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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강 미래는 어느 곳으로
임 바울  2013-11-15 16:23:47, 조회 : 1,907, 추천 : 391

                                                    7. 미래는 어느 곳으로
                                                       (INTO TOMORROW)



        로마 카톨릭의 생각을 해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추기경 Newman은 “오직 스콜라 신학자만이 교황과 공의회의 표현의 뜻을 결정할 수 있으며, 이런 표현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시간이 지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났지만,  뉘앙스와 함축적인 의미들이 가장 부지런한 분석가들도 , 특별히 그들은 개신교도들이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새로운 카톨릭 신학의 주요 노선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확실히 전통적인 노선과는 다르다. Gregory Baum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교권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견해와 교회의 가르침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보수주의자들은 주장은 제 2 바티칸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 공의회에서, 카톨릭 교회는, 공식적으로, 엄숙하게, 상당한 갈등 뒤에, 매우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자신의 마음을 바꾸었다.”


        계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관계, 구원, 교회의 가르침과 교황의 권위와 같은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제에서 마음의 변화는 카톨릭 교리에 대한 대다수 개신교의 분석을 시대에 뒤진 것으로 만들었다. 로마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개정할 의무를 개신교 앞에 놓았다.


이런 변화의 중요성과 그들의 가치에 대한 우리들의 의무는 필연적으로 교회가 1980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기를 요구한다. 변덕스러운 상황과 알려져 있지 않는 요소들을 가지고, 교회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게다가, 발람 시대로부터, 전문적인 예언에 종사했던 사람은 항상 의심을 받아왔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씨앗에 불과한 것들이 미래에 크게 보일 때에는 항상 이런 예측들이 시도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들의 중요성을 측정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회전축은 주관적인 종교적 경험으로 나아가고 객관적인 교회의 충성에서 멀어지는 이동이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강조는 두 개의 다른 노선을 달려가는 사람이 서로 서로를 카톨릭 교인으로서 간주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들이 똑같은 객관적인 가르침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양쪽이 똑같은 주관적 경험들을 나누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세대에서, “너가 어떻게 믿는가는 너가 무엇을 믿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공의회는 진리 그 자체와 사람에 의해서 이해된 진리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하였다. 이런 차이점은 사람이 문화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그의 배경과 성장 과정, 그의 교육, 직업등은 그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볼 것인가를 결정하도록 영향을 미친다. 이런 조건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순수하게 해석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몇 십년이 지난 미래의 어느날, 카톨릭 신앙을 전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가 있게 될 것이다. 다른 장소에서에 사는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의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용어의 의미가 순수하게 지역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Southern Ireland에 있는 카톨릭의 믿음과 프랑스에 있는 카톨릭 믿음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같은 다양한 나라에서, 우리는 수없이 다른 형태의 카톨릭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이런 문화적인 차이점은 항상 있어왔다. 적어도 지난 30년간, 프랑스는 신비적인 영성으로 유명하게 되었으며, 미국은 그들의 혈관속에 실용적인 행동주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아일랜드 사람들은 종종 믿음을 북 아이리쉬의 언어로서 정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내가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미래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더 이상 그 자신을 카톨릭으로서 또는 오래된 말로서 보편적인 교회로서 생각할 수가 없게 될 것이며, 이런 변화가 주로 실용적인 이유가 아니라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예배에서 그 지방의 언어 사용을 인정함으로서 신앙 성립에 문화적 영향의 실체에 자신을 조율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실용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에 대한 이해의 불충분성을 인정함에 따라 미래의 다양성이 일어날 동기를 부여하였다. 이것은 정확하게 신학적인 문제이다. 진리가 뚜렷하지 않으면, 전통적인 신학자들이 그은 날카로운 선이 무더지게 되었을 때에, 교회는 상응해서 선포와 가르침에서 덜 포괄적이 되려고 하게 된다. 이런 신학적인 이동은 객관적인 교회의 가르침에서 주관적인 영적 성향에 대한 강조에서 일반적인 이동과 일치한다.  


