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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강 확신을 위한 안간힘
임 바울  2018-08-01 15:17:39, 조회 : 102, 추천 : 27

                                               제 10 강 확신을 위한 안간힘



        내가 믿기로, 성경에서 가장 겁나게 하는 것이 구절이 하나 있다. 산상수훈 마지막에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다.


        산상수훈을 주님에 의해서 긍정적인 선포로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우리들에게 있다. 결국, 그가 팔복을 준 것은 산상수훈에 있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애통하는 자는....온유한 자는..”등의 말씀이다( 마 5:3-12). 산상 수훈 때문에, 예수님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억양을 가지고 말을 한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은 산상수훈의 절정을 간과한 것 때문이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 [마 7:21-23]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예고편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올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나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발 나를 떠나가라.” 심지어는 “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 너희는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놀라운 경고에 대해서 특별히 무서운 것은 “ 나에게 주님, 주님 말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으시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였다,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라고 할 것이라는 것이다.


1. 주여, 주여

        어떤 사람이 그들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은 성경에서 약 15번 정도 등장한다. 몇가지만 여기서 언급해보자;

[창 22:11-12]   (11)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46:2]  (2)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출 3:4]   (4)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3:10]   (10)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눅 10:41]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3:34]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너희 자녀들을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눅 22:31]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행 9:4]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마 27:46]  (46)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런 희귀한 문법구조는 히브리어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반복해서 부를 때에, 그가 부르는 사람과의 친한 개인적인 관계를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했던 말을 마지막 날에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 주여, 우리들은 당신에게 속하였고, 또한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친밀감으로 예수님을 불렀던 것이다. 그들은 “ 주여, 주여”라고 부를 것이다. 마치 그들은 주님을 깊게, 그리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친근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친밀하다고 가정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는 것이다, “ 나를 떠나가라.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높이는 명칭인 “ 주여”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적ㅇ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안에 있지 않다. 그들은 그에게 속하지 않았고 마지막 심판날에 견딜 수가 없다. 이 말씀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교회의 회원으로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교회의 삶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말씀사역에 참여를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명성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임재 앞에 그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할 때에,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책의 서두에 이 문제를 부각시킨 것이다. “ 마지막 심판때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쫓겨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우리의 확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하는가?


2. 논의중에 있는 교리

        수세기 동안, 확신에 대한 질문이 교회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많은 교회는 확신을 가질 수는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나아갔다.

        예를 들면, 16세기의 트렌트 공의회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람이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부인했다. 로마는 이 생애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의 지위에 대한 계시를 준 사람을 제외하고는 가능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보통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최종적인 분석으로, 대부분의 “확신”은 추측, 의견, 그리고 성경이 부패하였다고 정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상이라고 로마교는 주장한다. 우리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단순한 의견ㄴ에 의지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결과적으로, 구원의 확신은 어떤 특별한 계시적인 행동을 받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관점이다.

        구원의 확신을 부인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아니다. 어떤 개신교인들은 오늘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내일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믿는다. 한때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배도를 하고 그들의 구원ㅇㄹ 잃어버릴 가능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역사적으로, 구원의 확신의 교리는 성도의 견인 교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로마교는 우리가 전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어떤 개신교인들은 한정된 시간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우리의 최종의 상태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개혁신학, 또는 내가 붙잡고 있는 신학의 신념은 우리가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오늘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죽을 때에 은혜의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충만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3. 씨뿌리는 비유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진실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다;


        “ [마 13:1-9]   (1)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 유명한 비유의 문맥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그 전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물었다, “ [마 12:47] (47)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기를, “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인가?”( 48절)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지명하면서, “ [마 12:49]   (49)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그의 참된 형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지, 그를 따르겠다고 단순히 결정을 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예수님은 말한다.


