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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 제 3 부 제 10 강 피를 통한 구속
임 바울  2014-02-22 13:19:02, 조회 : 2,382, 추천 : 436

                                                         제 8 장
                                                     피를 통한 구속


엡 1:7

        우리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계힉을 발견하려는 여정에서, 우리는 모퉁이를 돌았다. 타락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우리의 여행을 출발하였다( 제 1 장). 배운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법을 어긴 죄인이기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형벌의 본질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 가를 조사하였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고통을 받는 지옥의 형벌 교리이다. 사실, 제 2 장과 3장은 독자들이 읽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만큼 쓰는 나도 어려움을 갖는다.


        그러나 제 7 장에서 우리는 중요한 전환점에 도착했다. 자신의 거룩한 속성으로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마땅한 형벌을 자신이 직접 짊어지셨ㄷ. 그는 우리의 죄책을 없애고 그의 진노를 가라앉혔다. 그는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켰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그자신과 화목하게 하였다”라고 바울은 말한다( 고후 5:19). 우리가 이 진리를 깊이 묵상하면서 할수록, 이 거룩하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존경하게 되고 그를 알고 싶어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를 화목하게 할 만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주신 그의 은혜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일에 방해를 받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선 우리들을 신적 공의가 어디로 인도하는지를 고찰해보자. 조에 대한 그의 진노의 크기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지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엄하심을 보았다. 이제부터 그의 긍휼하심의 깊이를 깊게 고찰해보자.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고 바울은 주장한다(롬 8:32). 도대체 “모든 것”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질문의 범위를 넘어선 신적 영역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2천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를 위한 새로운 생명의 원천이 어떻게 가능한가? 속죄의 결과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


1.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이끌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의해서 자유롭게 제공되었다.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벧후 3:9).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위해서 눈물을 흐리신 것은 거짓이나 위선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에게 와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모든 백성들의 사악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을 드러낸 것이다(마 23:37). 몇 번이고 성경에서, 하나님은 악한 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그들이 돌아와서 사는 것을 원하신다( 겔 33:11). 그는 모든 사람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러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기를 원했고, 선교사를 파송했고, 성경이 번역이 되었고, 모든 나라에 제자를 삼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오도록 강요하기 위해서 산과 들과 길로 나아가야 한다. 어린양의 잔치에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차야 한다(눅 14:23). 초청이 모든 사람에게 나아갔다. 참으로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은 단지 초청만 된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믿으라고 명령을 하였다(행 17:30).

        그러나 아프고, 완고한 사실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왜? 복음 메시지에 결점이 있는가? 전혀 그러지 않다. 확실히 우주의 창조주와 친밀한 교제를 경험하도록 초청을 받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창조주와 우리 사이에 놓여있는 장애물을 하나님이 직접 없애고, 영원한 즐거움의 교제로 불러주신 것보다 더 황홀한 전망은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죄인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죽음만큼이나 감동적이고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상이 십자가의 복음보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진리, 용서, 창조주에 대한 지식, 미래에 대한 소망, 죄에서의 해방, 죽음의 두려움에서의 자유-을 정확하게 맞추어져 선포되었는가?

        복음에 결점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내가 복음을 이해하면 할수록, 얼마나 확고하게 역사에 근거를 하고 있으며 얼마나 완전하게 인간의 상황에 잘 들어맞는가를 더 분명하게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더 복음을 사랑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때때로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에 당황함을 느낀다.

        A. 인간 마음에 있는 결점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한다. 만약에 진리에 어떤 결점이 있지 않다면, 마음에 결점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 마음은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에게 적대적이다. 그의 거룩한 법을 듣고 두려움이 불타오른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서 도망간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를 듣는다. 그들의 교만이 찔림을 받는다. 그리고 시나이 반도에서 처럼 갈보리 십자가에서 도망을 간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협하거나 또는 간청한다고 할지라도, 상처받는 동물이 수의사에게서 뒷걸음치는 것처럼 우리는 그에게서 뒷걸음을 친다.  우리의 불의 때문에 진리를 억누른다(롬 1:18). 세상의 행위가 악하다고 선포를 했기 때문에 그가 지구에 있을 때에 예수님을 미움을 받았다. 똑같은 이유 때문에 그는 여전히 미움을 받는다. 그의 십자가의 처형과 첫 제자들의 핍박으로 인도하는 부인과 불신의 체계가  1세기에서 처럼 20세기에도 활동하며 강력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가득찬 복음의 메시지가 그들의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받기를 원한다(딤전 2:4). 하나님이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는 회개로 그들을 이끌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딤후 2:25). 오직 하나님의 사역만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저항을 이겨낸다. 어떤 사람도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올 수 있도록 허락을 받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요 6:65).   하나님이 효력적인 부름을 가지고 그들을 불러야만 한다. 이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서 일어나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


        B. 죄의 자각
일반적으로 죄의 자각은 성령이 사역으로 시작을 한다( 요 16:8). 우리는 복음 메시지를 듣는다. 이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관통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 그리스도의 의, 그리고 심판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를 보기 시작한다. 이 광경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바로 이것이 John Newton이 그의 유명한 연설해서 말했던 것이다, “ 나의 마음을 두렵도록 가르치는 은혜를 받았다.” 동시에, 성령은 주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했으며 오래 전에 이루어졌던 그의 죽음이 오늘날 나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인식하도록 이끌어준다.

