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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Back to the christian life, 제 20 장 하나님에게 영광이 있다
편 집 자  2011-11-04 20:12:58, 조회 : 2,002, 추천 : 377

                                                       제 20 장
                                            하나님에게 영광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삶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와 비 개혁주의를 구분하는 여러 가지 주제를 조사하였다. 우리의 칭의와 최종적인 성화에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기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가 점진적인 성화와 영화에서 계속해서 하시는 일도 보았다. 그리고 우리의 최종적인 성화 또는 영화에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음도 보았다. 지난 두 개의 장에서, 두가지 특별한 개혁주의 주제 즉,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자유와 성도로서의 제사장직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가 초기에 보았고 계속해서 보았던 것처럼, 기독교 삶의 개혁주의 견해에 여러 가지 주제들을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안에서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매우 친근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의무적으로 동의를 한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전혀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있다.


        삶의 주요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우주의 하나님에게 어떤 영광을 더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말한 것이 아니다. 또는 그의 본질중에 어떤 것을 더 영광스럽게 만든다는 것도 아니다. 가득찬 그릇에 한방울의 물도 더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영광이( 행 7:2) 무한하시고 완전히 영광스럽지만, 그 자신의 본질적인 영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였다. 창조와 구속에서 이런 일을 하셨다.


        창조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어떻게 영화롭게 하였는가를 인식한 시편기자는 주장하기를 “  (1)(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해서 구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배웠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래 참으신다고 하였다.“ (22)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롬 9:22-23).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긍휼을 지정한 그릇에 부음으로서- 주권적으로 은혜로 회심시킨 사람, 연합과 교제의 언약적 관계로 들어가게 한 사람, 세상에서 교회로 부른 사람,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기초로 의롭다고 선포함으로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자신이 한 일에 의해서 , 지금 하고 있는 일로,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에서 아직 하지 않는 일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였다.


        삶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우리를 불렀을 때에, 그는 자신의 영광으로 우리가 취하도록 인도한다. 그럼으로서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하신 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서 응답하도록 하신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도록 우리를 불렀을 때에, 우리는 삶에서 그의 영광을 반영하거나 선포하도록 불렀다.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에게 돌리면서 살도록 불렀다(고전 16:29, 시29:2). 우리가 그를 찬양할 때에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시 50:23, 86:12). 그를 경외하고 경배하면서 영화롭게 한다(계 14:7, 고전 16:29, 시29:2). 우리의 몸으로 그를 대항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면서 영광을 돌린다( 고전 6:20). 그 안에서 믿음이 성장함으로 영화롭게 한다(롬 4;20). 그를 위해서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서(요 15:7-8), 그리고 선한 일을 통해서 그를 순종함으로서(마 5:16) 영화롭게 한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제한이 없다. 우리가 믿고 하는 모든 일에서 그의 영광을 반영하고 선포하면서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를 즐거워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의 눈을 그에게 맞추어야 하고 매일 매일 새롭게 그를 즐거워해야 한다. 심지어 건강이 약화되어도 ,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라고 다윗과 함께 선포해야 한다(시 73:25-26). 우리가 본래 그리고 스스로 공허하고 불충분하지만, 우리의 충만함과 충분함은 그에게서 발견되고 그에게서만 발견된다. 우리가 지금 영광의 주님과 함께 연합과 교제에서 참이지만 불완전한 기쁨을 경험하지만, 우리가 그의 온전한 영광속에 있을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할 날을 열심히 고대해야 한다. 영광의 주님을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고, 그의 임재에서 우리는 기쁨의 충만함을 느낄 것이다( 시16:11). Thomas Watson이 상기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 우리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할 때까지 충만하게 우리 자신을 즐길 수 없다.“


