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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 3 부 : 제 11 장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
임 바울  2014-07-20 20:13:37, 조회 : 1,869, 추천 : 328

                                    11.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



눅 9:62

         그리스도가 오시기 800년 전에, 선지자 엘리야는 그의 동료이며 후계자로서 엘리사의 협력을 구하였다. 그는 엘리사가 쟁기질을 하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외투를 그에게 던졌다. 엘리사는 이것이 엘리야가 그를 섬김의 길로 부르는 방식임을 즉시로 이해하고는 자기 일을 버려두고 엘리야에게로 가서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라고 말하였다.

         엘리야는 무관심한 체하며,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라고 말하였다.

         엘리사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밭으로 돌아가 그의 소를 죽이고, 그의 쟁기를 불살라 그것을 고기를 삶아 그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일어나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을 들었다(왕상 19:19-21).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부모에게 작별 인사하는 경우를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를 인용한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눅 9장의 예수님의 말씀과 대조시킨다.

눅 9:62

이 대조는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가서 가족들과 함께 있기를 원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눅 9장에서 제자가 되는 일에 따르는 우선적인 문제들은 실제로 그들이 싸우는 것을 지체하거나 핑계를 대는 것이다. 왕상 19장에서 엘리사의 행동은 그가 한 결심이 다시 변역될 수 없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엘리사의 경우(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는 되돌아가지 않는 일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왕국의 섬김에 있어 적당한 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는 왕국의 시민조차 될 수 없는 자이다. 그에게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왕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1. 머뭇거리는 세 사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시작은 하지만 뒤를 돌아보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자들의 핑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반응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을 방해하는 이런 변명들은 그분을 따르는 일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그 변명들은 세 가지 경우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씨를 죽이고 영적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라고 말씀하셨다.

막 4:19

         ⓐ 신체적 고난과 불편  :  눅 9장에 나오는 첫 번째 사람은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랐다.

눅 9:57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감동을 받으나 그를 따르는 자들은 결코 없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또 그가 어떤 분인가를 알고 그의 인격과 메시지에 감동을 받고는 그를 따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진지하고 그리스도께 감동을 받았다고 해도, 그는 자신이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받을 신체적 고난과 불편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셨다.

눅 9:58

그 이야기는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분을 따르는 일로부터 되돌아가려는 자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그가 더 이상 제자의 길을 걷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제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불편에 대한 댓가를 치르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많은 자들과 같다. 만일 설교자가 와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약속을 하면, 그들은 기꺼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고난과 신체적 박탈에 대해 말하면 그들의 열정은 시들어지고 만다. 이런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예수님께 매혹된 자들은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Ryle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 단지 신앙적인 특권을 소유함은 아무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영적인 유익함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며 풍부한 기회와 은혜의 수단을 가지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또한 당신은 가장 훌륭한 설교를 즐길 수도 있으며 빛과 지식과, 거룩함과 훌륭한 친구들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은 아직도 회심하지 않고 있으며 마침내는 영원히 잃어버려질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특권이 진정한 특권은 아니며, 또한 영적인 유익함이 진정한 유익함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유익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롬 9:4-5

그러나 바울이 말했던 자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 때문에 마음에 근심과 고통이 있었다고 하였다. 유익함은 진정한 제자가 되도록 이끌 수는 있었으나 그들은 진정한 제자가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개인적인 노력이 있어야 했다.

         ⓑ 일시적이나 더욱 절박한 의무 : 눅 9장에 나오는 두 번째 사람은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59절). 그러나 그는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라고(60절) 대답을 하였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예수님의 가혹함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예수님의 부르심은 절대적이고 엄중하다. 그러나 그 상황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우리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조차 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의 관례를 비추어보면, 그의 경우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만일 그 사람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그는 자기 집에서 슬퍼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기 때문에 단지 그의 아버지가 늙으셨다고 한 것이며,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 분을 따르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려면 아직은 몇 년이 더 남아있기에 그 동안 집에 머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즉시 자신을 따르고 그 부르심에 그가 복종하는 것을 연기하지 말 것을 요구하셨다.