        죄의 자각을 위한 한가지의 패턴은 없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역사하신다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하나님의 짓누르는 고통에 고민하였고, 어떤 사람은 비교해보면 약한 고통만을 받았다. 나의 경우에,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서 확신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믿었지만, 하나님이 나를 영생으로 받아들일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를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하였다. 나는 역사의 독재자들을 하나님이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히틀러, 네로, 등). 그러나 악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운명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확신을 하지 못하였다. 그가 나를 거절하는 것은 가능한가? 나는 두렵지 않았으며, 또한 내 자신의 죄성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깊이 관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확실하게 곤란함을 느꼈다. 이 고난은 내 자신의 의를 뒤흔들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여전히 죄를 가망이 없는 독특한 것으로 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고 개혁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나를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조명할 때에, 나의 무가치와 무력함이 점점 자라게 되었다. 그때에 십자가의 메시지를 들었다. 나는 그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 나는 용서를 필요로 하며 내 삶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자신의 완전한 지혜를 따라서, 각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자유로움을 인정한 뒤에,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진실되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되려면 이런 인식은 필수적임을 알게 되었다. 불의한 집나간 탕자는 집으로 발걸음을 움직이기 전에 바로 이런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C. 중생
            자각은 믿음과 같지 않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우리의 상태를 알게 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쁘게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사람이 죄의 자각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가지는 않는다. 지적인 면에서 진리를 알 수 있지만 그것을 미워할 수 있다. 본성에 대한 기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며, 죄에 대한 자각은 단지 저주를 위한 기초가 된다. 우리는 단순한 지식을 필요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삶의 새로운 원리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삶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새로운 삶의 수여를 중생으로 언급한다. 이 단어가 “다시 태어난다”라는 사상을 우리들에게 주로 주지만, 성경은 실제적으로 세가지 영상으로 그 의미를 전달한다. 첫째로, 성경은 탄생의 영상을 준다:

요 1:12
벧전 1:23

두 번째로, 성경은 창조의 영상을 준다;

고후 5:17

세 번째로, 우리는 부활의 영상을 보게 된다;

엡 2:4-5
요일 3:14

        이런 세가지 영상은 두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첫 번째로, 이 모든 것들은 중생에서 우리는 소극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태어나게 할 수 없고, 창조할 수 없고, 부활시킬 수 없다. 중생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우리가 할 수 없으며 우리 안에 이루어진 일이다. 보통 우리가 요 3:3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번역을 하지만, 헬라아 “아노덴”은 또한 “위로 부터”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당하다. 요한은 단어의 두가지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중생은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성령의 완전한 신비적인 일에 의해서 일어난다. 바람처럼, 그가 원하는 곳으로 분다( 요 3:8).

        우리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울음이 자궁에서 해산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중생에서 하나님은 적극적이고,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A. Alexander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새롭고 천박한 신학이 우리 시대에 매우 풍성하게 쏟아놓았떤 비상식적인 개념중에서, 죽은 사람이 스스로 새로운 생명을 산출할 수 있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영적 중생을 통해서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생각은 우리의 첫 번째 탄생과 관련한 상상한다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모른다. 이런 영혼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경멸하는 정서는 빨리 사라져야 한다.”

        추가적으로, 이 세가지 영상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신 변화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준다. 그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했다. 그는 우리를 죽임에서 건져냈다. 우리는 여전히 중생전에 사람이다. 우리의 인격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되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미워했던 것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우리 구원을 위한 그의 은혜로운 규정), 그리고 우리가 전에 사랑했던 것들을 미워한다( 모든 형태에서 반역). 돌과 같은 우리의 마음이 없어지고, 살같은 마음을 우리는 주었다( 겔 19:11, 36:26).

        우리가 너무 어려서 의식을 하지 못할 때에 중생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삶에 대한 전체적은 접근에서 중요한 변화들을 우리는 인식하게 될 것이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을 보지 못했다(요 3:3).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며, 그것에 참여하려고 애를 쓴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적대적이었으며 그의 법에 순종할 수가 없었다( 롬 8:5-8). 지금 우리는 그의 말씀의 순수한 영적 양식을 사모한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벧전 2:2). 전에 우리는 전에 평안함을 가졌다. 이제 우리는 거룩해지기를 원한다( 요일 3:9).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John Newton과 함께, 우리는 기쁘게 노래를 부른다, “ 나는 길을 잃어버렸지만, 지금 그 분은 나를 찾았다. 내가 전에는 소경이었지만 이제 나는 본다.”

        어떤 사람은 이 변화를 갑작스럽게 경험한다. 다른 사람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다. 틀림없이 중생 그 자체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행위이다. 그러나 중생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우리의 입장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속에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우리는 우리를 영원토록 변화시키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한 능력을 주었다.

