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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강 책임감(회피인가 참여인가?)
이드보라  2016-07-25 11:36:14, 조회 : 942, 추천 : 174

제 7 강
책임감
회피인가 참여인가?

세상에 대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책임은 무엇일까? 시대마다 그리스도인들이 택하여 온 방법은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세상에 대하여 묵인할까? 정죄할까? 두려워할까? 피할까? 정죄할까? 아니면 봉사함으로 참여할까? 이 점에 관한 개념과 생각또한 바리새인의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개념과 태도가 과연 그리스도인다운 것인지, 혹은 바리새인과 같지는 않은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는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말하면서 첫 도입부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각기 다른 생각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1-2).


바리새인들의 평소 가졌던 포교의 열심을 생각할 때, 죄인과 세리를 영접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들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열심은 생명을 귀하게 여겨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개종의 권유일 뿐이었기에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의 소왕국을 넓히려는 동기가 있던 바리새인들, 그들의 생각과 문화로 전향시켜서 그 틀에 집어넣고자 하였던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이 교인 하나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다녔지만 그것은 복음전도가 아니라 개종의 권유와 포교활동일 뿐이었다. 역시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불평과 불만이었다.


-바리새인들의 태도


하나님의 선택하심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택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택하시고 이삭과 야곱에게도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언약을 이어나가셨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시고 그들에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을 맺으신 바 있다(출 19:5-6)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그들을 몰고갔다(대하 36:16). 그로 인하여 바벨론의 포로생활이라는 고난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택한 백성과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포로된 데서 자유케 하시며 언약의 땅으로 귀환시켜 주셨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에는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을 다시금 환기시키고 스스로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다른 백성과 혼인하지 않고 그들과 상거래함으로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종교적 분리주의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성결의 본질을 오해하고 그릇된 생각으로 이방나라와의 모든 접촉을 끊어버리고 바리새적인 신념들이 생기기에 이른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알렉산더대왕의 넓은 제국에 합병되고 헬라의 영향이 유대교 속으로 침투하였을 때 어떤 유대인들은 이에 굴복하였고 어떤 이들은 항거하였다. 헬라주의자들에게 굴복한 자들에게서 사두개인들이 나왔고, 굴복하지 않고 항거한 자들(하시디안)에게서 바리새인들이 나왔다.


바리새인들이라는 말은 바로 하시디안들을 말한다. 이는 실제로 ‘분리주의자들’이라는 말의 아람어이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배타적이었고 율법에 심히 엄격하게 순응함으로써 다른 것들과의 접촉으로 인한 부정함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들은 헬라화된 유대인들을 배척하였고, 율법에 무지하고 율법을 범하는 부정한 대중들을 배척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분리주의로 인하여 스스로의 우월감과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들은 부정한 평민을 추방하기도 하였고,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를 저주받은 자로 취급하였다. 복음서에서 ‘세리와 죄인’ 혹은 ‘이방인과 세리’라는 표현은 바리새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어휘인데 장로들의 유전과 바리새인들의 의식 규정을 준수하지 못한 일반 대중에게 조소하던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바리새인들의 평가에서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것은 영적사회에서 쫓겨난 외인들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예수님의 교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 이방인과 세리와 죄인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배척하였고 가능성까지 배제하며 그들끼리만 교우관계를 가졌다.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그들은 먹고 사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치며 평민의 손님이 되지 않을 것과 그들을 초대하지도 않을 것과 그런자와는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을 것까지도 엄숙히 맹세하며 실행하였다. 그들이 가졌던 거룩함과 성결의 교리는 왜곡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거룩히 되기를 추구하는 대신에 그들은 죄인들과의 사회적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자기 무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멸시하였다. 세상을 거부하고 또 지독히 비판적이어서 무지와 죄와 궁핍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돌보거나 동정하거나 돕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이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처음에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의 멸시 천대를 받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어떤 부류에 있던지 자비를 베푸셨다. 자녀를 데려온 부모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이를 금하지 말라는 예수님이셨다(막 10:13-16). 눈멀은 거지 바디메오의 경우에도 긍휼을 구하는 그를 꾸짖는 많은 무리들과는 다르게 그의 원하는 것을 물으시고 그를 낫게 하셨다(눅 18:35-43). 또한 공중 앞에서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금하였던 랍비들과는 다르게 사마리아 여인과도 거리낌없이 대화를 나누셨다. 유대인들이 상종치 않았던 사마리아인임에도 주님에게는 멸시받지 않았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창녀를 보면 독선적인 경악심으로 겉옷을 끌어 모으고 뒷걸음질 쳤지만 예수님은 창녀를 가까이 오게도 하시고, 눈물로 자기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고 입을 맞추며 기름을 붓도록 내버려 두셨다(눅 7:36-50). 모세의 율법에서 문둥병과 문둥병자에 대한 상세한 규칙이 기록된 것은 위상생의 문제에서 다루어진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있는 자라고 여겨 그들을 질색하며 쫓아내었다. 이러한 학대와는 대조적으로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낫게 하셨다(막 1:40-45). 또한 주님은 많은 병자들을 만지시고 고치셨는데 그중에 12년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에 대하여 어떠한 질시와 책망의 눈길이 아닌 부드러운 말씀과 고치심으로 대하여 주었다(막 5:25-34).


