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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Back to the christian life, 제 17 장 피할 수 없는 영광의 소유
편 집 자  2011-10-29 15:20:13, 조회 : 1,804, 추천 : 364

                                                     제 17 장
                                              피할 수 없는 영광의 소유


                    칭의가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이라면, 성화는 과정이고, 영화는 그것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한 일을 기초로 우리를 어떻게 의롭다고 했는지를 토의하였다. 이제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바꾸어주시면서 우리들 안에서 그가 하신 일들을 무엇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1.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율법속에 계시된 온전한 의를 요구하신다. 그것뿐만 아니라, 은혜롭게 복음으로 우리들에게 온전한 의를 주셨다. 기독교인의 삶에서 복음과 율법,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서 구원을 받았다(엡 2:8-10).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성화를 위한 양식으로서 율법을 지킨다. 그러나 알맞은 관점에서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한 일 때문에 구원을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우리의 칭의와 성화)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 때문이다(의롭게 하고 그리고 거룩케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칭의) 선포한 후에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로 의롭게 되어간다(성화).


        칭의는 단번에 전가된 의이지만, 성화는 기독교인의 삶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부여되는 의이다. 중생과 시작하여 성화로서 계속된 기독교인의 삶은 과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우리들에게 선포되었던 분을 점점 닮아가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매일 매일 합당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엡 4:1)


2. 집으로 가는 여행길
        우리의 순종은 앞으로 있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중생하고 의롭다하을 받은 순간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는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성화를 겪는다(롬 6:1-11, 엡 2:5). 우리가 거룩하게 되 순간에, 죄의 지배와 수반되는 저주가 단번에 부서졌다.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과 구속을 이미 받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거룩하다(고전 1:30, 골3:1,9-10).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과거시제). 그러므로 이미 거룩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구절을 읽을 때에,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의 거룩이다(고전 6:11, 히10:10-14,29. 13:12, 벧전 1:2). 과거에 우리를 위해서 이미 성취된 어떤 것으로 완전한 성화에 대한 이런 이해는 고린도 성도들과 같이 소문난 불완전한 기독교인들을 성도라고 부를 수 있었는가를 설명한다(고전 1:2). 사실 그들은 전혀 성도처럼 보이지 않았다. 고린도인들과 같이, 우리 또한 성도이다.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단번에 우리를 위해서 완전하게 하신 일 때문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지만,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점차적으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단번에 주어진 성화는 이야기의 한면이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을 때에, 죄는 우리의 삶에서 지배권을 더 이상 행사하지 못한다.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 않다(롬 6:2-6,14. 요일 3:9. 5:18). 그러나 얼마의 죄가 우리 가운데 남아있다(롬 6:20, 7:14-25, 요일 1:8-10. 2:1). 완전한 성화가 단번에 일어나지만, 점차적인 성화는 죄로부터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평생의 과정이다. 이 땅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완성된 성화는 과거에 단번에 통치하는 죄에 대해서 우리들의 죽음을 말한다. 점차적인 성화는 현재에 살아있는 죄를 멸절시키려는 계속되는 전쟁이다. 미래의 영광의 자리에 갈 때에 최종적인 성화가 마쳐질 것이다 . 그것은 완전한 죄의 소멸이다( 슥 14:20-21, 계 21:2).


        완전한(과거), 점차적인( 현재), 최종적인 (미래) 성화사이에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군에 의해서 포로가 된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들을 적의 지배로부터 우리들을 자유롭게 하였지만( 과거에 완전한 성화), 그는 우리들에게 집을 향해서 나아가도록 명령을 내렸다( 현재에 진행되는 점차적인 성화). 우리가 집에 도착하고 난 다음에, 우리는 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미래에 있을 최종적인 성화).


