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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 : 교회 사람인가 교황인가?
임 바울  2013-11-07 09:12:02, 조회 : 1,939, 추천 : 373

                                           6. 교회: 사람인가 교황인가?
                                    (THE CHURCH : THE PEOPLE OR THE POPE?)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권위에 대한 투쟁은 새로운 카톨릭이 성취한 힘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이다. 많은 현대의 카톨릭 교인은 교황 통제의 전통적인 유형을 반대한다. 그러나 교황은 변할 수 없다. 교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것과 옛날 카톨릭을 중재하는 것은 양측의 심각한 절충안을 마련한다는 것은 현재의 토론을 고려한다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교회가 이런 입장에 도달하였는가를 보는 것은 쉽다. 권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단단하게 통합된 사고 구조이다. 교회의 권위는 자연적으로 편리하게 이 세상에 있다. 하나님은 구원의 사역을 교회에 위임하였고 , 지구에서의 대표자인 교황으로 하여금 그것을 지휘하도록 맡겼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사람은 교회에 속해야 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그의 대표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카톨릭 교인들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과 교회의 동일시를 덜 확신한다. 교회에 있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분리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 안에 있으며, 그 위에 있지 않다.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에 의해서 섞여져 있다; 하나님은 어느 정도 모든 사람 안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구원이 교회 밖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면,  그때에 세상에서 교회의 전통적인 역할은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다. 현대의 디아스포라에 대해서 말할 때에 칼 라너가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은 중앙집권이 붕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분권화가 가지는 의미는  교회의 권위에 잠재적으로 위험을 준다. 전통적인 힘의 구조는 바티칸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중앙 집권화에 의존한다. 교회가 분권화를 실행하게 되면 교황의 통치가 전에 처럼 가능한가? 이것은 로마교에서 제 2 바티칸 공의회 가 개최된 후로 계속해서 던져지는 질문이다.

        분권화는 다수 카톨릭 교인이 더 이상 권위와 교회 정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에 권위가 있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권위가 있어야 하는가이다.  논증은 두 가지 다른 권위 이론에 대한 것이고, 교회가 어떻게 통치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개념이고,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세계관에 대한 것이다. 갈등은 교리뿐만 아니라 정신과 이데올로기에도 있다.

        
        이 두 개념은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양립을 할 수 없는가? 한  이론은 하강하는 권위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상승하는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전자는 전통주의자들이고, 두 번째는 진보주의자이다. 전통주의자들은 교회를 정상에 교황이 있는 피라미드 형으로 생각을 한다. 그 밑에 있는 모든 사람을 통치한다. 권위의 전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간다. 진보주의자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다르다. 교회는 다소 평면이다.  계급구조로서 하나가 다른 것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권위의 전개는 아래에서부터이다. 권위는 교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성령이 자신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계시할 때에 그리고 일치에 이르렀을 때에, 그때에 교황은 이런 단체적인 관점을 명확하게 해야 하고 교리적인 형태로 표현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성명은 권위가 있다. 교황이 이것을 선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리고 다수가 믿는 것들을 대신해서 분명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권위 이론의 관습은 때때로 어려움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William DuBay는 이런 견해를 주장하고 그리고 나면 놀라웁게도, 그가 생각했던 방식대로 항상 문제를 보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오직 두 가지 선택만 가졌다: 권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던가 또는 교회를 떠나야만 했다. 첫 번째 선택은 생각조차 할 수 없기에, 그는 두 번째를 선택했다. 그가 발견한 딜레마는 The Human Church라는 그의 연구에서도 조금 엿보였다.


        권위에 대해서 상승의 견해를 갖고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주어진 문제에 대해서 그가 믿는 것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진보주의자들은 지적인 문제 이상의 것에 직면한다. 진보주의자들의 정의에 의하면, 평신도들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들의 견해에 교황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교황이 성령과 일치하지 않았을 때보다 진보주의 신학자들이 성령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이 이것을 항상 깨닫는 것은 아니다. Charles Davis와 같이 이런 문제를 깨달은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교회를 떠나야 한다. 교회의 권위에 대한 진보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의 견해가 계속된다면, 교회의 기능에 어떤 마비현상은 불가피하며, 진보주의 사제들의 확고한 이런 견해는 계속해서 교회를 떠나는 일들을 발생하게 할 것이다.