지난 시간에 다루었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대조적인 기도를 기억하는가? 그들의 기도내용에서도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니이다’(눅 18:11)라는 그들의 말은 세리와 죄인들을 향한 그들의 멸시어린 눈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세리 삭개오의 집에 갔을 때에 바리새인들은 격분하며 반발하였고, 세리 마태와 함께 하는 주님을 기이히 여겼다.
수많은 복음서의 기록들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차이점을 말하여 주고 있다. 어찌하여 이렇게 철저하게 불일치하는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그들 자신’에게 두고 그들의 성결을 보존하는 데만 급급하였지만 예수님은 ‘타인들’에게 관심을 가져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는 바리새인들의 분노에 찬 질문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5-17)고 답하셨다.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의 비유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나서는 주인의 안타까움을 기억하는가? 마침내 양을 찾았을 때 주인의 기쁨을 기억하는가?(눅 15:1-7)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다른 점은 한 마디로 ‘은혜’였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먼저 잃은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는 행위이다. 랍비들은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말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죄인이 있는 데로 찾아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그리 말씀하고 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한 근본적이고 동일한 진리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인내하였다. 그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약해지지도 않았다. 끝까지 기다리며 돌아오는 아들을 달려가 맞아주었다. 거듭 강조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면이다. 아들이 받아 마땅한 종의 위치로 그를 내몰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를 그 집의 아들로 다시 선언하고 인정하고 좋은 가락지와 신발과 옷으로 입혀 주었고 잔치까지 베풀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 비유된 맏아들은 기뻐하기는커녕 불평하였다. 인간의 공로가 말소시킬 수 없는 죄책에 대하여, 과분한 사죄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회개하는 죄인에 대한 하늘의 기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하였고 혹독하고 까다롭고 독선적이고 무자비한 맏아들은 그 은혜를 도저히 이해할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교회의 태도

