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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강 : 제 6 장 자 천국으로 가자!
임 바울  2015-01-24 15:44:24, 조회 : 1,670, 추천 : 234

                                                   제 6 장
                                            자 천국으로 가자!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준비한다. 일상생활을 위해서 심지어 취미 생활을 위해서도 공부를 하고 교육을 받는다. 결혼, 집 그리고 가정과 같은 중요한 사건을 계획한다. 어떤 사람은 저녁 파티 또는 짧은 휴가까지도 군사 훈련을 하는 것처럼 면밀하게 계획을 짠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헌신하는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죽기를 준비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살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우리 많은 기독교인들도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또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죽음은 인생에서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재림한다는 것을 100% 확신하면서도 이런 태도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현대인들의 침묵에는 아주 불길한 어떤 것이 담겨져 있다; 현대인들은 이런 자세를 갖고 있다. Charles Dickens의 "The Old Curiosity Shop" 책이 매주 시리즈로 처음 출판되었을 때, 독자들은 Little Neil의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구입하기 위해 긴 행렬 속에서 기다렸다. 죽음에 대한 초기 세대의 개방성은 우리 세대에서 사라졌다. 죽음은 대항해서 싸울 수 없는 주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숨길 수 없다. 과학적인 영역 속에서만 토의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젊은 기독교 청년이 어느 날 한 가게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놀랍게도, 그 때의 주제는 죽음과 임종이었다. 그 친구의 신앙을 알고 있던 손님 중에 한 사람이 “Jim, 너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순간적으로 죽을 수 있는 육체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당신의 말은 정말 사실이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일이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라고 Jim은 응답하였다. 사실 그는 다음날 죽었다. 다음날 그는 죽은 채로 발견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죽은 것이 아니라 준비된 상태에서 죽었다.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우리가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때때로 살아가면서 심각하고, 치명적인 병으로 인해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하는 예상치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비로서 우리는 현미경을 통해서 죽음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의 현재 삶이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확실성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할 것이다.


        예상되는 죽음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영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던 능력을 우리는 거의 상실하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죽는 방식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에서 빈약하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기독교인의 참다운 태도를 어떻게 개발할 수 있는가? 성경이 진술하는 몇 가지 기본적인 요점들을 이해한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 참된 지평선


        죽음을 준비하고 예상을 하면서도,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의 죽음 또는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미래의 중요한 사건으로서 보지 않는다. 물론, 개인의 죽음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면, 바울은 자기가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훨씬 나은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은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죽기를 열망하였다(빌 1:21-23). 그러나 신약의 기독교인들은 아주 먼 지평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반되는 보편적인 죽음의 파멸.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우리 자신의 죽음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아직 오지 않는 더 큰 사건에 종속이 되기 때문이다. 참된 관점과 문맥 속에서 죽음을 보는 법을 함께 배워보자.


2. 패배당한 적들


        기독교인은 죽음을 패배한 적으로 본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는 죽음을 만난 예수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죽음이 그를 붙들었다. 말하자면, 3일 동안 그를 속박하였다. 그러나 그때의 죽음은 그 이상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죽음은 자기의 모든 자원을 사용하였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부수고 부활하였다; “[행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그의 죽음으로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를 멸망시킬 수가 있었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평생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였다(히 2;14-15).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님은 완전히 거룩하시고, 어떤 죽음이나 사단이 그를 제압하고 그를 감금할 권세나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를 죽음으로 붙잡을 수 있는 어떤 죄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는 죽음과 사단을 우리를 위해서 쳐부셨다. 우리 안에 거하는 그의 영을 통해서 그와 함께 있기 때문에, 사단은 죄와 죽음으로 우리들을 붙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우리가 받아야 하는 형벌을 짊어졌다면, 우리는 똑같은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은 벌써 확정이 되었다.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들을 분리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3. 그리스도와 함께 있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에 두어야 한다. 그는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바울은 빌 1:23절에서 말한다. 이것이 바울에게 주었던 영향력을 보자. 주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바울이 좀 더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의 봉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것이었다. 이것은 열매 맺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빌 1:22). 우리는 죽음을 향한 성경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우리들의 전 생애에 어떤 차이점을 주는가를 여기에서 볼 수가 있다.


        이 차이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훨씬 좋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봉사를 하려는 동기를 갖게 된다. 그들의 마음을 다가올 세상에 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억압에서 벗어난 사람이기에 이 세상에 많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리스도와 미래의 장소에 대한 이런 종류의 사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신앙에는 특별한 어떤 것이 있다. 천국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사랑은 우리 성격에 대해서 어떤 천국의 속성들을 나타낸다.  벧전 1:8에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벧전 1:8]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아이작 왓튼은 동시대의 사람인 Richard Sibbes에 대해서 글을 썼다;


        가장 복받은 이 사람에게
        이런 찬사를 주도록 하자
        그는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그 천국이 이미 그 사람 안에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각 사람은 천국에 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영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확신을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을 아직 오지 않는 영광스러운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본다. 이런 기독교인들은 벌써부터 천국 나라를 즐기고 있으며 최종적인 이사 준비를 한다.