2. 진리를 다시 살리자.
        우리의 즐거움이 충만해질 날을 고대하면서, 비록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를 즐거워하면서 우리는 여기서 그리고 지금 살고 있다. 우리가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함을 인식시킴으로서, 개혁주의 신앙은 온전한 영광중에 있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우리가 그의 영광을 위해서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사이에 있는 피할 수 없는 연결을 강조한다. 그의 영광에 대해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선반에서난 찾을 수 있는 생명없는 진리가 아니다. 시장에서 집으로 가지고 와서 냉장고에 집어넣고 다시는 찾지 않는 물건이 아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모든 진리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한번 부각되어야 한다. 부각되었다면, 그것을 지켜야 하고, 준비해야 하고, 맛을 보아야 하고, 우리의 모든 존재에 영양분을 주어야 하고, 힘을 주어야 하고, 유지를 시켜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개혁신앙의 진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 생명을 주는 영양분을 제공한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개혁주의자들의 모토인 soli Deo gloria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맛을 내게 한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 신앙과 실천, 교리와 삶 , 진리를 아는 것과 그대로 사는 것 사이에 있는 연결을 이해하는 것은 개혁주의자들이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준 진리의 체계라고 개혁주의자들이 설득하는 일에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해를 했다면, 온전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론 뿐만 아니라 행위에서도, 전 삶을 지배한다.


Abraham Kuyper는 개혁주의 신앙을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서 모든 삶과 힘을 바치는 높고 거룩한 소명으로 바르게 설명했다. 카이퍼는 알았다. 그의 뛰어난 업적중에서, 그는 뛰어난 정당의 창설자였고, 대학교 설립자였고, 뛰어난 신학자였으며, 분명한 목사이고, 영향력있는 집필가이며, 훌륭한 교수였고, 뛰어난 수상이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그는 삶의 모든 영역을 그리스도의 주권에 바쳤다.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창조물에는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일관성있게 “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이다”라는 방식으로 전 생애를 살았다.


        카이퍼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니다. 이전에 종교개혁자들은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삶을 살았다. 오늘날의 교회는 적용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포옹하고, 흉내내기 위해서 팔을 넓게 벌리고 있다(모방주의). 또는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서 도피하며 산다(도피주의). 훨씬 더 나쁜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 자신의 문화를 창조하면서 세상에서 벗어나고 있다. 일단 안전하게 숨고 나면, 그들은 세상을 흉내내는 또 다른 문화를 창출한다. 기독교 음악, TV, 오락등과 같은 것에서 이런 것들이 보인다.


        현대교회에서 “모방, 회피주의”의 경향이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자들과 그의 후계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들이 믿고 행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했다. 강의실에서, 미술에서, 오케스트라에서, 법정에서, 실험실에서, 정당에서, 설교단에서 그리고 평신도의 자리에서. 그들은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무비판적으로 그것을 흉내내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위험과 기회를 가진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가 그들을 세상에서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세상에 있는 우리들을 악한 자에게서 보호하신다는 사실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요 17:5). 루터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면전앞에서 살았다( Coram Deo). 그리고 칼빈의 말처럼, 세상에 있는 것중에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이 점에 관해서 개혁가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것처럼, 개혁자처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행동들을 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 개혁가들은 말한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성도들은 인생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삶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신적 주권과 떨어져서 일어날 수 없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모든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의 은혜에 의해서 모든 삶에 충실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성경적 진리를 적용시켜야 한다.


        성경을 따르는 충실한 개혁주의의 믿음은 , 항상 성경에 따라서 개혁을 하는 개혁주의 신앙은 그것을 수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세계관을 배양하도록,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우도록 요구한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선함을 인정하면서 회피주의를 반대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여전히 타락한 상태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모방주의를 반대한다(롬 8:18-22). 하나님의 타락한 창조물들은  참된 개혁주의 신앙이 구속의 필요성을 선언한다. 모든 나라로 하여금 제자삼는 복음주의 업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에서 문화명령을 성취해야 한다. 지구를 채우고, 다스리고, 그의 대리자로서 그리고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영광으로 운영함으로서 그가 명령한 모든 것들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마 28;19-20, 창 1:27-28, 벧전 2:9). 그리스도가 구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주이고, 그의 주권은 거기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창조물을 포함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문화의 주가 되신다. 모든 것의 주로서, 그는 모든 곳을 다스리고, 모든 사람을 다스리고, 그의 말씀에 따라 그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