현대 교회가 소외된 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바리새적일까? 그리스도적일까? 교회는 세상에서 물러나는 경향과 세상의 의행대로 방치해 두는 경향이 있다. 복음주의적 교인도 결국 그들의 참된 성격을 부정하는 셈인데도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본 일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일반적인 태도에 대한 서로 다른 원인들을 열거하면서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1. 첫째는 분명하고 솔직한 바리새적 독선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의 형이 가진 죄인에 대한 생각이다. “죄인은 제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라, 그가 마땅히 받을 것을 받을 뿐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라는 생각은 말로 표현되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건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만족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하고 정죄한다. 남의 약점을 동정하고 용납하는 일이 교회보다는 불신자들에게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교회가 죄를 묵인하고 회개가 필요치 않은 것처럼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람들에게 친교를 베풀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들에게 보여지는 교회와 성도는 ‘성자를 위한 곳이지 죄인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게 된다. 사실상 신약의 의미에서 교회는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도라면 또한 죄인이기도 하다. 우리의 성품은 부패하였고, 우리의 발은 타락하였다. 아직 완전에 이르지 않았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고 그의 자녀가 된 것을 은혜로 믿고 있다. 교회의 거룩은 현재 나타나는 실제 의미에서보다는 하나님께 속한 신분에서, 계속적인 소망에서, 최종적이니 구원에서 더욱 그러하다. 바리새주의는 거룩에 대한 그릇된 주장이며 교회에 대한 그릇된 견해이다.


교회의 잘못된 견해는 다른 면에서도 나타난다. 도덕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인종과 사회적 형태도 취할 수 있다. 교회가 성경이 금지한 것 이상으로 교인 되는 일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면 바리새적이 되고 만다. 교회를 연합시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통된 신앙과 성령 안에서의 공통된 참여다. 이런 근본적인 것을 따지자면 신자들의 공통점은 그 어디에도 없다. 성격이나 인격, 교육정도, 피부색, 문화, 시민권, 언어 등 여러 가지 점에서 같을 수 없다. 교회는 놀랍도록 포용하는 친교를 지니고 있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가 없다’라고 갈 3:28에서 말씀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평등히 대하며 그들을 거부하거나 냉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교회가 세상에서 물러나는 두 번째 이유는, 오해에서 나왔을지라도 진정한 오염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하나님의 규례를 거절하는 인간 사회라는 소위 ‘세상’, 혹은 단순히 불경건한 세속주의가 악하다는 참된 성경적인 인식에서 출발을 하였지만, 이 고상한 이념이 변질되어 방향을 잘못 잡을 때 이러한 일들이 생긴다. 성경의 명령을 듣고 순종하여 세상을 사랑하거나 본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서 물들지 않도록 하려는 태도의 동기는 아름다우나 그 방법과 태도가 엄청난 과오를 불러일으키는 오류로 나아갈 수도 있다. 세상의 표준을 따르는 데서 피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세상 사람들을 피하고 인연을 끊는 방법인가? 소원은 옳으나 엄청나게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게 된 것을 역사속에 있는 수도원 정신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수도원 제도가 무조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도원 생활은 어떤 형태로든 진정한 기독교의 전형이 아니다.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이므로 이 또한 곧 바리새주의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고 보전하시기를 위한다고 요 17:15에서 말씀한다. 혼자서만 사는 교회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진정한 기독교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바리새주의의 세 번쩨 현대적인 형태는 세상과의 접촉이 균형 잡히지 못한 이유로 바리새주의라 부르는 것이 옳다. 이것은 복음 전도와 사회에 대한 관심의 단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교회의 책임은 무엇인가?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과 구속의 사역들을 어떻게 구별해 가면서 일할 것인가? 이러한 논쟁들에서 우리는 복음주의의 명제와 에큐메니칼적 반명제를 명백히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먼저 복음주의적 명제는 극단적으로는 하나님의 첫째 관심이 개인의 영혼 구원이고, 교회의 유일한 책임은 복음 전파이므로, 사회적 복음의 친사촌 뻘 되는 사회 활동은 분명히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전도의 사명이 온정주의적인 방법으로만 나아가고 의료나 교육 사업에만 쏠리기를 거부한다. 물론 개인 구원만 강조하는 특이한 예는 극단적인 예이지 흔한 일은 아니다.


또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반명제는 하나님의 첫째 관심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세상의 평화를 위한 일이기에 현세계의 혁명적 운동들을 필요시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과 제휴하여 사회를 개조할 의무를 가지며 사회적인 불의의 구조에 대항하여 싸움으로 인하여서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를 위한 의사 일정을 마련케 하라는 것이었다.


