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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강 거짓된 확신
임 바울  2018-08-20 21:29:04, 조회 : 80, 추천 : 11

                                                         제 3 장 거짓된 확신


        구원의 확신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그들이 구원의 상태에 있다고 확신하는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 때문에 매우 복잡해졌다. 그들 중에 한 부류가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했던 사람들이다. 마지막 말에 그들은 “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님에게 나아왔다. 예수님에게 자신들이 속하였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을 당했다. 그들의 확신은 가짜임이 드러났다.  


        어떻게 가짜 확신이 가능한가? 어떻게 사람들이 가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 장에서,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려고 한다.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문제점들은 두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이 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첫 번째 문제는 구원을 위한 요구사항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구원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 세가지 주요 오류를 볼 것이다; 보편구원론, 율법주의 그리고 성직자주의. 두 번째 문제는 구원이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가졌지만 그들이 이 요구사항을 맞는지를 오해할 때에 일어난다. 마지막 두 장은 구원의 요구사항에 우리가 맞는지를 정확하게 살펴볼 것이다.


A. 보편구원론  


        구원의 잘못된 확신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첫 번째 주요 오류는 보편구원론이다. 보편구원론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모든 사람이 천국을 간다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이 이런 교리를 갖는다면, 간단한 삼단논법이 그로 하여금 보편구원론의 교리에서 그의 운명에 대한 다음과 같은 확신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전제 1 ; 모든 사람은 천국에 간다.
전제 2 ; 나는 사람이다.
결론   ; 그러므로, 나는 천국에 갈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논란은 16세기에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발생했다. 어떻게 칭의가 일어나느냐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 문제는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느냐 또는 다른 어떤 수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느냐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신 칭의는 우리 문화에서 압도적인 견해가 아니다. 오히려, 죽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이고, 보편주의는 이런 사상을 갖고 있다.


        첫 번째 복음 전도를 위한 진단에 대해서 전 장에서 말한 적이 있다; “ 너가 오늘날 밤에 죽는다면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두 번째 진단은 이런 것이다; “ 오늘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내가 왜 너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너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전에, 내 아들이 어렸을 때에, 이 두가지 질문을 던졌다. “ 예”라고 첫 번째 질문에 즉시로 대답한 것에 대해서 기뻣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을 하였을 때에, 그는 자기 생애에 가장 어리석인 질문을 들은 것처럼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 내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간단한 것인가? 내 아들은 성경적 신학에 헌신하는 집에서 자랐다. 가는 그에게 이신칭의를 교육하는 일에 실패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견해에 벌써 잡혀있었다.


        우리는 신학에서 마지막 심판을 없앴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각에서 신적 형벌 또는 지옥의 형벌에 대한 개념을 지워버렸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죽으면 천국을 간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 문화에서 성화를 위한 은혜의 가장 강한 수단은 죽는 것이다. 죄에 쩌든 죄인이 시체실과 무덤 사이에서 자동적으로 변화가 되기 때문이다. 장례식이 개최되면서, 죄로 쩌든 그 사람은 덕이 충만한 사람으로 소개될 것이다. 그의 죄는 죽음에 의해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 정해졌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를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 9:27).


        마지막 심판에 대한 위협은 빌리 선데이, 드와이트 무디, 빌리 그래함, 조나단 에드워드, 조오지 윗필드와 같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옥에 대해서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차이점에 대해서 가장 많은 말씀을 하셨다. 사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말씀보다 지옥에 대한 말씀을 더 많이 하셨다. 그는 마지막 날에, 모든 무익한 말까지도 심판을 받게 된다고 그의 청중들에게 경고를 할 정도이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심리적으로 억누르기를 원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최종적이고, 보편적이고, 심판에 대한 위협이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도 그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편주의만큼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는 교리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가!


B. 율법주의

거짓된 확신으로 인도하는 두 번째 주요 오류는 율법주의이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언급하는 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른 말로 하면, 선한 행위가 당신을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잘못 이해를 한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둔 기준을 맞출 수 있다고 믿는다.


        전에 복음 전도 폭발의 트레이너로서 봉사를 한 적이 있다. 일주일에 한번 내지는 두 번 훈련원들을 공동체로 데리고 간다. 그들에게 말을 하게 하고, 신앙진단을 위한 질문들을 하게 한다. 후에, 우리가 받은 질문들의 상호관계를 살펴본다. 답중에 95%가 행위로 의롭다함의 범주에 들어간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왜 하나님이 당신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가를 물었을 때에 당신은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를 물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선한 삶을 살았다, 나는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다. 나는 보이스타우트에서 봉사를 하였다‘라고 대답을 한다. 또는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한다. 그들의 확신은 그들이 성취한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 불행하게도, 사람의 행위는 확신을 위한 거짓된 기초이다. 성경은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어떤 사람도 율법의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 롬 3:20, 갈 3;11).