        개혁주의 신학은 항ㅅ아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의 필연적인 요구를 강조하기 때문에,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구별된 기독교인의 세계관, 또는 인생관을 낳았다. 다음 페이지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리의 모든 삶을 변화시키고 구별된 기독교 세계관을 배양하도록 어떻게 자극시키는가를 조사함으로서 결론을 맺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신학과 신앙안에서 하나님을 충만하게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3. 모든 것의 주님
        태초에 하나님이 있었다. 무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다(창 1:1). 또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도 창조하였다(출20:11, 느9:6).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나왔고, 그를 통해서 나왔고, 그에게로 간다. 영광을 영원토록 그에게 돌려야 하는 이유이다(롬 11:36). 땅은  하나님의 소유로 가득찼다고 다윗은 공포한다(시104:24). 그는 모든 언덕위에 있는 산양을 소유하고 있다. 시편기자가 말한 온 땅은 주님에게 속하였다(시24:1). 사실,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그에게 속한다(대상 29:11, 창14:19, 출9:29, 신4:39, 10:14, 욥41:11).


        영원한 창조주와 소유자인 그는 혼자서 모든 것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신다. 그의 권한에는 제한이 없다. 권한이 어떤 영역에 한정되어 있는 정부 직원과 같지 않다. 하나님의 권위가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의 지배는 절대적이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것이다. 그가 모든 위에 주님으로서 있으며 모든 것에 권세를 갖고 있다(대상 29:10-11). 그가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고, 모든 곳 위에, 모든 사람위에, 모든 것 위에 권세를 가진다. 그의 통치는 땅끝까지 이른다(시59:13, 103:19, 느9:6). 주님의 그의 보좌를 하늘에 폈다; 그의 주권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시103:19). 그는 하늘에서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마28:18).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자기의 뜻을 성취하였다(마 6:10). 모든 곳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는 끝이 없다. 그의 보좌는 영원하다( 시93:1-2, 97:1-2, 99:1-2). 모든 것 중에서 뛰어나신 분이다(골 1:18).


4. 성경을 위한 새로운 싸움  
        뛰어난 창조주, 소유주, 그리고 통치자- 우주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의 주님-는 모든 것에 영화롭게 됨으로서 우리들의 삶에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는가를 계시했다는 사실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리가 믿고 행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기 위해서 삶에서 하나님을 우선으로 두는 방법에 대한 것을 계시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과거에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마지막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의 아들 안에서 자신을 나타냈으며, 아들에 대한 기록된 증거를 우리들에게 주셨다(히 1:2). 그것이 신약과 구약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배운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행위들을 요구하는가를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주하는 혜택을 갖고 있다. 그는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모든 영역과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 illumination)을 해주시고  순종할 수 있도록 능력도 부여하여 주신다. 유행하는 신앙과는 정반대로, 성령은 성경떠나서 우리들을 인도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을 이끄신다. 성령께서 이 목적을 때문에 성경이 영감된 것이다(요 14:26, 16:13, 17:17, 딤후 3:16-17).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곳에서 인도를 찾고 있다. 중요한 도덕적 또는 윤리적 결정에 무엇을 가장 기초로 삼고 있는지를 물었을 때에,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놀라웁게도 ‘성경’이라는 단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성경을 언급한 소수의 사람도 그들이 믿고 행하는 모든 것을 위한 기준이 아님을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보여주었다. 게다가, 똑같은 조사단은 거듭났다고 하는 4명중에 1명이 그들은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다고 고백하였다. 복음주의자들 중에, 그 숫자는 조금 낫지만,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순종할 것을 보장하지 않지만, 한가지 근심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우리가 그것을 읽지 않고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성경이 우리가 믿고 행하는 것을 위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복음주의자로서, 우리는 성경의 무오류성(無 誤謬性)에 대한 논쟁에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싸움을 지금 잃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분명히 어떤 성도들은 성경이 온전하다고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나서 돌아서서 그것을 무시한다.


