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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 4 부 제자가 되었을 때에 받는 상들 : 제 12 장 행복한 그리스도인
임 바울  2014-07-21 18:16:58, 조회 : 1,965, 추천 : 303

                                               12  행복한 그리스도인




마 5:3-12


         오늘날 흥행업자와 성공적인 텔레비전 연출자, 또 발행부수가 많은 신문의 편집자, 패션 잡지의 편집자가 현대의 관점에서 팔복을 다시 쓴다면 나는 그들이 다음과 같이 쓸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는 행복하다. 성(性)적으로 자유분방한 사람은 행복하다. 아름다운 자와  잘 생긴 자는 행복하다. 유명한 자는 행복하다. 세상이 존경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것과는 정반대이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 5:3-10

         이 말씀은 복음 안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을 총체화한 것이며 그 분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권하는 삶의 방식을 열거한 것이다. 그 말씀은 또한 제자 됨에 있어서 기본적인 부르심을 닮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됨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눅 9:23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팔복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은, 그것이 서술하고 있는 삶은 어떤 소름끼치고 비참하게 되는 삶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진정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의 의미 때문이다. 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의미는 세상의 피상적인 유쾌함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에서이다. 팔복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는 진정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1. 행복의 추구

         세상은 물론 이것을 알지 못한다. 미국 내에서 사람들은 행복의 추구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말하고 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돈을 통해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10만 달러를 목표로 세우고는 그 목표를 달성한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가 않았다. 자신의 목표를 더 높이고 100만 달러를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백만 달러의 목표에 이른 후, 또 다신 2백만 달러를 목표로, 또 3백만 달러를 목표로 하고 살아간다. John D. Rockfeller는 얼마만큼의 돈이면 충분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돈에 대한 사람의 필사적인 추구는 그가 어떤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돈은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텍사스의 어느 백만장자는 “나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비참하게도 환멸을 느끼며 살았다”라고 고백하였다.

         또 다른 남자는 그가 권력을 통해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치계에 입문을 하였다. 그는 지방 선거에서 입후보를 하였고 당선되었다. 그러자 자신의 의원석에 앉기도 전에 시장이 될 꿈을 꾸었다. 그가 시장이 되면 주지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은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전에 한 유명한 정치가가 빌리 그래함에게 와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 나는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고 삶은 그 모든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미지의 세계로 기꺼이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행복으로 이르는 길은 성적으로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이혼을 하고, 또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한다. 그 사람은 일주일 내내 “ 행복한 시간들”을 가지는 독신 생활을 하며, 금요일에는 파티를 열고 주말에는 시골에서 밤새도록 즐겁게 보낸다. 최근에 CBS에서  켈리포니아에 있는 독신자들을 인터뷰했다. 그 여성은 “남자들은 모두 같이 침대에 드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일생동안 충분히 나를 만족시킬만한 남자들이 많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의 몸을 강하게 하고 또 그들의 코를 매력 있게 가꿈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장 잘 팔리는 책을 쓰고 오락대중매체를 통해서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됨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명성은 잠시 동안 행복감을 가져다주나 그 생명이 짧다.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임종할 때에, 그는 의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과 인간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만일 당신 내 생명을 6개월 연장시켜준다면 내가 지금까지 얻은 모든 것의 반을 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가? 행복의 추구는 단지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든 간에, 적어도 이상적으로 행복했던 자가 있었다. 우리는 그를 슬픔의 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는 자진해서 우리의 슬픔을 떠맡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행복하였다. 빌리 그래함은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만일 우리가 평온함, 신뢰, 자족, 평화, 기쁨, 그리고 영혼의 만족을 행복이라고 한다면,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매우 행복하신 분이었다. 우리는 그의 웃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들떠서 돌아다니지 않았다. 쓸데없는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의 행복은 외적인 환경에 있지 않다. 그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 외적인 자극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삶의 환경과 미래의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비밀을 알았다. 그는 모든 상황 속에서도 평온함과 , 확신과 침착함을 가지고 움직였으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렇게 하였다!.....만일 진정한 행복한 축복을 가진 자가 있다면.....그는 바로 예수님이다!”

        팔복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그 행복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하셨다.


2. 행복에 이르는 길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행복은 그 분의 기준에 맞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는 데에 있다. 이 기준들은 예수님의 거룩함과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  팔복에서는 누가복음의 “ 심령”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눅 6:20).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가난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마태복음을 인용한다. 그 분은 신체적 결핍을 칭찬한 것이 아니다. 그 분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보다 하나님의 왕국에 더 가까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려고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명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교만한 부유함에 반대되는 것이다. 나는 이전에 산상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에 대해서 어떤 것을 깨달은 인간의 정신 상태이며, 자신의 죄와 마음의 부패로 인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팔복 중의 첫째 복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의 교리에 대한 성경의 진술 중 가장 명백한 진 술중에 하나이다.”