          교권이 제한된 면만 말할 때에, 개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만들 더 많은 여지와 자유를 가진다. 이런 여지가 허락되면, 환경적인 요소들이 더 많이 카톨릭 신앙에 침입하게 되며, 나타나는 카톨릭 신앙에 영향을 행사한다. 전체적인 붕괴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문화, 국가적인 신분, 심지어 가족의 삶에 동화가 될 것이다. 이런 영향력이 아마도 통일성과 단결을 유지하려는 지방교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카톨릭 믿음의 형성에 이런 요소들의 침입은 , 전통적인 근거에서 말하면, 교회의 연합이 사라지게 될 것을 의미한다.  


        교황의 직분이 수없이 많은 독립적인 지방 교회의 중재자의 직분으로 몰락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현대세계에서, 군주제도는 공격을 받고 있으며, 교회적인 군주제도이기에, 교황제도는 비평가들의 낮을 피할 수 없다. 현대 군주가 살아 남아있는 곳을 보면, 그들은 모든 유효한 권세가 제거된 상징적인 형태로서만 남아있다. 이런 패턴이 교황의 경우에도 일어난다면, 교황은 그의 직분을 유지하지만, 전에 가졌던 모든 권세는 지역 교회로 전환될 것이다. 그들이 로마를 향해서 경애를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그들 자신의 영적인 통찰력에 의해서 자신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미래에 관한한 가장 두 번째로 중요한 발전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종교적 비전이다. 이론적인 개발들이 신앙인과 불신앙인 사이에 새로운 대화로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미래는 이런 해석에 따라서 모양을 이루어갈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로, 교회로부터 가속되는 이탈을 보게 될 것이다. 구원이 근본적으로 객관적인 가르침의 수용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인 태도에 의존한다고 한다면, 그때에 교회의 역할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의 비평이 그들의 삶의 스타일을 방해하고 그들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 과거에는 이런 일이 없었지만, 교회를 떠나서 “디아스포라(diaspora)”로 남으려는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많은 카톨릭 교인들이 떠난다면, 이것은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될 것이다. 많은 전통주의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바꾼다면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이 될 것이라고 진보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주의자들은 교정이 일어나면, 카톨릭의 생득권이 많은 세속적인 잡동사니로 바꿔지게 될 것이라고 불평을 한다. 미래는 전통주의자들이 옳다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두 번째 가능성은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가 W.C.C라는 우산 아래 일치될 것이다.  


        이 운동의 기원을 1910년 Edinburgh Conference에 둔 세계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관계는 다소 복잡한 사건이었다. 비록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완화하였다, 일반적으로 로마는 이 운동에 참여를 꺼려하였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의 연합은 요한 바오로가 제 2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였을 때에 교황의 마음에 있었던 원대한 목적이었다. 우선순위에 대해서 교황은 카톨릭이 연합에 대한 협정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 자신의 집을 먼저 세울 것을 요구 명령하였다. 이것은 또한 한스 큉의 작품인 “ The Council, Reform and Reunion”에서 출발한 우선 순위였다.