                A. 믿음
           중생은 하나님의 일이고, 신앙과 회개은 우리의 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가 죄에서 돌아선다. 그러나 신앙과 회개는 필연적으로 중생에 따라서 일어나고 우리의 중생이 의식속에 일어난 방식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모든 사람은 그에게 온다( 요 6:37). 이것은 그들이 그에 대한 믿음을 행사하고 그 앞에서 자신을 낮출 것을 의미한다. John Murray가 기록한 것처럼, 중생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중생한 마음은 그들의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 전에 그리스도로부터 숨으려고 하였고, 그를 믿지 않으려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이제 자연스러운 것은 그 앞에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신앙과 회개가 동시에 우리들에게 허락된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빌 1:29, 딤후 2:25).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믿거나 회개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속에 일어난 변화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기를 원하게 하고 그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신앙은 종종 지식, 동의 그리고 신뢰로서 이루어진다고 분석을 하였다.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진리로 믿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믿음에 의존해서 그에게 자신을 맡겨야 한다. 이런 세가지 요소들이 중요하며, 오늘날 지식의 필수불가결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대중 문화에서, 믿음은 종종 성경적인 의미를 없애버렸으며 내용과 대상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덕스러운 어떤 것으로서 다루어주고 있다. 우리 안에 믿음을 유지해야 하고, 심지어 단지 “믿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을 한다(이것은 믿음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의미하는 것처럼 들린다).

        학문적인 입장에서, ‘내포주의자( Incluvist)"들은 그리스도를 듣지 못한 사람들이 단순히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한다. 어떤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말을 한다. 이것은 다른 종교의 신일 수도 있다. 또한 인간 지식을 초월하는 실체에 대한 모호한 사상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들의 영이 그들 위에 있는 어떤 것들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믿음을 보았을 때에,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생각한다.

        대중문화와 내포주의 신학자들은 한마디로 틀렸다. 신약에서 , “믿음”은 항상 그리스도의 믿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롬 10:17절에서 말하였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우리가 성경적이고,구원론적인 신앙을 행사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했는지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 적어도,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알 필요가 있다. 그가 세상의 죄를 위한 희생양으로서 우리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설교자, 책, 친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운다. 그리고 우리가 배웠던 똑같은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신뢰를 둔다.

        
        기독교 믿음은 참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고,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따르려고 하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려고 하는 믿음이다. 어떤 다른 종류의 믿음이 어떤 사람을 구원론적으로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 있다고 믿음을 만한 근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복음을 들을 기회와 반응을 할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없다.

롬 10:13-15

구원얻는 믿음은 좋은 소식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B. 회개
           신앙과 회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두가지 요소는 구분될 수는 있지만 서로에 대해서 분리될 수는 없다. 신앙은 그리스도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위해서 그 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의 죽음은 우리 죄를 덮을 수 있고 그의 의는 우리에게 영생의 권리를 줄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과 화평을 위하여 예수님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사람을 볼 필요가 없다. 모든 혜택은 그에게서 흘러나온다. “ 이 세상의 삶의 위험, 수고, 그리고 올무”를 통과할 수 있도록 그가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는 우리가 거주할 곳을 위해서 아버지 집에 가셨다.

요 14:2

다른 한편으로,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또는 상관이 없던 삶으로부터 돌아선다는 것이다. 그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생각, 말, 행위를 거절하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님 없이 살아가려는 모든 반역적인 노력들을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는 우리 죄에 대한 미움과 슬픔을 포함하고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또한 수고를 포함한다; 확실히 노력해야 한다. 믿음처럼, 이것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회심은 계속적으로, 절규하는 죄에 대한 싸움을 말하는 반면에 신앙은 중생된 영혼의 계속적이고 , 끊임없이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현대 교회의 정황속에서, 회개에 대한 전체적인 생각은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예배는 “축하 쇼”가 되었다. 이런 곳에서는 고백의 기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우울한 음조가 전혀 없으며, 조용한 묵상이 없다. 정직하게 하나님의 임재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유쾌하게 행동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많은 진영에서, 세례식에서 행해지는 간증들에 참된 회오의 글들이 결여되어있다. 유치원에서부터 우리 문화는 높은 자존심을 가져야 하고 즐겁지 않는 것들은 거절해야 한다는 진지하게 가르친다. 어떻게 우리는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앞으로 지을 죄에 대한 고민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엄하게 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하나님은 이와같이 흥을 깨뜨리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삶에 대한 그의 주요한 관심은 우리의 자존심을 지지해주는 것이다.

        공예배가 주로 죄와 심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예배의 주요 행위들이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축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우리의 공예배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 의식적으로 우리의 거룩하고, 전지하고, 은혜스럽고, 참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배의 음조는 즐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회개는 우리의 경배와 우리 삶의 끊임없는 저류에 있어야 한다.  

        나를 , 가족을, 교회를 위한 우리 기도 중에 하나는 욥과 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았고 자신을 낮추었으며 먼지와 재 가운데서 회개를 하였다. 또는 이사야 처럼, 주님의 거룩함을 보고 다음과 같은 부르짖임이 있어야 한다.

사 6:5

주님의 임재가 강하게 나타나고 우리는 축하를 할 수 없고 단지 눈물을 흘리는 겸손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부끄러운 죄책과 타락에 대한 철저한 의식속에서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그의 은혜를 우리를 휘어잡는 그런 예배의 경험을 나는 갈망한다.