        십년 전 내가 팔복에 대해 설명한 내용과 지금 비교를 해 볼 때, 나는 초기의 내 설명이 적절한 것이었다고는 확신할 수가 없다. 또한 많은 주석가들의 설명이 적절한 것이었다고도 확신할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지당한 태도에 대해 말해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만일 우리가 소유물에 집착해 있다면, 그런 태도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이다. 그는 그 자신의 소유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아를 죽이는 자이다. 실상 그는 집과 땅과 가족과 친구들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라면, 그는 소유물에 의해 소유당하지 않고 그가 이것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Tozer는 이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왕국을 소유하는 복이 있는 자들은 모든 외양적인 일들을 거부하고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소유물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는 자들이다. 이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구걸하는 외적인 상황과 병행하여 내적인 상태에 도달한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라는 말을 사용하심은 실제로 이런 의미에서 하신 말이다. 이들 복 받은 가난한 자들은 어떤 폭정 하에서도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그들은 압제자의 멍에를 끊었으며, 그들은 싸우지 않고 복종함으로서 그 일을 해내었다. 그들은 소유물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림으로서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 대부분의 다른 미덕(美德)들과 마찬가지로 애통함은 어떤 영적인 것을 시사한다. 깊은 의미에서의 진정한 애통함은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것이며, 이 팔복에서 약속한 위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공되는 위로이다. 이 세상에서의 어떤 행복도 죄가 용서받았음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를 다시 회복시키는 일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본문은 이 한 가지 의미에서만 애통함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 생각은 두 가지로 적용시킬 수가 있다. 첫째, 그것은 개인적인 상실감으로 애통해하는 일이다. 이 경우는 예수님을 위하여 부모와 자녀들, 배우자 또는 친구를 잃어버리는 경우이다. 이 자연적인 상실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보상받게 될 수도 있다.

마 10:29-30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해하는 자들을 위로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두 번째, 죄를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애통해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팔복에 나오는 헬라어를 독일로서 “leidtragen”으로 번역을 하였다. 그 의미는 슬픔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처럼 자진해서 세상의 슬픔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세상은 스스로 그 슬픔을 견디어내지 못한다. 세상은 임박한 재난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세상의 진정한 상태와 요구, 그리고 그 운명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는 세상에 대해서 애통함을 보이셨다. 그분께서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증거로 삼으셔서 많은 이들을 죄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이르도록 하셨다.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  서구문화는 온유함을 비열한 속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온유함은 사실 위대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경건한 생활을 해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인 “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는 말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시 37:11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 같다. 시편말씀은 중요하다. 시 37 편의 첫 부분은 진정으로 온유한 자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는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않는” 자이며,  그 대신에 “ 여호와를 의뢰하며 선을 행하는 자”이며,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이며,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자”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온유한 자에 대한 설명이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임으로 그들이 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다해도 인간들 앞에서 떳떳이 서 있을 수 있는 자이다.

         로렌스 형제는 온유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그는 욕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는 그는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임으로서 그의 종이 되기를 열망하였기에, 수도원의 부엌에서 기꺼이 잡일을 하였다. 그는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으로 생각했다. 그는 부엌에서 일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것”처럼 실천하였다. 그는 그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을 인식함으로서 그는 자신을 “ 모든 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들이 스스로 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약속이 있는데, 즉 그것은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영혼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왕국에만 적합한 자들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땅을 현재 소유한 자들이 그것을 잃게 되는 반면에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들은 설교를 통한 복음전파로서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이 땅을 소유하고, 땅을 새롭게 하고, 모든 것을 그분께 영원토록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내 서재에는 아프리카 서부로 파견되었던 독일인 선교사 Walter Trobisch가 쓴 “ Living with Unfaithful Desires"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은 우리의 서구적인 생활방식이 젊은이들에게 강요한 청년기와 성적 요구의 충족을 유예시킨 것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일반적인 서구적 삶을 잘 말해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오랫동안 충족되지 않은 채 남아있지는 않는다. 성적 욕구는 즉시로 만족되어지며, 또한 그들은 적어도 언제 어느 때든지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그 기록 즉시로 그것을 포착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성경적인 비유를 사용하자면, 우리의 문화는 우리의 욕구를 통제하는 것을 장려하기 보다는 모든 것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세상은 의에 목말라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에 대해 목말라 하는 것이 행복으로 이르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죄의 길은 성취를 약속한다. 즉 그 길은 이상향을 지나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길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죽는 길이다. 반면 의의 길은 힘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은 진정한 만족으로 우리를 이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다.

