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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강 포부(우리의 영광인가 하나님의 영광인가?)
이드보라  2016-08-12 13:48:35, 조회 : 1,097, 추천 : 163

제 8 장
포부
우리의 영광인가 하나님의 영광인가?


우리의 하는 모든 행동은 그 뒤에 있는 동기로 인해 작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 보다, 왜 그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들의 삶에는 어떠한 동기와 포부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생각이 우리의 행위와 삶의 방향을 지배하고 있는가?


오직 두 가지의 지배적인 포부가 존재하고, 나머지 모든 포부는 이 두 가지에 준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두가지 포부와 동기가 반대되는 개념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의 변론 속에서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일까? 이 말 자체는 헬라어에서도 영어에서도 모호하다. ‘하나님의’라는 말은 주격 소유격도 될 수 있고 목적격 소유겼도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볼 때, 이 소유격이 주격 소유격으로 쓰였다면 하나님이 사랑의 주체가 되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이 된다. 반면에 이 소유격이 목적격 소유격으로 쓰였다면 하나님은 사랑의 목적이 되어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란 뜻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도 그렇다. 주격 소유격일 때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영광 또는 찬양’을 말하고 목적격 소유격일 때에는 ‘하나님께 드릴 영광이나 찬양’을 말하게 된다. KJV이나 RSV 성경은 주격 소유격의 뜻을 취하여 요 12:43의 말씀, ‘저희는 사람의 영광(칭찬)을 하나님의 영광(칭찬)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번역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광(칭찬)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영광(칭찬)보다 더 사랑하였다는 뜻이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번역이다. 그러나 이 말이 고의적으로 애매함을 내포하고 있어서 사도 요한이 두 가지 의미를 다 내포하려고 했다고 주장할 가능성도 있다. 바리새인들이 이중적인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광을 ‘사람에게’ 바치기를 좋아했고, 또한 ‘사람에게서’ 영광(칭찬)받기를 좋아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의 주체가 되시고 동시에 목적(대상)이 되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이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 한다는 뜻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행해지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고(요 8:50, 7:18)에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와 사역에서 아버지만을 영화롭게 하셨다(요 12:28, 17:4).


종교개혁의 가장 큰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인간 중심이었지만,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권위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람의 전통을 거부하고, 기록된 말씀의 충족성과 우위성을 지지하고,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람의 공로를 1%도 거부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지하였다. 그들은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참 영광만을 높이고자 종교개혁자들은 미사를 거부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미사가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이라는 견해는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완전한 희생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이기에 가증스러운 견해였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순수하고 명백하게 교회의 권위는 ‘오직 성경’, 죄인의 구원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있어서 그들의 동기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그의 신학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였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비석도 세우지 않을만큼 무명의 사람으로,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만 속한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경건한 열망으로 개혁주의자들은 바리새주의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헛된 영광, 스스로의 영광만 구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속에까지 이러한 바리새주의는 얼마나 많이 도사리고 있는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한다. 타락한 우리의 본성은 예배와 봉사중에까지도 우리의 영광으로 마음을 빼앗기게 한다.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야 할 예배,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인 예배에서도 우리의 이기심은 잘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복음 전도는 어떠한가? 진정한 예배와 결속되어 있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되는 예배가 희생제사가 아니던가? (롬 15:16). 복음 전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써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많은 전도는 사람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교회 내에서의 봉사활동을 보자. 봉사란 섬김이요, 섬김은 비천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봉사를 자랑의 기회로 삼는 것은 사악한 일이다. 주님은 다스림과 봉사, 권세와 섬김을 구별하시고 다스림과 권세는 이교도들의 특징이지만 봉사는 그의 제자들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 10:42-45). 그러기에 기독교 사역자는 상전이 되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본받을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봉사를 따라 오는 어떠한 권위를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살전 5:12-13, 딤전 3:5, 히 13:7,17). 그러나 이것은 건전한 가르침과 언행이 일치하는데서 오는 권위이지 다른 사람의 마음과 양심의 의지까지 주장하려는 독재적인 권위가 아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타인을 자기 아래 예속시켜 주장하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마 23:8-10에서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라고 말씀한다. 땅에 있는 자가 아비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평신도와 교역자 사이에 주종적인 순종관계를 벗어버리도록 가르친다. 개혁주의 교회만이 가진 독특성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훈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보여준다. 고린도 교회 내에서 있었던 문제는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속했다며 당파를 지어 싸우던 일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속했음을 명백히 밝히며 그들의 당파싸움이 그릇되었음을 가르쳐 주었다. 오늘날에도 파벌 정신이 깃드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 당파에만 국한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는 칼빈을, 알미니우스를, 루터를 따르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 영광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의 영광보다 사랑한다 함은 또한 사람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자 함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것도 동족들에게 고향 사람들에게까지 버림받고 배척당하였지만 하나님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선언을 들으셨다. 그리고 그는 부활과 승천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막 1:11, 롬 1:4, 빌 2:9-11)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포부는 어떠하였는가?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사람의 지지였고 이러한 포부는 그들의 삶의 곳곳에 작용하였다.

