지 멕도널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분노로 소리치게 하는 교리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교리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는 얼마의 사람들을 자신의 행동에 맞는 형벌을 받도록 내버려둘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의 속성의 충만함을 온전하게 나타나도록 하였다. 다시 한번, 조나단 에드워드의 말을 인용해보자.

        “무한한 영광이 빛나도록 하는 것은  옳고 바른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해야 하는 것도 옳은 것이다. 즉 그의 영광의 모든 부분들이 나타나야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균형있게 빛남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져야 한다. 한 부분의 영광이 다른 부분의 영광보다 지나치게 나타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때에 이런 빛남은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광대함, 그의 권위, 무서운 위대함, 공의 그리고 거룩함은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 죄와 형벌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보여질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빛남이 불완전하게 될 것이다.”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영광의 완전한 표현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의 나타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친절함과 그의 엄위함이 동시에 나타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필연적인 것이다. 죄는 본래 좋은 것이라고 우리는 말해서는 안된다. 잃어버린 자의 고통도 본래 좋은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죄가 허용되지 않았다면, 어떠한 죄인도 그들의 죄 때문에 벌을 받지 않는 이 세상은 아주 나쁜 세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온전하게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알미니안의 견해는 지옥을 인간 자유의 불가침에 대한 영원한 보상으로서 본다. 칼빈주의자들은 지옥을 하나님의 거룩성의 영원한 표현으로서 본다.

        에드워드가 이런 식으로 표현한 첫 번째 사람은 아니다.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위대한 작품속에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류중에서 얼마에게서 은혜의 효력을 보여주고, 나머지에 대해서 공의의 형벌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왜냐하면 어느 한쪽이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공의의 저주아래 둔다면, 어떤 사람도 구원하는 은혜의 긍휼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사람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바뀐다면, 형벌의 엄중함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악한 자의 형벌은 성도들의 기쁨을 증가시키고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감사를 증가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6세기 개혁자 쟌 칼빈도 이런 해석에 동의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진정으로 어거스틴의 의견에 동의한다.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이 악이 이런 선에서 나올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선을 악함에서 얻는 것도 악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것보다 그의 전능한 선함에 더 바람직한 것을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사람의 자유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 은혜의 복과 그의 공의의 심판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줄 수 있도록 사람과 천사들을 작정하였다.”

        이것을 삼키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가 목에 걸리기 전에, 롬 9장에 있는 바울의 주장을 깊이있게 고려해야 한다. 전에 두 번 이 구절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제 더 깊이 이 구절을 보아야 한다. 바울은 많은 유대인 동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하였다. 유대인들에 대한 약속이 실패를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구원이 모든 유대인들에게 차별없이 약속된 적이 없기 때문에, 오직 약속의 자녀들에게만 약속이 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을 약속의 자녀로 택하고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인 목적에 따라서 긍휼을 나누어줄 권리를 가진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나 행사에 있지 않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게 있다.

        B. 토기 쟁이와 진흙

           바울은 바로를 언급하면서 구원에서 하나님의 엄중함을 예로 들고 있다. 하나님은 바로의 패배와 파멸을 통해서 하나님 능력을 보여줄 목적으로 그를 세웠다. 이 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긍휼을, 그가 원하는 사람을 강팍하게 한다.

        바울은 이것이 매우 어려운 교리임을 잘 알고 있다. 인간 의지의 불가침성을 변호하려고 하였다면 바로 이 구절은 가장 알맞은 곳이다. 대신에, 그는 정확하게 반대 방향으로 변증을 하고 있다;

롬 9:19-24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 대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권리가 있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구원하고, 어떤 사람들을 공의의 심판에 둘 권리를 하나님은 가진다. 게다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형벌을 그가 구원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들이 행동이 받아야 하는 형벌을 받은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들의 형벌을 보게 될 것이고, 이것으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함을 배우게 되고 자신들이 은혜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서 기쁨을 더하게 될 것이다. 악한 자를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하는 것은 하나님이 패배한 것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의 속성의 온전함과 그의 구속받은 자들의 기쁨을 더하는 것이다.