        이 땅에서, 우리는 집을 향하여 여행을 할 것이다. 그리고 칭의에 성경적인 교리를 아무렇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핑계로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루터가 주석한 것처럼,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오직 홀로 있는 믿음이 아니다. 간단명료하게 말하자면, 이 말이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신앙과 참된 회개사이에 분리할 수 없는 일치를 부정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칭의와 성화의 분리할 수 없는 결합을 부인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어떤 사람도 행위가 없어도 구원을 받지 않았음을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이 가르친 것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았다) 야고보의 가르침( 오직 믿음으로만 아니라, 믿음과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았다) 사이에 있는 분명한 어려움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명확한 어려움에 대한 대답은 문맥속에서 바울과 야고보를 읽으면 찾을 수 있다. 이렇게 할 때에,  다른 믿음과 다른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도구인 구원얻는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야고보는 죽은 믿음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하다. 마귀도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약 2:19). 그러나 이런 믿음은 우리의 칭의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야고보는 이 죽은 믿음과 구원얻는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죽은 믿음은 참된 행위를 생산할 수 없지만, 구원얻는 믿음은 항상 참된 행위를 생산한다. 죽은 믿음과 연관된 행위들과 참된 믿음과 연결된 행위들은 다른 것을 주목하라. 행위는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다고 바울이 말했을 때에, 율법에 순종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공로로 받으려는 율법적인 해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야고보가 행위에 대해서 말할 때에, 구원얻는 믿음을 증거하고 또는 보여주는 선한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과 야고보의 말에서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죽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 행위들을 더할 필요가 없다. 그는 구원얻는 믿음의 선물을 필요로 한다. 죽은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Gerhard Forte가 썼던 것처럼, “ 믿음이 죽었다면 , 그 믿음은 반드시 부활되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이 - 그것이 구원얻는 믿음이라면- 선한 행위를 잉태해야 하고 , 탄생시켜야 한다.


        우리가 진짜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은 , 선한 행위의 열매를 생산할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에 의해서 명령이 되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사랑과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려는 욕망속에서 역사하는 믿음은 반드시 이런 열매를 맺는다(약 2;17).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마 7;16-20, 요 15:8,16). 하나님은 뜻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서 역사를 하고 있으며, 그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서 우리 가운데서 일을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보여주어야 한다. 점차적으로 성화되어야 한다.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이루어가야 한다(빌 2:12-13). 구원얻는 믿음이 없다면, 선한 행위란 있을 수 없다. 선한 행위가 없는 곳에서, 참된 구원의 믿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원인(구원얻는 믿음)과 결과(선한 행위)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행위를 위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we are saved not by works, but for works)(엡 2:8-10). 그리고 우리는 그런 선한 행위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3. 우리 성화의 주요동기
큰 태엽은 시계와 같은 기계들을 움직이게 하는 주요한 태엽이다. 계속적인 반동(反動)를 통해서 시계로 하여금 똑딱 똑딱거리게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시계처럼, 기독교인의 삶에도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큰 태엽이 있다. 칭의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우리의 것이 되는 것처럼, 성화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우리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칭의와 거룩이기 때문이다(고전 1:3). 칭의와 거룩이 그리스도와의 우리가 연합한 결과임을 알 때에, 그들 사이에 놓여있는 갈등이 사라진다. 하나를 다른 것으로 절감할 필요가 없으며, 이 국면이 성경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도 없다. 그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그가 의롭게 했던 사람들을 거룩하게 한다(고전 6:11).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한다. 우리의 구원과 거기에 필요한 모든 부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라고 칼빈이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다른 곳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구원을 찾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해서 그의 것을 소유하게 됨을 배워야 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복들을 열거하였다: 그의 피로 인한 정결, 그의 무덤으로 인한 수치, 그의 부활속에 있는 새로운 생명.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과 성화에서의 연합의 영향력에 대한 이 주제는 롬 6:1-14절에서 바울에 의해서 자세하게 구체화되었다. 롬 5: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라. 제 6 장 첫 번째 구절에서, 그의 반대자들이 이 진리에 기초해서 진행시킬 잘못된 논리를 예상했다(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에 거하겠느뇨?). 이런 잘못된 논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의 논증으로부터 하나 하나 나아갔고, 그의 반대자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하였다.