신자와 불신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 서로의 의사를 공동 투자할 수 있는 대화에 의하여 복음 선포는 축출되고 있고, 더 나은 사회 구조를 위한 추구가 개인적인 관심에 대한 추구로 대치되고 있다. 그들은 회심이라는 단어를 빼고 종교다원과 불가지론 모두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명제와 반명제는 양극을 이루고 있으며 양자가 다 그 속에 바리새주의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양쪽 모두가 세상에 관여하는 형태가 한정되고 극단적이고 불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는 바람직하고 올바른 기독교답지 않다.


특별히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복음주의는 진정한 복음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영혼 창조만 아니라 인간이라 불리는 사회적 존재이기도 한 영육의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 및 그들의 영원한 운명과 육체와 사회 모두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래서 참된 기독교의 사랑은 사람을 사람으로 돌보고 그들을 섬기며 몸 때문에 영혼을 무시하거나 영혼 때문에 몸을 무시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영국에서 있었던 노예제도의 폐지와 철폐, 그리고 소외된 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밝은 사랑을 통해서 그것이 어떻게 바리새인들의 무관심의 어두운 배경에서 밝히 비쳤던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인종차별, 굶주림, 가난, 전쟁을 제거하려는 사회 정의의 문제에 특별히 정력을 쏟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쑤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는 딤전 1:15의 말슴을 잊고 교회로 하여금 모든 족속과 나라에 회개와 사죄를 선포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도 망각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수직적인 사역과 인간 관계에 관련된 수평적 사역의 발란스를 조절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세상 어느곳에서나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4. 현대판 바리새적 세상 도피의 교회를 살펴보는 중 독선적인 것, 즉 자기 도치웨 의한 수도원적 회피주의와 또한 복음전도나 사회운동 중 어느 한편을 무시하여 불균형한 강조를 하는 표본들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려고 하는 가장 평범한 이유를 들라면, 곧 네 번째 이유인 일반적인 나태와 이기심을 들겠다. 이것은 그저 상처와 더러움에 가담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이다. 세상 자체도 고도의 무책임과 무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우를 죽인 가인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나님께 반문하였는데, 동일한 모습이 오늘날에도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서, 어두운 곳에 대하여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시된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을 사랑하시고, 그가 창조하신 해를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비추신다.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려고 희생하시며 우리의 곤경에 깊이 개입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연히 계시거나, 개입을 거부하시거나, 하늘의 안전한 곳에 숨어 계셨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들어오셨고 우리의 시험과 슬픔과 고통을 담당하셨다. 소외된 자들을 살피시어 친구가 되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교회의 사명은 성자의 사명을 반영하는 것이며, 교회와 성자는 모두 성부의 성격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실 뿐만 아니라 구주시다. 주님은 우리의 공로를 보상하시는 분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우리는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처럼 세상으로 보내진다. 도망쳐 피하라 하지 않고 혼란한 인간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의 의심과 고난과 절망을 동정하고 하나님의 종과 증인들로서 그 사랑의 통로가 되며, 줄 수 있는 위안을 베풀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오는 구원의 복음을 전파한다. 우리는 이러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신앙생활의 큰 역설은 이러하다. 온 교회와 모든 성도는 세상에서 구별되는 그만큼 세상에 개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거룩’에 대한 만큼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하셨다. 거룩하지 않은 세속성이나 세상적이 아닌 거룩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세속성으로, 즉 참으로 하나님께로 구별되어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맏아들과 같은 불만스러운 판단의 태도에서 건져낼 수 있고, 접촉에 의해서 오염된다는 그릇된 바리새적 공포에서 건져낼 수 있고, 또한 개입하기를 거부하는 초연함에서 건져낼 수 있다. 이 모든 것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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