시 16:11

         우리는 세상의 쾌락에 주리고 목말라하기 보다는 오로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E. M. Blaiklock는 “ Eternity"라는 잡지에 성경에 나타난 물의 중요성에 관한 기사를 썼다. 그 기사에서 그는 사막에서 물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강한 지,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채워주게 될 그와 유사한 욕망에 대해 극적으로 설명하였다. 그의 생각은 Major V. Gilbert가 “ The Last Crusade" 라는 책 속에서 설명한 제 1 차 세계대전 중 팔레스타인의 영국 해방군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나왔다.

         “바르샤바로부터 전진한 영국과 오스트렐리아와 뉴질랜드의 연합군이 건조한 사막지대를 넘어 후퇴하는 터키군의 뒤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었다. 그 공격은 물을 수송하는 낙태 대열이 도착하기 훨씬 이전에 감행되었다. 그래서 물병은 텅 비었다. 태양은 독수리가 선회하면서 기다리는 하늘에서 이글거리며 내리쪼이고 있었다.

         길버트는 “우리는 두통을 일으켰고, 우리의 눈은 충혈 되었고 눈을 멀게 하는 강렬한 빛으로 시야가 희미해졌다.....우리의 혀는 부어오르기 시작했고.....우리의 입술은 붉은 자주 빛으로 변하더니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행렬에서 떨어져나간 자들은 다시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필사적인 힘으로 시리아로 가기 위해 그들은 애를 썼다. 시리아에는 우물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해질 때까지 그곳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갈증으로 죽어갔다. 길버트는 “우리는 그날 생명을 위해 싸웠다..... 우리는 후퇴하는 터어키군을 따라 시라아역에 들어갔다. 우리가 처음으로 본 것은 차갑고 신선한 물로 가득치 있는 돌로 만든 수조였다. 밤의 적막감속에서 물통에 물이 흘러 들어가는 물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우리의 대대는 순서를 지켜서 물을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그는 엄격히 물을 담는 우선순위를 정했다. 즉 우선적으로 부상자, 보초병, 그리고 차례차례로 물을 담았다. 마지막 사람이 물을 담기까지는 4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그들은 수천 갤런의 물이 있는 다른 쪽의 낮은 담벼락으로부터 20 feet 떨어진 곳에 서서 그들의 차례를 기다렸다.

         길버트는 “우리들 모두는 바르샤바로부터 시리아의 우물까지 행군하면서 처음으로 성경의 교훈을 배웠다고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끝냈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갈증, 의에 대한 갈증, 우리 삶에 있어서 그 분의 뜻에 대한 갈증이 그러한 것이라면 , 우리는 성령 안에서 얼마나 풍부해지게 되겠는가!”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    팔복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곳에는 진행순서가 있다. 우선적으로 세 가지 특징, 즉 심령의 가난, 죄에 대한 애통, 온유함은 사람인 참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다가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네 번째 복은 복중의 복중으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에 대한 욕망의 성취를 나타낸다. 하나님께 접근함으로서 그 결실을 맺게 되는 팔복은 이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 분의 형상을 닮게 되는 자의 변화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팔복은 긍휼과 , 청결함과 화평을 위해 일하는 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긍휼은 그 첫 번째 특징이다. 은혜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사랑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성으로 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진다.

         나는 본회퍼가 긍휼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방어와 대조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어느 정도의 권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잘못된 의미에서의 권위와 적어도 그 권위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고귀하기에 비천한 자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던가. 또는 우리가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서 하찮은 사람들과 시간을 소비할 틈이 없다고 말할 때 내세우게 되는 권위를 말한다. 그것은 교만에서 나온 죄있는 권위이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소유물이나 권력이 없는 이 사람들아, 이 땅의 나그네들이며 죄인들인, 예수님의 이 제자들은 그들 자신의 권위를 부인함으로서 그분과 함께 살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비롭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다른 이들의 가난과 겸손, 다른 이들의 죄를 떠맡는다. 그들은 억압받는 자, 병자, 비참한 자, 피해를 당한 자, 추방당한 자, 그리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모든 자들에게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망신을 당하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예를 희생할 것이며 자발적으로 그의 수치를 떠맡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당하게 될 모욕을 상관치 않고 죄인들과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한 약속은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미 그것을 발견하였으며, 그로 인해 복을 받았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서구 문화에 있어서 적어도 청결이 말로서나마 높이 평가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가 않다. 오늘날 청결하게 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청교도적이며” 또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처녀성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정직함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해방된” 도덕성으로 인해 행복해졌는가? 그렇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불안과 슬픔, 그리고 좌절감은 그것이 거짓임을 드러내준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으로 이르는 길은 청결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죄는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 57:20-21