        1. 성도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즐긴다
        2. 우리가 연합한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죽었다.
        3. 그리스도가 죄로 죽었고 우리가 그와 연합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과거에 죄에 대           해서 죽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벌써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현재에 죄속에서 계속해서 살 수 없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 속에 있을 수 없다.

        롬 6 장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절이 아니다. 바울의 논증의 전체 요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벌써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고,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다는 점에서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같이 살아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현재에 점차적으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성령의 능력주심을 통해서, 우리는 집으로 여행길을 떠나야 한다.

        이 구절에서 그려지고 있는 큰 그림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함과 단번에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구절은 우리의 과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보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칭의의 큰 태엽이기에, 그것은 성화의 큰 태엽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을 조사하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망원경으로 그리스도을 볼 필요가 있을 때에 그들 자신에게 현미경을 갖가 된다. 우리들의 진전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에 머물러야 한다. 바로 그때에 우리는 참된 거룩함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큰 그림을 마음에 두고, 우리 자신을 죄에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살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롬 6:11). 롬 6장에 기초해서 보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몇 몇의 참된 영적 성도들만의 경험이 아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단번에 죄에 대해서 죽었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은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 귀중한 진리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죄에 대해서 죽었지만, 죄가 그들 안에서 아직 죽지 않았기에 그들 안에서 계속해서 죄를 죽여야 함을 알아야 한다(점차적인 성화). 롬6장에서 (단회적인 성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벌써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주석하고 난 다음 두 개의 장에서, 바울은 롬 8l13절에서(점차적인 성화) 우리의 죄성이 계속해서 죽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깊이 탐구한다. 바울은 골 3 장에서 똑같은 것을 말한다. 몇 구절을 사이에 두고, 그는 그리스도안에서 단번에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을 논한다(3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음으로서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을 간주하라는 우리의 계속되는 일에 대해서 언급한다( 5-11절).

        쉽게 바울은 과거에서 현재로, 단회적인 것에서 점진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이미 우리가 단번에 성화되었기에, 우리는 점진적으로 성화될 필요가 있다. 이 점진적인 성화가 성령의 거주하시는 능력에 의해서, 우리들의 삶에서 죄에 대해서 죽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의를 행하기 위해서 더욱 필요하다(갈5:22-23). 죄에 대해서 죽고 의를 행하는 이 이중적인 일이 골 3:5-11절에서 바울에 의해서 기술되어 있다. 다른 곳에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곳에서 우리들을 씻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완전한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함으로서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후 7:1).


4. 실패를 위한 공식들
        죄에 대해서 죽고 의를 행하는 것,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 더러운 것에서 우리를 씻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완전한 거룩함을 이루는 이 과정들을 결코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된다.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과 사단 그리고 추종자들과의 영적 전쟁에 우리들은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야 한다(엡 6:12). 이 책의 제 2부에서 본 것처럼, 이 전쟁은 여자의 씨와 뱀의 씨가 이 땅에서 벌이고 있다(창 3:15, 마12:30). 이 전쟁은 또한 각 성도들과 성도 안에서도 매일 안팎으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싸우도록 요청받은 주요 적대자는 악명높은 셋이다: 세상, 육체, 그리고 마귀이다( 요일 2:14-17). 우리는 그들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과대평가해서도 안된다. 그들은 겁나지만 무적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승리자 이상이다.

        우리가 승리자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삶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특별한 공식을 따르는 간단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 개혁주의 정통들은 전형적으로 비 성경적이고 또는 성경 외적인 공식들을 기독교의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조적으로,  개혁신앙은 반드시 실패로 끝날 수법과 같은 그런 공식들을 거절한다.

                1세기 이후로, 그들은 “승리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또는 영원이라는 측면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다고 어떤 성도들은 주장한다(요일 1:8-10). 그러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면, 모든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의 완전한 승리하는 기독교인의 삶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완전한 그리고 모든 면에서 승리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과도한 죄성”에 대해서 정직하지 못하다. 그들은 죄에 대한 정의를 의 식적인 행동에만 제한하고 있다( 표면위에 떠있는 것들). 성경은 죄를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는 것을 실패하는 어떤 것으로서 정의하고 있다. 숨어있는 잘못도 포함한다( 표면 아래 있는 것들)(시19:12).