제 2 바티칸( 1962-65)에서 제 1 바티칸(1870) 사이에 , 로마 카톨릭 사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교회가 기본적인 권위의 문제를 고려하였다는 것을 보면 분명한 사실이다. 제 1 바티칸은 하강하는 권위 형태에 대한 분명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곳곳에서,  전통적인 견해를 인정하였지만, 제 2 바티칸은 상승하는 권위 형태에 교정수단들을 만들었다. 제 1 바티칸 공의회는 새로운 이념의 중요성을 측정할 수 있는 유용한 치수를 우리들에게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1870년에 완성된 이탈리아의 재통합은 교황이 유럽에서 세속적인 능력을 빼앗겼음을 의미한다. 전에 교황은 거의 모든 유럽에 권위를 주장하였으며, 왕을 세우고 폐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전 나라에 구원을 부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황의 세속적인 주권은 바티칸이라고 부르는 로마의 적은 나라에 제한되었다.  교황의 세속적인 권세가 심하게 제한되었지만, 대조적으로 그의 영적인 권세는 좀 더 증가되었다. 1870년에 Pius 9세는 교황 무오설을 선포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느꼈다. 교리와 윤리의 문제에서 교황의 무오설은 수세기 동안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870년 전에, 교리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루터도 이것을 언급하였으며, 교황이나 공의회가 교리적인 문제에서 오류로부터 무오하게 보호받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종종 그의 청중들을 화나게 하였다. 제 1 바티칸 공의회는 거의 모든 권세와 권위를 교회에게 두었으며 계급 구조에서 그 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스렸다. 이런 사실들이 헌법에 있는 많은 장의 목록에 실려있다: “'Of the Institution of the Apostolic Primacy in Blessed Peter', 'On the Perpetuity of the Primacy of Blessed Peter in the Roman Pontiffs', 'On the Power and Nature of the Primacy of the Roman Pontiffs' and 'Concerning the Infallible Magisterium of the Roman Pontiff'. 헌법은 교회를 다루려는 목적이었지만, 교황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다. 교회에 대한 교황의 태도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급진 카톨릭 교인들은 불평한다:  ”기독교 교회에서 내가 짐(왕, 수장)이다( 'L'Eglise, c'est moi!').“


이때에 교황은 권위있는 성명을 발표하기 전에 교회를 참고해야 하는 어떤 의무에 있지 않다는 것은 제 1 바티칸 공의회에서 분명하다. 자신의 권위에 의지해서 그는 말하며 필수적으로 교인들의 대표자로서가 아니다. 큉이 지적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교황의 권세는 절대적으로 임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자연법 또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는 도덕 또는 전에 정의된 교리들에 반대되는 교리를 결코 정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과 도덕에 대한 문제를 발표하기 전에 교회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주교들이 교황과 참여하는 형태로서 제 2 바티칸 공의회에 나타난 자문이라는 생각은 제 1 바티칸에 있는 헌법에서 일부로 제거된 것이다. 제 2 바티칸의 자문에 따르는 제안들이 제 1 바티칸에서도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 공식은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개인으로서 또는 스스로 하는 행동에서 그는 신앙에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를 사용하고 보편적인 교회의 도움을 받은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


무오성에 대한 마지막 구절은 공의회를 사용하고 보편적인 교회의 도움이라는 개념을 생략하였다. 교황이 교회에 의존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위로부터 오는 통치의 개념과 상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 2 바티칸에서 온 교회에 대한 상응하는 헌법을 볼 때에, 교황의 권세와 권위에 대한 똑같은 개념이 온전하게 보전된 것처럼 처음에 보인다. Florence의 공의회는 교황의 권세가 충만하다고 진술했고, 트렌트 공의회는 최고라고 덧붙였다. 제 1 바티칸은 더 나아가 보편적이라고 했지만, 제 2 바티칸은 전체적인 전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교회에 대해서 보편적이고, 충만하고, 최고의 권세를 가진다.” 제 2 바티칸에 따른 그의 권위는 전보다 더 절대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우리가 본것처럼, 공의회는 상대적으로 배타적인 신학을 지지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때때로 반대되는 파벌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서를 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헌법에 “하강하는 권위의 개념”의 존재는 반대되는 견해의 존재를 결과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  최근에 전통주의 견해가 진보주의자들에게 암흑가의 전쟁과 같은 것이 되었음을 기억할 때에, 그들 자신의 견해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았다면, 중립이 되었다는 것을 적어도 보증하는 것 처럼 보인다.