        너무 종종, 우리는 꿈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이미 선한 사람이고 꿈을 꾼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조금 더 행복하게 , 조금 더 낫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런 망상들을 산산히 깨어버리고 우리가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란다.


3. 그는 우리가 의롭다고 선포하신다.

            하나님은 구원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신다. 신앙과 회개를 일으킬 새로운 생명의 알곡을 우리 안에 놓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온전하게 그의 거룩한 법을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매일 매일 그를 대항해서 죄를 짓는다.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는 죄의 권세에 잡혀있다. 예수님이 온전한 삶을 영위했고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앎으로서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역사적 개신교의 대답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을 행사하기 시작할 때에, 이 믿음을 근거로 우리를 의롭다고 한다. 칭의는 법적 선언이다. 그가 우리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의를 소유한 것으로 본다는 하나님 입장에서의 진술이다. 본래, 칭의는 우리를 의롭거나 또는 거룩하게 만들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성격을 다시 만들 것이다. 우리가 성화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의 은혜의 행위이다. 칭의는 법앞에서 우리의 신분과 관계가 있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얻은 저주아래 더 이상 우리가 있지 않다고 하나님이 간주하는 선포이다.

        아담이 전에 대표로서 섰다. 그의 불순종으로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되었다. 우리가 죄의 성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담의 죄책이 우리들에게 전가되었다(롬 5:19).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른 대표인 예수님을 갖고 있다. 아담과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거룩한 삶을 살았다.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다. 자신의 도덕적인 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와 신적 분노를 가라앉게 하기 위해서 희생적인 죽음을 가졌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목적이다. 그의 의를 만족시키는 그의 방법이다(롬 3:25-26).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을 의롭다함을 나타내도록 해준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모든 값을 받은 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의를 우리 불의의 대신으로서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신다;  우리가 그의 율법의 요구사항을 전부 성취한 것처럼 간주한다.

        탕자와 같이, 겁을 먹고 두려운 마음을 하나님에게 간다. 그가 우리의 빚을 청산해주고 우리를 종으로서 받아들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좋은 옷과 신발을 신겨주며, 한번도 잘못된 적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다루신다.


        A. 전가는 경멸적인 율법주의인가?
그리스도의 의가 불의한 자들에게 전가되었다는 진리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진다. 로마 카톨릭 신학은 칭의는 법적인 선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의 삶에 주입이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오지 멕도널드는, 다소 비숫한 방법으로서, 고전적인 개신교 교리를 그들이 실제로 의롭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요구로부터 자신을 변호하려고 비참한 소설로서 본다;

        “먼저 그들은 공의가 요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인을 처벌하신다. 그리고 그는 죄인을 벌주지 않고 대신에 온전히 의로운 사람을 벌 주시고, 그의 의를 죄인들에게 돌린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의롭다고 말한다. 참으로 놀랄만한 혼돈과, 선과 악의 전도가 아닌가! 공의는 의로운 사람을 불의한 사람으로 다루지 않는다; 공의가 죄의 형벌을 요구한다면, 공의가 죄인을 벌주지 않을 수 있는가? 공의라는 명목으로 고통을 의인에게 놓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불신이 만연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몰록(Moloch)를 믿는다면 , 그를 몰록이라고 불러야지 공의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하나님의 것인 의는 실제적인 것이지 비열한 율법주의가 아니다. 나에게 전가된 의는 하나도 없다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라. 죄인으로 나를 간주하라. 어떤 것도 어떤 죄도 없는 의로운 사람들으로 되는 나의 필요성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멕도널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었다고 바울이 말했을 때에, 믿음이 의라고 말한 것이라고 맥도널드는 주장한다( 롬 4:3). 그리고 믿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를 가져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로워지려는 그를 도와줄 수 있기에, 믿음을 가진 사람을 비록 완전한 의는 아닐지라도 의로운 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한다.

        항상 멕도널드의 수사력은 강하다. 그러나 그의 분석에는 엄청난 문제점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의 형벌을 요구한다는 것을 제 1 장에서 이미 보았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없애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항해서 죄를 지었고,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들에게 주지 않고 대신에 우리를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으로 취급을 한다면, 그때에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멕도널드의 교리는 웅장한 것처럼 보인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유일한 소망을 잘라버린다. 그리스도가 그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멕도널드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두 번째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벌을 주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말을 한다. 멕도널드는 롬 5:12-21절에서 바울의 논증을 무시한 것이다. 이 구절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당신과 내가 에덴에서 금지된 열매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한 것처럼 다루고 있다. 죽음- 아담을 위협했던 형벌-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내려졌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아담을 우리 모두의 대표로서 본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아담은 우리를 대표하였고 타락을 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표하였고 율법을 지켰다. 아담의 조는 모든 사람의 저주로 인도된다.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이 믿는 모든 사람의 의와 생명으로 인도된다( 롬 5:18). 양쪽의 경우에, 대표자와 대표한 사람간의 연합이 있다. 하나님은 이 연합을 죄책의 전가와 의의 전가를 바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배열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반박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B. 전가는 거룩성을 손상시키는가?
            멕도널드 논증의 세 번째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개신교의 칭의 교리는 거룩성을 추구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바보로 만든다. 신학적인 용어로서, 멕도널드는 개신교 교리는 필연적으로 율법폐기론으로 인도한다고 비난한다. 또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고 말한다.