        이런 신앙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개혁주의자들의 후계자인 복음주의자들이 개혁의 공식적인 원리를 잊어버리게 된다: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하고 해야 하는 모든 것을 위한 최고의 기준이다. 그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우리가 성경을 보충하려고 할 때에, 결국 우리는 성경의 자리를 빼앗는 것을 결말이 난다. 그리스도 때에, 바리새인들은 성경과 함께 전통을 두었다. 그리고 전통은 성경을 짓밟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값싼 것들이 성경을 대신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값싼 대체물들이 실제로 성경을 짓밟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담성을 갖고 있지 않다. 성경이 그들에 대하여 평가할 때에, 그들은 종종 돌아서서 다음과 같은 비장의 카드를 내어놓는다: “ 성경은 ...대한 교과서가 아니다.” “ 성경은 믿음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에 대한 것은 아니다.” “ 성경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쓰여졌지만, 우리가 이런 것에 대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지 않다...”“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연속해서, 비장의 카드가 나오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모든 삶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의 필연적인 권위와 충족성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중요한 도덕적 또는 윤리적 결정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결정을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준비케 하기 위해서 영감되었고,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딤후 3:16-17).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준비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믿는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에게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가(벧전 1:15,22-25)? 거룩함이 모든 일에 유익하다는 것을 믿는가(딤전 4:8)? 우리의 생각조차도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믿는가?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한다(고후 10:5). 예술에 대한 우리의 생각, 과학, 역사, 수학, 경제, 심리학, 철학등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그리스도에게 복종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져 있기 때문이다(골 2:3).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있고 만물이 그 안에 있고, 그안에서 유지되기 때문이다(골 1:16-17).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머물도록 해야 한다. 말과 행위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에게 감사를 돌리면서 해야 한다(골 3:17).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까지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간에, 우리는 그의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전 10:31).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한다(롬 14:7-8). 우리는 마음과 몸과 정성과 온힘을 다해서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우리 자신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마 22:37, 신6:5).



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경에 따라서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해야 하기때무네, 가장 중요한 점에서 성경은 절대로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명백하게, “성경은 프랑스어를 어떻게 말하는가, 차를 어떻게 고치는가,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가, 사업을 어떻게 운영하는가를 상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John Frame이 주목한 것처럼, “이 모든 활동에서 우리 위대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을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아주 상세한 내용의 명세표 또는 전체의 적용을 말하고 있지 않지만, 성경은 원리를 통해서 중요한 것들을 우리들에게 말한다. 바르게 해석을 한다면, 삶의 모든 것에 그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구별된 기독교 세계관을 세우는 우리의 업무는 성경을 충실하게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상황에 성경적인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분명하게, 우리의 작업은 쉽지 않다. 때때로, 이것은 고통이 수반되는 연구가 필요하고 매우 어려울 수 있다(딤후 2:15, 벧후 3:16-17).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일이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일이 기독교 세계관을 세우는 것임을 이해했다. 그 당시에 이런 단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위의 삶과 관계는 주님에게 거룩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 똑같은 말하고 있는 셈이다. J .I Packer에 의하면, “청교도들은 모든 기독교인의 삶이 -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물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 가족, 교회, 세상과의 그의 관계: 그 자신과의 관계 즉 자기 훈련과 자기 관리등- 항상 주님에게 거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세기에 글을 쓴 , J. C. Ryle은 주님에 대한 청교도들의 거룩의 개념은 “삶에서 모든 의무와 관계에 충실함”으로 기술하였다. “이것인 참 거룩한 사람의 증표이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잘하려고 노력한다. 이 사람은 좋은 남편과 좋은 아내가 될려고 발버둥친다. 좋은 부모, 좋은 자식, 좋은 일꾼, 개인적으로 공적으로 좋은 사람, 사업에서 좋은 사람, 그들의 가정생활에도 좋은 사람이다.”


        주님에 대한 청교도들의 개념은 정신적인 활동만을 말하고 있지 않고, 각 개인의 삶과 사회적인 단체에서 만들어가는 것들이다. 기도실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진리를 찾고, 거실과 교회와 가게와 시장에서 찾은 진리를 적용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모든 삶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 주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았다. 바로 이것이 청교도들이 모든 삶에서 그리스도에게 거룩하려고 노력한 이유이다.