첫 번째로, 교회에 대한 헌법의 순서와 구조는 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황의 중요성을 덜 강조하도록 계획되었다. 8개의 장중에서 오직 하나만이 제 1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온 문서와 비교를 하면서 교황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도, 두 개의 전 장에서 교인들에 대한 것을 다루고 난 다음에 교황 권위를 공의회는 다룬다. 이것이 함축하는 것은 권위가 교황에게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헌법의 순서를 주석한, Yves Congar는 첫 번째 가치는 조직, 중재자의 기능, 또는 권위가 아니라( 하강하는 개념의 모든 국면), 기독교인의 삶 자체 그리고 제자가 되는 것을(상승하는 개념의 모든 국면) 의미한다고 말한다. 관심이 외적 교회의 구조에서 종교적 체험이라는 내적 영역으로, 성직자의 입장에서 나온 권위로부터 주관적인 통찰력에 기초한 권위로 이동되었다.  


두 번째로, 미묘한 방법으로서 진보주의자들은 교황에게 전통적인 권세를 주었던 문장 자체도 수정하려고 하였다. 그가 “충만하고, 최고이고 교회위에 보편적인 권세를 갖고 있다고 표현한 첫 문장과 함께 이 모든 권세들을 분명하게 빼앗는 문장이 하나 있다! 그는 이 권세를 자유롭게 항상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언듯보면 이 문장은 전에 했던 진술을 강화하고 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식적인 카톨릭 문서를 해석할 때에 첫 번째 인상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져야 한다. 이 문장은 숨겨진 급소라고 Butler는 설명한다: ‘”할 수 있다“라고 해석된 단어는 하나의 옷걸이이다. 교황이 자문을 가지고 행동할 때에 그의 행동이 ”유효하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경우에, 교황이 자문없이 행동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교회를 고려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말할 때에 충만하고, 최고이고, 보편적인 권세를 유효하게 행사할 수 있다. 교회에 상관없이 그의 권세를 행사한다면, 그는 타당하지 않게 권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그의 행동은 도덕적인 정당함이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전통적인 어법이 다소 진보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도록 바뀌었다. 이 두 문장의 병렬은 자문의 문제가 전체적인 토론에서 나타난 긴장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진보주의자들이 제기한 세 번째 도전은 더 심각하며 전통적인 기능에서 보면 교회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교황 무오설의 개념은 부정될 수 없지만 , 진보주의자들은 두가지 다른 무오성을 교회에 도입함으로서 그것을 무효화시키는 일에 성공했다. 이 두가지 행위는 교황 권세의 어떤 주장도 대항하기에 충분할 정도이다. 첫 번째로, 성령의 빛을 받은 모든 카톨릭 교인은 진리에 대한 무오한 인식을 가진다. 진리에 대한 지각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전통적이다. 그들은 진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한다. 틀림없이 이 말은 옳다. 교회는 항상 진리에 대한 지각을 믿었다. 과거와 현재의 긍정의 차이점은 전에는 교권이 진리를 해석하는 업무를 맡았지만, 지금은 주로 교회가 이 일을 한다. 두 번째로 모든 카톨릭 교인의 무오성에 첨가하여, 모든 감독들이 갖고 있는 무오성이 있으며, 그것은 그들의 직분에 고유한 무오성이다. 이 무오성들은 하나님 말씀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하였다(성령이 주시는 내적인 영적 지각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 물론 백성, 감독, 교황 안에 있는 세가지 무오성은 항상 협주곡으로서, 똑같은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행동을 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카톨릭 교인의 영적인 통찰력이 동등한 무오성을 가지고 그로 하여금 부인하게 하는 어떤 무오한 가르침을 제시한다면 보통의 카톨릭 교인들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가? 감독의 무오성은 어느 쪽에 맞추어야 하는가? 분명히 이것은 악몽과 같은 상황이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 상황에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다. 교회가 받고자 하는 가르침만을 교회에서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이 임신계획에 대한 토의에서 점차적으로 분명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평신도는 늘 그랬던 그들의 선생에 대하여 똑같은 경외감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힘으로서 그들은 나타났다. 공의회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평신도에 대한 특별한 문서들이 승인되었으며, 전통주의 사상이 촉진한 과장된 교권주의의 불균형을 교정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평신도가 교권의 역할을 맡은 일에 위협을 가하였다. 모든 교회의 회원은 성령을 소유하며, 따라서 기독교 진리의 근원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전에는 말한 적이 없었다. 이런 접근은 교회의 공식적인 선생들만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왔다.