         첫 번째 사람의 경우에서 우리는 댓가를 치르는 일에 실패한 사람의 본보기를 보았으며, 두 번째 사람의 경우에서는 부모와 남편, 아내, 자식들, 형제 자매들을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미워하지 않는 자”의 본보기를 보았다. 또한 성경본문에서는 특별히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방식대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음으로서 영원히 멸망 받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미루는 버릇은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커다란 해를 끼치는 것이다. 미루는 버릇을 지닌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에 복종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다른 의무들로 해서 예수님에 대한 복종을 생각 밖으로 밀쳐내게 된다. 그는 작은 일부터 그 일을 영원히 미루려고 하지는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시간의 연기는 하루의 연기가 된다. 그리고 그 하루는 일주일, 또 일주일은 한 달을, 한 달은 일 년을 가져야 마침내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진정한 응답 없이 일생이 지나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Charles Spurgeon 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 당신은 현재 단지 젊은 연습공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신의 생이 다 끝나갈 때 당신은 영혼에 유익이 되는 일에 좀 더 일찍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혹은 당신은 현재 사업을 막 시작하려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사업에서 큰돈을 벌었을 때, 당신은 그때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혹은 당신은 작은 가게의 주인으로서 가족들을 부양하고 열심히 일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미루기 위한 당신의 핑계이다. 당신은 당신이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시골에 별장을 짓고 은퇴하여 또한 자식들을 다 성장시킨 후에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과거의 일들을 후회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일들은 일종의 자기 망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런 일로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당신은 아마도 오늘, 다음날도 역시 똑같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 없이는 당신은 새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며, 마지막 날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 없이 소망 없이 당신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이방인이 되어 버릴 것이다. 미루는 버릇은 사단의 가장 큰 그물이다. 그러기에 방심한 영혼은 그 그물에 쉽게 걸려들게 된다.”


        ⓒ 자신의 방식에 따르는 결정 : 세 번째 사람(첫 번째 사람과 마찬가지로)도 역시 자진해서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방식대로 하기보다는 자신의 방식대로 하기를 원했다. 그는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61)라고 발하였다. 언뜻 보기에 이 요청은 엘리야에게 요청하는 엘리사의 경우와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사람의 실수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에 대해 명령을 하시는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제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가 예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기는 했으나 사실상 그 분의 능력 안에서 그분을 따르지는 않았다.

         이 점이 제자가 되려는 자들을 방해하고 결국은 그들을 파괴시키는 점이다. 노어 봄내 나는 목사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떤  이가 서로간의 책무의 부족에 관하여 말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의하면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대로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믿으며, 예수님의 주되심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그분에게 언제 어떻게 복종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자신의 방식을 원한다. 만일 이것이 편안한 것이라면 그들은 복종을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복종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는 말이 정확할 것이라고 믿는다.

         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고전 ‘제자가 되기 위하 댓가’라는 책속에서 눅 9:57-62절을 세심하게 분석하였다. 그는 이 세 사람의 핑계를 자세히 검토하였다. 그는 세 번째 사람에 대해 특별히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세 번째 남자의 핑계는 두 가지 면에서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첫째로, 과거의 일에 대한 생각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였다. 엘리사가 그의 밭으로 돌아가 쟁기를 불사르고 소를 죽인 것인 엘리사의 부름이 다시는 반복할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의 경우는 그와 반대이다. 이 사람은 이 전의 관계들과 생활방식에 계속 집착하였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 부르심에 따르는 첫 단계는 제자들이 그들의 이전의 존재 양식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따르라는 부르심은 즉시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낸다. 옛날의 상황 속에 계속 머문다면, 제자가 디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레위는 자신의 옛 관습을 버려야 했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물을 버려야 했다. 따르는 부르심 속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 있으며, 그것은 즉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육신된 아들과 함께 가는 것이라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두 번째 실패는 복종의 결핍이다. 복종은 제자가 되는 일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다. 따라서 복종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제자가 되려는 많은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원할 때 복종하고 원하지 않을 때는 복종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제자의 도리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또한 예수님을 구세주로서 믿는 믿음도 아니다.

         본회퍼는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이 대강 처리해 버린다면, 그는 은혜의 말씀을 듣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당신이 당신의 삶속에서 그 분을 멀리하면서  어떻게 그 분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소망할 수 있는가?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복종하는 자만이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만일 당신이 복종할 준비를 하고 있다면, 그때에 당신은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믿음 안에서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불복종은 세상에 속한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인해 생겨난다. 만일 우리가 뒤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에 적당한 자들이 되지 못한다. 뒤를 돌아다보는 자들은 세상의 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그분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2. 롯의 아내

예수님께서 이 세 사람에 대해서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물론 그 말씀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계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경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여기서 눅 9장의 그 분의 말씀을 우리가 인정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경고의 말씀을 살펴보겠다. 이 경고는 눅 17장에서 발견하는데 그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필요한 때에 준비하지 않는 위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2)고 말씀하셨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조차인 롯의 아내였던 이 여인은, 제자됨에 있어서 길을 재촉하지 않고 오히려 뒤를 돌아다 봄으로서 멸망당한 성경 속의 고전적인 본보기이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과 소돔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천사들의 방문을 받아서는 곧 멸망당하게 될 소돔을 도망하도록 (그녀의 남편을 따라서) 경고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천사들의 강요를 받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산으로 가는 도중에 그녀는 천사들의 엄격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상기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녀의 이점, 그녀의 불복종, 그리고 그녀의 무서운 결말을 상기하도록 하라.

