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Henderson Christian Seminary in New York

변론자 그리스도

Home About Us Academic Program Admissions News &
Event
Gallery Contact Us
LOGIN

 



제 12-13 강 도덕(외면적인가 내면적인가?)
이드보라  2016-06-27 12:11:55, 조회 : 1,024, 추천 : 153

제 5 강

도덕 (외면적인가 내면적인가?)


지난 주까지 종교, 권위, 성경, 구원에 대한 변론을 다루어 보았다.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반대로 종교는 초자연적인 것이며, 권위는 전통이 아니라 성경에 있으며, 성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서 오는 것임을 밝히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이제 다섯 번째 변론의 주제인 도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논리상 이 주제는 나중에 다루어진다.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에 포함된 ‘칭의’ 이후에 ‘성화’ 곧 거룩한 삶에 대한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생활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성취하는지, 어떤 행동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무엇이 우리를 성결하게 혹은 성결하지 않게 하는지 알아보자.


1. 옛 도덕과 새 도덕


오늘날에도 논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옛 도덕’과 ‘새 도덕’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과 벌이신 논쟁이 오늘날의 토론에 어떠한 실마리와 해답을 주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 옛 도덕과 새 도덕의 정의

‘옛 도덕’은 대체로 ‘규범적’이라 하고 ‘새 도덕’은 ‘상황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새로운(혹은 상황적인) 도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큰 이유로 규범적인 옛 도덕을 거부한다. 그들의 말을 따라보면, 첫 번째로 옛 도덕은 권위주의적이라고 한다. 하나님이라는 외부 권위에 의해 강요되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한편 상황 윤리는 권위의 명령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이성의 명령이기 때문에 이를 지지한다. 두 번째로 옛 도덕은 절대적이기에 거부한다. 율법은 융통성 없고 복잡하다는 생각이다. 한편 새 도덕은 사랑이라는 큰 이름 아래 지도하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이를 지지하고 있다.


새 도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바울이 그들의 주장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율법을 타파하였으며 특히 안식일에 대한 율법에 대하여 그리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글을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 속에서 ‘율법과 사랑 간의 대조’는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과 사랑간의 반대개념과 대조는 그릇되었고,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고 있다. 주님이 거부하신 것은 율법에 대한 서기관들의 잘못된 해석이었지, 율법 그 자체는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에 순종하러 오셨으며,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러 왔다고 말슴하고 있다.


2. 바리새인의 집념


‘새 도덕론자’들이 놓치고 있는 가장 큰 것은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그르게 사용하여 그릇된 구원의 길에 빠진다던지, 단순한 외형적 법전에 빠진다던지, 또는 둘 다를 가져오게 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도덕에 반대하신 것은 율법의 권위주의, 또는 율법의 절대성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아니라 그들의 외식이었다.


우리는 제 2장에서 이미 성경과 전통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와 그의 변론을 배웠다. 막 7:1-23을 보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까다로웠던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마가는 자세히 설명한다. 시장에서 돌아와서 씻지 않고 먹는 것을 본 그들은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느냐?(5절)’고 질문한다. 이 질문 속에는 두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통을 따르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정결의식에 대한 특별전통을 어째서 제자들이 준수하지 않는가?’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모두 답변하신다. 첫째는 전통의 위치에 관해서, 둘째는 부정의 성격과 그에 대한 정결의식의 성격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먼저 6~13절에서는 2장 강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통을 성경에 종속시키셨다. 그리고 14~23절에서는 부정과 그로 인해 문제가 되는 정결법은 ‘내적이요 도덕적인 것’이며, ‘외적이요 의식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다.


마가를 비롯한 복음서의 저자들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자주 묘사한다. 바리새인들이라는 말은 ‘구별된 자들’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헬라문화를 철저하게 배척하였다. 그들은 물질과 정신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부정한 것이 상호간에 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몸이 불결한 나쁜 사람을 만지면 다른 사람의 영혼에도 부정을 가져온다고 믿는 그 원리는 복잡하고 다양한 원리들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의식적인 정결식 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손 씻는 일이었다. 손 씻기를 가볍게 보는 자는 땅에서 멸망할 것이라는 전통이 있을 정도로 엄격하게 다루었다.