        이런 가정된 완전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완전주의자 그리고 승리하는 삶의 옹호자들은 하나님의 그의 말씀에서 요구하고 있는 완전한 거룩함의 신적 기준을 낮추었다(fp 11:44-45, 마5:48, 엡 5:1, 벧전 1:15-16).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낮출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그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완전성과 불변하는 속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그 자신이 기준이다. 그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히 13:8), 그의 기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죄를 재정의 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을 낮추는 것은 상당한 나쁜 것이다. 그러나 완전주의자들과 승리하는 기독교인의 삶의 옹호자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주요 신약의 주제들을 무시한다: 즉 “우리가 이미 얻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여러번 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서 자라가야 한다”라는 말씀들이다( 빌 3:12-14, 약 3:2, 엡 4:14-15, 빌1:9, 골1:10, 2:19, 살전 3:12, 4:1,10. 살후 1:3, 히12:5-14, 벧전 2:2, 벧후 3:18). 그들은 요일 1:8절을 무시하였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속에 진리가 없다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의 논리는 매우 분명하다: 진리가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가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면,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승리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가장하는 사람들은 롬 7장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울의 고뇌하는 “곤고한 자( wretched man)"를 확실히 잊어보지 않았다.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의 문맥속에서 그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롬7장을 잊었고 있는 그대로 그것을 이해했다면-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직면하는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설명중에 하나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 얼마나 자주 못 미치는가를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자주 십자가로 달려가야 하는가를 또한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들은 롬 7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롬7장을 사도 바울이 회심 전에 있었던 바울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경 다른 곳에서도 정상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죄와의 끊임없는 투쟁으로서 말하고 있다. 롬 7장을 썼던 동일한 바울은 또한 갈 5:17절을 썼다. 기독교인의 삶을 죄에 대해서 성령과 육신의 끊임없는 투쟁으로서 기술하고 있다. 이 일생의 투쟁은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지, 부정할 수 있는 조건들이 아니다.

        오늘날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가르침과는 달리,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갈등을 직면하는 것을 막아주지 않는다. 이런 갈등들을 산출하는 것이 성령의 바로 존재목적이다. 우리가 싸우는 거룩한 전쟁의 잔인함에 놀라서는 안된다.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존재가 바로 우리의 구원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은 완성되었지만,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은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안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B. Letting go and letting god
                우리가 열심히 노력을 함으로서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승리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권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참된 성화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만 하면 즉 우리가 통로가 될 수 있도록 하기만 한다면,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그의 뜻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기만 한다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죄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고 인정하면, 우리는  영적인 일을 충분하게 묵상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하나님에게 항복하지 않았다고 들을 것이다. 수동적이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성경은 영적인 방관자로서 우리들을 불렀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는 선한 싸움”을 하도록 불렀다(딤전 6:12).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서 ...고난”을 받도록 불렀다(딤후 2:3). 내버려둠으로서 우리 자신이 피동적이 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군사로서 싸울 수가 있는가?

        본질적으로, 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라”라는 개념은 칭의와 점진적인 성화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칭의와 점진적인 성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칭의는 수동적으로 단 한번만 받는 것이지만, 점진적인 성화는 우리의 전생애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추구해야만 하는 것을 보지 못한 결과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점진적인 성화에도 주권적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성화시킨다( 요 17:17, 히12;10). 성령을 통해서 아들도 마찬가지이다(엡 5:25-27, 딛2:14). 또한 우리는 점진적인 성화에 책임을 져야 한다. 성경에 있는 모든 명령과 금지는 우리가 따르도록 명령한다는 사실이 증거이다.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더러운 것을 피하라고, 항상 기도하라고, 그리고 자신의 말을 순종하라고 말씀하신다. 빌 2:12-13절과 골 1:29절을 보면, 우리의 점진적인 성화에서 신적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빌2:12-13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리고 골 1:29절에서, 그는 자서전적으로 쓰고 있다, “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일을 하신다.  성도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의 의미들을 우리도 성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의 일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사역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로 하여그 a일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신적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확고하게 만든다. 주권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능력을 부여한다.