하나님께서는 청결함을 추구하는 자에게 평화를 주셨다. 이 복의 약속은 마지막 날에 그들이 그분을 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청결함을 추구하면서 평화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고 사람들 간의 화평을 촉진시키는 일을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들 스스로 평화를 맛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화의 축복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과 투쟁하여 왔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투쟁하여 왔기 때문에 또한 그들은 다른 이들과 그리고 자기 자신들과 투쟁하여 왔던 것이다. 수직적 관계의 파기는 수평적 유대관계를 파기시킨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화를 가졌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과 화해하였다. 바울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엡 2:13-14). 그들은 하나님과 진정하면서도 영원한 화평을 발견하고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화평을 이루고 유지시키는 일을 추구하게 되었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교제하지 않는 곳에서 교제를 유지시키는 자이다. 그들은 자기주장을 모두 버리고 미움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조용히 참아낸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선으로서 악을 극복하며, 전쟁과 증오의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 팔 복중 마지막 지복은 핍박받는 중의 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상세히 말하신 복이다.

마 5:11-12

         팔복의 내용 중에서 이 내용만큼 우리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할 내용은 없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축복하신 다른 고통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핍박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들이 흔히 그렇듯 그들의 열심 있는 태도에 대한 핍박이 아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그들의 이웃에게 입증하기 위해 그들을 귀잖게 만들고 또한 그들을 경멸한다고 해서 받는 핍박이 아니다. 이것은 심지어 어떤 중요한 대의로 인해 받는 핍박도 아니다.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핍박은 그들이 따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는 믿는 자”들에 대한 핍박이다. 10절에서는 그것을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부르며, 11절에서는 “나를 위한(예수님을 위한)” 핍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분과 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핍박이며, 우리가 행복을 발견하는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에서 그분을 위하여 고통 받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사람이 핍박받음으로 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행복은, 우리 전에 있던 “성도들이나 사도들, 선지자들과 순교자들”도 그랬듯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가운데 촉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운데 증진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 15:19

3. 그리스도를 닮는 일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넓은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팔복에서 권유하는 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을 장소는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쉬운 세상이 아니다. 세상은 거칠고, 험난하며, 사악하고 탐욕스럽다. 그러니 심령이 가난하고 죄에 대해 애통해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는 자가 있을 장소는 어디인가? 오로지 한 군데가 있다. 그곳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상은 예수님에게도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그들을 쫒아 내버려라. 그들은 이곳에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도망가 버리면, 우리는 가장 소중한 보석이며 내세에 대한 지식을 소유한 그 분을 못 박는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 그 죄를 없애고 하나님의 충만하신 축복의 길을 열어주는 일은 단지 십자가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세상의 외침을 듣게 된다. 세상은 “그를 못 박으라.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는 그분께서 축복의 말씀을 하실 때, 우리 자신이 복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하고 말씀하신다.

         십자가에서는 모든 눈물이 다 거두어진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모든 행복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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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6. 제 4 부 제자가 되었을 때에 받는 상들 : 제 14 장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임 바울 2014/08/10 284 1742
15  15. 제 4 부 제자가 되었을 때에 받는 상들 : 제 13 장 핍박과 함께 오는 현재의 행복    임 바울 2014/07/28 330 2181
 14. 제 4 부 제자가 되었을 때에 받는 상들 : 제 12 장 행복한 그리스도인    임 바울 2014/07/21 303 1965
13  13. 제 3 부 : 제 11 장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    임 바울 2014/07/20 328 1868
12  12. 제 3 부 : 제 10 장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자    임 바울 2014/07/08 301 1692
11  11. 제 3 부 제 9 장 비용을 먼저 계산함    임 바울 2014/07/02 294 1394
10  10. 제 2 부 제자가 가는 길 : 제 8 장 따르지 않는 사람도 제자가 될 수 있는가?    임 바울 2014/06/23 278 1429
9  9. 제 2 부 제자가 가는 길 : 제 7 장 빈 손의 길    임 바울 2014/06/18 263 1681
8  8. 제 2 부 제자가 가는 길 : 제 6 장 겸손의 길    임 바울 2014/06/12 265 1701
7  7. 제 2 부 제자가 가는 길 : 제 5 장 섬김의 길    임 바울 2014/06/05 260 1493
6  6. 제 2 부 제자가 가는 길 :제 4 장 복종의 길    임 바울 2014/05/26 275 1600
5  5. 제 1 부 제자의 의미 :제 3 장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    임 바울 2014/05/16 311 1973
4  4. 제 1 부 제자의 의미 : 2 장 그리스도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임 바울 2014/05/05 277 1849
3  3 . 제 1 부 제자의 의미 : 제 1 장 제자로 부르셨다.    임 바울 2014/04/30 224 1730
2  2. 서론    임 바울 2014/04/30 271 1122
1  1. 강의 계획표    임 바울 2014/04/30 26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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