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Henderson Christian Seminary in New York

If I should die before I wake

Home About Us Academic Program Admissions News &
Event
Gallery Contact Us
LOGIN

 



제 5 강 : 제 4 장 천국은 어떻게 생겼는가?
임 바울  2015-01-07 15:48:48, 조회 : 1,830, 추천 : 219

                                                   제 4 장
                                      천국은 어떻게 생겼는가?


       제 4 장 천국은 어떻게 생겼는가?


        지금 나는 잠을 자기 위해서 누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영혼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깨어나기 전에 죽어야 한다면
        주님께서 나의 영혼을 데리고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거의 2백 년 동안 이런 기도를 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알고 있는 유일한 기도일 수도 있다. 죽을 때에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기도이다. 죽음에 비밀이 있음을 제안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오늘밤에 일을 끝내고 베개에 머리를 놓을 수 있다. 아마도 즐거움과 성취감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 또는 좌절과 실망에 빠져 잠을 잘 수도 있다. 그리고 밤사이에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칠 수도 있다. 주님께서 나를 천국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천국은 무엇과 같은가? 거의 모든 부모들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이 문제는 많은 생각을 요구할 것이다. 다른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서 서투른 답을 우리 자녀들에게 주었을 때에 우리는 분명히 창피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또는 누구랑 결혼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에, 우리는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온갖 힘을 쏟을 것이다. 천국에 대한 질문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정확하게 대답하기를 원한다면 이 질문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스스로 그 대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지 않고서는 어떻게 천국에 대해서 알 수가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정확하게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천국이 무엇과 같은가를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얼마나 많이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고는 아마도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아주 분명한 사실로부터 시작해보자!


1.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기초적인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너무나 확실해서 많은 사람들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거나 또는 그것을 간과할 때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며 우리가 얼마나 죄가 큰지를 알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 시작할 것이다.


        모세는 심오한 방법으로서 이것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주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린다. “[출 3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 그러한 임무를 성취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많은 부담을 가졌기에 다음과 같은 응답을 하였다. “[출 33:12]   (12)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 그는 자신과 함께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를 지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의 인도자를 필요로 했다. 주님의 뜻을 착수하려면 대변인의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동행을 위한 필요성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필요함을 실감하였다: “[출 33:15] (15)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결과적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출 33:16]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그는 하나님 임재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것이 그의 백성을 다르게 만든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순종할 이유가 없다. 후에 다윗왕은 이런 확신을 보여주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신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그리스도 교회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그의 백성은 성령의 거주지로서 알려졌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있으려고 왔다.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지금도 계신다. 그는 우리를 그의 성전으로 만들었다.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세웠다. 그는 우리를 그의 성전으로 만들었다.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세웠다. 하나님은 봉사를 위하여 따로 구별한 매우 특이한 범세계적인 백성으로 창조하였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성취한 모든 것을 우리가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관점이다. 그의 백성에 머문다는 주제가 죽기 전에 다락방에서 주었던 가르침을 주요 요지이다. 오순절에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그의 백성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우리 중에 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속하셨다.


        모세는 이것을 이해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동행을 요구한 이유이다. 주님이 함께 있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모세는 “영광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출 33:18).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는 욕구를 만들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임재가 의미하는 모든 것의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그의 임재를 충만하게 경험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모든 성도들은 그것을 다시 맛보기를 노력하고 개발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망이 요구하는 모든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그의 거주하는 임재를 경험하기를 예수님이 기도했던 이유이다. “[요 17:23] (23)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된다. “[요 17:24]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것이 천국이 무엇과 같은 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조명하여주는지를 알겠는가? 지금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이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있다. 그의 임재 안에 있는 것과 그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천국은 바로 이런 소망의 응답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무한하다. 그는 편재(遍在)하신다. 또는 모든 곳에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재는 그의 백성들의 임재와 똑같은 것이 아니다.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있다. 자신의 언약에 의해서, 그들을 복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있다.



2. 하나님의 내리는 복


         성경에서 가장 초기의 그리고 가장 잘 인용되는 축도 또는 “축복 기원문”중에 하나는 아론의 축도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제사장이 선포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축복의 기원이다. 그 안에 있는 각각의 진술은 전 구절보다 다르고 더 나아지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똑같은 내용이다.