그런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던 행동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14~23절에서 그들이 질문 한 데 대한 답변을 주셨다. 그의 변론은 무리들에게 부정케 하는 근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심으로 시작하여서 제자들에게는 이 근원적인 것들을 더욱 상세히 설명하여 주고 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근본원칙을 무리에게 말씀하시고 나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더욱 풀어서 설명하시기를,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을 대조하여 설명해 주셨다. ‘들어가는 것’은 음식 뿐이며(마음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말씀하셨다) 그것이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가므로 사람을 부정하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 반면에 ‘나오는 것’은 죄인데 이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를 부정하게 한다고 설명하셨다.


여기에 악한 생각들과 죄의 반복된 행위들, 그리고 죄악성을 강조하시며 이 모든 악한 것들이 다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죄의 기원과 결과, 모든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중적인 중요한 진술을 내포하고 있다. 그 기원은 마음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여 의식적인 정결에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는 손보다 마음에 더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도덕의 내면성’을 강조하셨다.


3. 중생은 필수적임


본문에서 예수님은 중생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중생의 필연성을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의 악행과 악한 말은 악한 생각 즉 마음속의 일이기 때문에 행위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에 달려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람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셨고 사람을 위해서만 그의 귀한 생명을 버리시며 사명을 수행하셨다. 인간 고유의 존엄성을 귀하게 여기셨지만 또한 인간은 동시에 타락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다. 모든 인류는 죄를 짓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때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 때문에 선을 행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인간의 전적인 타락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람의 타락’은 어떤 원시 족속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갖가지로 개화되고 세련되고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자들이었으며 우리 모두가 해당된다.


우리의 악한 것은 우리의 환경에 기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직 우리 마음의 내적 부패에서 비롯된다. 물론 환경이나 교육이나 전례가 중요하다만, 그 모든 것은 근본적인 것은 바로 사람의 악한 마음에 있다는 말이다. 마 7:17-20절의 ‘나무와 열매의 비유’는 주님은 사람의 마음과 말과 행동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하셨고 마 12:34에서는 이 비유가 명백히 무엇을 말하는지까지 친절히 가르쳐 주셨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나타난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다. 그에게 주님은 ‘거듭남의 필연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위에서부터 나는 것’으로서, 마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과 같이 우리로 말미암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건이다. 거듭난다는 말은 성령으로 다시금 태어난다는 말이다. 중생은 심오한 내적 변화요,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심기움이다. 중생과 그로 인한 새 생활은 성령의 사역 중에서 최고봉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하나님의 중생케 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삶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하나씩 맺어간다. 거듭남의 교리와 성화의 교리는 진정 복음주의의 강조점이다.


그러나, 성화가 중생의 ‘자연적인 결과’라고 해서 ‘자동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참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도 행실이 나쁘고, 생각없이 행동하고, 죄를 범하고, 대인관계가 좋지 못하고, 결혼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서신서들에서 혀를 제어하고 열심히 일해서 생계를 이어갈 의무를 가르치고, 공평과 자비 그리고 용서와 친절함, 성적인 순결함에 대해서, 부부 사이의 의무와 부모와 자녀, 상전과 종의 의무 등을 권면할 때 이 모든 가르침의 수신 대상은 ‘중생한 자들’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의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하며(엡 6:4) 도덕을 가르쳐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에게 주신 기능은 행악자를 처벌하고 준법 시민을 보호하고 포상하여 사회의 악을 견제하고 선을 선양하도록 하셨다(롬 13:1 이하). 고로 각 사람은 환경이 어느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개인이 환경에 영향을 더욱 줄 수 있다고 할지라도, 또 각 사람이 처한 바가 환경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개인의 유전에 기인한다고 할지라도, 개인이 그의 환경에 무관심하였다는 점에는 핑계댈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발걸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나와 가정과 직장과 모든 단체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변화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모두에 뻗치지 못할 곳이 어디인가?