첫째로 그들의 회심을 방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는 ‘산헤드린이 어떻게 생각할까?’였다.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기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 사람을 두려워하였기에 그들은 올무에 걸리고 말았다(잠 29:25).

둘째로, 그들이 증인이 되는 대신 침묵을 지키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그들 중에 에수님을 믿은 소수의 사람들은 은밀한 제자의 모습을 지녔었다. ‘관원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2-43)라는 기록은 그들이 얼마나 사람의 눈과 귀와 평판에만 집중하였는지 보여준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 주님을 증거해야 할 때에도 벙어리로 있을 때가 많다. 우리는 늘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하랴’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로, 그들의 사회적 품행이 망가져 버렸다. 그들이 가진 헛된 영광은 모든 공적인 행동에 깃들어 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와 회당에서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으며 랍비라 칭함받기를 좋아하였다. 사람들에게서 존경받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의도적으로 행하였다.

넷째로, 그들의 잘못된 포부와 동기가 그들의 종교적 행위, 경건의 모습을 타락시키고 말았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나쁜 예를 좇지 말라고 경고하신다(마 6:1-6, 16-18). 먼저 개괄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하신 후에 세 가지 예-구제, 기도, 금식을 들어 자세히 말씀하셨다. 이 세 가지는 우리도 해야 하는 일이다. 이 세 가지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진 잘못은 경건의 이유와 목적과 동기에 있었다. 경건의 실천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방법과 바리새인들의 방법을 대조하고, 그 배후에 있는 동기와 그에 따르는 보상에 대한 대조를 살펴보자.


-종교의 두 가지 형태


예수님은 먼저 두 가지 경건의 형태, 곧 겉치레적인 것과 은밀한 것을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과시에 대해서 해학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셨다. 그들이 구제할 때 나팔을 크게 불고 이목을 집중시키며 기도할 때는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했다. 금식할 때는 더럽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함으로 얼굴을 흉하게 하고, 금식 때문에 창백하게 된 것처럼 재로 문질러 우울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바리새인의 모습은 어떠한가? 주보의 헌금명단에 이름내기를 좋아하고, 금식하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경건한 생활에 대해서 명성 얻기를 좋아하는 모습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경건은 은밀한 경건이다. 주님은 여섯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였다. 기도할 때는 방해나 주위의 산만함을 피하여 하나님과 마주대하고 금식할 때는 평상시대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어야 한다. 구제할 때는 남에게 자랑하지 말고 의식하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외모와 모습이 비정상적인 것과 같지 않고 평상시대로 하되, 아무도 추측할 수 없게 하라는 것이다.

-종교의 두 가지 동기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동기는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인 과시를 주님은 ‘외식’이라 하였고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외식은 연기를 하는 것이요, 변장이다. 그런데 구제나 기도나 금식은 단순히 이런 식으로 다루어질 수 없는 것이 이것은 실재의 사람들이 실재의 행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제의 목적은 필요한 자의 절망감을 덜어주고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있고 금식은 신령한 유익을 바라고 자신을 단련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은 이런 행위가 가지는 진정한 목적보다는 자기의 허영심만 신경쓴다. 자신을 위해서 구제하고 기도하며 금식한다.