[민 6:24-26]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주님이 너를 축복하고 너를 지키신다는 것은 하나님 임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전달한다. 그는 백성에게 임하며 그들을 깊이 돌보신다. 계속되는 구절에서, 조금은 다르지만 더 풍성한 방식으로 복을 받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서 돌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주님은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아버지의 복과 돌보심이 그의 얼굴에 나타난다. 우리에게 그의 복을 나누어주면서 그의 얼굴, 은혜와 즐거움으로 비추어 준다. 그는 그의 백성을 사랑하며 기뻐서 하는 것이지,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모의 시선은 실제로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때때로 더 많은 상처를 준다는 것을 거의 대부분의 자녀들은 알고 있다. 이 원리는 여기에서도 동일하다. 아버지 얼굴의 모습과 시선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서 그리고 우리의 삶을 돌보아주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천국의 아버지가 우리를 즐겁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기독교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경험임에 틀림이 없다. 아버지가 우리를 기뻐하심으로서 우리의 삶에 안주하기 위해서 그의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요 14:23) 이 지구 땅의 모든 즐거움을 합친 것을 초월할 것이다. 복을 받고 지킴을 받는 것은 사랑하고 돌보시고 웃으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친다. 그의 사랑이 우리를 감싼다. 그는 우리에게 은혜스럽다.


        아론 축복의 마지막 구절은 첫 번째 구절을 훨씬 더 확장한다: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너에게 돌리고 너에게 평강을 주기를 원한다.” 실망하는 부모의 모습만큼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천국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가 우리를 안 보려고 한다는 생각은 견딜 수가 없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를 향하여 바라본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의 등을 돌릴 수 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책과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죄를 담당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갈 때에, 아론의 축복은 거꾸로 되었다.


[민 6:24-26]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24)여호와는 네게 <저주를> 주시고 너를 <버리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서 돌이키시고 <고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서 <돌리고> <고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우리를 은혜롭게 바라보시는 그의 얼굴의 복을 이제 우리는 경험한다. 그의 얼굴이 빛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비추고 있다. 그의 얼굴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얼굴을 드신 것이다. 이것은 일시적인 평강이 아니다. 전에 우리의 적이었던 하나님과 화해가 됨으로서 갖게 되는 영속적인 평강이다.


        이런 함축적인 의미로부터 생각할 때에, 천국이 왜 영광스럽고 빛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롬 5:1-2]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모세에게 있어서,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 임재의 복은 우리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인정하시는 그의 얼굴의 복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준다. 모세가 하나님 임재가 자신들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부르지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나님 임재의 약속은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요청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가족


        그러나 이것은 천국에 관한 책이다. 이 모든 것이 천국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죽음 뒤에 삶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고 우리에게 양자(養子)의 영을 주었다(롬 8:15-17, 갈 4:4-7). 성령은 이제 우리와 함께 거한다. 그리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있을 것에 대한 보증이다(엡 1:13-14).

롬 8:15-17
갈 4:4-7
엡 1:13-14


        요 14:1-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명한 말씀에 비추어서 이것을 생각해보자. 이것이 말하는 위로와 평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구절이다.


요 14:1-3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였다는 천국에 있는 “집”은 무엇인가? 요 14:2절에서 집(mansion)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신약에서 이 구절에서만 사용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생각은 우리가 천국에 집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주지가 거기라는 점이다.


        비록 우리가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집(house)과 거주지(home) 사이에 갖는 차이점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에, 우리의 집(house)이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home)을 말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한 것은 천국에 어떤 집(house)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즐기는 관계의 본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home). 그것은 집(house)이 아니라 사는 곳(home)이다.


        집(mansion)으로 번역된 단어가 나타나는 다른 곳은 요 14:23절이다.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거처한다(abode)는 것은 거주한다(home)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 때에 일어나는 그리스도와 그리고 아버지와 우리들 간의 깊은 관계이다.