4. 하나님은 마음을 보심


도덕에 대한 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의 변론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막 7:21-23, 눅 16:15).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은 겉으로 나타나고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남아 숨겨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악한 것은 변함이 없다. 드러나는 교만도, 보이지 않는 교만도 주님 앞에서는 모두 추악하다. 바리새인들은 온갖 율법과 금지조항들을 계산하여 세세히 준수하였고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의롭다고 여겼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표준과 시각과 검사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높고 깊다. 주님께서는 이 율법에 대해서 완전케 하시려고 왔다고 하였다.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다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주님은 율법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동의하시고 순종하셨다. 주님의 생각과는 다르게 바리새인들은 성경보다 전통이었고, 기록된 것보다 말해진 것이었으며 마음보다는 의식이었다. 그들이 율법에 대하여 잘못 하였다고 하여서 율법의 귀한 가치가 비하되어서는 안된다. 율법을 회피하거나 함부로 취급하거나 권위를 낮추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모든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


율법의 허용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장로의 유전은 최대한 허용성을 늘였다. 율법은 남편이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을 발견할 때 이혼을 허용하였는데(신 24:1), 전통은 허용의 범위를 늘이고 늘여서 남편의 독단적인 변덕까지 포함시켰다(마 19:3). 법정에서의 보복을 허용하여 집행자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그 정도까지나 타당한 손해배상까지 형벌을 제한하였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이를 넘어서 개인적인 영역까지 허용도를 높이고, 개인의 복수를 정당화하는 데까지 허용하였다. 하나님의 법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전통은 ‘이웃’을 편협하게 해석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친구에게만 적용시켰다.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억지로 끌어다가 만들었다. 맹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제한을 용납하고 허용을 용납하였다. 살인과 간음에 대하여 언급하신 두 계명도 동일한 원칙으로 적용하셨지만, 그들은 행동에만 국한시켰다.


율법의 영역은 실제의 행동과 언어 그리고 생각과 마음의 동기까지 미치고 있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사람의 유전에 대하여 외형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의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마음과 뜻을 다하여 내적으로 부합해야 하는 것이다.


‘새 도덕’은 바리새인들의 도덕과 유사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자유롭다는 개념을 가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다. 바리새인ㄷ의 도덕은 절대론적이요 규정적인 데 반하여, 새 도덕은 상대론적이요 상황적이라는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지만, 양자 모두는 율법의 요구를 결과적으로 감소시키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오해하여 율법의 요구를 삭감하는 죄가 있었고, 새 도덕의 가르침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오직 사랑의 법만 남아있다고 하는 죄가 있다. 모든 도덕은 절대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음에도 말이다.


새 도덕자론자들은 사랑의 요구가 율법의 요구보다 더 강요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옛 도덕은 율법과 사랑을 모두 함께 충족시키려는 데 반하여, 새 도덕은 사랑 이외의 절대적인 것들을 모두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구사항이 적고, 제한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간음한 자가 자기의 행동이 사랑과 일치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 간음을 금지한 옛 법이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 확신해야 할 것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도덕에 있어서 사랑과 율법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배타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과 율법은 서로 지도하며 제한을 두어야 하며, 나침반으로서의 역할이 필요하다. 사랑은 율법을 불필요하게 하는 종결이 아니요, 사랑한다면 더욱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하였는가? 이 구절은 독립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어떤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의 진술은 율법의 범주가 완전히 폐지되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칭의나 성화를 위해서 율법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우리의 연약성이 속에 있기 때문에, 타락한 본성 때문에 자기 아들과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구원을 받음을 기억하고 이러한 맥락속에서 ‘율법에서의 해방’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에 굳게 서기를 강조한 것이다.


율법이 우리의 칭의의 근거나 성화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여서 율법이 우리 행위의 표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정 반대이다. 율법이 아닌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지라도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제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율법을 기록하시어, 칭의의 결과로서 성화의 본질로서 자리하게 하신다. 의롭다 함을 얻은 자의 의무는 바로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마음으로 되돌아가며, 바리새인적인 의와 그리스도인의 의가 다른 점으로 되돌아가며, 마지못해 하는 외형적인 준수가 아니라 생각과 뜻과 마음이 자원해서 하는 내적인 율법 순종을 강조하신 그리스도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


5. 도덕은 의식보다 우선함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행하신 도덕에 대한 변론에서 끌어낼 수 있는 세 번째는 ‘도덕과 의식상 의무의 중요성’에 대한 비교이다. 불결과 정결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개념은 ‘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도덕을 외부적인 조건으로 오해하여 몸의 정결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그 마음에서 기인함을 강조하시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의식적이고 외부적인 정결함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내적인 정결함임을 강조하셨다.