         우리는 롯의 아내가 영적인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않고서는 이 경고의 위력을 결코 평가하지 못할 것이다. 우선 첫째로, 그녀에게는 구원받은 자인 그녀이 남편이 있었다. 사실상 롯은 스스로 제자가 되지는 ㅇ낳았다. 그는 아브라함이 있었던 산지보다는 쾌락적인 평원의 도시를 선택하였다. 그래서 그 댓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벧전 2:7)이라고 불렀다. 롯의 아내는 구원받은 남편으로 인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멸망당했다. 롯의 아내는 또한 아브라함과 경건한 우정을 유지시킴으로서 그에 따른 이점을 가졌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녀에게는 친숙한 것이었다. 참 하나님에 대한 그의 지식은 그이 집안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며 롯과 그의 아내도 여러 해 동안 그의 지식에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참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예배에 참석해 왔으며, 또한 소돔이 다른 왕들에게 정복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을 포함한 그녀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구원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롯의 아내는 천사들이 소돔에 와서 그녀의 가족들에게 경고하였을 때에도, 그 천사들을 맞아들이는 이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천사들이 탈출을 도와준 자들 속에 속해 있었다.

         그때 당시 그녀만큼 이런 영적 이점을 가진 자는 한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의 아내는 가는 도중에 뒤를 돌아보다가 심판을 받게 되었다.

         롯의 아내는 무슨 잘못을 했는가? 그것은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다. 첫째로, 그녀는 천사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았다. 천사들이 그 도시를 파멸할 것이라는 말을 전하러 소돔에 왔을 때, 그리고 롯과 그의 가족이 피신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가족들은 마지못해 떠났다. 천사들은 그들이 떠날 때 까지는 그 도시를 파멸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다. 롯은 그의 사위들에게도 말했다.

창 19:14,17

성경에서 이렇게 긴급하고 명백한 명령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체하고 일부러 꾸물거렸다. 그녀는 천사들의 명령을 무시함으로서 복종하지 않았고 결국 뒤를 돌아다 보았다.

         두 번째로 롯의 아내는 믿지 않았다. 천사들은 그 가족들이 그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치지 않거나 소돔을 멀리하지 않으면, 그 도시에 사는 자들과 함께 잃어버린바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대는 것처럼 그녀도 이유를 내세웠음이 분명하다. “내가 그 분을 이해한 그대로라면, 하나님께서 그런 말을 하셨을 리 없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같은 큰 도시를 정말로 파괴하지 않으실 것이다. 설사 그 분이 그렇게 하신다 하더라도 그 분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는 나를 파멸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일을 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려고 하시는 일을 말씀하셨다. 롯의 아내는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 받았다.

         세 번째로, 롯의 아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보다도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쾌락을 좇았다. 만일 천사들이 방문하기 전에 여러분이 롯의 아내를 만나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녀는 자신이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우월한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이 소돔에 사는 다른 자들과 같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예배하였으며 그 분을 섬기기를 원하였다. 그녀는 소돔에서 “훌륭한 사람들”중의 하나라고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그녀 태도는 하나님의 심판 때 결국은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Ryle 감독은 이 성경본문에 관해서 “기억해야 할 한 여인”이라는 제목의 훌륭한 설교집을 출판했다. 그 속에서 특별히 세속의 위험에 대해 강조하였다. 그는 수차에 걸쳐 시작은 잘 하였으나 결국은 되돌아선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선 이유는 성경이 진술하지 않거나 예수님이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게 됨으로서 세상을 만드신 주인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다.

         신앙을 가진 가족의 자녀들과 결혼한 부부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일은 공산주의자들이나 심지어 목사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그들은 처음에 잘 시작하나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은 갈수록 식어지고 마침내 그들은 멀어져가는 것이다.

         Ryle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당신이 자칫 신앙에서 멀어져서 세상과 비밀스럽게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하도록 하라.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은둔자나 수사, 수녀가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나는 모든 이들이 부르심을 받는 삶을 살면서 그의 진정한 의무를 행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신앙을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어떤 타협도 해서는 안되는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당신은 마치 그리스도께 당신 마음의 적은 부분을 드리고 가능한 이 세상의 일들에 당신 마음의 많은 부분을 할해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당신이 술책을 지나치게 부리다 실패하지 않도록, 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하나님의 왕국을 첫 번째로 구하고 그 다음에 당신에게 모든 것이 더해질 것이라는 것을 믿으라.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당신의 유익함을 위해서,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당신 영혼을 위해서, 룻의 아내가 범한 죄를 깨닫고 주의하도록 하라. 우리의 주 예수님께서는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3. 앞으로 나아가자.