        예수님은 14장 초두에 똑같은 것을 말하였다. 그는 집을 짓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 안에서 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되었을 때에 그들이 경험할 관계의 심오함을 준비하기 위해서라고 당황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땅에서 경험했던 어떤 것보다 더 깊고 풍성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을 것을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무엇과 같은가에 대한 부분적인 답으로서 완전한 관계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절대로 외롭지 않을 것이고, 친구가 항상 있을 것이다. 소외된 감정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온전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부서진 관계가 회복되고 그리스도와 형제가 천국에서 즐기게 될 것임, 모든 면에서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천국에 있다는 것의 본질은 주님과 관계가 열리고 절정에 이른다는 것을 배우게 되면, 천국에 있을 때에 우리의 것이 될 관계의 풍성함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영향력이 우리들의 삶에 미치게 될 것이다; 천국으로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거짓말이다. 성경은 매우 다른 견해를 보여준다. 실제적인 문제는 우리가 충분하게 천국을 향한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한 사람은 예배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극적인 차이를 일으킬 것이다. 참되고 영속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죽음 뒤의 삶이 죽음 전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관계성으로서 천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것들을 더 분명하게 보도록 도와준다.



4. 영혼
 

       “죽었을 때에 너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기독교인들에게 해보자. 이것은 분명히 함정이 있는 질문이기에 우리 대부분은 선뜻 대답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이 표현 속에 담겨져 있는 함정은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이 응답을 하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the soul) 천국에 간다.” 또는 “그것은 (the soul)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 또는 이와 유사한 말들을 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질문이 실제로 강조했던 생각의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영혼은 우리의 사고방식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질문을 던져보자. “죽었을 때에 너의 영혼이 천국에 간다면 너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보통의 대답이 “천국 안에 있다”는 것이 보통의 응답이다. 물론이다. 그러나 첫 번째 대답은 “그것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죽었을 때에 “인격으로 존재”였던 우리가 “비인격적인 존재”로 변하는가? 물론 우리가 죽었을 때에 “우리가 그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했을 때에 바울의 말을 고려해보자.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였다. 그는 핵심을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두었다.


빌 1:22-24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육체 안에 남아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어떤 “비인격적인 것”이라는 암시를 찾아볼 수 없다. 바울 그 자신이 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지구에서 그가 누렸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하고 깊은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기독교인이 죽었을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 우리가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지금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지금도 함께 있지만, 그러나 마지막으로 추수되어야 할 것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는 죽음 뒤에 삶에 대해서 세 가지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① 그리스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풍성하고 깊어진다.
②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죽었을 때에, 우리가(우리의 일부분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
③ 천국에서의 우리의 삶은 우리를 위한 막다른 골목이 아니다. 이 길을 통해서 앞으로 올 것이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5. 천국에 대한 묘사


        “천국은 어떻게 생겼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일부분으로 천국에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경험하는 것임을 볼 수 있는 시력이 생겼다. 옛날, 루터교 신학자 J. A. Bengel은 이것을 매우 아름답게 표현하였고, 바울의 말에 어울리는 주석을 하였다. “나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죽는 것도 유익이다”라는 구절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죽는 것은 더욱 그리스도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천국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어본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 지금 우리를 위해서 어떤가를 물어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 질문이 당신을 혼란스럽게 하는가? 이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천국을 가기를 원한다. 천국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통치되고, 그의 임재가 충만하다. 그를 사랑하고, 그의 임재가 모든 곳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한 장소이다. 사랑하는 분과의 교제와 예배와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펼쳐지는 곳이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는 다면, 그때에 우리가 천국에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천국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천국은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풍성하고 최고의 절정에 이르는 곳이다. 우리가 지금(now) 그리고 이곳에서(here) 그의 은혜와 그의 임재를 즐긴다. 그때에 (then) 그리고 저곳에서(there) 우리는 그의 임재와 은혜를 충만하게 즐긴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지금 경험한 은혜와 임재를 한번 생각해보라. 천국에서 바로 이 경험이 영원히, 충만하게, 강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자서전을 보면 이 사실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증거한다. 각 기독교인은 각자가 자신이 본대로 이것을 설명하였다; 북아프리카의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은 “그의 마음의 휴식으로”, 독일의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낙원의 문이 열렸다”고 하였다. 프랑스인 파스칼은 “불”에 대해서 말했다. 영국인 웨슬리는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라고 하였다. 아이작 왓트는 노래를 이것을 표현하였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무덤에서 나오는 영광을 발견하였다.” 천국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경험들이 절정에 이르는 곳이다. 이런 즐거움이 얼굴을 마주보면서 분출될 것이다.