        대조적으로,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우리 개인적인 삶의 어떤 영역으로 제한을 둔다. 일반적으로 모든 삶과 문화위의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한다. 기껏해야, 우리 삶의 일부분만이 거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손해를 입을 정도로, 풍성한 개혁주의 유산을 손상시키고 있다. Kuyper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엄격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봉사에 바쳐져야 함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신앙을 집안에만 또는 교회에만 제한하는 것을 거절했다. H Henry Meeter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이 현명하다. 참된 개혁주의 성도는 “ 영원한 위한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관계된 문제들도 그의 충실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기에..... 모든 삶에서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썼다.” 카이퍼와 Meeter의 의견에 동의를 한 , Clareance Bouma는 그리스도 주권에 대한 개혁주의의 바른 이해에 대해서 바르게 주장하였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기독교인의 증거를 요구한다. 집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국가에서, 모든 사회적인 영역에서 증인역할을 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만이 전부가 아니다. 삶과 관계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모든 인간의 합법적인 곳에서 왕을 위하여 군인이 되는 것이 - 이것이 참되고, 온전한 기독교인으이 본질에 속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칼빈주의자들이다-, 이런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실제로 칼빈주의의자들이다.”


        Bouma는 우리가 구원을 받은 죄는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참된 구원은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구원전에, 우리는 정말로 부패했다. 사람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악한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죄의 타락과 오염에 의해서 우리의 삶 모든 부분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죄가 모든 삶에 영향을 주었고, 참된 구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든 삶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죄로부터 구원은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인간의 모든 면들이 구원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참되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이 전체적인 것임을 고려하면서 , Meeter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할 때에, 그는 그 사람 전체를 구원한다. 전인(全人)은 하나님의 요구에 헌신해야 한다. 그가 교회에 있을 때에만 아니라, 장사를 하고 정치를 하고 어떤 종류의 사회활동에도 헌신해야 한다. 삶의 어떤 부분도 제외되서는 안된다. 전체적으로 인생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대로 움직여야 한다. 정치, 사회 그리고 사업 관계, 가정 관계, 교육, 학문 그리고 예술도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삶을 통치해야 한다.”


        모든 것의 주(主)라는 그리스도의 요구라는 관점에서 보면, Herbert Schlossberg와 Marvin Olasky가 기독교 공동체에 던졌던 통찰력 넘치는 질문에 우리 자신은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리스도난 개인적으로 우리들의 삶의 주이시고 삶과 문화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이면서 모든 삶을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France Schaeffer의 유명한 질문으로 확장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물론 프란시스 쉐퍼의 질문에 있는“그렇다면”이라는 단어는 다른 같은 완전한 질문에 대한 의미를 산출하고 탄생케 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주이기에, 모든 삶에서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고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삶, 가정, 교회, 직장, 문화,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가정, 직장, 문화 나라에서 너의 삶은 주님에 대해서 거룩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는 모든 삶의 주이고 너의 삶의 모든 것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면, 그럴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나서 당신은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6. 오늘날 선택하라.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주님이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의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자율을 주장할 수 있는 삶의 부분이 하나도 없다고 , 알아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음을 Frame은 주목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위하든지 또는 그리스도를 대항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무관심과 분할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를 위하던가 아니면 대항하던가 밖에는 선택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경의를 표하던지 또는 그를 대항하여 반역을 하는 것 밖엔는 없다. 개혁주의 신학자 A. A. Hodge는 절도있게 우리들에게 상기를 시켜준다,

        “ 땅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이 교회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우주를 목표삼아야 하고, 그의 최고의 통치를 삶의 모든 부분까지 확장해야 하고,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교회적인 모든 인간 단체들을 의의 법에 순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모든 충성된 기독교인들의 의무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우리의 능력안에 있는한, 인간 사회와 그의 모든 단체와 기관들을 구별된 기독교적인 기초위에 세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무관심과 하나님 나라의 법과 세상, 왕, 마귀의 법으로의 분할은 의의 왕에 대한 반역이다. 성경은 , 왕국에 대한 위대한 법률서는 훌륭하게 적용을 할 때에,  모든 관계된 인간의 삶의 행위를 규정하는 원리를 기록해놓았다. 어떤 타협이나 수정도 있어서는 안된다. 도덕적인 인간의 모든 삶에 대한 규정으로서, 왕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의 어떤 영역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를 대항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모이지 않으면, 우리는 흩어버리는 사람이 된다. 이런 대조에 대해서, Jay Adams가 다음과 같이 썼다,

