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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강 예배(입술인가 마음인가?)
이드보라  2016-07-09 17:10:07, 조회 : 938, 추천 : 172

제 6 강
예배
입술인가 마음인가?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높고 고상한 활동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할 때, 어떤 종류의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실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가 되어야 할까?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고 미워하며 멸시하며 견디지 못하시는 예배도 있기 때문이다.

1. 두 가지 기본 가정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변론하실 때 사 29:13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이 구절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예언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계시된 원칙이기도 하다. 이 구절에는 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두 가지 가정이 깔려있다. 이 가정은 예배에 대한 오늘날의 토론에서도 동일한 바탕이 되어야 한다.

첫째는 예배가 ‘합당한’ 활동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이 백성이...나를 존경하되’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예배(Worship)이라는 말은 ‘가치있는 신분’이라는 worthship의 약어로서,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실 가치가 있으신 분이며, 그의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인으로 나아와 그를 구주로 높이며, 자녀들로 나아와 우리의 아버지로 공경해야 하며 종으로 나아와 우리의 주를 높인다. 예배는 소일거리나 취미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존경하는 가장 의무적이고 합당한 일이다.

두 번째는 예배가 ‘공적인’ 활동이라는 점이다. ‘이 백성이...나를 존경하되’하셨을 때 이는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개인적으로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도하는 활동도 있지만,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공적인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예배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이에 대해 변론하실 때, 그들의 예배의 습관이나 예배가 공적이지 않아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배의 외적인 형식주의 즉 그들이 가진 위선과 외식을 지적하셨다. 예배는 하나님을 존경하는 공적인 활동으로서 아무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참된 예배는 어떠한 것이며 우리는 어떠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일까?


2. 합리적(이성적 예배)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인정하시는 마음의 예배란 ‘합리적인 예배’이다.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는 감정이라는 요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 사고에서 마음은 사람의 인격 전체를 말하며 종종 감정과 정서보다 지적인 면, 이성적인 면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다. 주님께서 제자도에 대해서 설교하실 때 즐겨 사용하셨던 잠 23:26 의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라는 말씀은 주의를 집중하며 이성적으로 나에게 경청하라는 의미이다. 구약의 지혜서에서 RSV 성경은 때로 마음을 이성으로 번역하였다. 신약 성경에서도 마음은 무엇보다 이성을 말한다. 자주 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는 것(행 16:14)은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이해력을 열어 복음을 파악하고 받아들이게 하셨다는 뜻이다.


물론 이성은 마음의 구성 요소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마음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할 때, 마음의 구성 요소으 하나인 이성적인 예배를 함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의 예배에서 기본이 되는 원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아덴에서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단을 쌓고 예배드리는 데 대하여 모순을 깨달았다.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2)’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다. 700년이 넘도록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각기 독립된 종교를 발전시켜 왔다. 사마리아인의 일부는 이스라일인이요, 일부는 주전 8세기에 그곳에 정착했던 메소포타미아 이방인들에게서 내려온 혼혈족이었다(왕하 17:24 참고). 영적인 면으로 볼 때 그들은 서로 다른 성경을 의존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을 받아들였으면서도 다른 선지자들의 계시는 거부하였다. 선지서가 없이 율법서만 가진 사마리아인들의 하나님의 지식은 더욱 불완전하였다. 주님은 ‘너희(사마리아인)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유대인)은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약속된 메시야)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 4:22-23)’고 말씀하셨다. 신령과 진정은 이 구절에서 ‘아는 것’이라는 단어 즉 진리로 예배함을 뜻한다.


사마리아인의 예배는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함으로 잘못된 예배였고, 유대인들의 예배는 그 의식주의 때문에 훼손된 예배였다. 그들의 예배는 이성의 지적인 경외함이 없는 입술의 예배(무의미함)였다. 이사야 시대의 백성들도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갔으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었다. 그들을 가리켜 소경과 술취한 자에 비유하였다.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시고 기록하게 하신 선지자의 가르침에 대하여 귀를 막으면서 어찌 사마리아인들이 마음(이성)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겠는가? 바리새인들은 성부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거를 거부하면서 어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겠는가?


대중 성도들의 이성적인 마음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종교개혁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된 성경 말씀으로 이루어진 기도문을 전해주었다. 공중예배에 나온 모든 자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설교를 듣고, 시와 찬미를 하고 기도에 담긴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회개를 촉구해주고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구원의 은혜를 알 수 있는 길은 성경을 통해서이다. 이 합리적인 활동이 없는 에배는 참 예배가 될 수 없다.