        “천국은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사람들이 질문을 할 때에 천국을 통치하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보다는, 천국에 모습에 대한 설명을 기대하고 물어본다. 그러나 천국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천국은 단순히 장소가 아니다.



6. 계시의 비전


        계시록은 천국이 어떤가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담고 있다. 계 4,5,6장은 천국의 영광에 대한 생생한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아름다운 이상을 통해서, 요한은 열린 문을 통해서 하늘을 본다. 그는 신적 임재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앞에는 장엄한 보좌가 놓여있다. 영광스러운 분이 그 위에 앉아있다. 그 주위에는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인다. 4 명의 신비스러운 생물이 그 주위에 있으며, 마치 예배 인도자처럼 행동을 한다.


계 4:8


        4 명의 생물이 보좌에 앉아있는 영원토록 살아있는 하나님에게 영광, 경배, 찬양, 감사를 올릴 때마다 24 장로는 보좌에 앉아있는 하나님에게 엎드려, 영원토록 살아있는 하나님에게 경배를 드린다. 보좌 앞에 그들은 자신들의 면류관을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 4:8-11


        이것은 풍성하고, 회화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의 목적은 분명하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림을 우리들에게 말한다. 천국은 예배의 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드라마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음을 제 6 장에서 말한다. 도살당한 어린양으로서 기술된 그리스도가 하나님 섭리의 책을 보전하기 위한 일곱 인을 하나씩 떼기 시작한다. 다섯째 인을 떼었을 때에 천국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좀 더 보여주고 있다.


계 6:9-11


        매우 신비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여러 가지 면이 계시록에 담겨져 있다. 그러나 몇 가지 면은 분명하다.    


        어린양이 5번째 인을 떼었을 때에,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제 5장에서 기술되었던 사람들과 똑같은 광경이 아니다. 제 5 장에 있는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일을 하였다. 제 6 장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에게 부르짖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큰 소리로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심판을 하실 것인가를 물어보고 있다.


        천국에 있는 제단 밑에 있는 이 영혼들은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녀로서 주님에게 간구하는 것처럼 주재이신 하나님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는 사도 바울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 말할 때에 사용된 단어와 똑같다( 롬 8:15). 큰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면서 "아바, 아버지“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높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단지 반영한 것이다(막 114:36, 히 5:7).


        하늘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이것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다. 천국은 궁극적인 목적 또는 기독교인을 위한 피난처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해준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도록 계속해서 간구하고 있다.



7. 다가오는 왕국


        여기 그리고 지금 우리는 초림과 알려져 있지 않는 재림사이에 살고 있다. 만물이 절정에 이를 때까지 신비한 방법으로서 이 긴장이 계속될 것을 계시록은 보여준다.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 점이 확인된다. 참으로 마지막 세대에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때까지 긴장은 계속될 것이다.


        천국 성도들이 불평하고 중얼거린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계 6:10] (10)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주기도문에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한다. “[마 6:10] (10)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말속에는 아버지가 지구위에 하나님의 왕국을 충만하게 나타내어줄 것을 우리가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권세와 정사를 다 부수고 난 다음에 아버지 하나님에게 왕국을 건네줄 때에 이 간구가 응답이 될 것이다(고전 15:24).


        따라서 이 간구는 불평 또는 중얼거림의 기도가 아니다. 원수를 갚아달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제단 아래에 있는 순교자들은 주님이 그들에게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왕국의 도래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는 왕이 오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이 완성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이런 간구는 지구에 영광의 충만함이 나타나기를 요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근거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가 다시 올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을 성취해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의 공의는 충만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리스도 왕국의 도래를 원하는 주요 관심사는 그의 영광이지, 우리 자신의 편안함이 아니다.