전통적인 사고 구조 속에서, 교회는 두 개의 단체로 이루어져 있다.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이다. 교회가 권위있는 가르치는 단체로서 종교적인 진리에 접근할 수 있었기에, 교회의 나머지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할 의무를 가졌다. 배우는 교회는 그것을 받고 그들의 가르침을 믿을 의무를 가졌다. 배우는 교회가 가르치는 교회가 제공하는 가르침을 의심하고 질문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교권이 가르침에 질문을 하는 것은 진리의 공급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성령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르침은, 전통적인 교권의 기능을 심각하게 제한한다. 모든 카톨릭 교인들이 진리를 분별한 수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는 가르치는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그가 본 것에 주의하는 한, 그는 또한 배우는 교회에 소속될 수 있다. 사실 전체 교회가 , 다른 그리고 상호 의존하는 측면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가 될 수 있다고 Butler는 말한다. 성령이 가장 낮고 천한 사람에게도 무오한 종교적 지각을 주기에, 교권과 교황의 가르치는 역할이 어느 정도는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변화는 결과적으로, 교황의 절대적인 무오성을 무효화시켰다. 이제 진보주의자들은 교황의 절대적인 권세에 다루었고 최후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얻으려고 하였다.


        마지막 도전으로서, 진실로 전통적인 견해라고 생각하는 - 교황은 감독들에게 부차적이라는 것을 재 강조함으로서 독립적인 교황의 행동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견해는 주교가 교황과 함께 행정에 참여하는 일에 대한 결정에서 분명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변인으로 뽑기 전에 모든 사도들에게 권세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사도들은 의장이 베드로인 위원회의 회원이다. 토론을 관장하고 투표가 취해졌을 때에 그 결정을 발표하는 것이 베드로의 역할이다. 이것은 확실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른 어떤 다른 감독들과 분리하거나 그들을 나머지 감독들보다 높이지 않았다.


         진보주의자들은 이 원리를 현재의 상황에 적용했다. 감독들이 사도들을 계승하였다. 시간적으로 그들 뒤에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들이 지금도 감독들 안에서 계속해서 살아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사도들의 권세와 권위는 감독 직무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사도들에게 부속되었던 똑같은 기능이 또한 감독들 중에도 따라다녀야 한다. 예수님은 다른 감독들과 분리하거나 높이기 위해서 교황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황은 위원회의 의장이다. 그는 단체의 결정을 발표하지 다른 위원회의 회원들의 권세를 그 자신의 개인적인 권세 아래 두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교황은 독립적인 권위있는 발표를 할 자유가 없다. 단지 다수 감독들의 의견을 발표하는 대변인의 역할만을 가진다. 그때에 그의 권위는 감독들과 합당한 자문뒤에 발표할 때에만 효력을 발생한다.