        다시, 이것은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잘알고 있다. 바울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결코 쉬운 적이 없다. 칼빈주의자들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억지로 보낸다고 찰스웨슬리와 잔 웨슬 리가 말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이 진리에 대해서 조오지 멕도널드와의 분노와 혐오감을 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마도 다소 조롱하는 투로 이 진리에 응답을 하고 싶은 충동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하는 것은 로마서이다. 어떻게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C. 어려운 교리를 이해하기


           첫 번째로, 죄인은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이 제 1 장의 주장이다. 우리는 매우 신비로운 방법으로 아담이 죄에 연류되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이다. 이 진리를 피할 방법은 없다. 우리 자신의 죄를 하나님에게 돌릴 근거가 전혀 없다. 우리의 양심은 이런 죄 때문에 우리에게 분노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 죄가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구원은 어떤 사람에게 빚을 갚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원은 선물이며,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는 것은 권리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불의하게 다루지 않는다. 어떤 사랑메게 공의를 베풀고,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푼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다.

시 33:4-5

        세 번째로, 성경의 표현들을 그 구절이 의미하는 이상으로 풀어서는 안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였다고 표현할 때에, 바로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었지만 , 하나님께서 잔인하게 그로 하여금 반역을 하도록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반역중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강팍해져 있다. 성경이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서 강팍하게 하였다고 하였을 때에, 그가 어떤 사람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영향력을 금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로 하여금 전보다 더 강팍해지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에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유기에서 하나님은 그 마음으로 하여금 자기의 길을 가도록 묵인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다.

        유사하게도, 바울이 토기쟁이와 같이 행동할 권리를 변호할 때에, 똑같은 덩어리를 가지고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는 비천한 그릇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때에 이 똑같은 덩어리는 이미 타락한 진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저주하도록 결정을 하고 그리고 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타락을 하게 한 것이 아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인간을 이미 타락한 사람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긍휼을 어떤 사람에게는 공의를 베푼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은 어려움을 안다. 사람들을 저주하기 위해서 창조를 하였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곳까지 성경 해석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식으로 결코 말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고 가르친다. 모든 사람은 지옥에 가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었다. 논리적인 일관성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여기까지만 가야 하지, 그 이상을 가서는 안된다.


        D. 현재의 결점있는 비전
           우리의 최종적인 고찰이 도움이 될 것이다.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궁극적인 실체를 전혀 알지 못하며, 우리가 믿음을 갖고 난 다음에도, 영적인 실체들을 분명하게 보기 위하여 안간힘을 써야 한다. 인간의 행복과 자유가 우주에서 가장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죄가 사소한 것이라고, 사랑의 하나님은 이런 일에 대해서 야단을 떠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이 보는 것처럼 도덕적인 실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와 싸여 있다. 이런 내키지 않는 마음이 대속적인 속죄와 영원한 형벌을 믿는 일에 우리들에게 어려움을 준다. 하나님이 그 정도로 거룩하다고 우리는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정도로 나쁘다고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이런 희미함속에 갇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런 삶속에서 나오도록 하였을 때에, 하니님은 실체를 볼 능력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그리고 전체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것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죄는 오직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됨을 보게 해준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저주 속에 버려두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권이다.

이런 진리속에는 비 논리적이고 비 윤리적인 면이 전혀 없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결점있는 마음의 결과이다. 우리가 이런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움을 발견할 때에, 이런 진리를 급하게 부인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고, 이런 진리들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신앙생활이다.



5.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것인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계획에 대해서 우리가 묻고 싶은 다른 질문들이 있다. 아마도, 가장 괴로운 것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중에서 왜 적은 숫자만이 응답을 하느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한다.

마 7:13-14

세기를 걸쳐서 교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청함을 받았지만, 상대적으로 소수만 선택을 한다. 이런 것을 볼 때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보다는 잃어버리는 것이 하니님의 영광이 요구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야기시킨다.

        나는 이런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 책을 너무 길게 만들고 사실 권위있게 말할 자격이 있지 않는 영역으로 나를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년동안 했던 글과 생각을 기초로 해서 몇 사람의 의견만을 제시하려고 한다.