4. 미래의 복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졌다(골 3:3).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위에 있는 것에 두어야 한다. 그곳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오른 편에 앉아있다. 그리고 우리의 것이 될 복들을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묵상해야 한다.


        이런 복들에 대한 묵상은 죽음에 대해서 또는 심지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변화를 준다. 우리는 죽음을 “고향으로 가는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 준비된 복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떤 고난을 우리들이 겪든지 간에 우리들을 붙잡아주는 것이 된다.


        이것을 온전하게 설명한 것은 베드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살아있는 소망과 천국에서 우리가 갖는 기업들을 위해서 거듭난 성도들에 대해서 말한다. 고맙게도, 이 기업은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들을 위해서 보호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얻을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호를 받고 있다고 베드로는 말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이다(벧전 1:3-5). 요점은 이것이다. 믿음은 영광스러운 미래를 예상하고, 또한 강하게 된다. 강화된 믿음은 우리의 발걸음을 튼튼하게 하며 이 지구 땅의 순례를 도와준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의 시민으로서 살아간다. 믿음의 능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밖으로 나아가도록 촉진시킨다.

        우리는 그리스도 그 자신 안에 있는 기업을 예상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그와 함께 천국에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긴다. 벌써,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시온 산에 있고, 천국 예루살렘에 있으며.....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과 새로운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는다(히 12:22-24). 천국에서, 이것을 완전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야구의 9회 말에 찾을 수 있는 승리한다는 감정의 고조는 천국에서 거룩한 연합의 위대한 날에 들려지는 함성소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기대한다. 또한 벌써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위대한 만남도 고대한다. 성도들을 위한 이런 기대는 어떨까? 우리는 위대한 날에 대한 기대와 우리 구원자의 영광을 위해서 살 만한 더 큰 이유를 갖고 있다. 우리는 지금 희미하게 본다. 그러나 나중에 면전에서 보게 될 것이다. 주님에 의해서 알려진 온전함에 대해서 어떤 정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는 특별한 어떤 것이 남아있음을 볼 수가 있다. “[요 13:7] (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우리 삶속에는 예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들을 위해서 한 일과 앞으로 할 일에 대하여 큰 경배를 드려야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준비한 모든 것들은 반드시 우리들에게 오게 될 것이다. 자신의 완전한 계획에 따라서 이 세상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그는 우리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바로 그때에 우리가 삶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스쳐지나갔던 일들이 아주 분명하게 될 것이며, 우리들은 경이로움에 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 지혜는 다가오는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일에 도움을 줄 것이다. 동시에, 바울처럼, 주님이 그의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분리시켰다면, 이 일을 통해서 또한 이루려는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빌 1:23-26).
                 

5. 일시적인 소유물들


        우리가 가는 세상의 영광의 빛에 의해서, 현세대의 약함과 무상함을 인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위에 있는 것들을 믿음으로 이해함으로서 우리의 안목이 교정되었을 때에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때 비로서 이 세상이 잘못된 것에 너무 큰 가치를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럴 때에만 우리는 빈곤, 손실, 고통, 세상적인 부, 성공, 그리고 기쁨을 적절한 관점에서 볼 수가 있다. 영광을 보았던 사람들은 차이점을 안다. Stradivarius 바이올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악기들이 얼마나 엉성하게 만들어졌는가를 아는 것과 같다.


        잘 죽고 그리고 다음 세상에 들어가는 비결은 여기에서 그리고 지금 잘 사는 비결과 똑같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죽음을 맛볼 시간이 왔을 때에 그 경험은 다가올 세상을 위한 맛을 발전시킨다. 위가 그 맛을 가졌을 때에만, 우리의 소유물과 우리의 고통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 태도에 대한 것을 다시 말한다(얼마나 자주 이런 관점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주목해 보라):


[고전 7:29-31]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통과 시험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곤란함과 고통들을 보게 되면, 괴로움으로 우리들의 삶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의 관점에서 그들을 놓게 되면, 그들의 힘은 약해지고 소멸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중함”이라고 불리는 안정되고 지속되는 것과 비교해서 보아야 한다(고후 4:17). 바로 그때에 우리의 고통은 가볍고 순간적임을 알게 된다.


        오래된 저울을 생각해보자. 이런 저울에 우리의 고통을 잴 때에, 무거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광이라는 것을 저울 맞은 편에 놓았을 때에, 그 고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고통은 잠깐만 있지만, 영광은 영원토록 지속되기 때문이다.


        신약은 우리로 하여금 한 발자국 더 전진하게 한다. 고통과 영광의 관계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만의 비교는 아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성을 갖기도 한다. 고통은 하나님이 영광을 창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이다. 다가올 세상에서나 온전하게 알 수 있으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때에만 확실하게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들 안에서 은혜를 실제적으로 주시는 것은 삶의 마찰과 시험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어머니가 청동으로 만들어진 살림들을 닦고 광을 내는 일에 열심인 것을 보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을 것이다. 적당한 양의 광택 약을 헝겊에 붓고 , 청동으로 된 물건에 뭍여 스며들게 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광택을 내기 위해서 힘을 다해서 닦는다. 시험도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물체를 보았을 때, 우리의 얼굴이 분명하게 반사되고 이 작업은 마치게 된다. 어머니는 자신의 얼굴이 그 물체에서 분명하게 보였을 때에 만족한 웃음으로 일을 마친다.