주교행정에 대한 공의회의 가르침은 교황의 권세를 제한하려는 시도였으며, 독립적인 교황의 행동이 제거되기를 소망하였다. 이 문제를 다르게 표현하면, 교회의 감독들은 앞으로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서 제공되었던 것을 자신들이 통제하기를 소망하였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전체적인 문제를 가장 중요한 도덕적이고 교리적인 문제로 바꾸었다. 이런 수단들을( 자문) 사용하지 않고 믿음의 항목들을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교황은 심각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Butler는 주장했다. 교황이 죄인이 될 뿐만 아니라, 이런 경우에 그는  자신을 분리주의 입장에 두게 된 것이라고 큉은 말한다. 교황은 결코 교회의 뜻을 마음대로 또는 대항해서 뜻을 밝힐 수 없다.  교황 그 자신이 분리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분리주의는 파문으로 보통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 교황의 폐위를 위한 교회법의 허용은 교황이 이단이나 또는 분리주의에 들어갈 때이다. 주교직에 포함되어 있는 책임은 매우 크다. 그러나 모든 진보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문제들을 진술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권위를 교황에 두기 보다는 교인들에게 두고 권위의 하강하는 형태를 상승하는 형태로 바꾸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이 네 가지 시도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교황 바오로는 실제로 자신의 직분을 의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응답하였다. 실제적으로 그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의 권위가 다른 어떤 감독들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개념이었다. 그가 위협을 받았다고 느꼈던 구절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교회 헌법의 부록을 첨가하기로 결정했다. 이 부록은 공의회가 헌법에 대한 자신의 업무를 완성한 다음에 첨가되었다. 따라서 어떤 투표나 공식적인 논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명을 위한 부록은, 주교 행정을 전면적으로 대항해서, 머리와 주교 사이에 동등성이 있음을 부인하였다. 교황은 주교행정의 어떤 행동들을 세우고, 촉진하고, 승인하는 일에 있어서 그 자신의 결정권에 따라 진행한다고 하였다. 이런 역할에 의해서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주교의 행동들이 그 자신의 의견과 일치한다면, 그때에 그는 주교의 머리로서, 또한 교황의 의견인 그들의 견해를 분명하게 발표할 수 있다. 그러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때에 그는 보편적인 교회의 목자라는 다른 역할에 의해서, 주교들을 고려함이 없이 홀로 행동할 수 있다. 그는 그들의 견해를 무시할 수 있으며, 그들을 보충하기 위해서 변경시킬 수 있다. 그러나 , 그 반대는 제외되었다. 주교 없이도 그는 행동할 수 있지만, 교황 없이 주교는 행동할 수 없다.

이런 관계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제 2 바티칸 후에 겪어야 했던 가장 괴로운 문제는 산아 제한이었다. 수 백만명의 카톨릭 교인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막연하게 미루어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전통주의자들은 산아제한의 불법성이 확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회에 있는 다수는 이 문제에 유동성있는 접근을 원했다. 여러 달 동안 교황은 고민하였고, 주교의 자문없이, 전통주의의 입장을 내렸다. 주교의 활동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교들의 모임을 소집했어야 하는가?  교회법이 해설적인 부록의 도움을 받아서 읽는다면, 그 답은 분명히 부정적이다. 보편적인 교회의 목자로서, 교황은 양떼의 건강을 위해서 단독적인 책임을 가지며, 자신의 권위에 의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헌법을 공의회가 의도한 대로 읽는다면, 그때에 그는 주교의 참여에 의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다. 교황 바오로의 칙령이 발표된 다음에 , 주교들이 로마에 모였을 때에, 벨기에의 추기경이며 진보주의자들의 지도자인 Leo Suenens는 그가 불법적으로 행동했음을 교황에게 알릴 목적으로, 그가 불법적으로 행동했음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물론, 이것은 문서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이것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관점에서, 교황 바오로는 자신이 가진 권세 안에서 행동을 하였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는 불법을 행한 것이다.


제 3 바티칸이 열림으로서 어떤 모양으로 이와 같은 모호성을 해결할 때까지, 교회 안에 있는 혼동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혼동은 전통적인 권위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일으킨다. 교황이 교회를 통치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권세들을 사용한다면, 교회는 여전히 성령의 지도하에 합법적인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연적으로 두 가지 논평이 앞의 논의에서 일어난다. 첫 번째로, 사람이라는 개념이 애매하고 오해받기가 쉽다. 누가 이런 사람을 구성하는가가 결코 명백하지가 않다.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전 인류가 함축적으로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 엘리트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전위파 중에서 전제된 사도적인 의식을 발견하는 것은 보통이다. 그들의 예언자적인 통찰력이 인정되지 않을 때에 상응하는 아픔이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뒤에 나오는 행위의 양상이 이제 잘 세워졌다. 선지자가 교회를 이탈하고 있으며 권위에 의한 핍박에 대해서 중상적인 설명들이 주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정확한 한계를 정하는 것이 진보주의 신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성령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철학자인  Herbert Marcus를 고려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의 메시지는 우리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또는 아닌가? 성령은 Callahan 과 Novak과 같은 급진적인 세속주의자들을 통해서 교회에 말씀을 하시는가 또는 로마 카톨릭을 떠난 사람들을 통해서만 말씀을 하시는가? 성령은 낮고 천한 사람과만 관련을 맺으시고 신학자들과는 전혀 관련을 맺지 않으시는가? 사람의 개념이 명확하게 표현될 때까지는, 교황의 권위를 제한하기 위한 시도로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악선전에 불과하다.