강해 설교와 같은 참된 설교는 공중예배에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예배는 경건한 것이다. 우리를 경건하게 해 주는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례 자체는 예배가 아니고 설교 자체는 예배가 아니지만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이 내려주신 귀한 은혜의 수단이기에, 설교를 들음과 성례를 보고 참여함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공예배를 드릴 때, 정신을 집중하여 이성적인 예배를 드리려고 애써야 한다. 이성을 온전히 쏟지 않는 형태의 정서적이고 심미적이고 환상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늘에 있는 예배는 온전하지만, 이 땅에서의 예배는 그렇지 않다. 땅에서는 거울로 보듯 희미하지만, 이 땅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의 예배는 이성이 함께 해야 한다.


3. 영적 예배


마음의 예배는 합리적인 동시에 신령하다. 우리의 이성이 확실한 성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면 우리의 영도 마찬가지이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지독한 적개심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예배 드리는 장소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말할 때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0-24)’ 고 하셨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일치하게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에 우리의 예배도 그리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말씀은 구약의 3/4를 거부한 사마리아인들과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예배를 드려야 하고 외식을 일삼고 이를 자랑하였던 바리새인들과는 반대로 영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당이 필요없고 예배의 의식과 형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늘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배할 수 있도록 장소를 허락하셨다. 눈에 보이는 지성소의 시은소에 임재하여 주셨고, 성막과 성전 등 한 군데의 장소를 지정하여 주셨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장소와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찬미요, 영적인 경배이다. 눈에 보이는 장소와 형식과 함께 마음의 찬미와 영적인 경배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언약하시고 그 약속을 기억하신다. 이 약속을 받은 우리들의 예배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반드시 이렇게 하라는 법과 교리는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미천한 죄인임이라는 이성적인 깨달음 때문에 우리의 영이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를 경외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몸으로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마음(영)이 그렇지 않다면 이는 바리새인의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좋아하시는 예배가 ‘상한 심령 곧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시 51:16-17)이라고 말씀한다. 오늘날의 예배는 너무 화려하고 찬란하며 장중한 음악에만 치중하고 있다. 예배에 수반되는 외적인 것들이 각기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외적인 표현은 자유로이 인정할 수 있으나 다만 강조해야 할 점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입술의 표현보다 마음이라는 사실이다.


영적인 예배라고 할 때 가장 큰 의미로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말해야겠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예배)하며...(빌 3:3)’라고 말씀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며 하나님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게 하신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내적 예배를 드려야 한다.


4. 도덕적 예배


진정한 마음의 예배는 합리적이고 영적인 동시에 도덕적이다. 이성과 영에 덧붙여 양심도 참여한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그가 남편이 없다고 하였을 때 주님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6-18)’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를 드리기 전에 죄가 드러나고 죄를 자복하고 용서함을 받아야 야 함을 알리시는 것이다.


대부분의 공중 예배에는 자복하고 회개하는 순서가 있다. 성찬이 집행되기 전에도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주께 의지한다. 누더기 같은 죄를 걸친 채로 하늘의 궁정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법칙은 예배에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성경의 저자들은 회개가 없는 예배에 대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한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서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어다’고 말씀하시며 죄의 회개와 도덕이 결여된 예배를 미워하였음을 지적하셨다. ‘너희가 손을 펼 때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잠 15:8, 삼상 15:22, 암 5:21, 사 1:11-17).


이 도덕에 대한 강조, 회개의 촉구는 참으로 필요하다. 오늘날 경건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도덕이 없는 종교로 오염되었다. 예배자의 양심이 사라지고 죄사함의 가치를 땅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성전과 회당에 참석하고 성경을 상고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구제하면서도 마음과 죄는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책망하셨다(막 12:40).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인들 중에서도 공중 예배에 참석하면서 뒤돌아서 부정직한 상거래를 하고 부도덕한 관계를 끊지 않고, 피해를 입힌 자에 대해 원한을 품으며 복수를 꾀하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도덕적인 순종이 없는 거짓 예배를 거부해야 한다. 빛이신 하나님과 같이 어두움에서 멀어지고 거짓과 비진리에서 구별되이 행해야 할 것이다. 예배는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 이상의 원리가 존재한다. 그것들이 연결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입술의 예배만 될 뿐이다. 우리는 집중된 가운데에서 우리의 모든 생명을 바치는 예배를 드려야 하며, 주일 한 시간에 드리는 공적 예배에 그 주간의 헌신이 집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찬미의 제사 즉 우리의 영혼과 몸의 합리적이고 영적이며 도덕적인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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