        이것은 낡고, 오래된 비난이다. 이것은 종종 혼란스럽게 만든다. 확실히 전가 교리는 율법폐기론으로 비뚤어질 수 있다. 아마도 멕도널드는 의로워졌기 때문에, 그들의 실제적인 행위들이 하나님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대한 적이 있었던 것같다. 그러나 주요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현재부터 루터, 칼빈, 오헨, 에드워드, 다른 정통 신학자들은 , 그리고 주요 개신교 신앙고백서에는 거룩함으로 인도되지 않는 신앙은 구원얻는 신앙이 아니라는 경고로 가득차있다.  우리가 참으로 중생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본성은 죄를 싫어할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설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한 것을 아는 것이 실제로 죄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싸움을 도와준다. 이런 투쟁에서 우리가 벗어나도 된다는 핑계를 절대로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순결한 것처럼 우리가 순결해야 한다( 요일 3:3).

        이런 능력을 가진 멕도널드이 개신교의 가르침이 율법폐기론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또한 바울은 이런 위험에 대항해서 자신의 교리를 지켰다는 것도 인식을 했어야 한다.롬 1:1-3:20절에서, 모든 사람은 죄의 책임을 갖고 있음을 바울은 증명했다. 형벌을 받아야 하고, 그들의 행위로서는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롬 3-5장에서, 하나님으로 온 의가 나타났다고 그는 선포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이다.  그의 논증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에서 빛이 난다. 이것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전가되었다는 진리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한 후 즉시로, 칭의교리가 율법을 멸시한다는 반대를 다루고 있다:

롬 6:1

물론 바울은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결론임을 보여준다.

롬 6:2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의 칭의 교리가 멕도널드와 같다면, 그가 반대에 응답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믿음 그 자체가 의라는 멕도널드의 교리,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들에게 주입됐다는 카톨릭의 교리는 거룩함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한다는 불평의 대상이 아니다. 바울의 교리는 이런 불평을 받기가 쉽다. 멕도널드가 개신교 신학자를 대항해서 펼친 똑같은 불평이 바울을 대항해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개신교가 바울을 바르게 해석했다는 좋은 증거이다.


        C. 구원얻는 믿음의 본질

            멕도널드 분석에 보여지는 심각한 문제중은 아브라함 믿음에 대한 해석이다. 표면적으로, 그의 해석은 일리가 있다. 롬 4:3절은 다음과 같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이것을 그에게 의로서 여겼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는 하나님과 연결을 시키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이미 의로운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 적절하다는 멕도널드의 주장을 위한 어떤 성경구절을 멕도널드가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이 교리는 멕도널드의 입장에서는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롬 4:3절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운 행위로서 간주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는 것은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이해를 할 때에 어떤 면에서 믿음은 칭의를 위한 요구사항을 성취한 것으로 결론을 맺을 수가 있다.

        결국 이런 해석은 거절되어야 한다. 많은 이유들이 주어질 수 있다; 첫 번째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운 것으로서 여겼다고 바울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또한 그는 의 그 자체를 믿는 사람에게 준 것으로서 말할 수 있다(롬 4:6,11).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은 믿음 또는 의를 “여긴다”는 동사의 목적어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서 간주한다고 말할 수 있다(롬 4:3,9). 또는 그는 의를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롬 4:6,11). 첫 번째 표현방법은 우리의 의가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수 있지만, 두 번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 표현방법은 믿음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는 도구라는 생각과 양립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성경은 믿음 때문에( because of, 또는 on account of ) 우리가 의롭다라는 것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믿음에 의해서, 또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 모든 표현들은 우리 믿음이 우리가 바른 관계를 갖는 도구이지,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전달한다. 예를 들면 빌 3:9절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유일한 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온다, 믿음에 기초한 의라고 선포한다. 믿음으로 이루어진 의에 대해서 바울이 말했다고는 전혀 볼 수가 없다. 대신에 믿음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소유한 의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바울의 믿음은 그 자체가 의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이 의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다. 바울은 J.C. Ryle에 의해서 다음 진술을 승인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참된 믿음은 그것에 대해서 어떤 공로도 없다. 그것은 절대로 행위로 보아서는 안된다. 구원자의 손에 놓는 것이고, 남편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고, 의사의 약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어떤 것도 가지고 오지 않는다. 어떤 것도 주지 않으며, 어떤 것도 공헌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지불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성취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제시한 의의 영광스러운 선물을  받기만 하고, 취하기만 하고, 영접하기만 하고, 잡기만 하고, 포옹하기만 한다.”