        아마도 이런 잘못된 구원관을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 사역동안에 만났던 부자 청년과 같다( 눅 18:18-30). 부자가 예수님에게 왔을 때에, 그의 입에서 예수님을 찬양하는 말을 하였다. “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요구사항이 무엇이냐고 예수님에게 물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구원의 요구사항에 대해서 청년에게 말해주기 전에,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했던 아첨부터 다루었다. 예수님은 물었다, “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선한 자가 없다”( 눅 18:19). 어떤 비평가들은 ,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하고 신성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부인하였다고 말을한다. 아니다. 부자 청년이 지금 누구와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을 예수님은 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몰랐다. 그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부자 청년은 순회 전도자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분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었다, “ 왜 나를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느냐? 너는 시편 14;3절을 읽어본 적이 없느냐?  [시 14:3]   (3)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것이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가?  결국,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을 항상 본다. “ 선하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성경적인 선함의 기준은 하나님의 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우리들의 행동을 판단해야 한다. 우리의 내적인 동기에 따라서 심판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는 소원에 따라서 심판을 해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이지만 , 소위 칼빈이 말하는 “ 시민적 덕”을 행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다. 즉 그들은 사회에서 선한 일을 한다. 그들은 선한 이유에 의해서 자선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도와준다. 그들은 때때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인간적인 면에서 아름다운 일들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 계몽된 자기 이익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자기 이익이다.


        전에 비극적 화재 사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빌딩에 불이 났다. 화염에 붙잡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돌진하였다. 소방관이 들어가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구출하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빌딩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하였다. 그때에 빌딩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있던 사람중에 한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빌딩으로 들어갔다.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몇 분이 지난 뒤에, 그는 살아서 나왔다. 그의 팔에는 꾸러미가 있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박수를 쳤다. 그가 아이를 구출하였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들어간 것은 평생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가지고 나온 것이지,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불신자들이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서 빌딩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아마도, 그의 생명을 바쳐서까지 구할 수 있다. 서로에 대해서 가지는 자연적인 염려에 의해서 시민적 덕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덕은 충분하지가 않다. 하나님이 사람의 행동을 볼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일을 한 것인가?” 에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라; “ [눅 10:27]   (27)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법을 지킨다면, 그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향하여 있지 않다면, 그때에 그 사람의 덕은 시민적 덕이다.  우리의 훌륭한 덕이라고 할지라도 찬란한 악에 불과하다고 어거스틴이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육체에 있는한, 죄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묻어있다. 부자 청년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기준을 성취했다고 생각했다.


          바울은신약에서 그들 자신에 의해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였다( 고전 10;12).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볼 수 있다. 긜고 우리가 간음, 살인, 사기, 또는 잔인한 죄등을 짓지 않는다면, 우리는 괜잖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보다 더 죄를 많이 짓는 사람들을 항상 발견할 수 있기에,  우리는 괜잖을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 것은 쉽다.


        예수님에게 왔던 부자 청년의 신앙관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시를 그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율법을 상기시켰다; “ [눅 18:20]  (20)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율법에 대한 그의 천박한 이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 [눅 18: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전생애에 십계명을 지켰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 내가 율법의 깊은 의미를 설명할 때에 너는 산에 있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너는 내 강의를 듣지 않았구나!” 또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침대에서 일어난 순간부터 너는 이런 명령들 중에 어떤 것도 지키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이 사람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서 아름다운 학자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눅 18:22]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


        이점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구원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자에게 우리의 재산을 나누어 주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개인 재산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만 한다는 보편적인 명령을 세우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특별한 부자 청년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재산에 붙잡혀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돈이 그의 신이다. 그의 우상이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 정말 너가 십계명을 다 지켰니? 하나님 앞에 어떤 우상도 두지 않았니? 그렇다면, 너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라.” 그 이후에, 매우 열정적이던 부장 청년은 머리를 흔들면서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났다. 그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만남의 주제는 선함이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충분한 선을 갖고 있는가? 신약의 모든 페이지는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한다( 사 64:6). 구원받기 위해서 그의 의를 믿는 사람은 거짓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구원받기에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다( 눅 17:10).


D. 성직자 주의( Sacerdotalism)

        거짓된 확신을 주는 잘못된 오류는 성직자 주의이이다. 구원은 성직자를 통해서, 성례를 통해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견해이다. 사람들은 세례를 말한다. 주의 만찬을 말한다. 다른 의식들을 언급한다. “ 나는 이런 성례를 했다. 이것은 은혜의 수단이다. 나는 성례를 하였기에 확신을 가진다.”


        이것은 성경시대에 바리새인들이 했던 동일한 잘못이다. 그들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성례를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달한다. 또한, 기독교인의 삶을 도와주는 은혜의 수단이다. 그러나 성례는 어떤 사람도 구원하지 않는다. 성례에 확신의 기초를 두는 사람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구원하지도 않고 구원할 수도 없는 것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이것과 연결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견해가 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은 교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참여하는 것은 보이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반드시 보이는 교회에 참여를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확신을 교회의 회원에 둔다. 그러나 교회의 회원은 어떤 사람도 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이것은 불법이고, 확신을 위한 잘못된 방법이다.


        끝을고, 소윈 복음주의 진영에서, 몇가지 잘못된 확신이 나타나고 있다. 죄인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 복음전도에서 손을 드는 것, 제단의 부름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 예수님을 위해서 결심을 하는 것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게 하는 방법이다. 기도를 하고, 손을 들고, 강단 앞으로 나가고, 결심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들이 했던 행위을 신뢰하는 것이다. 외부적인 신앙고백은 거짓된 것이 될 수 있다. 외적인 모습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실체인 내적인 신앙고백이 없을 수 있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거짓된 확신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런 거짓된 확신의 형태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적이고 실제적인 구원의 확신을 얻는 방법을 탐구해야 한다.

    
p.s. 이 책은 “ Can I be sure I'M Saved?"의 제 3 장 ” False  Assurance"을 번역한 것입니다. 오류를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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