        여기에 “천국은 무엇과 같은가?”라는 질문에 부분적으로 성경이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나태함 차가움에서 해방되어서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연약함, 수치, 그리고 죄책감이 없이 그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사랑으로 구속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좋아하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또한 천국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을 하면서, 우리의 최종적인 운명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제단아래의 영혼처럼, 주님이 이 세상을 끝내고 다가올 세상이 시작될 것을 간구하게 될 것이다. 그의 통치가 전 피조물위에 완전히 성취되기를 기원할 것이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주님?”이라고 우리도 묻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처럼,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떨어져서 오랫동안 살아야 한다. 전화도 하고, 편지도 쓰고, 카드도 보내고, E-mail도 하지만 그 시간은 천천히 간다. 대화가 자주 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당장에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아내와 자녀들의 정경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집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거기에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바로 그곳이 가정이다.


        천국은 이와 같다. 물질적인 환경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의 만족감도 그리스도와 그 자신의 가족과 그자신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팔을 활짝 펴고 예수님과 그들은 우리를 반길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얼굴과 얼굴을 보면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즐거움은 그에게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가족과 함께 그를 경배하고 노래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천국은 어떤가?” 집에 가는 것과 같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 James Barrie의 유명한 연극 “Peter Pan”의 말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된다. “죽는 것은 큰 모험이 될 것이다.”



<<제 4 장 시험문제>>

1. 천국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가질 수가 있습니까?

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 왜 당신을 놀라게 합니까?

3. 하나님 임재의 기본적인 진리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들을 향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민 6:24-26)?

5.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는 집은 무엇입니까?( 요 14:2)

6. 죽으면 “영혼이 천국을 간다”라는 말을 주석하라

7. Bengel의 설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8. 계시록에서 보여지는 천국의 모습은 무엇인가?

9. 제단 밑의 순교자는 무엇을 간구하고 있는 것인가?

10. 천국은 당신에게 모험인가?


<< 눅 17 장 연습하기 : 눅 13-15장의 관점을 가지고 >>범위 : 눅 17:22-37

a. 이것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b. 인자의 날이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c. 왜 인자의 날 하루를 보지 못한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까?

d. “인자의 날을 볼 수 없다”라고 하는 이 말은 제자들에게 한 말입니까, 아니면 바리새인(눅 17:20)들에게 한 말입니까?

e. 왜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까?(눅 17:23)

f. 인자의 날을 번개로 비유한 이유를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g. 왜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h. 왜 버림을 받아야 합니까?

I. 인자의 날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눅 17:26절을 가지고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주의 : 이 구절은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질문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도 한 말입니다. 한번 더 생각을 해서 질문에 답을 주셔야 합니다.

p.s. 이 책은 " If I should die before I wake"의  "제 4장 What Will Heaven  Be Like?"를 번역한 것입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전적으로 번역자인 저의 잘못입니다. 이 책의 번역 내용은 번역자의 서면 동의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admin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5-04-30 20:36)


  추천하기   목록보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9  제 9 강 : 부록    임 바울 2015/01/31 279 1558
8  제 8 강 끝맺음    임 바울 2015/01/30 228 1332
7  제 7 강 : 제 6 장 자 천국으로 가자!    임 바울 2015/01/24 219 1614
6  제 6 강 : 제 5 장 아직 좋은 것이 남아있다    임 바울 2015/01/14 235 1711
 제 5 강 : 제 4 장 천국은 어떻게 생겼는가?    임 바울 2015/01/07 219 1830
4  제 4 강 : 제 3 장 천국으로 가는 길( The Way to Heaven)    임 바울 2015/01/02 195 1232
3  제 3 강 : 제 2 장 죽고 난 다음에( After Death)    임 바울 2015/01/02 178 1025
2  제 2 강 : 제 1 장 마지막( The End)    임 바울 2015/01/02 195 1097
1  제 1 강 강의 목적및 소개 , 들어가는 말    임 바울 2015/01/01 175 1277

    목록보기 1
       

 
www.hendersonny.org // email: info@hendersonny.org

Copyright © 2018 Henderson Christian Seminary in New York
NY : 40-36/38 78th Street, Elmhurst, NY 11373
General and Admission Office of NY & NJ 718.810.3248 or 646.338.7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