전가된 의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John Piper가 준 다음과 같은 유비가 매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 내 아들 바나바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해보자, ” 학교에 가기 전에 너의 방을 청소하라. 너가 정돈된 방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밤 게임을 볼 수 없다. 그가 말을 듣지 않고 청소를 하지 않고 학교를 갔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어지러운 방을 보고 청소를 해주었다고 가정해보자. 학교를 마치고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집에 왔고, 그가 했던 것을 깨닫고 두려움을 가졌다고 해보자.  그가 사과를 하고 겸손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바나바, 너의 사과와 복종 때문에 내가 청소를 한 것으로 간주를 할 것이다. 따라서 너는 오늘밤 게임을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롬 4:6절에서 말하고 자는 내용이다. 또는 나는 너의 사과를 청소한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우리의 믿음을 주시겠다고 하는 의로움과 연결을 시킨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방을 청소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것을 해주었다. 방이 깨끗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제 자유롭게 깨끗한 방과 연결해서 주시겠다는 모든 혜택을 줄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이런 복들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가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4. 그는 우리를 자녀로 만들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에, 몇몇의 친구들과 나는 Iowa에서 모닥불을 놓았지만, 통제를 할 수가 없었다. 불을 끄기 위해서 소방차들이 도착했을 때에, 풋볼 경기장 만큼에 해당하는 부분을 태워버렸다. 그 불이 나무에게 번져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이 났을 때에, 나는 지치고, 더럽고, 비참하게 집으로 갔다. 법정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지만, 어떤 형벌도 주어지지 않았다. 경찰이 나를 잡으로 오지 않았다; 시에서 나에게 벌금을 주지 않았다. 신문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이런 행동에 책임을 부가하지 않을 것임을 발견하였을 때에 나는 감사함을 가졌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과 영원한 평화의 선물을 보장받았다는 지식은 우리의 마음을 떨리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찬양과 감사로 무릎을 꿇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이해에 많은 결점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아마도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으면 우리가 했던 수 천억의 죄와 허물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우리의 빚을 갚기 위해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또는 “이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셨다,”라는 십자가와 공의의 의미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고후 5:19).

        이런 진리가 우리의 마음과 심장을 관통한다면, 그들은 위로와 감사가 쏟아질 수 밖에 없다.


        A.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칭의보다 더 큰 선물
           칭의의 교리가 위대한 만큼이나, 또 다른 큰 선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입양이다. 우리의 죄가 없어지고 예수님의 의로 옷입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들어가는 것은 훨씬 더 놀라운 일이다.

        전에 우리가 진노와 불순종과 사단의 자녀였음을 기억하라( 엡 2:2-3, 요 8:44).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랑을 부어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는 것은 옳다(요일 3:1).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히 2:11)


        B. 우리의 입양: 법적 신분과 본질적인 성향

           우리의 입양에는 두가지 중요한 면이 있다. 첫 번째로, 법적인 선언이다. 우리는 법적으로 자녀의 신분을 받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을 때에, 그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 권위-를 주었다( 요 1:12).

        추가적으로, 우리는 자녀의 본성을 또한 받았다. 이것은 양자의 영이라는 용어로서 성경에 표현되어 있다. 우리 마음에 그의 임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도록 격려한다(롬 8:15, 갈 4:6). 그리고 중생으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요 1:13, 벧전 1:3).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아들은 항상 아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서 보도록 권리와 소원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자녀로서 그를 부를 수 있으며 불러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 6:9). 모든 상황에서 그를 신뢰해야 한다(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11). 그의 사랑스러운 징계를 받아들여야 한다(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7)). 고난중에서 그를 부른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느니라(롬 8:15)).

        우리의 입양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이라고 롬 8:23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분명하게 우리가 여전히 고대하는 것은 영광임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봉사하도록 새로운 몸이 주어질 것이고 죽음과 고통이 영원히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입양이 미래에 완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이미 우리의 것이 자녀의 신분과 본질을 드러내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이 땅에 겪는 염려, 두려움, 후회 그리고 불안등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보호하시며, 심지어 우리의 모든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시는 분임을 매일 매일 묵상하게 되면, 이런 것들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쉽게 가라앉게 될 것이다(눅 12:7).

        이런 문맥속에서, 보면 멕도널드의 작품에 대해서 나쁜 말들을 했던 것에 대해서 위로를 받는다. 멕도널드의 가장 큰 실수는 예수님과의 관계와 상관없이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한다. 내 견해에서는 이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이것은 하나님 공의에 대한 본질을 처음부터 혼란스럽게 만들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신 아름다운 일들을 감소시킨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녀로서의 의미를 보여주는 일에는 참으로 큰 일을 하였다고 즐겁게 그리고 기꺼이 인정한다. 바로 이것이 C.S. Lewis에게 까지도 유혹을 했던 자녀에 대한 이해였다. 나는 멕도널드의 설교를 추천하지를 않지만, 성도들은 그의 소설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으리고 본다. 작가로서 멕도널드의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이 더 조화로운 신학에 종사하는 일에 사용됭기를 소망할 뿐이다.


5. 그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을 닮게 하였다.


        멕도널드와 다른 많은 신학자들은 칭의에 대한 개신교의 강조가 성도들이 거룩함을 추구하는 일에 열심을 하지 않게 한다고 걱정을 한다. 원리적으로 이것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실제적으로 역사에서 일어났었다. 성경의 문맥에서 벗어나서 성도들의 모든 것이라고 적용을 할 때에, 항상 심각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부성애에 대한 멕도널드의 강조도 똑같은 사건을 발생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독자들은 칭의 교리만을 보고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잃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거룩성에 대한 것이다.