        하나님의 왕국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을 섭리라는 광택 약을 가지고 덮었다. 시험과 고통이라는 것을 가지고 열심히 고통스럽게 닦음으로 광택이 나게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이 우리들의 삶에서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자신의 온전한 영광이 부활을 통해서 나타날 때에만 하나님은 만족할 것이다.


[고후 4:17-18]   (17)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6. 매일 죽기 위해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의 마지막 측면이 있다. 지금까지 보았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매일 죽는 것을 배워야 한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매일 죽는다면(고전 15:31), 우리 죽음의 날은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포기하였던 모든 날 중에서 최고의 날이 될 것이다.


        유명한 설교자 C.H. Spurgeon은 그의 설교중 하나에서 이것을 표현하였다;

        “매일 죽는 사람은 죽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자주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단지 한번 더 죽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리허설을 했던 노래 가수처럼, 그가 맡은 역을 완전하기 위한 연극배우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이며, 그것을 성취하는 것에 불과하다. 매일 요단강가에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위해 내려가고, 주님이 죽을 때에 같이 죽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같이 죽는 사람은 당연히 주님이 살 때에 같이 산다. 그들이 비스가 산에 올라갔을 때에, 그들에게 매우 오랫동안 친숙했던 것들이다. 그들은 죽음의 지도를 매우 철저하게 연구를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예술작품을 주셨다. 그는 작품의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최종적인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항상 쉽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삶의 마지막 날에 성도 중에는 커다란 갈등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은 육체적인 면에서, 어떤 것은 사단들의 행패에 의해서이다. 이 땅의 삶에서 우리가 완전한 정돈을 할 정도로 영적인 진보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주었던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들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들도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인식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육체를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신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우리의 몸을 사랑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도교인에게 있어서 몸은 성령의 몸이었다. 우리는 전심으로서 사랑에 넘쳐서 이 몸을 주님에게 바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죽음이 다가오면서, 육신에 있었을 때에 삶이 얼마나 귀하였는가를 알게 될 것이며, 이런 즐거움을 양도하는 것은 어렵다. 아직 오지 않은 영광에 대한 경험은 이런 순간에 우리를 붙잡아 줄 것이다.


        죽음의 날은 임관의 위대한 날을 위한 준비로서 육체를 벗어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이별하는 날이다. 부인 또는 남편, 부모 또는 자녀, 형제 또는 자매, 막역한 친구들, 이 모든 사람을 손에서 놓아야 한다. 이 세상을 떠날 필요한 있는 이런 영적인 기술을 단 하루 만에 배울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 한번만 죽는다; 그러나 잘 죽는 것은 연습을 통해서 배워야만 하는 기술이다.


        때때로, 얼마 동안 집에서 떠날 때가 있다. 떠나기 전에 늦게까지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방에 들어가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정리를 해준다. 잠자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용한 이별을 위하여 침대 옆에 앉는다. 우리는 아주 잠시 동안만 그들이 볼 수 없기를 소원할 것이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위한 가장 적절한 준비는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배워야 한다. 꽉 죄고 있던 모든 소유를 놓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주님,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깁니다.”


        어느 날 실제적으로 놓는 일이 죽음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있었고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다시 영원토록 만나게 될 것이다. 다시는 헤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쓰고 있는 동안에, 결혼을 통해서 우리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되었던 숙모가 죽었다. 숙모는 80살이었다. 오랫동안 그리고 온전히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다. 그녀가 죽은 오후에 그녀는 아마도 아이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찬송가 하나를 듣고 있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세상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 가는 날 천국 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그날 오후가 조금 지나서, 믿음가운데, 숙모는 침대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졌고,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 마음에 이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잠을 자기 위해서 눕습니다.
        나의 영혼을 지켜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깨어나기 전에 죽는다면,
        주님이 나의 영혼을 데리고 가기를 기도합니다.



<< 제 6 장 시험문제>>

1. 휴가 준비와 죽음을 준비하는 나의 자세에는 차이점이 있는가?

2.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3. Jim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4. 죽음은 “패배당한 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5. 천국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

6. 천국에서 받는 복에 대한 묵상은 이 땅에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

7.  스펄전의 죽음에 대한 설교는 어떤 메시지를 나에게 전달하는가?



<<눅 21장 연습하기 : 눅 13-17장의 관점을 가지고>> 범위 : 눅 21:1-4

a. 부자는 어떤 상황에서 헌금을 냈습니까?

b. 과부는 어떤 상황에서 헌금을 냈습니까?

c. 부자는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d. 과부는 왜 칭찬을 받았습니까?

e. 생활비 전부를 바쳐야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까?

f.  당신의 헌금 생활은 과부의 입장입니까, 아니면 부자의 입장입니까?




p.s. 이 책은 " If I should die before I wake"의  "제 6 장 Ready to go"를 번역한 것입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전적으로 번역자인 저의 잘못입니다. 이 책의 번역 내용은 번역자의 서면 동의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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