        어떤 사람도 유다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가 결정한 것이다. 3년이라는 지상생활동안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마귀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요 6:70). 유다가 진실로 회심을 하고 나서 은혜에서 떨어지고 구원을 잃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지만, 그는 회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의 상태를 고려할 때에 우리는 멈추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비유의 말씀뒤에, 예수님은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복음서에서 비유에 대한 설명을 주시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 설명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이 비유는 보통 비유가 주는 교훈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비유는 단 하나의 요점만을 준다. 일반적으로 비유를 우화로 바꾸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 전체 이야기에 상징적인 의미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뿌리는 비유를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에 적용을 하면서 상징적인 수준까지 다가간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을 시작하다, “ [마 13:18-19]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그가 말하는 첫 번째 그룹은 길에 떨어진 씨를 말한다. 옛날에, 씨뿌리는 시기에, 농부는 먼저 씨를 뿌리고, 그리고 땅을 갈았다. 그러나 길에 떨어진 씨앗은 땅밑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딱딱한 길위에 놓이게 된다. 뿌리는 내리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새들이 먹어버린다. 예수님은 새가 사탄이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다. 그들은 복음을 듣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예수님은 계속한다, “ [마 13:20-21]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우리가 복음주의 모임에 가거나 또는 TV에서 이런 모임을 본다면, 복음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 즐비하게 줄을 서 있는 군중들을 볼 수 있다. 전에 나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심을 하는 방대한 국제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내가 그것을 읽었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한 결심을 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중에서 몇 명이나 참된 회심을 하였으며, 그중에서 몇사람이나 가짜인가를 궁금해했다. 이런 모임에서 복음을 들었던 사람중에는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심이 감정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 모임에서 앞으로 나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약속을 버린다는 것을 확인된 사실이다. 그들의 갑작스럽게 먹은 결심은 종종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런 복음주의 모임에 대해서 심한 비평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옥외 집회는 그들의 성공을 평가하는 기준에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그들의 회중에 있는 회원의 수에 의해서 평가를 한다. 그리고 일정기간에 어느 정도 증가를 했는가로 결정을 한다. 옥외 복음주의 집회는 회심의 결정을 한 사람들이 강대상으로 나오는 그 숫자, 또는 손을 드는 것, 또는 카드에 서명하는 것등으로 결정을 한다. 이런 모임들은 사람들이 한 결심을 그들의 통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영적 실체를 측량할 수 있을까? 전도에 참가한 어떤 사람도 사람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결심한 사람의 숫자를 세는 것밖에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경고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복음을 기쁨으로 듣는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믿음생활을 하지 않는다. 이런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이 바로 바위에 씨가 떨어진 사람이다. 땅이 깊지가 않아서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 해가 떠오르면, 조금 자랐던 씨가 말라버린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라져 버린다.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환란과 핍박이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세 번째 종류의 씨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한다, “ [마 13:22]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 씨는 복음을 듣고 말씀으 받았지만, 이 세상의 염려로 인해서 막힌 사람을 말한다. 가시와 같이, 세상적인 염려는 “ 말씀을 막는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 [마 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확실히, 기쁨으로 복음의 메시지에 반응을 한 많은 사람이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은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복음에 반응을 한 많은 사람에게도 이것이 해당된다. 진심으로 구원받는 사람은 말씀대로 행동함으로 그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이다. 씨가 뿌리가 내리고 자라면, 열매를 맺는다.


4. 열매의 필요성

        과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6세기의 개혁자들은,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지만 그러나 분리되어 있는 믿음에 의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로마 카톨릭 교리와는 다르다. 그들은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행위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카톨릭의 견해는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는 행위와 믿음이 함께 있어야 한다. 즉 의롭다함을 받을 당시에 필요한 것은 믿음과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견해에서, 믿음은 의롭다함과 동일하다. 그리고 행위가 있어야 한다.


로마 카톨릭 견해 믿음 + 행위 = 칭의


개신교 견해 믿음= 칭의 + 행위이다.


        개신교에서. 행위는 우리에게 있는 은혜 상태가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칭의에 어떤 것도 더하지 않는다.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일에 역사하는 유일한 의로운 행위는 그리스도의 행위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할 때에, 그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받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칭의로 계산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한다; “ 이런 말은 어떤 열매도 맺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의로운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말한 것처럼, 의롭다 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다( 약 2:26). 살아있는 믿음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참된 믿음은 행위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공식의 오른쪽에 어떤 행위가 없다면, 공식의 왼쪽에 어떤 믿음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공식의 왼편에 어떤 믿음이 없다면, 그때에 공식의 오른편에 어떤 칭의도 없다.


        따라서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 우리의 믿음의 진짜라면, 우리가 “ 주여, 주여”라고 말하면서 마지막 날을 맞이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불법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이 생산하는 열매의 양은 다를 수 있다. 좋은 씨는 “ 어떤 경우에는 100배, 60배, 30배”를 맺는다( 마 13:23). 어떤 참된 기독교인은 다른 기독교인만큼 열매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참된 신자는 얼마간의 열매를 맺는다. 그가 없다면, 그는 신자가 아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이다, “ 그들의 입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로 알지어다( 마 7:16).” 사람이 결심하는 일에 많은 강조를 하는 기독교 문화에 , 강단 초청에 응답을 하고, 죄인의 기도를 하는 일에 빠져있는 이 중요한 요점을 놓치기 쉽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으로 사람은 회심하지 않는다. 사람을 회심하는 것은 결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우리가 결심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강단앞으로 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손을 들고, 카드에 싸인을 하였기 때문에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에 참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왕국에 들어간다.


        오해하지 말라. 믿음의 공식적인 고백에 나쁜 점은 없다. 이런 고백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의롭다함을 받은 모든 사람은 이런 신앙을 고백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한다. 문제는 믿음의 공개적인 고백이 우리 회심의 증명서가 된다고 할때에 발생한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멀리 있으면서 그들의 입술을 가지고 예수님을 경배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한다( 마 15:8). 어떤 사람도 믿음의 고백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의 문제를 푸는 가장 쉬운 방법은 믿음의 고백과 일치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결정하는 것 열매를 조사해보아야 한다. 기독교인의 삶에서 자가 검증을 위한 확실한 곳이 있다. 제 4장에서 이것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에 어떤 사람도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일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참된 확신은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거짓된 확신을 가질 가능성이 있으며, 참된 확신은 얻기에 어려울 수 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참된 구원 은혜의 소유에 의해서 동기가 된 것임을 어떻게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서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위로,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준다. 우리가 은혜의 상태에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도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나머지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p.s. 이 책은 “ Can I be sure I'M Saved?"의 제 1 장 ” The Struggle For Assurance?"를 번역한 것입니다. 오류를 지적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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