         이 글의 대부분의 내용은 소극적인 것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불충분하게 시작하는 자들을 경고하는 내용을 다루었다. 우리에게는 분명 인내가 필요하다.

마 10:22

그러나 나는 거기서 끝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구원얻은 자의 특성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왕국을 빼앗을 때까지 “침노하는 자”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면서 마치려고 한다.

마 11:12

         칼빈주의자들은 진정으로 경건한 삶과 복음전도를 위한 모든 촉진제를 제거해버린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정하셨다면, 나에게는 어떠한 의무도 없으며 다른 이들도 어떤 일을 할 의무가 없음은 마찬가지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원신다면, 그 일을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만일 그 분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 그 일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 내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단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사역하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나는 내 자신을 즐길 것이며, 그냥 있을 뿐이다. 이 논증은 옳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의 결과를 명하고 계신다고 생각함으로서 충분한 이해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그 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때에 그 분은 환경의 피해자가 될 것이며 우리들을 맡으실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다양한 환경속에서 여러 수단들을 통하여 모든 일을 명령하고 계신다. 이들 수단 중 한 가지는 하나님의 중생의 사역으로 변화된 생명을 가진 자들의 열심 있는 활동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교육을 받은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 3:3,7

만일 그가 거듭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이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중생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한번 중생의 사역이 이루어지면, 각 개인은 더 이상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보는 자이며, 온 힘을 다하여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는 자이다.

         일을 시작하여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의에 대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가진 자들이며 그 갈증이 만족될 때까지 뒤돌아보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영적인 것들을 열망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실증내지 않는 자들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루 종일 그들의 중요한 기쁨이 된다.

         그들은 잃어버린 양이었으나 이제는 그들의 목자의 목소리를 듣는 자들이며, 또한 그들을 위로할 자는  그 분 외에는 없으시다.

         그들은 눈이 멀었으나 이제 볼 수 있게 된 자들이다. 그들의 눈은 앞으로 올 영광의 빛으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천상의 도시를 바라보는 순례자이다. 그들은 등불을 기름에 가득 채워놓고 기다리는 처녀이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이 준 달란트를 많은 이익을 낸 종들이다. 그들은 달란트를 묻어두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투자한 자들이다. 그들은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 목마른 자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병든 자를 돌보아주고, 감옥에 갇힌 자를 위로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열매를 맺는 가지이다. 마르지 않는 샘이다. 경주에서 지치지 않는 달리기 선수이다. 그들은 주님이 오실 때에 깨어있는 종들이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경주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그것은 장거리 경주이다. 그것은 우리의 회심으로 시작해서 우리의 임종 때까지 혹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장거리 경주이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직면하는 도전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에 직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우리가 결코 멸망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분의 능력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그 분의 손으로부터 낚아채 갈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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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6. 제 4 부 제자가 되었을 때에 받는 상들 : 제 14 장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임 바울 2014/08/10 284 1744
15  15. 제 4 부 제자가 되었을 때에 받는 상들 : 제 13 장 핍박과 함께 오는 현재의 행복    임 바울 2014/07/28 330 2181
14  14. 제 4 부 제자가 되었을 때에 받는 상들 : 제 12 장 행복한 그리스도인    임 바울 2014/07/21 303 1968
 13. 제 3 부 : 제 11 장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    임 바울 2014/07/20 328 1869
12  12. 제 3 부 : 제 10 장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자    임 바울 2014/07/08 301 1694
11  11. 제 3 부 제 9 장 비용을 먼저 계산함    임 바울 2014/07/02 294 1397
10  10. 제 2 부 제자가 가는 길 : 제 8 장 따르지 않는 사람도 제자가 될 수 있는가?    임 바울 2014/06/23 278 1429
9  9. 제 2 부 제자가 가는 길 : 제 7 장 빈 손의 길    임 바울 2014/06/18 263 1683
8  8. 제 2 부 제자가 가는 길 : 제 6 장 겸손의 길    임 바울 2014/06/12 265 1702
7  7. 제 2 부 제자가 가는 길 : 제 5 장 섬김의 길    임 바울 2014/06/05 260 1495
6  6. 제 2 부 제자가 가는 길 :제 4 장 복종의 길    임 바울 2014/05/26 276 1602
5  5. 제 1 부 제자의 의미 :제 3 장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    임 바울 2014/05/16 311 1973
4  4. 제 1 부 제자의 의미 : 2 장 그리스도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임 바울 2014/05/05 277 1849
3  3 . 제 1 부 제자의 의미 : 제 1 장 제자로 부르셨다.    임 바울 2014/04/30 224 1732
2  2. 서론    임 바울 2014/04/30 271 1123
1  1. 강의 계획표    임 바울 2014/04/30 26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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