            전에 연합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던 많은 장애물들이 지금 제거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많은 문제에서, 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유익한 교환이 지금은 가능한 것으로 고려되고 있다. 예를 들면, 성경의 문제는 분열의 요소라기보다는 연합의 요소가 되는 것으로 증명되어지고 있다.  많은 카톨릭이 채택한 다소 느슨한 입장이 비 전통주의 개신교에 더욱 가까워지게 하였다.  온유한 성경 비평과 공의회에서 인정된 가르침에 대한 비평을 허락한, 1943년에 발행된 회칙 Divino Afflante Spiritu는 사상의 교환을 위한 길을 열었다. 구원을 교회에 있는 회원에게 있다는 것을 느슨하게 함으로서, 로마카톨릭은  구원받기 위해서 개신교가 카톨릭이 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개종할 필요를 요구하지 않는 선에서 직접적인 토의의 가능성을 세웠다. 이런 발전은 진리에 대한 교리적인 강조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영적인 자세를 결정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 주관적인 경험을 기꺼이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일치운동에서 많은 개신교인들 중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연합에 대한 다른 장려가 언급될 수 있다. 교황 권위가 항상 연합의 장애물이었지만, 이것이 지금 로마 카톨릭 자체내에서 비평을 받고 있다. 과거에 카톨릭 사제들은 상대자인 개신교와 매우 달랐기에 연합을 위해서 함께 일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개신교는 성찬 예배뿐만 아니라 예배학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카톨릭은 전통적인 개신교 예배로 더욱 가까이 가는 새로운 접근법을 개발하고 있다. 사제 독신과 같은 , 이전에는 어려웠던 많은 관습에 대한 합법성이 신중하게 고려되고 있다. 카톨릭은  성경과 초기 기독교 세대와 같은 기독교의 기원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떤 개신교인들은 전통에 대한 점증하는 진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운동과 생각은 다가올 거대한 일들에 대한 징조가 될 수 있다.  이것과 함께, 사도적 기독교의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잘못된 관점을 가지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너무나 자주 기독교 연합이라는 생각이 성경적 기독교는 이것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비평을 하여 왔다. 신약을 읽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결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많은 서신서들이 거짓된 가르침이나 행위에 의해서 위협을 받았을 때에 기독교인의 연합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써졌기 때문이다. 신약의 저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기독교 연합을 절대적으로 선호하였다. 즉 기독교는 같은 진리안에서 그들의 연합을 발견해야 한다. 그들이 참여하는 어떤 공통된 기획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고백하는 진리에 의해서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게다가, 그들이 고백하는 진리는 사도들이 가르쳤던 진리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약이 가르치는 사도적인 승계이다.


        연합의 소망과 실현에 대한 가능성이 필연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사실, 연합에 대한 두려움은 전통적인 개신교에서 최근에 나타난 것들이다. Harold Rowdon은 1910년에 있었던 Edinburgh Conference는 복음주의 개신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내내, 기독교 연합의 대의명분이 거의 복음주의자들의 대의 명분이었다. 그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10년 뒤에, 다른 신학적인 신념에서 온 사람들의 관심 때문에, 일치운동이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 버려졌다. 이제 전통적인 개신교는 그것이 죽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죽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심스럽게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앞으로 있을 연합에 대한 원리이다. 첫 번째로, 그 원리는 실용적인가 아니면 신학적인가? 두 번째로, 원리가 신학적이라면, 또한 성경적인가? 연합은 성경적인 복음을 추천하는가 아니면 애매하게 하는가? 미래가 전개되면서 이런 잣대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 가능한 발전은 특히 남미에서 보여지고 있는  공산주의 경향을 가진 카톨릭의 출현이다. 카톨릭의 헌신이  부서진 사회를 혁신하고 회복하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해석될 일련의 혁명을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 확실히, 카톨릭 아방가르테는 혁명 신학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Marty 과 Peerman's New Theology No. 6에 의하면, 신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간 지표, 혁명과 관련된 문제는 1969년에 전체적으로 신학을 지배하는 것이 주제이다.  최근에, 신학자들은 하나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폭력의 합법성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비폭력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혁명을 어떤 사람은 평화를 주장한다. 그렇지만, 공산주의 방향에서 지향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으며, 어떤 로마 카톨릭 사상가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미래 복음주의가 정치적인 투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현재와는 다른 목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의 목적인 기독교와 관련된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희미하게나마 보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목적은 실제적으로 복음적이라기보다는 교훈적인 것이 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카톨릭은 현재 기독교 특정설( 하나님의 은혜는 선민에게만 주어진다는 설)과 로마 중앙집권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종교적인 보편주의와 교회 독립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위에 언급된 발전에 반대되는 마지막 가능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많은 전통적인 개신교는 , 후 제 2 바티칸 투쟁의 결과로서, 역사적 개신교의 신앙이 그들의 영적 필요성의 열쇠를 갖고 있음을 많은 카톨릭 교인들이 뒤늦게 인정할 것이라고 낙관을 한다. 종교개혁에서 논쟁의 주요 원인이었던 교회론이 이제 결정적으로 개신교 방향으로 수종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낙관주의를 위해서 인용된 또 다른 이유는 성경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방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다.