        이 중요한 진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생각해보라. 가지는 포도나무를 떠나서 자랄 수 없다. 사실, 포도나무를 떠나면, 그 가지는 마르고 죽을 것이다. 그러나 가지가 나무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랄 수 있다. 먼저 그 성장을 가능케 만든 것이 포도나무임을 잊지 않는 한 가지가 성장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다. 우리는 가지이다. 그를 떠나서,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요 15;1-5).

        끝으로, " 맡기라“공식은 거룩함을 위한 공식으로서 내적 수동성을 성령의 능력으로 규율이 바른 도덕적 노력으로의 성경적 부르심과 동등한 것으로 보았다.  J.I Packer가 설명한 것처럼, 기독교인의 삶에서 재앙을 던져준 ”착각“이라고 하였다.

C. 일등급으로 가라
        어떤 사람은 승리의 삶을 가르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수동적인 삶을 가르치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길은 2등급의 “육적” 기독교인과 반대되는 일 등급 “영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보좌를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 내어주고, 항복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한가지를 분명히 해두자: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물의 주(主)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벌써 만물의 주이시다. 더군다나, 성경은 기독교인들을 일등급과 이등급 시민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회심뒤에, 모든 기독교인들은 “육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이라고 과감에게 말을 한다. 우리들은 죄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의롭다고 말한다. 마이클 호튼( Michael Horton)은 “ 우리는 육적인 그리스도인 또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가 있으면서도 영적이다. 그들의 항복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범주에 있다”라고 말했을 때에, 이 점을 분명하게 하였다.

        십자가 밑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바로 이곳은 진실로 영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갈 필요가 있는 곳이다. 그들이 십자가 밑에 있다면, 그들을 위해서 죽은 완전한 어린양을 주목하여 본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들의 손을 입에도 대고, 욥과 같이 그들이 너무 성급하게 말을 하였다고 고백할 것이다.


5. 몇가지 미결사항을 처리하자
        공식 또는 비결은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죄를 극복하는 일에 도움을 되지 않는다. 승리의 삶 또는 수동적인 자세 또는 항복을 권장하면서 성경을 비결 서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삶을 반쯤 이해하는 것으로 끝이 날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운 생명의 떡이다. 우리 스스로 구워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요 6:48-51).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를 부각시킨다: 하나님이 우리의 양육과 성장을 위해서 은혜롭게 제공한 수단들이 있다.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한다면 우리의 삶에서 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가 없다. 초대교회의 사도시대처럼, 말씀에 계속해서 헌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배울 필요가 있다. 성찬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기도가 드려져야 한다. 이런 것들은 성령이 은혜가운데에 우리로 하여금 성장하도록 주신 것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자라가도록 주신 수단들이다.

        행 2:42절에서 교회에 의해서 행해지는 필수적인 역할을 주목해야 한다. 서부사람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들은 다 떨어진 개인주의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화는 온전히 개인적인 일만이 아니다. 이 책이 제 3부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영과 진리로서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서 영적으로 함께 자란다. 성찬에 함께 참여하고, 특별히 성경적인 교회의 징계를 행사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함으로서 자라간다.

        마지막으로, 고통과 아픔중에서도 우리의 삶을 주권적으로 계획하시고 섭리적으로 인도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은혜가운데 성장을 경험하도록 하신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들은 무기력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 느끼는 고통, 직장을 잃었을 때에 절망, 산산조각이 난 가정에 대한 슬픔, 이 모든 것들은 정말 우리들에게 아픔을 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는 매우 특이한 방법이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일으키신다. 실제로 우리의 삶의 모든 조각들은 그의 온유한 손 안에 있다. 이 모든 조각들이 어떻게 결합되는가를 아직까지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지 않았을 뿐이다.