        많은 신약의 편지들은 두가지 간단한 요점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엄청난 복을 우리들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우리는 위대한 부름을 받았다고 바울은 엡 4:1절에서 말한다. 이제 우리는 이 부름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롬 6:11절에서 말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다. 이제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게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물로서 드려야 한다. 히브리에서도 똑같은 생각이 흘러가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지성소로 드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이것을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도록 그리고 선한 행위를 하도록 장려한다( 히 10:19-2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어떤 복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하게 한다는 생각은 바보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었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위해서 했던 일에 대한 감사로서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위대한 즐거움을 잡아당기는 것으로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칭의는 죄에 대한 성도의 싸움을 위한 초석이다. 롬 6:1-4절에서 그의 죽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 그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죄가운데 살아도 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롬 8:3-4절을 보면 우리가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우리속에서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육신에 있는 죄를(즉 우리를 대신한 예수님의 죽음에서) 하나님이 정죄를 하였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이런식으로 생각을 한다; “ 나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없고 의롭다. 그런데 나의 참된 신분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가?”

        입양과 성화 사이에 역동적인 관계는 매우 분명하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잉기에, 우리는 아버지의 행위를 모방해야 한다( 마 5:44-45). 이런 식의 삶을 살아감으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마 5:16). 우리의 모든 노력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마 6:1-18).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그리고 벌써 거룩하고,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선언을 하였다면, 그때에 우리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방면에서 우리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골 3:12, 엡 4:1). 우리의 목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온전해야 한다(마 5:48).

        성화의 위대한 비밀은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의 협력에 있다. 우리는 거룩해지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해지기 위하여 훈련을 받아야 한다(딤전 4:7). 우리의 육체를 쳐서 절제를 해야 한다( 고전 9:27). 우리는 죽음에 이를때까지 죄를 거절해야 한다( 히 12:4).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들었다(고전 6:9-10). 거룩함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히 12:14). 그러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에 이르라”고 우리에게 말한 동일한 성경구절은 “너희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우리에게 말한다(빌 2:12-13). 궁극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살전 5:23).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를 시키는 것은 하나님이시다(고후 3:18).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운명적으로 기다리는 것으로는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권세를 없애기 위해서 긍정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 동시에, 성령에 의존을 하면서 이런 일들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발전에 대해서 그에게 공로를 돌려야 한다. 그가 우리로 하여금 거룩질 수 있도록 허락을 하였다. 모든 방면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빌 3:10).

        
6. 그는 우리를 영원토록 그 자신과 연합하게 하였다.

        A. 지금 하나님과 연합.......그리고 영원한 연합

            성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이 연합은 영원전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을 하였고, “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하였다(엡 1:4). 그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에 이것은 사실이 되었다. 이점에서, 비록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지만, 하나님은 “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게하였다”(엡 2:5-6).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후에 온전하게 될 것이고, 새롭고 , 영원한 몸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과 그의 모든 택함받은 피조물들과 영원토록 즐기게 될 것이다(살전 4:17). 죽음으로, 성도는 완전하게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임재가운데 들어가게 된다(빌 1:23).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죽음은 그리스도와 그의 택함받은 자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살전 4:16, 롬 8:38-39).

        그렇지만, 그와 연합의 총화는 죽음이 영원히 없어지고 예수님이 왕국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주었을 때에 이루어진다(고전 15:24, 54-55). 계21:3-4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거주지가 사람과 함께 있을  바로 그때이다. “하나님이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B. 천국에서의 사랑의 만찬

           고전 13:8-10절의 유명한 설교에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 완전한 세상을 사랑의 세상으로서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천국에 있는 모든 피조된 거주인들인 성도들과 천사들을 향해서 수없는 시내물을 통해서 끊임없이 흘러가며, 이것에 대한 응답으로 최고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리스도는 천국에 있는 그의 성도들을 사랑한다. 그의 사랑은 거기에 있는 전체 교회로 흘러나가며,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간다. 한마음과 한 몸을 가지고, 그들의 구속자이신 예수님에게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다. 모든 마음은 이 거룩하고 영혼의 남편과 결혼을 하였으며,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가진다. 천사들도 사랑으로 그들과 연합이 되었다. 성도들과 천사들도 서로를 사랑한다. 천국의 영광스러운 사회의 모든 회원들은 진심으로 연합되어 있다. 단 한가지의 비밀도 없으며 적들도 없다. 사랑이 충만하지 않는 단 하나의 영혼도 없으며, 모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지 않는 외로운 영혼도 없다. 모든 사람들은 사랑스러우며, 모든 사람들이 기쁨과 만족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모든 영혼은 서로에 대해서 사랑에 빠져있으며, 모든 복받은 거주자들 중에서, 사랑은 상호적이고, 충만하고, 영원하다.”