        성경의 문제에서, 카톨릭 교회는 마음이 아니지만,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설교는 더욱 성경적이어야 하고, 사제들은 성경을 더 많은 묵상해야 한다는 가르침에서, 공의회는 확실히 전통적인 개신교를 기쁘게 하는 것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서 사람이 얼마큼이나 연역할 수 있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오늘날 많은 평신도들이 과거에는 전혀 없었던 방식으로 성경적인 가르침에 의해서 도전을 받고 있다. 의미심장하고 심지어 극적인 결과들이 발생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카톨릭이 취한 성경에 대한 태도는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좋은 의도를 무효화할 수 있다. 결국, 전체적으로 개신교주의는 항상 전통을 계시의 원천으로서 부인하였고, 권위있는 말씀에 대해서는, 성경안에서 계시를 발견하였고 , 성경과 관련해서 계시를 발견하였다.  성경의 유용성과 개신교 진영에서 성경에 대한 널리 퍼진 존경심은 역사적 신앙으로의 회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카톨릭에서 성경의 광범위한 유용성과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증가하는 관심에 기초해서, 결과가 필연적으로 전통적인 개신교 신앙을 반드시 회복할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로마 카톨릭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특별히 방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참된 기독교를 로마 카톨릭에서 재 발견한 징조로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사실로부터 반드시 이런 결과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방언 현상은 기독교의 참됨을 증명하는 어떤 요소들이 있다. 그들의 견해에서, 카톨릭이 지금 방언을 말한다는 간단한 사실들이 기독교 실체의 회복이 진행중에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다른 가능한 해석도 있으며, 이런 경험들이 신학적인 좌익과 우익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다고 Ranaghans가 가르쳤다는 사실은 모든 것이 잘되어 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로서 우리들에게 경계하게 한다. 주관적인 경험에 대한 새롭고 극적인 카톨릭의 관심에서 보면, 방언 현상과 같은 어떤 것들은 기대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결정적인 것은 이런 관심이 성경적 기독교 회복의 파생물과 결과인가이다. 이런 결정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포함된 어려움은 광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미래가 밝은 것은 아니라고 경고를 한다.



        개신교와 카톨릭은 종교적인 의심에서 나온 것을 변증하는 많은 유산들을 갖고 있다. 우리의 과거가 무시될 수 없지만, 현재에 대한 우리들의 마음을 곡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논하고 싶지 않는 그리고 후회해야만 하는 오래된 논쟁이 있다. 논의의 대상은 그것이 카톨릭이든 개신교이든, 옛날 생각들을 방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개신교 입장에서,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의 의견을 마치 신적 계시인 것처럼 보아서는 안된다고 먼저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개신교 교인들은 항상 그랬든 것처럼, 모든 인간의 의견을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시키려고 해야 한다.


                 이것은 바울이 엡 4:15절에서 간결하지만 중요한 지침을 놓으려고 했던 신학적인 작업이다 .“ 사랑가운데 진리를 말하라...” 명령의 어떤 면도 절충되어서는 안된다.  성경적인 진리는 묽어져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본질이 침범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리를 말할 때에 사랑가운데서 행해져야 한다. 성경의 본질에 있어서는 완고하고, 비  본질적인 것에서는 융통성이 있고, 모든 것에서 관대한 것은 우리 자신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금언(金言)이다. 우리의 논의는 싫증나고 하찮은 변증의 수준을 뛰어넘어야 한다. 성경적인 그리스도를 대면하는 것처럼 사랑이 우리들을 인도해야 한다. 진리는 그런 곳에서만 발견이 될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붙잡은 것은 오직 진리 문제이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신학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다. 교회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을 잊기가 쉽다. 그는 교회를 그의 죽음으로 샀다( 행 20:28). 그리고 여러 세기를 걸쳐서 교회를 보존할 것을 보증하였다( 마 16:18). 세상에 기독교 신앙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복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은혜 때문이다. 우리가 내일을 바라 볼 때에, 우리의 소망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마 28:18-20]   (18)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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