        하나님은 은혜가운데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들을 주셨다. 이것들을 무시하면 성장을 할 수가 없다. 마치 우리의 육신이 먹을 거절하게 되면 성장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6. 멜랑히톤(Melanchthon)의 문제
        우리에게 제공한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서 성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그는 우리의 믿음의 시작과 끝이다(히 12:2). 우리의 초점이 그에게 고정되면, 하나님의 율법의 목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가까이 가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은 우리를 저주하고, 우리 스스로 갖게 된 의를 저주한다. 그리고 나서 율법은 거룩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율법의 눈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들의 삶을 회고하면, 구원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롬 7장과 롬 8장 전체에서 바울이 했던 것을 우리가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도 도망가야 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에 했던 것처럼 살아있을 때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여전히 율법이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지만, 법적으로 우리들을 저주할 수 없고 우리들을 위협할 수 없다(롬 8;1,33-34).

        우리는 이런 귀한 진리를 자주 잊어버린다. 결과적으로 절망의 늪속으로 빠져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 모두는 루터의 문하생인 멜랑히톤과 같다. “ 구원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하는지”를 묻는 편지를 루터에게 보냈다. 루터는 퉁명스럽게 그에게 응답을 하였다. “멜랑히톤, 가서 용감하게 죄를 지으라. 그리고 십자가 밑에 가서 그것을 고백하라. 복음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다.” 멜랑히톤으로 하여금 방탕하게 살도록 루터가 충고한 것이라고 잘못되게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가 가져야 하는 참된 의는 멜랑히톤 밖에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충격을 가한 것이다.

        루터의 놀랄만한 진술의 실체를 이해하게 되면,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지마 여전히 죄가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정직한 것이 얼마나 우리들의 삶에 힘을 주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본질속에는 어떤 선한 것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롬 7;18).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가 정결하게 되고,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바로 그때에 영화가 이미 우리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전 6:11). 영광스러운 운명을 갖도록 하나님은 새로운 신분을 우리들에게 주었다. 우리 안에는 완전히 더러움밖에는 없고 오직 죽음만이 당연하며 저주를 받아야 함을 슬프지만 인정해야 한다. 롬 7장에서 나와서 롬8장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이 두 장 안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긴장은 사소한 충돌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진행하고 싸움이 하늘에게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일부분이다. 바로 그때에 우리의 싸움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성경적으로 다룰 능력이 생기게 된다. 더 이상 진행중에 있는 싸움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가장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이미 승리하였고 완전해진 것처럼 말할 필요가 없다. 또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우주를 창조하신 주권적인 하나님에게 우리들의 삶의 중심을 내어주었는지를 의아해 하면서 직면하고 있는 전쟁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킬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치열한 싸움 현장에서 우리자신을 수동적인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전쟁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그 이 전쟁을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우리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피동성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포기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우리 자신의 힘과 우리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칭의된 죄인으로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 그의 무한한 공로에 피난처를 삼아야 한다. 그의 다함이 없는 힘을 우리들에게 허락해달라고 간청해야 한다. 그의 완전한 공로를 우리의 유일한 공로로서 주장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위로를 발견해야 한다.

7. 영광에서 영광으로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칭의된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위로를 찾을 수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혜인가? 이 특혜가 위대한 것처럼, Packer는 아직 오지 않은 영광은 얼마나 더 좋은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풍성하게 기억나게 해주었다.

        “여전히 죄를 짓는 칭의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그리고 지금 아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혜택인가! 우리 앞에 놓은 소망, 하나님 앞에 있는 소망, 그를 바라보고 그와 교제를 가지는 것은  훨씬 더 놀라운 것이다. 더 이상 죄인인 입장이 아니라, 진정한 의인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다. 현재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 목적을 향해서 우리들을 인도한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리고 은혜롭게 우리들을 이 목적을 향해서 인도한다. 사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예정되었다. 말하자면 영광을 위해서 묶여져 있다. 바울에 의하면,

        “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고난의 기간동안에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다. 영원전부터 하나님은 그들을 영화롭게 할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과거시제로서 아직 오지 않은 영광에 대해서 말할 수가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아멘.