오늘날,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20세기의 바리새인들이 있다. 묵상시간과 주일예배의 말쑥함, 단순한 하루의 규칙으로 규정하는 모습, 흡연이나 음주와 치장을 삼가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모습 등이다. 우리는 도덕적인 품성과 마음의 자원에 힘쓰고, 순전히 외부의 표준에 따라하기만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6. 사람이 사물보다 중요함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열 세가지 악한 것들 중에서 마지막 두 가지 교만과 광패(어리석음)을 제외한 열 한가지는 모두 사회적 범죄, 즉 사람에 대한 죄악을 말한 것이다. 그는 십계명 중 두 번째 돌판의 다섯 계명에 대한 위반(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탐욕)등을 포함시키셨고, 악독과 속임, 흘기는 눈도 말씀하셨다. 우리의 부패한 마음은 하나님께 대하여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악함을 보여준다. 바리새인들은 외부적인 의식에 집중하느라 도덕에 대하여도 사랑에 대하여도 무관심하였다. 호 6:6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의식적인 규칙보다 자비가, 사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이 성경적인 원리를 두 가지 일에서 보여주신다. 그 첫 번째는 안식일을 범한 것이다. 그는 안식일에 사랑의 동기로 먹이셨고 고치셨다.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고 물으셨던 것을 기억하라.  두 번째로 주님이 죄인들과 상종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공격하였다. 주님은 죄인의 집에 앉아서 식사하시면서 의사와 병자의 비유를 말씀하셨고, 호 6:6을 인용, 너희는 가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였던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셨다(마 9:9-1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준수와 친교에 대해서 그들의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하여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이 그리하신 것은 사랑이 모든 덕의 으뜸이었기 때문이었고, 굶주린 자와 병든 자, 죄인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때문이었다. 고르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지각 없는 맹세의 준수보다 부모에게 마땅히 드릴 공경이 우선이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바리새인의 도덕관이 피상적이요, 외형적임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종교와 도덕을 구체화하려거나 또는 피상적인 규칙으로 축소화하려는 것은 현대판 바리새주의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죄와 도덕에 대하여 내적인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목전에서 우리를 더럽히는 죄에 맞서 싸우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음과 도덕의 정결함을 위해 애쓰며 거룩의 길을 나아가야 할 것이다.



  추천하기   목록보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2  (후기) 예수는 선생이요 주시다    이드보라 2016/08/22 157 868
11  제 16 강 포부(우리의 영광인가 하나님의 영광인가?)    이드보라 2016/08/12 163 1097
10  제 15 강 책임감(회피인가 참여인가?)    이드보라 2016/07/25 174 941
9  제 14 강 예배(입술인가 마음인가?)    이드보라 2016/07/09 172 937
 제 12-13 강 도덕(외면적인가 내면적인가?)    이드보라 2016/06/27 153 1024
7  제 9-10 강 구원(공로인가 은혜인가?)    이드보라 2016/06/13 131 777
6  제 7-8 강 성경(목적인가 수단인가?)    이드보라 2016/05/30 143 799
5  제 5-6 강 권위 (전통인가 성경인가?)    이드보라 2016/05/16 141 891
4  제 4 강 종교 (자연인가 초자연인가?)    이드보라 2016/04/29 149 917
3  제 2-3 강 서론적 소론(2)    이드보라 2016/04/29 132 621
2  제 1 강 서론적 소론(1)    이드보라 2016/04/29 143 633
1  강의안) 강의목적 및 교재소개    이드보라 2016/04/29 131 608

    목록보기 1
       

 
www.hendersonny.org // email: info@hendersonny.org

Copyright © 2018 Henderson Christian Seminary in New York
NY : 40-36/38 78th Street, Elmhurst, NY 11373
General and Admission Office of NY & NJ 718.810.3248 or 646.338.7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