바리새적인 의의 동기가 이기적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의의 동기는 경건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고유한 특권이다. 이 모두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행한다. 아무리 은밀히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할지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은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행위 자체만 아니라 배후에 있는 생각과 동기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이고 진정한 진실됨으로 이러한 일을 행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는 것을 금지한 말씀(마 6:1)과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어 선행을 보이도록 하라고 하신 명령(마 5:16)이 모순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 아니다. 첫째로 이 두 구절은 신앙생활의 서로 다른 단면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라고 하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행위는 은밀히 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비추어서 보게 하라는 빛은 선행이다. 이는 곧 굶주린 자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자비의 행위로서 이러한 은덕을 입은 자들에게 알려질 수밖에 없다. 둘째로 이 두 구절은 잘못된 사례에 대한 말씀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서 비취게 하라는 것은 비겁의 죄를 지적한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말라 하신 것은 허영의 죄를 지적한 것이다. A.B 브루스가 말하기를 ‘우리는 감추어야 할 때 나타내고 나타내야 할 때 감추려고 한다고 지적한다. 셋째로 서로 다른 점에도 불구하고 금지와 명령 이 둘의 궁극적인 목적은 같은데, 곧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경건은 은밀해야 하며, 우리의 선행은 나타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아닌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 종교에 대한 두 가지 보상


바리새인이 상을 받았는가?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했다고 1절에 말씀하지만, 사실 그들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상인, 더도 덜도 아닌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에 관중에게 박수를 받고 칭찬을 받는 것과 같이 종교적인 연극배우가 받을 상은 이와 같다. 그러나 그 박수가 사라진 후의 다른 보상은 전혀 없다. 주님은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라고 말씀하신다(2,5,16절) 이 동사는 영수증을 주는데 쓰이는 동사이다. 테스커 교수는 이를 가리켜 ‘완불되었다’고 말한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은밀히 구제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도 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상해 주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본문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는 말씀은 은밀한 행위에 대한 드러나는 보상을 말하지 않고, 보지도 보상도 하지 않는 사람들과 보기도 하시고 보상도 하시는 하나님과의 대조를 말하고 있다.


본문의 ‘드러나게(KJV)’ 라는 말은 뭇사람의 갈채 속에서 상받는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갚으신다는 말은 즉각적이고 신령한 보상을 말한다. 경건을 진실하게 행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상은 엄청나다.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발견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주린 심령을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시고 영을 새롭게 하시며 그들에게 새 힘을 주신다.


-현대 바리새주의와 그 구제책

서로 다른 형태와 동기를 가진 바리새인적인 경건과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살펴보았다. 그릇된 바리새인의 포부와 동기는 그 자신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경건생활도 망치고 만다. 오늘날 바리새인의 정신이 아담의 후손 개개인에게 붙어다니고 있다. 그들을 어리석다 여기고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헛된 영광은 우리들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심리 욕구, 갈채에 굶주리고 칭찬을 안달하고, 아첨을 먹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족할 수 없을까?


이에 대한 구제책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헛된 영광은 우상숭배’임을 깨닫는 데 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대권을 빼앗는 것이며, 하나님께만 속해있는 영광을 우상에게 돌리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만이 영광의 주체와 대상이 되시는가?


첫째로 영광이 하나님께만 있음은 그가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의 기원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서 기인한다. 그는 우리 모두의 존재의 근원이시오 그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끊임없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고백은 경건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엄숙한 사실이며 진리이다.


둘째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이 오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심판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그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판단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르치셨다.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사도바울은 하늘에 계신 주인이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깨달았다. 평생을 그 앞에서 살았으며 그리스도의 종으로, 하나님의 계시된 비밀을 맡은 자로서 충성되게 살았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의 유혹과 교만함에서 벗어나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주의가 참 기독교 앞에 굴복되려면 우리는 창조주이자 심판주이신 아버지 하나님,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주시는 분이요 받으시는 분임을 깨닫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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