        그러나 미래의 영광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  우리가 죽었을 때에 일어나는 것은 즉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이상의 많은 것들이 결합되어 있다( 죽은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빌 1:21, 고후 5:8).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 굉장한 것이다. 그 영광은 굉장할 것이다. 우리의 육과 영이 완전하게 구속되었을 순간은 정말 놀랄만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부활하시고, 높아지시고, 영화롭게 된 구속자의 형상과 닮았을 것이다. 우리의 약한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될 것이다( 빌 3:21). 참으로, 우리의 영광에 대한 소망은 고난 중에서 놀라운 위로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영광의 소망은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그리고 지금 거룩하게 성장하도록 우리들을 복돋아 준다. 그의 첫편지에서, 요한은 말하기를, “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요한은 “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라고 더하였다. 우리가 “ 주님과 같이 될 때”가 있다는 복된 날들을 고대하면서,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영원토록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회복될 것이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타락 이후로 우리가 소망하여 왔던 것이다(창 1:26-27). 우리가 죄에 빠졌을 때에, 이 형상은 훼손되었고 뒤틀렸다. 전에 처럼 신적 형상이 분명하지가 않다. 그의 타락에서, 그를 통한 우리의 타락에서, 신적 형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되었다. 여러가지 비숫한 점들을 찾을 수는 있지만, 그 형상은 뒤틀렸고 전혀 제모습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정한 때에, 주권적으로 은혜스럽게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 안에서 그의 형상을 회복시킬 것이다. 그 시점부터, 그는 우리 안에서 그의 형상을 점진적으로 새롭게 하는 과정을 계속해서 진행시킬 것이다(엡 4:24, 골 3:10). 이 계속되는 새로움을 우리는 점진적인 성화라고 부른다. 그 기간동안 우리 안에 있는 신적 형상은 더욱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거울속에 있는 주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볼 것이다(고후 3:18).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할 것이다. 그의 영광을 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보는 것은 서로 서로 관련이 있다. 그의 영광의 광채가 충만하게 있는 그를 보고 그의 존재의 분명한 형상을 보기 때문에 그의 영광을 우리는 반사할 것이다(히 1:3). 우리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주목할 때에, 우리는 더욱 더 그와 같이 변형될 것이다. 하나의 영광에서 다른 영광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완전하게 변화될 때까지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변형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완전하게 영광을 받게 될 것이고 자신의 영광을 충만하게 보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기뻐하였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다(롬 5:2). 우리가 최종적으로 거룩하게 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소망이다. 우리는 하나님 영광의 완전한 모습을 담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믿는 자들의 영광이 될 것이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것이 “그의 영광의 찬송” 즉 우리 구속의 최종적인 목적이라고 표현하였다(엡 1:12-14).

        우리가 그 날을 소망하면서, 우리의 유일한 반응은 무릎을 꿇고 그가 우리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했던 것들 때문에 모든 생애를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해야 한다. 그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들에게 주셨다(엡 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단번에 칭의되었고 거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점차적으로 성화되어 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한 날에 최종적으로 거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느 우리 영광의 유일한 소망이다(골 1:27).

        이런 영광의 측면에서, 우리는 동시에 의롭게 되었고 죄가 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나쁜 소식이기도 하지만 또한 좋은 소식이다. 나쁜 소식은 그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소식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다.

연구과제

1.롬 6:14-20절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당신이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2.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그와 함께 죄에서 죽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의 삶에서 여전히 죄를 죽일 필요가 있는가?( 고후 7:1, 롬 8;1-13, 갈 5:22-23, 엡 4:22-24, 골 3:5-11)?

3.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는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4. 우리 안에 있는 치열한 전쟁에 대해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가?

5. 기독교 삶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는 매일 매일 직면하고 있는 전쟁을 그리스도의 힘을 가지고 어떻게 싸우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6. 언제 우리의 몸과 영이 완전하게 최종적으로l 구속되는가?

7. 고난때에 이 소망이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는가?

8. 요일 3:2-3절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이 소망이 어떻게 당신으로 하여금 거룩한 가운데 성장하도록 복돋아 주는가?

    

* admin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04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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