두 번째로, 전통적인 권에 진보주의자들의 반감 중에 있었던 것에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상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진리에 대한 무오한 소유에 대한 회의주의 때문이기도 한다. “Infallible? An Inquiry”라는 책에서 한스 큉은  문제는 무오성이 전제에 의존한다는 주장에 두었다.  그는 믿음에 분명하고, 확실한 진술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제적인 정의를 진리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한다. 언어는 항상 유동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언어의 의미는 바뀌며, 게다가 신적 실체를 설명하거나 기술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진리를 쓰여진 진술과 동일한 것을 삼으려는 욕망은- 교황 무오성이 의존하고 있는- 신앙을 확신으로 인식하려는 오류를 시인하는 것과 같다고 큉은 말한다. 그의 의견에서, 성경적인 저자들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기에, 우리도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글은 단지 그들의 종교적인 경험에 대한 응답, 반영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지 그것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큉에게 있어서, 하나님만이 홀로 무오하다. 무오하다는 단어는 교황을 포함해서 어떤 사람에게도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성경을 포함해서 어떤 것에도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종교적인 확신은 성경을 들음으로서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황에게 순종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오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무오하다 말할 수 있는 것과 어떻게 확신을 유발한다는 것은 분명하지가 않다. 설교된 그리스도는 한스 큉이 솔직하게 말한 것처럼 결점이 있는 문서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참된 본질을 알기 위해서, 이런 모호한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무오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결국, 하나님이 교회를 모든 진리로 인도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설교자의 마음에는 거짓된 것으로 시작했을 지라도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참일 때에 그에게는 참이 될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큉은 무오성의 개념을 확대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무오할 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 또는 솔직히 신뢰할 만한 믿음의 도약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결점이 있는 성경적인 문서로부터 설교될 때마다, 결점이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가 듣는 사람들을 만나러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라고 교회에 요청하고 있다. 사람들은 교황과 공의회가 실수를 저지른다는 큉의 주장에 동정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해결책은 거짓된 무오성을 거절해야 하는 것이지, 무오성 그 자체의 개념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문서들과 관련한 조심스러운 정의를 내리게 되면, 무오성은 모든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주장했던 어떤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미래는 교인과 교황 사이의 투쟁의 결과에 달려있다.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은 두 개의 세계관이고, 두 개의 이념이고, 교회에 대한 두 개의 다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입장은 변화를 공식적인 가르침에 일으키는 것이 어렵다. 다른 하나는 변화하지 않는 것에 어려움을 가진다. 전자는 합법적으로 교회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두 번째는 대중 속에 널리 퍼져있다. 움직일 수 없는 전통적인 대상이 저항할 수 없는 진보주의자들의 힘을 만나게 될 때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가진다.


아마도, 갈등은 선동적인 비율에 못미칠 것이다. 논재중에 있는 당파의 체질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가장 급진적인 당파가 교회를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급진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죽을 수도 있으며, 평신도들이 더욱 자유로운 탄원자들을 거절할 수도 있다. 로마 카톨릭은 교황 바오로가 지금 요구하는 정책들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존경심이 강한 유지, 다소 진보주의적인 견해에 대한 개방,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급진적인 접근. 교황 바오로는 신학에 있어서 진보주의자들의 뒤에 있으며, 정치와 사회적인 관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은 교황 뒤에 있다. 이런 중용이 가능할 것인가는 오직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중용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반 종교개혁운동 신학은 더 이상 선택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미래가 진보주의 카톨릭 신학에 있다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결정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얼마큼이나 혁신적일 것이냐이다.

* admin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3-11-26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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