        천국에는 질투, 시기 그리고 불만, 교만도 없다고 에드워드는 주장한다. 꼴사납고 부적당한 어떤 것도 있지 않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거주자들의 능력을 막는 내적인 죄가 있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기쁨으로 섬긴다. 그들은 완전한 평화와 평온함을 갖는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연합은 영원토록 유지된다.

        또 다른 설교에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비유를 든다. 그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우리들 위에 무한히 높이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 대표되는 것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과 성도들간의 연합이 무한히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어떤 것에 의해서 증가를 하며, 일정한 속도로 영원히 위로 올라간다.“

        계시록의 표현과 영광의 상태를 묘사하려는 에드워드의 노력에  C.S. Lewis의 상상력이 넘치는 그림을 더하고 싶다. 마지막 전투장을 결론지으면서, 나니아의 자녀들은 Aslan의 나라에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피곤함이 없이 달릴 수 있으며, 그들은 어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전에 그들보다 먼저 갔던 모든 사람들과 재회를 한다. 이 세상에 있었던 모든 좋은 것들이 보존되어 있고, 모든 악한 것들은 사라졌다. 이 영광스러운 땅에서 쫒겨나는 일은 없으며, 왕은 그들에게 참된 삶이 시작되었다고 말을 한다.

        “그들에게 이것은 실제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과 나니아에서의 모든 모험은 오직 겉표지와 제목에 불과하다: 이제 그들은 위대한 이야기의 제 1 장을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지구에 있는 어떤 사람도 읽은 적이 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영원토록 계속된다. 모든 장들은 전 장보다 더 낫다.”



7.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떠나서, 인간 상태는 황량하다. 의학과 기술의 진보가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진다고 느끼도록 하지만, 우리 자신의 건강과 번영이 우리의 운명과 영적인 비참함을 가끔 가려주지만, 우리는 여전히 빠르게 무덤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사실에 직면해 있다. 무덤 너머에서, 죽을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났을 때에,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 하나님의 적을 태우는 맹렬한 불과 소멸하는 불이 기다리고 있다.”(히 10:27). 우리는 하나님의 적들이다. 우리는 반역을 했던 사람들이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따르도록 포로로 잡았다 (딤후 2:26). 우리의 마음은 육신에 잡혀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적의를 품고 있다. 우리는 그의 법에 복종할 수 없으며, 그를 기쁘시게 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이야기에 기초해서 영화로 만들어진 Tolkie의 “ The Lord of the Rings"은  Frodo 와 Sam과 격렬하게 싸우는 존재로 그들 자신을 상상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어두움의 주인을 섬기는 운명적인 피조물이며, 소망이 없으며 무자비하게 악을 행하는 존재이다. 참된 의와 선의 적이며, 멸망받아야 할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와 떨어져있는 사람의 운명이다. 그리스도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의의 전가를 얻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입양이 되었다. 그 안에서 즉각적으로 중생함으로서 우리의 본성이 바뀌었다. 성화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우리의 속성들이 새로워진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상상이 되지 않는 영광스럽고, 문자적으로 끝이 없는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 안에서 George Herbert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 온유, 평화, 기쁨, 사랑과 복들이 넘쳐났다.”

        우리 문화- 우리 교회의 문화-는 복음에 지쳐있다. 우리는 이런 영광스러운 복들- 이런 복스러운 긍휼, 이런 긍휼이 넘치는 구속-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차를 사는 것보다 또는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보다 또는 스포츠 게임을 보는 것보다 덜 흥분을 한다. 우리는 예배에서 하품을 하고 생명의 말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교회가 깨어날 때이다. 모든 것을 값진 진주를 위해서 팔아야 할 때이다. “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해야 할 때이다”(히 12:1-2).

        우리의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이다. 그가 제시한 구원은 비교할 수 없는 구원이고,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그가 준비한 천국은 사랑의 세계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어떤 좋은 것도 막지 않는다. 하나님의 오른 손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시 16:11). 이런 즐거움을 찾는 일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 자녀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던져야 한다.


8. 저자의 기도 원문

O Lord, how perfect are Your provisions for our needs! We need a stable and abundant physical environment, and You have given us the earth with all its riches and grandeur. We need companionship, and You have given us mothers and fathers, brothers and sisters, husbands and wives, and children and friends. We need purpose, and You have given us work to do, problems to solve, obstacles to overcome. Most of all, we need salvation—oh, how we need it! We are turned in upon ourselves, barely capable of loving even the members of our own families and utterly unable to love the One in whom we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We are guilty, condemned, and lost. No good thing dwells in us, and it is only Your hidden grace, poured freely and secretly upon us, that prevents us from exhibiting our depravity in its full horror. If You should leave us to ourselves, we would quickly make earth itself into hell. What we will become if You send us where we deserve is a thought too wretched to contemplate. But You, O Lord, are merciful and have made so perfect a provision for our redemption from sin. Why should we reject so great a salvation? Why should we not turn and live? Grant, dear Lord, that not only I but all who are dear to me and all who read this may turn and live, and that we may understand, appropriate, and rejoice in all the riches of Your salvation. In Your great name, amen.

Clotfelter, David B. (2004-10-01). Sinners in the Hands of a Good God: Reconciling Divine Judgment and Mercy 제 8 장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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