        A. 어린아이들의 죽음과 구원
           자신의 도덕적인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에 이르기 전에 죽은 모든 사람들은 택함을 받았으며, 죽을 때에 중생을 하고 즉각적으로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가며, 거기에서 성숙하게 자라도록 돌봄을 받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택함을 받았다고 한 말에 주의를 기울이라. 나는 그들이 순진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가가 되었다는 사실과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권적인 지혜와 능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 어렸을 때에 그들로 하여금 죽게 함으로서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불렀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성경구절들이 있다. 이런 생각중에 하나는 최종심판은 우리들의 행위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계 20:12). 이것은 그들이 저지른 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아담의 죄만으로 아이들을 영원한 저주를 내린 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어렸을 때에 죽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성경의 명백한 교리가 아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는 소망의 근거를 갖고 있다( 비록 우리가 이 교리를 확신하다고 할지라도, 낙태, 유아살해, 정신 박약아의 안락사, 또는 세상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등을 위한 어떤 핑계도 될 수 없다. 선을 얻기 위해서 악을 행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B. 복음 전파와 세계선교를 위한 관심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에 이른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응답을 함이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강한 의심을 갖는다.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를 믿다가 죽은 할머니를 걱정하는 새로운 회심자를 위로하는 것이 얼마나 어색한 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제공할 수 있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아는 이런 생각을 확실할 만한 성경적인 근거를 전혀 보지를 못하였다. 구원은 주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가능한 지식과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아는 것을 요구한다( 요 17:3). 나는 이런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어떤 증거나 죽음뒤에 믿고 회개할 기회를 받을 것이라는 어떤 증거도 성경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우리들이 관심은 내포주의와 다원주의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토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복음과 선교에 힘을 써야 한다고 믿는다.  복음을 듣지 않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의 어느 곳에서까지 복음이 전달될 수 있도록 봉사하고, 희생하고, 복음을 전하고, 박해를 받고, 필요하다면 순교까지 하도록 해야 한다.


        C. 대규모적인 교회의 확장
           끝으로, 인류의 얼마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  나는 전혀 알지를 못한다. 현재에, 예수님이 확실하게 말했던 원동력은 지금도 작동을 하고 있다. 복음을 들었던 많은 나라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만이 그리스도를 믿는 증거를 보여줄 뿐이다. 한편으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직 소수만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하늘은 어릴 때에 죽은 사람으로 가득차 있으며, 뱃속에서, 심지어 시험관에서 죽은 아기들로 가득차있다.  누가 미래에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신학자들은 앞으로 교회의 대규모적인 확장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것을 말하며, 그리고 나서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롬 11:25-26). 후자는 유대인의 사회속에 위대한 각성운동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많은 숫자의 유대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면, 또한 많은 이방인들도 구원할 것이라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합 2:14절의 예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구의 많은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이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합 2:14

결국 잃어버린 사람들이 적은 숫자에 포함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진리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에 대한 판결은 옳을 것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합당한 숫자를 구원할 것이다. 인류의 최종적인 상태는 하나님의 거룩함, 은혜로운 속성들을 완전하게 반영할 것이다. 그의 영광을 보여주고 그의 백성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즐거움을 보여줄 만큼의 충분한 숫자를 하나님은 구속할 것이다. 나는 이것 이상으로 알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행진 명령을 계속해야 한다.

마 28:19

우리는 최종적인 결과를 하나님에게 의탁해야 한다.



6. 칼빈주의 견해에 대한 실제적인 효력
          
        칼빈주의 우주관이 알미니안 견해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것을 초기에 언급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점차적으로 기쁨을 가지게 되었음을 제 4 장에서 말했따. 이런 진술들을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한다. 내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유사한 교리적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중에서 특이한 감정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A. 합리적이다.
           내가 만족하는 것은 주로 지적인 것이다. 칼빈주의 세계관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성경에 더 부합되고, 실제적인 기독교인이 삶과 잘 맞는다. 인간 자유를 하나님의 계획보다 더 높은 것으로 또는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일에 어떤 방해물로서 간주함을 성경 어느 곳에서도 볼 수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주권적으로 이루신다고 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계획을 그의 피조물의 예지된 행위에 따라서 조정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서, 우리의 자유 행위들은 하나님이 일어나야 하는 것으로 미리 정한 것을 수행하며,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는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품위를 전혀 빼앗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그의 피조물을 통해서 그리고 통치를 통해서 자신이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의 이야기는 성경과 일치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또한 기독교 삶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이 우리들의 모든 삶을 정했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존재할 것을 예지만 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영원하신 계획에 따라서 우리 모두를 창조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성경과 기독교인의 삶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통째로 통치하는 하나님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교리의 즐거움은 지적인 것에만 있지 않다. 첫 번째로 내가 이 교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 교리의 달콤함을 맛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고 자신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서 영원토록 행동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평강과 안정감을 준다-.


        B. 어른들은 책임이 있다.
           그의 부모의 삶에 중심에 있는 아이를 잠깐 상상해보자. 그들은 부끄럽지 않게 그 아이를 사랑한다. 아이가 요구하는 모든 장난감을 그에게 주었다: 그의 행동이 결과로부터 빛어지는 결과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가 화를 낼 때에 그들은 전율하였다. 그는 일종의 군주였다.