        “두개의 나무를 가진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는 허락되고, 다른 하나는 금지되었다) 천국과 지옥에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까지, 성경은 두가지, 그리고 오직 두가지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길과 다른 모든 길. 따라서 사람은 구원을 받거나 받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거나 아니거나이다.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이 있고, 저주의 산 에발산이 있다.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이 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고 영원한 파멸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이 있고 우리를 대항하는 사람이 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있고 밖에 있는 사람이 있다. 삶이 있고 죽음이 있다. 선이 있고 악이 있다. 빛이 있고 어두움이 이TEk. 하나님의 왕국과 사단의 왕국이 있다. 사랑이 있고 미움이 있다. 영적인 지혜와 이 세상의 지혜가 있다.”

        동산에서, 하나님은 사단과 전면전을 선포했다. 천사와 마귀에 의해서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이 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전쟁이 땅에 있다.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 오직 양자택일이 있을 뿐이다. 비 무장 지대는 없다. 중간 지역은 없다. 중성은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려는 이스라엘의 자녀처럼, 우리도 역시 누구를 섬길 것인지를 오늘날 결정해야 한다.


6. 영광은 준비되었다
        우리가 무엇을 택하든지 간에,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면, 그는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영광스럽다. 그를 대항할려고 선택한 사람에게서도 영광을 받는다. 바울은 진노의 그릇을 멸망을 위하여 준비되었다고 부르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이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 오랫 참은 것과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라고 하였다(롬 9:23-24).

        이 구절은 우리들에게 특이한 성경적 대조를 제공한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던 대조를 이 세대의 절정 때에 이루어지는 대조 속으로 집어넣고 있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전혀 다른 두 운명을 준비하였다. 하나는 영광이요, 하나님은 멸망이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요점은 하나님은 양쪽의 그릇에서그의 영광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커튼이 올라갈 때에, 하나님은 양쪽의 그릇에 의해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신적 극장에서 전혀 다른 두 역할을 감당한다. 하나님은 파멸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의 반역조차 긍휼의 그릇에 보여준 영광의 부요함을 알리는 일에 사용하신다.

        영광을 위하여 준비된 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긍휼의 그릇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이 회심시켰던 사람, 언약의 백성, 교회,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롬 9:24-29). 기독교인들은 긍휼의 그릇이다. 영광을 위해서 미리 준비된 그릇이다. 너에게 하나님은 영광의 부요함을 알리셨다.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무한한 영광을 선포하고 반영함으로서, 너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를 즐거워함으로서 여기 그리고 이 곳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부른 이유이다. 우리에게 맡겨두면 이 일은 절대로 이루질 수 없다.

        다시한번, 우리는 우리들의 눈을 우리 자신에게서 떼어서 그를 보아야 한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과 빛이다. 매일 매일  부활하시고 높아지신 영광의 주님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살아야 한다. 영광중에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날들을 고대해야 한다. 그 날에, 우리는 영광중에 있는 그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도 그와 함께 영원토록 몸과 영혼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에 우리는 완전하게 그의 영광을 선포하고 반영할 것이다. 그는 우리의 소망이다 , 유일한 소망이다. 그에게 영원토록 영광이 있을 지어다. 아멘.


연구문제

1.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명령할 때에, 하나님에게 더 많은 영광을 더하라고 명령하는 것인가?

2. 왜 그 말이 아닌가/

3. 어떻게 하나님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가?

4.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5. 이런 식으로 당신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6. 현대의 교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 주위에 있는 문화를 흉내내고 회피하는 방법을 설명하라

7. 기독교인은 모방자 또는 도피주의자인가?

8. 오늘날 모방자와 도피주의자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9.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주(主)이기에,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이 사실을 반영해야 하는가?

10. 개인적인 삶, 가족,교회, 직장, 문화, 국가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admin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2-2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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