        그러나 어떤 용기있는 친구가 부모들을 데려다가 괴물과 같은 아이를 만들지 않으려면 자녀 교육방법을 고쳐야 한다고 경고를 하였다. 부모는 이 충고를 받아들였다.

        집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아이의 어떤 요구들에 대해서 “No"라고 대답을 하였다. 짜증을 부릴 때에 무시되었다. 적어도 상을 주지 않았다. 규칙들이 부모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아이들이 정한 규칙들을 폐지하였다. 규칙을 어겼을 때에는, 그것에 대한 고통을 받아야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부모들은 가족의 삶의 중심에 그들의 결혼을 두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관계를 위해서 노력을 하였다. 그들은 함께 결정을 하였다. 아이의 수준에 그들을 맞추기 보다는, 그들의 세상에서 사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들이 전보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즐겁게 자신의 삶을 그들에게 내려놓았다. 아이가 아니라, 부모가 가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서 살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첫 번째로, 아이는 이것을 싫어하였다. 그는 많은 혜택을 잃어버렸다. 그것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는 발버둥을 치고 고함을 질렀다.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숨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들은 후회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는 점점 행복하게 되었고 전에보다 훨씬 더 안정감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우는 소리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어른이 만들은 규칙아래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안정된가를 알게 되었다. 기다리는 법을 배웠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서 노력을 경주하는 법을 배웠다. 부모의 사랑을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부모의 사랑에 만족을 느꼈다. 자신의 삶이 이 사랑의 결과임을 알면서 더욱 행복하게 되었다. 부모의 포옹이 그를 더욱 편안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향한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사랑에 근거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 자기가 만들은 세상은 매우 적으며  그들의 부모가 만들은 세상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이 유비는 전혀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칼빈주의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서 얻게 된 경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이 있기 전에 온전한 사랑과 기쁨속에 있었다.나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즐거움의 산물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가졌던 즐거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광에 하나님이 열중하는 것은, 결코 나를 위협하거나 또는 하잖은 존재로 만들기 보다는, 나의 신변을 보장해준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광의 표현으로서 나의 존재를 정했기 때문에 그가 나를 사랑한다.

        나의 구원은 자기 성취에 있지 않고, 자존심을 부양하는 것에 있지 않고, 내 자신에게 진실된 것을 배우는 것에 있지 않고, 나의 창조성의 깊이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구원은 내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무한한 기쁨과 지혜가 있으며, 그의 오른손에만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내 자신의 자유를 얼만큼이나 훌륭하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보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나로 하여금 나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훨씬 더 뛰어난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경험하라고 초청을 한다. 칼빈주의자들의 우주관은 어른이 가장이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성장하도록 용기를 주는 가족과 같은 개념이다.

        오해를 하지 말기를 바란다. 알미니안주의는 성숙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버릇없는 아이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양 진영은 자기 부인과 거룩함에 헌신을 한 것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확실히 나의 신학에 반대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삶에서 뛰어난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존 웨슬리와 찰리 웨슬리의 거룩함, 열정, 효력에 대해서 경탄함을 갖는다. 그들은 칼빈주의를 열정적으로 반대를 한다. 내가 여기서 주장하려는 것은 칼빈주의 우주관이 성경에 적합하고 우리 자신의 동기에 부합되며, 칼빈주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열정과 초점을 가지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힘을 더 많이 준다는 점이다.

        우주는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유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기쁨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내가 말한 많은 부분에 대해서 그는 반대할 수 있지만, A.W. Tozersms 하나님 앞에 서있는 우리에 대해서 매우 아름답게 표현을 하였다.

        “모든 영혼은 하나님에게 속해있다. 그의 즐거움 때문에 존재한다.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의 입장에서는 주권이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복종에 있다. 우리는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런 영광을 주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힘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매우 슬퍼해야 하는 것은 그에게 이런 영광을 주지 못한 것에 있어야 한다.”

7. 저자의 원문 기도

Gracious God, I rejoice that You have made the world for Your own glory, and I rejoice to be a part of Your world. All things are from You, and it is good and right that they should exist for You. I thank You that this truth gives direction to my life. I am Yours; empower me to live accordingly. In Jesus’ name, amen.

Clotfelter, David B. (2004-10-01). Sinners in the Hands of a Good God: Reconciling Divine Judgment and Mercy (p. 253). Moody Publishers. 제 9 장을 완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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